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가면 놀이가 돼서는 곤란하다

 

SBS <가면>이 다루려는 건 정체성에 대한 문제다.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의 삶을 살아야하는 자(변지숙)와 죽었지만 타인의 욕망에 의해 유령처럼 떠도는 자(서은하)의 이야기. 도플갱어인 그들은 가면이란 장치를 통해 삶을 바꾼다.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변신 욕구는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소재지만, 이러한 범죄에까지 와 닿는 변신에 대한 욕망은 그 사회의 건강하지 못함을 드러낸다.

 


'가면(사진출처:SBS)'

즉 이 드라마는 가면이란 설정 자체가 이미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특징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막상 가면을 씌우고 나니 거기 보이는 많은 놀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적으로 이런 놀이들은 극성을 높여주고 때론 달달하게 때론 자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게 해준다. 이를테면 가면을 쓴 당사자인 변지숙(수애)과 그 사실을 모른 채 조금씩 그녀에게 마음이 이끌리는 민우(주지훈)의 사랑이다.

 

가면이란 장치를 쓰자 두 사람은 서로 끌리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변지숙은 다가오는 민우에게서 한 걸음씩 물러나게 된다. 자신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또 두 사람은 정략결혼을 한 사이로 한 방에서 지내지만 한 침대를 쓰지 않는다. 이것은 또 하나의 가면 장치다. 그들이 한 침대를 쓸 것인가 아닌가 역시 이 드라마의 달달한 자극 중 하나다.

 

가면을 씌우자 만들어지는 놀이는 이밖에도 많다. 변지숙에게 그 가면을 씌운 석훈(연정훈)은 그녀에게는 이 모든 사실을 터트릴 수 있는 두려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범죄의 공모자로서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의 정체를 아는 동창을 그는 끝내 살해한다. 또 그녀의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서 그는 등장해 그럴 듯한 거짓말을 해댄다.

 

가면이란 설정은 결국 두 가지 장치를 가능하게 해준다. 멜로의 장애물로서 정체를 숨기는 장치가 그 하나고, 스릴러의 요소로서 범죄 사실을 숨기는 장치가 나머지 하나다. 이 두 장치가 서로 얽히면서 굴러갈 때 드라마의 극적 전개는 가능해진다. 여기에 여전히 가난한 지숙의 집안과 병을 앓는 노모 그리고 사채 빚을 받는 일을 하는 동생의 이야기가 겹쳐지고, 지숙을 향한 석훈의 시선이 단지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게 아니라 죽은 서은하와의 비뚤어진 애정관계도 깔려 있다는 사실은 이 극적 전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좋다. 가면이란 장치는 이만큼 충분한 효용을 드러낸다. 하지만 드라마는 단지 그런 놀이의 쾌감 때문에 보는 건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 흐름이 메시지를 관통해야 하고 놀이의 쾌감 역시 그 흐름 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정도여야 한다. 그런데 <가면>은 이 장치를 활용한 놀이에 너무 깊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의 구성 또한 약간 패턴화되어간다. 즉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 놓인 변지숙을 민우나 석훈이 등장해 구해주는 장면들이다.

 

변지숙의 캐릭터 또한 너무 수동적인 입장만을 만들어 놨다. 즉 그 범죄의 가면을 쓰게 된 그녀의 입장을 가족을 위한 희생 같은 선함에서만 찾다보니 너무 캐릭터가 일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저 밑으로 꾹꾹 눌러놓은 채 수동적인 위치에만 서려 한다. 누군가 그걸 건드려 주었을 때만 깨어나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이 너무 답답하게 여겨지는 면이 있다. 어차피 가면을 썼다면 그 가면이 주는 욕망을 끄집어내는 힘또한 무시할 수 없을 텐데도 그녀는 여전히 신파의 주인공처럼 그려진다.

 

<가면>은 그 장치가 가진 극성이 높은 드라마다. 그래서 시청률은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드라마가 가면이 가진 욕망의 변주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멜로나 스릴러적인 상황에만 빠져 가면놀이에 탐닉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의 유혹에 빠져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자극을 위한 자극으로만 치닫는. 가면놀이에서 벗어나 좀 더 인물들의 과감한 변신과 그 파국을 그려내는 일은 어려운 일일까



입소문에 의해 희비 엇갈린 <킹스맨><그레이>

 

영화 <킹스맨>의 선전은 놀랍다. 19금 영화로서 400만 관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영화에 대한 홍보가 그리 대단하게 이뤄지지 않았던 점을 떠올려보면 이런 기록은 이례적으로까지 여겨진다. 그저 많은 외화 중 하나일 뿐으로 여겨졌던 <킹스맨>은 관객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흥행에 급물살을 탔다.

 

사진출처: 영화 <킹스맨>

반면 영화 시작 전부터 주부들의 포르노니 전 세계 영화계를 강타한 작품이라는 문구들로 화제가 되었던 19금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이하 그레이)>는 애초의 기대와 달리 관객들의 발길이 뚝 끊어진 모양새다. 지난달 말에 개봉했지만 지금껏 30만 관객을 조금 넘어서는 기록을 보이고 있다. 무엇이 이런 희비쌍곡선을 만들었을까.

 

결국 입소문의 영향이 컸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킹스맨>은 애초의 기대보다 훨씬 흥미로운 스파이 액션에 성장드라마 게다가 폭력 미학까지 덧붙여지면서 볼거리가 풍성했다는 의견들이 쏟아진 반면, <그레이>는 기대와 달리 야하지도 또 파격적이지도 그렇다고 무언가 철학적인 탐구도 없었다는 반응이다. <킹스맨>이 입소문의 순풍을 탔다면 <그레이>는 역풍을 맞으면서 점점 열기가 식어버렸다.

 

과거 같았다면 해외에서의 뜨거운 반응을 얻은 <그레이>에 우리네 관객들의 관심 또한 뜨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 영화가 외화에 못지않은 장르적 성과와 흥행 성적을 가져가고 있어서인지 최근 들어 해외의 반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되고 있다. 대신 중요해진 건 외화라도 그것만이 보여줄 수 있는 확실한 차별점이 뭐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킹스맨>은 국내 영화가 도무지 다루지 못하는 성격의 영화가 아닐 수 없다. 007 시리즈 같은 스파이 액션 장르는 물량 공세도 공세지만 그 문화적 정서적 차이 때문에 국내에서 만들어지기 어려운 면이 있다. 기껏해야 <아이리스><베를린> 같은 남북이 얽힌 우리식의 스파이 액션이 가능할 뿐이다. 게다가 타란티노식의 폭력 미학 역시 국내 영화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는 영역이다. 우리 영화와는 차별적인 부분이 충분히 느껴지면서 동시에 나름의 장르적 재미에 충실했다는 점은 <킹스맨>의 대성공을 만든 가장 큰 요인이다.

 

하지만 <그레이>의 경우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 새로운 소재도 아니고 대단한 이야기도 아닌 것이 사실이다. 가학-피학적 섹스에 대한 건 이미 우리의 <거짓말>이 더 실감나게 다룬 바 있다. <거짓말>의 현실성에 비하면 <그레이>는 너무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 성적 소재를 떼어내고 보면 <그레이>는 그저 그런 신데렐라 스토리의 반복이다. 잘 생기고 모든 걸 가진 나쁜 남자에 끌리는 여자의 이야기는 국내 멜로드라마들의 닳고 닳은 소재다. 그러니 우리네 관객들이 <그레이>를 통해 새로운 점이나 신선한 면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제 우리 영화계에 있어서도 홍보마케팅 같은 포장은 그것만으로는 영화의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치기가 어렵게 되었다. 홍보마케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따른 작품만이 가진 고유한 콘텐츠적인 특징이 묻어나지 않는다면 관객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콘텐츠의 자생력에 따라 화제가 되지 않았어도 입소문이 그 힘을 다시 만들어내기도 하고, 제 아무리 화제가 된다 해도 입소문이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어놓으면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된다는 걸 저 <킹스맨>의 성공과 <그레이>의 실패가 보여주고 있다.

 

<피노키오>, 이 청춘들이 처한 현실 과연 옳은가

 

SBS <피노키오>에서 최인하(박신혜)피노키오 증후군이라는 이유로 MSC 입사 시험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다. 거짓말을 못한다는 건 기자로서 결격사유에 해당한다는 것이 이유. 그녀를 떨어뜨린 MSC 보도국의 에이스이자 그녀의 엄마이기도 한 송차옥(진경)은 이렇게 말했다. “무수한 거짓말들 위에 떠오르는 게 진실이라고.

 

'피노키오(사진출처:SBS)'

이것은 아마도 우리네 언론이 가진 현실일 것이다. 일단 보도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짓말이 아니라 그 이상도 해야 하는 게 작금의 언론이다. 과거 송차옥이 보도를 좀 더 임팩트있게 만들기 위해 아이들이 사고를 당한 현장에서 아이 신발(사실은 마트에서 산)을 들고 리포트를 하거나, 홍수보도를 하면서 무릎밖에 물이 안차는 데도 무릎을 꿇고 허리까지 차는 것처럼 꾸며 방송에 내보내는 것. 그런 자극과 연출은 물론 풍자적으로 과장된 것이지만, 아마도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침소봉대하는 건 지금의 언론이 처한 경쟁적인 현실일 수밖에 없다.

 

엄마이면서도 딸에게 그토록 무정한 송차옥이라는 인물은 그래서 일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인물처럼 극화되어 있다. ‘얼음마녀로 불리는 송차옥은 <피노키오>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바로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캐릭터. 그녀는 최달포(이종석)네 가족을 과장 추측 보도로 파탄 낸 기자이기도 하다. <피노키오>는 그래서 이 현실을 대변하는 얼음마녀 송차옥과 그 현실과 대결하는 최달포와 최인하라는 청춘들을 다루고 있다.

 

청춘들이 일의 세계 속으로 들어와 부조리한 세상과 대결하는 이야기는 최근 드라마들의 화두가 된 느낌이다. <미생>의 장그래(임시완)는 도무지 바뀌지 않는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미생이라 치부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무언가 거창한 꿈이나 이상을 더 이상 펼칠 수 없는 현실. 그러니 꿈이나 이상이란 하나의 사치처럼 되어버렸다.

 

따라서 이 미생의 청춘은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삶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런 위안은 없다. 그렇게 버텨낸 삶의 결과가 바로 오과장(이성민)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장그래와 다를 바 없는 여전한 미생이다.

 

<오만과 편견>의 청춘 한열무(백진희)나쁜 놈들 잡는 것이 검사의 책무라 생각하지만 검찰의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정의 같은 이상만 갖고 덤볐다가는 오히려 깨지기 십상인 곳이 바로 이 조직의 현실이다. 제 아무리 명백한 심증이 있다고 해도 위로부터 덮으라면 덮어야 하는 게 조직생활의 또 다른 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문희만(최민수) 검사 같은 인물 앞에서 한열무의 치기는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비춰진다.

 

거짓말이 기자의 덕목이 되는 언론의 현실. 꿈을 갖기보다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직장의 현실. 또 정의보다 조직의 룰이 앞서는 공권력의 현실. 이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미생>이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이런 현실 앞에 서 있는 미생의 청춘들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낸다고 완생으로 거듭날 수 없다. 또 완생으로 거듭난다고 해도 그것은 현실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의 시스템의 공고함을 확인하는 것일 뿐.

 

우리가 <피노키오><미생> 그리고 <오만과 편견>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그 속의 판타지에 열광하다가도, 한편으로 막막함을 느끼게 되는 건 바로 이 어찌 할 수 없을 것처럼 공고하게 구축된 부조리한 현실을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청춘들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이런 청춘들 앞을 가로막는 현실은 옳은가. 도대체 무엇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그들을 현실 앞에 마치 죄인처럼 서게 만들었을까.

 

<피노키오>, 제2의 <너목들>? 그 이상인 까닭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통해 사회적 범죄를 다루면서 타인의 속내를 읽어내는 초능력과 그 과정에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멜로까지를 다 잡은 이른바 복합장르드라마의 진수를 보여준 바 있다. 박혜련 작가가 다시 들고 온 <피노키오>라는 작품을 대중들이 기대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피노키오(사진출처:SBS)'

기대한대로 <피노키오>는 그 첫 회만으로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만큼의 잘 봉합된 복합장르의 틀을 보여주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져왔다면 <피노키오>는 기자라는 직업을 다루었다. 다루는 내용도 사회적 범죄에서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언론의 문제로 바뀌었다. 남다른 명석한 두뇌와 암기력의 소유자인 최달포(이종석)와 벌써부터 핑크빛 기류를 만들고 있는 최인하(박신혜)와의 멜로도 있다.

 

하지만 <피노키오>를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단순한 복합장르때문이 아니다. 이런 복합장르를 통해 이 작품이 전하려는 이야기가 가진 힘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피노키오>가 첫 회에 던져놓은 것은 거짓말이라는 화두다. MSC 보도국의 송차옥(진경)은 기자로서 진실 그 자체보다는 보도의 효과에 더 집중하는 거짓말을 대변하는 기자다. 그녀의 캐릭터는 이 한 마디로 정리된다. “팩트보다 중요한 게 임팩트야!”

 

최달포는 바로 이 송차옥의 거짓말 보도 때문에 가족을 모두 잃고 섬 마을로 들어와 자란 인물이다. 그런데 달포는 자신을 아들로 착각하는 최공필(변희봉)에게 거짓으로 아들인 척 함으로써 결국 입양된다. 거짓말로 피해를 본 인물이지만 그는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그가 기자가 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거짓말의 효용도 알지만 폐해도 알고 있는.

 

반면 최인하는 피노키오 증후군을 갖고 있어 거짓말 자체를 못하는 인물이다. 그래서는 그녀는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별로 없다. 그녀의 등장인물 소개란에는 이런 재치있는 인물설명이 들어있다. ‘변호사, 국회의원, 작가, 배우, 그 어떤 직종도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자가 된다.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누군가를 들여다보는 초능력을 가졌다면 <피노키오>는 역발상이다. 초능력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능력의 부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능력의 부족일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초능력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사실 거짓말의 유혹이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넘기 힘든 한계처럼 여겨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거짓말을 못한다는 건 또 다른 능력이 될 수 있다.

 

결국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그러했듯이 <피노키오>가 다루는 것 역시 소통의 문제. 아예 대놓고 기자들을 등장시켜 언론과 진실의 문제를 다루겠다는 건 그만큼 진일보한 <피노키오>의 야심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유독 사건사고와 논란이 그리도 많았던 올해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매체를 통해 매번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들은 과연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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