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거신 전화는’, 유연석이 보여준 로맨스릴러의 정석

지금 거신 전화는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차가운 눈빛을 날릴 때면 모든 걸 얼려버릴 것 같은 서릿발이 느껴지지만, 그 눈빛이 한없이 풀어지면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물기를 머금을 때 따뜻하고 뜨거운 이 인물의 숨겨졌던 속내가 드러난다. 차가움이 강렬할수록 뜨거움도 강렬해지는 냉온을 오가는 연기. MBC 금토드라마 ‘지금 거신 전화는’에서 유연석이 보여주는 이 냉온 연기는 살벌한 스릴러와 달달한 로맨스의 양극단을 오가는 ‘로맨스릴러’를 탄생시켰다. 

 

시작은 스릴러였다. 앵커 출신으로 대통령실 대변인의 자리에 오른 백사언(유연석)과 어린시절 자동차 사고의 충격으로 함묵증에 걸린 채 수어 통역사로 일하는 백사언의 아내 홍희주(채수빈). 이들이 쇼윈도 부부라는 사실은 어느 날 홍희주가 괴한에게 납치되면서 드러난다. 납치범의 협박에도 장난전화인 줄 알고 죽일 테면 죽이라는 백사언의 말에 홍희주는 분노한다. 결국 사고를 내고 납치범의 핸드폰을 습득한 홍희주는 드디어 숨겨진 자신의 비밀과 속내를 드러낸다. 

 

함묵증에 걸려 말을 못하는 척 해왔지만 사실은 말을 할 수 있는 홍희주는 그 핸드폰을 계기로 백사언에게 수시로 전화해 납치범인 척 협박을 하고, 그간 숨겨왔던 분노를 터트린다. 그런데 어딘가 백사언은 이 전화의 주인공이 홍희주라는 걸 조금씩 알아채고, 그래서 이 전화 통화를 통해 그녀의 진심 또한 조금씩 알게 된다. 납치범의 전화가 침묵을 강요받아 왔던 홍희주의 입을 열게 만들고, 또 그 진심을 백사언이 듣게 만들어준 것이다. 이 지점에서 스릴러는 서서히 로맨스로 방향을 튼다. 냉랭하기만 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백사언과 홍희주가 점점 가까워지고 마음을 열게 되는 로맨스의 과정과 동시에 납치범의 테러가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이 테러가 야기하는 불안과 위기는 백사언과 홍희주의 서로에 대한 마음을 점점 깊어지게 만든다. 즉 납치범에 의해 때론 백사언이 또 때론 홍희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들은 서로를 걱정하고 구해내려 온 몸을 던진다. 위협적인 상황 속에서 서로를 지켜주려는 마음이 커지는 것. 바로 이것이 스릴러와 로맨스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과거 백사언과 납치범 사이에서 벌어졌던 사건의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지금 거신 전화는’은 사실 잘 들여다보면 과연 저게 가능할까 싶은 상황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홍희주가 언니 대신 백사언과 결혼하는 설정이나, 그렇게 결혼 후 2년 간이나 말 못하는 것처럼 속여가며 부부생활을 해오는 설정 같은 것들이 그렇다. 또 납치범에게 납치되었다가 그가 쓰던 음성변조 핸드폰을 홍희주가 습득하는 과정도 어딘가 허술한 면이 있다. 마치 홍희주가 그 핸드폰을 갖게 만들기 위해 납치범을 허술하게 만든 작가의 의도가 너무 드러난다고나 할까. 

 

이처럼 개연성은 부족하지만 시청자들은 마치 드라마게임을 보듯 어쨌든 전개된 상황 속에서 두 인물의 감정 변화에 빠져든다. 백사언이 홍희주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그 감정들이 사실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또 대타로 결혼해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을 거라 여겼던 홍희주가 진짜 속내를 드러내자 백사언의 감정은 더욱 폭발한다. 즉 개연성이 부족해도 계속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두 사람의 감정이 커져가는 그 모습에 시청자들은 빠져든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의 감정에 빨려 들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유연석의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감정연기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냉담한 얼굴에서 시작해,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츤데레적으로 드러나고, 그 속내가 완전히 밝혀진 후에는 더할 나위 없는 사랑꾼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위기에 처한 홍희주를 향해 달려나가는 유연선의 절절한 모습은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지금 거신 전화는’은 스릴러가 풀어가는 진실에 대한 궁금증이 드라마의 한 축이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백사언과 홍희주의 사랑이 커져가는 과정이 드라마의 또 한 축이다. 그래서 이 두 바퀴를 동력 삼아 드라마는 쉬지 않고 달린다. 유연석의 냉온을 오가는 연기는 그 바퀴에 추진력을 더해줬다. 그의 이 몰입감 넘치는 감정 연기가 있어 스릴러의 냉탕과 로맨스의 온탕을 오가는 이 독특한 작품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MBC)

개연성 포기한 '펜트하우스', 시즌2로 돌아온 부메랑의 결과

 

미친 듯이 달려 나가던 폭주기관차가 어째 동력을 잃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SBS 금토드라마 <펜트하우스2>의 이야기 전개는 여전히 속도감이 있고, 스토리도 반전에 반전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동력이 시즌1처럼 힘을 갖지 못하는 건 시청자들이 김순옥 작가의 패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오윤희(유진)는 복수를 꿈꾸며 로건리(박은석)와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천서진(김소연)은 청아재단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엄마와 동생과 싸우면서 딸 하은별(최예빈)이 배로나(김현수)를 죽인 사실을 약점으로 잡은 주단태(엄기준)의 요구대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다. 천서진은 독한 척하지만 늘 울고 있고 그의 딸 하은별은 홀로 사이코드라마를 찍고 있으며 주단태는 이들의 약점을 이용해 늘 승리한다.

 

그나마 시즌2에서 변화를 몰고 온 인물은 하윤철(윤종훈)이다. 그는 오윤희와 함께 위장결혼을 한 부부처럼 다시 헤라펠리스로 돌아오지만, 자신의 딸 하은별이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고는 오윤희를 배신하고 천서진을 도우며 주단태와 맞선다. 물론 여기서도 주단태는 역시 승리한다.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색다른 관전 포인트로 유제니(진지희)의 엄마 강마리(신은경)가 목욕탕에서 거물 마마님들의 때를 밀어주며 갖게 된 친분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긴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펜트하우스2>의 메인은 아니다. 메인 스토리에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일종의 감초 역할이 더 큰 이야기다.

 

결국 <펜트하우스2>의 메인 스토리이면서 이 시즌의 주요 동력이 되는 건 죽은 심수련(이지아)의 쌍둥이로 등장한 나애교(이지아)다. 그는 주단태와 딱 맞아 떨어지는 사업파트너이자 주석훈(김영대), 주석경(한지현)의 친모다. 그런데 그의 정체가 애매모호하다. 처음에는 등 뒤에 나비문신을 한 나애교로 늘 심수련의 뒤편에 숨겨져 있던 인물이 전면에 나온 것처럼 보였지만, 갈수록 그가 심수련이라는 심증이 생기고, 급기야 가발을 벗고 문신이 지워지는 목욕신이 등장함으로써 그가 심수련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만일 그가 나애교가 아닌 심수련이라면 그가 돌아온 목적도 주단태에 대한 복수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이른바 '정체의 비밀'이라는 드라마의 공식적인 코드가 이 인물을 통해 그려진다. 그의 정체가 누구냐에 따라 향후 이야기 전개가 급반전을 이룰 수 있다. 이미 시즌1 엔딩에 심수련이 사망하는 장면이 나올 때부터 많은 시청자들은 분명 시즌2에 그가 점 하나를 찍고라도 돌아올 것이라 예측한 바 있다. 김순옥 작가는 이런 예측에 돌아온 인물이 나애교인가 심수련인가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떡밥을 더해 넣었다.

 

게다가 이 인물을 통해 주단태 밑에서 학대받으며 살아온 석훈, 석경의 '출생의 비밀' 코드도 등장하게 됐다. 만일 그가 석훈, 석경의 친모라면 이들 사이에 놓인 애증의 문제들이 드라마의 감정 수위를 높여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이지아가 연기하는 인물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정체의 비밀과, 이로써 함께 등장할 출생의 비밀 코드는 <펜타하우스2>의 가장 강력한 동력으로 기획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정체가 하나둘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어딘가 드라마의 힘은 예전만큼 생겨나지 않는 모양새다. 이는 시청률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19.1%로 시작한 <펜트하우스2> 연일 상승곡선을 그리며 6회에 26.9%를 찍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30%를 돌파할 것 같았던 파죽지세는 정체기로 접어든 양상이다. 이지아가 가발을 벗고 나비문신이 지운 회심의 충격 엔딩장면이 나온 최근 방영분에서는 되레 시청률이 소폭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이미 시청자들이 패턴을 읽고 있다는 것이고, 시즌1에 사이다 전개를 위해 쉽게 무너뜨린 개연성이 오히려 드라마에 부메랑으로 돌아와 힘을 빼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벌어질 것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벌어졌으면 하는 이야기를 개연성을 다소 포기하며 전개한 결과 시청자들은 이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돌아온 이지아가 나애교든 심수련이든 별 상관없다 여기게 된 것. 개연성을 던져버리고 달려온 시즌1의 폭주가 가져온 부메랑 효과다.(사진:SBS)

시청률 고공비행 '펜트2', 개연성 포기해도 늘 승리하는 까닭

 

적어도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상황을 찾아내는 김순옥 작가의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2> 첫 회에서 살인누명을 쓰고 도망자가 됐던 오윤희(유진)가 누명을 벗고 성공한 사업가가 된 하윤철(윤종훈)과 부부가 되어(물론 이건 꾸며낸 일이지만) 화려하게 헤라팰리스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과정은 개연성의 측면에서 보면 너무나 허술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허술한 개연성에도 그냥 시청자들이 별다른 불만 없이 넘어가게 된 건, 그것이 바로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지난 시즌1에서 헤라팰리스의 악마 같은 이들이 모두 승리하고, 적어도 그들과 맞서려 했던 이들이 모두 패배한 걸 보여줬다. 심수련(이지아)은 살해됐고, 그의 친딸 민설아(조수민)는 그와 친동생처럼 가까웠던 오윤희에 의해 헤라팰리스 건물에서 밀려 추락해 사망했다. 민설아의 복수를 꿈꾸던 로건리(박은석)의 계획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오윤희는 심수련 살해 누명을 쓰고 도망자가 되었다.

 

그러니 시청자들은 이제 오윤희가 다시 돌아와 저들에게 처절한 피의 복수를 해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 강력한 요구는 그가 돌아오는 과정의 개연성 생략조차 용인하게 만든다. 그리고 김순옥 작가는 이런 시청자들의 요구를 질질 끌지 않고 바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오윤희가 성대에 문제가 생긴 천서진(김소연) 몰래 '쉐도우 싱어'로 등장하는 대목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거기에도 개연성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렇게 오윤희가 천서진의 아킬레스건을 잡는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안긴다.

 

개연성은 부족하지만 시청자들이 원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김순옥 작가의 이런 대본은 미국에서 갑자기 돌아온 배로나(김현수)와 그가 청아예고 예술제 예선전에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진인 주석경(한지현)과 하은별(최예빈)의 계략으로 학교폭력을 당해오던 유제니(진지희)를 이용하는 대목에서도 등장한다. 마치 도와줄 것처럼 다가와 배로나를 화장실에 가둬 예선전에 나오지 못하게 하려한 유제니는 왕따가 무서워 저들의 요구대로 했지만 결국 자신이 당해왔던 폭력 사실을 모두에게 드러낸다.

 

사실 시즌1에서 저들 일진들과 다를 바 없던 유제니가 갑자기 배로나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빵을 갖다 주다 왕따가 되는 과정은 개연성이 별로 없는 이상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나중에 왕따 사실을 모두에게 드러내는 그 상황이 주는 카타르시스와 향후의 파장은 그런 설정이 김순옥 작가의 큰 그림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결국 유제니가 왕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엄마 강마리(신은경)는 오윤희와 가까워지게 되고, 헤라팰리스 사람들과의 치고받는 전쟁이 드디어 시작되기 때문이다.

 

청아 예고 아이들의 도를 넘은 학교폭력은 현재 가장 이슈가 되는 소재라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 수밖에 없고, 그 아이들의 문제는 고스란히 부모들의 새로운 진용 구축과 전쟁으로 촉발된다. 이러니 갑자기 배로나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일이나, 유제니가 배로나와 같이 왕따를 당하는 그런 사건들의 설득력 부족이 별로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러한 개연성 포기를 통해 더 강력한 시청자들이 보고픈 장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펜트하우스2>가 개연성을 포기해도 늘 승리하는 김순옥 작가의 전략이다. 작품의 내전인 힘을 따라가다 보면 원하는 장면이 아니라 보기 싫어도 봐야 하는 '리얼리티'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작품이 허구라도 현실의 리얼함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지만, 김순옥 작가는 그런 리얼리티보다는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판타지를 개연성을 무시하면서라도 보여주려 한다. 이것은 자칫 현실의 문제들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위험성이 있지만, 김순옥 작가는 그것보다는 판타지가 주는 '오락'과 '재미'가 더 중요하다 말하는 듯하다. 개연성이 떨어져도 파죽지세의 시청률을 내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사진:SBS)

'펜트하우스'의 작가 마음대로 세계관, 사이다만큼 고구마도 크다

 

SBS 월화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 오윤희(유진)는 애초 헤라팰리스 사람들의 갖가지 갑질과 폭력을 당하는 약자로 등장했다. 청아재단 이사장의 딸인 천서진(김소연)은 자신이 가진 아버지의 돈과 권력에 힘입어 오윤희가 받아야 했던 1등 트로피를 빼앗고 심지어 그의 목을 그음으로써 더 이상 성악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이 악연은 계속 이어져 오윤희는 자신의 딸 배로나(김현수)가 청아예고에 성악으로 들어가려하는 걸 결사적으로 막는 천서진과 헤라팰리스 사람들의 핍박을 받는다. 그래서 시청자들로서는 오윤희라는 약자의 입장이 되어, 딸의 복수를 위해 그를 이용하려는 심수련(이지아)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성공해가는 모습에 통쾌함을 느끼게 됐다. 오윤희는 결국 딸을 청아예고에 들어가게 하고, 헤라팰리스에도 입주하게 된다.

 

그런데 오윤희는 이처럼 시청자들이 몰입하게 만들고 그래서 사이다를 안겨주는 인물에서 한 순간에 불편하고 답답한 고구마를 안기는 인물로 변화한다. 그것은 그가 헤라팰리스에서 떨어져 사망한 민설아(조수민)를 죽인 범인이었다는 걸 흐릿한 기억 속에서 떠올리면서다. 물론 그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오윤희의 기억의 착각인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스스로 자신이 범인이라 생각하게 되면서 이 인물은 조금씩 흑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간 민설아의 친모인 심수련과 의기투합해 펜트하우스 사람들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공조해오던 오윤희는 점점 심수련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어쩐지 주단태(엄기준) 같은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인물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청자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약자로서 시청자들이 몰입해 그가 저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기를 원하게 만든 인물이 점점 뒷목 잡는 캐릭터로 변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윤희 뿐만 아니라 그의 딸 배로나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하윤철(윤종훈)과 불륜관계일 거라는 오해 때문에 학교에 자퇴의향을 밝히고 술을 마시거나 도둑질을 하는데다 엄마에게 응석을 넘어 화풀이를 해대는 모습은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시청자들 중에는 오윤희와 배로나가 심지어 펜트하우스 사람들보다 더욱 보기 불편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데, 이렇게 된 건 애초 그나마 믿었던 '몰입의 대상'조차 흑화된 데서 온 실망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펜트하우스'가 가진 사이다와 고구마의 실체를 드러내는 면이 있다. 즉 빈부격차나 갑질 같은 상황들을 통해 돈과 권력으로 약자들을 짓밟는 이들을 공공의 적으로 세운 후 복수극의 형태로 사이다를 주는 이 드라마는 그 이야기가 작품 내적인 개연성을 따르기보다는 작가의 의지대로 인물들이 설정되고 흘러가며 변화한다는 점에서 작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그 사이다의 실체는 사실상 작가가 만든 고구마 현실들을 전제로 조금씩 던져주는 '작위적인 보상'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자극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때, '펜트하우스'는 또 다른 자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윤희나 배로나 같은 인물조차 뒷목잡는 캐릭터로 변신하게 만든다. 즉 현실과 달리 작가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뭐든 가능하기 때문에 강력해진 사이다는 정반대로 작가가 더 큰 자극을 위해 만들어내는 고구마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펜트하우스'라는 세계는 작품 내적인 개연성보다 작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작위성이 커서, 사이다만큼 고구마도 마음대로 크게 만들어낸다. 약자로 시청자들이 몰입했던 오윤희가 어느 순간부터 흑화되어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존재로 변화하게 된 건 이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건 '펜트하우스'가 복수극의 형태로 제공하는 사이다의 실체다. 그건 실질적인 어떤 메시지(적어도 권선징악 같은)를 위한 사이다나 카타르시스라기보다는, 시청자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 위한 자극으로서 작가가 던져주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 그 사이다는 고구마로 변화할 수 있다. 더 큰 자극이 필요하게 된다면.(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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