‘개그야’, 무의미의 실험이냐 의미의 공감이냐

‘개그야’가 생긴 건 분명 ‘개그콘서트’가 열어 놓은 공개무대개그의 영향이 크다. 개그의 무한경쟁 시대를 열어놓은 KBS ‘개그콘서트’가 독주하고, 그 분위기를 감지한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등장한 후에도 MBC는 꽤 오랫동안 ‘웃으면 복이 와요’가 가졌던 콩트 개그류의 전성기가 다시 도래하기를 꿈꾸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대세가 기운 상황에서 MBC가 내민 카드가 ‘개그야’다. ‘개그야’가 여타의 공개개그와 차별점을 두었던 것은 내러티브 속에 잡아넣는 말 개그, 즉 유행어였다. ‘죄민수’의 “아무 이유 없어!”, “MC계의 슈레기"나 ‘사모님’의 “운전해 어서!” 같은 유행어들은 ‘개그야’가 가진 말 개그가 낳은 것들이다.

무대개그의 실험성은 단연 ‘개그콘서트’가 독보적인 상황이었으며, 그 주축을 이룬 개그맨이 정종철, 박준형이었다는 점에서 현재 그들이 이적한 ‘개그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시청률면에서나 관심도면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이유는 무얼까. 이들의 실험성과 ‘개그야’가 본래부터 갖고 있던 유행어 제조기를 방불케 하는 내러티브형 말 개그는 과연 시너지효과를 거두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유행어 면으로만 보면 현재의 ‘개그야’는 과거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인지도를 예감케 한다. 벌써부터 ‘천수정 이뻐’나 ‘없어’ 그리고 ‘끊지마’같은 코너는 그 제목 자체가 유행어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처럼 누구나 한번 들으면 귀에 쏙쏙 박히는 중독성을 갖고 있다. 특히 ‘천수정 이뻐’는 “힘들어? 오 내 새끼 오 남의 새끼” 이런 식으로 유행어 조짐을 보이는 말들을 연쇄적으로 풀어내는 묘미를 선사한다.

문제는 이런 입에 쩍쩍 달라붙는 말들이 독특한 발성과 높낮이를 통해 강한 중독성을 내포하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를 도출하지 못하는 점에 있다. 개그가 반드시 모든 사회적 의미를 내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무거운 것이 아닌 간단한 것이라도 의미망을 형성하지 못한다면 자칫 말장난에서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장난 또한 웃음의 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의미는 바로 그 말장난을 좀더 강력하게 각인시키는 힘이 있다.

의미 형성을 이루지 못하는 재미있는 말들의 상찬은 즉각적인 웃음은 불러낼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만들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러한 말의 무의미성이 극대화된 것은 바로 ‘나카펠라’다. ‘나카펠라’가 가진 실험성은 아카펠라의 패러디, 노래의 재해석, 그리고 몸 개그의 결합 등등 간단히 겉으로만 봐도 실로 극대화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정종철이 가진 다양한 개인기가 아니면 풀어내기 어려운 개그의 형식이다. 하지만 한바탕 웃고 나서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길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딱히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이러한 실험적인 코너가 한두 개 있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가 극대화된 풍자나 세태개그가 주류를 이루는 ‘개그콘서트’ 같은 경우에 이런 ‘무의미의 실험개그’가 주는 신선함은 오히려 더 커질 수 있다. 이른바 4차원 개그에 대한 주목도는 나머지 코너들이 대비효과를 주어야 비로소 더 빛나는 법이다. 하지만 ‘개그야’가 선보이는 코너들은 거의 대부분이 4차원에 머물고 있다.

IQ가 430이라 자처한 한 황당한 정치인에서 따온 것이지만 그 내용은 풍자와 세태와는 거리가 먼 ‘IQ430’라는 코너에서, 개그우먼이 “기분 많이 좋아?”하고 물어볼 때 유행어를 예감케 하는 재미에 비해 그 무의미함으로 인해 그 이상으로 남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다. ‘개그야’에 대한 떨어진 호응도는 아직까지 섣불리 그 원인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제 정종철과 박준형이 투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무대개그의 속성상(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앞으로 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의미의 실험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웃음의 의미가 만들어내는 공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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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 삼국지 정착이 가져온 개그맨의 어려움

‘개그 콘서트’의 간판 프로그램, ‘마빡이’는 그 설정이 단순하다. 그저 몇몇 개그맨들이 차례로 무대에 나와 이마를 치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다. 특별한 스토리도 없다. 있는 스토리라고는 고작 ‘그 이마를 치는 동작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에 대한 항변 정도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가진 웃음의 파괴력은 크다. 그 공감의 기저에는 복잡다단한 우리네 삶에 대한 어려움을 단순화시키는 명쾌함이 자리잡고 있으며, 자학적 동작이 가진 우스꽝스런 모습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던 힘겨움을 웃음으로 털어 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현실에 공감을 느낄 이들이 있다. 바로 개그맨 자신들이다.

정착 단계에 들어간 공개 개그 프로그램
‘개그콘서트’로 촉발된 국내 개그 프로그램들의 변화는 이제 방송 3사가 모두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음으로써 그 형식이 이 시대의 대세임을 증명했다. , 스탠딩 개그, 무한정 투입되는 아이디어, 새로운 얼굴들, 끊임없는 경쟁체제... 이 파고를 넘어 이제 이러한 형식의 개그 프로그램은 정착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 KBS ‘개그콘서트’에 도전장을 내밀며 등장한 SBS의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양대 산맥으로 가르던 개그전쟁에 뒤늦게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MBC의 ‘개그야’가 등장해 ‘개그 삼국지’의 안정적인 형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개 방송류의 개그 프로그램들의 끝없는 경쟁와 아이디어 산출이 가져온 것은 시청률 상승과 함께, 개그맨의 단명이다. 이런 류의 프로그램들은 한 마디로 엄청난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한다. 양이 많아지면 그만큼 주의력은 흩어지게 마련.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보라!)로 떠날 수밖에 없다. 이들 공개 개그 프로그램들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짧은 개그만큼 짧아지는 개그맨의 수명
‘개그 삼국지’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이제 공개 개그 프로그램이 하나의 시스템을 온전히 갖추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 시스템은 우리가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기 힘든 이 사회의 경쟁 시스템과 유사하다. 제작자들에 의해 걸러진 개그가 바로 TV에 담기던 과거 가족 경영식의 개그시대는 지났다. 한번 방송사에 소속되면 평생직장이 보장되던 요순시절은 갔다. 이제 그들은 밀폐된 세트를 빠져나와 무대 위에 올려지고 그 즉시 관객들에게 판정을 받는다.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자동 퇴출 된다. 편집에 의해 TV에 담기지 조차 못하는 것이다. 개그는 독해졌고 처절해졌다. 짧은 시간 내에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는 그들의 개그는 분명 촌철살인의 번뜩임과 아이디어로 충만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웃음의 파장은 짧아졌다. 그들은 그 짧은 웃음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 부속화된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처절한 개그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편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한없이 무너뜨렸다. 갈갈이는 무를 갈았고, 옥동자는 바보짓을 했으며, 세바스찬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었다. 그렇게 생존하려 했지만 지금 그들의 형편이 나아졌을까. 여전히 갈갈이는 괴상한 복장의 옷을 입고 나와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옥동자는 마빡이로 등장해 시종일관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세바스찬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전쟁 속에서 처절하게 생존하거나 퇴출 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시스템 밖으로 나온 개그맨들은 나을까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난 개그맨들은 버라이어티쇼, 토크쇼 같은 예능프로그램으로 편입되었다. 몇몇 개그맨들은 그 프로그램의 MC로서 자리잡았으나 게스트도 아니고 MC도 아닌 장기출연자들(그들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고정출연자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의 상황은 저 시스템 속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프리랜서의 어려움은 그것이 안정적이지 않으며, 자칫 소속 밖에서 섭외가 안 들어오는 고립의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또한 이들 버라이어티쇼나 토크쇼 자체가 가진 ‘출연자 중심의 방송’ 특성상 개그맨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가 쉽지 않다. 그들이 부여받은 임무는 출연자를 띄워주면서 쇼를 재밌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 상황은 ‘무너지기 개그’의 기본 전제를 깔아준다. 초기 상상플러스 고정출연자들의 ‘바보놀음(?)’이나, 각종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개그맨들의 무너지기 설정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유재석의 성공은 바로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프로그램의 특성과 자신의 개그스타일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이것은 진화에 진화를 거쳐 ‘무한도전’까지 오게 되는데 이 상황이 되면 이제는 시청자와 출연자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누가 더 심하게 무너지며, 심지어 굴욕을 느끼는가’의 재미를 추구한다.

이렇게 점점 제 살을 깎아야 타인을 웃길 수 있는 상황에 몰리는 개그맨들에게, 그들 보다 더 웃기는 가수, 영화배우, 탤런트들의 출연은 심지어 위기의식까지 느끼게 만든다. 쇼 프로그램의 특성이 그들 출연자에게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개그맨들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혀 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좁혀진 입지 속에서 저 시스템 밖으로 나와 쇼 프로그램에 편입된 개그맨들은 똑같은 시스템에 직면한다. 자신에게 오는 짧은 순간 순간의 촌철살인의 순발력이 없다면 역시 마찬가지의 편집이란 칼에 난자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차마 쳐다보기 민망한 처절함
가끔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나 보기가 껄끄러워 고개를 돌리곤 하는 것은 그 처절함을 순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개그맨들은 슬프다. 무너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그것이 여러 갈래길 중 하나가 아닌 오직 한 가지 길일 때 비극이 발생한다. ‘개그콘서트’와 ‘웃음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개그야’의 정착은 프로그램 제작자나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나, 개그맨들에게 더 많은 어려움을 예고한다. 개그 코너와 개그 프로그램은 남아도 개그맨은 남지 않는 시스템 속에서, 그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스템이 강화되면 개인들의 자유는 줄어들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개그맨들은 그 어느 정치인들보다, 경제인들보다, 의사보다, 더 존경받을 만하다(물론 가끔 개그맨들을 능가하는 정치인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마빡이의 고단함이 마치 개그맨들을 위한 퍼포먼스처럼 느껴지는 요즘의 개그계에, 그네들의 건전한 살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처절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개그맨들을 안정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 요구된다. 그것은 또한 신인 개그맨의 발굴보다 이미 발굴된 개그맨의 보다 효과적인 활용이 경제적이라는 측면에서도 방송사에 결국 유리한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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