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회담>,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정상 같은 그들

 

전현무는 <비정상회담>에서 소유와 정기고가 부른 을 패러디해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정상 같은 너-”라고 부른다. 농담 같지만 이 노래는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 그것은 아마도 실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문화적 차이와 생각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것일 게다.

 

'비정상회담(사진출처:JTBC)'

왜 결혼을 주제로 하면서 굳이 홍석천을 게스트로 앉혔는가 하는 점이나, 결혼 이야기를 하면서 동성 결혼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간 점은 <비정상회담>의 이야기 폭이 거칠 것이 없다는 걸 말해준다. 오히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그 지점에 놓여진 이야기 소재는 <비정상회담>이라는 특별한 토크쇼에서는 더 빛을 발하는 것이다.

 

고부갈등을 얘기하면서 터키 대표 에네스 카야와 이탈리아 대표 알베르토가 설전을 벌이는 대목은 흥미롭다. 에네스 카야가 무조건 어머니 편을 먼저 들어줘야 한다고 하는 반면, 알베르토는 아내를 지켜주는 게 남편의 의무라며 먼저 아내를 챙겨주고 나중에 엄마랑 얘기하면 된다는 입장으로 각을 세운다.

 

사실 고부갈등은 <사랑과 전쟁>의 단골소재일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도 첨예한 문제다. 최근 들어 조금씩 문화가 바뀌고 있지만 그래도 어머니 편인지 아니면 아내 편인지 하는 문제를 두고 어느 게 정상적인가를 질문하는 건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이 안건이 <비정상회담>에 오르자 흥미로운 관점이 생겨난다. 즉 그것이 그 나라의 문화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입장을 보인다는 것. 결국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어느 것이 정답이라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해체시켜버린다.

 

동성결혼에 대한 안건도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들어 대중문화 등을 통해 성소수자들에 대한 온정적인 시선이 생겨나고 있지만 실제 현실은 여전히 넘지 못하는 편견이 많다. 벨기에에서는 이미 결혼과 입양까지 허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동성결혼에 대한 편견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벨기에 대표 줄리안의 이야기는 그래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유럽이라면 상당히 개방적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동성결혼이 캐나다에서는 합법이고, 프랑스에서는 동성애자들이 사회적 활동을 왕성히 하고 있으며, 또 벨기에는 국무총리가 동성애자이고 독일의 외무장관도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우리에게는 낯선 외국의 문화차이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터키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에네스 카야의 증언은 우리보다 어쩌면 더 보수적인 터키의 문화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타르칸이라는 유명한 배우는 해변에서 남자와 손 잡은 장면이 사진에 찍혀 무려 3년 간이나 활동을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문화적 차이를 보이는 그들도 만일 내 자식이라면이라는 가정 앞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즉 힘들겠지만 자식의 선택을 지지하겠다는 의견이 많았던 것. 물론 그 와중에도 정말로 슬프지만 지지해줄 수 없다는 에네스 카야의 확고한 이야기는 넘어설 수 없는 문화적 장벽이 존재한다는 걸 말해주었다.

 

바로 이렇게 한 테이블 위에서 서로의 문화적 차이가 토론되고 때로는 격렬하게 설전을 벌이다가 때로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입장을 반복하는 것. 이것이 <비정상회담>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서로가 자기 문화 안에서 정상이라고 우겼던 것들이 다른 문화에서는 비정상으로 바라보이는 것을 한 테이블 위에서 발견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은 결국 문화적 차이일 뿐, 실체적인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건 아니라는 것. 이 다양성의 관점을 마치 문화적 썸을 타듯이 외국인 대표들이 때론 지지하고 때론 반대하며 밀고 당기는 토크쇼. <비정상회담>이 다른 토크쇼에서는 느낄 수 없는 흥미로움과 훈훈함을 주는 이유다.

 

<인간중독>, 멜로보다 더 눈에 띈 계급의 풍경

 

<인간중독>1969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군부정권과 베트남 전쟁은 그래서 이 영화의 중요한 소재다. 베트남과 우리나라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의 공간은 폐쇄적이다. 베트남이란 공간은 김진평(송승헌)이라는 전쟁영웅의 악몽으로서만 잠깐 등장할 뿐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다뤄지는 공간은 관사가 거의 대부분이며 음악 감상실이 가끔씩 나올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어딘지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진출처:영화'인간중독'

그들이 갇혀 있는 건 군대라는 계급사회다. 그 곳은 냄새나는 군화에 맥주와 양주를 말아서 마시라면 단 번에 마시고 머리에 털어내야 하는 곳이고, 누군가는 그 상명하복의 계급구조 안에서 최대한 자신을 낮춰 성공의 기회를 잡고픈 공간이며, 누군가에게는 억지로 그런 행사에 불려 다니며 얼굴을 내미는 것이 해도 해도 어색한 공간이다. 물론 이 놀라운 계급사회는 남편의 지위가 아내의 지위가 될 정도로 단단한 서열구조를 갖고 있다.

 

이 폐쇄적인 계급사회에 어느 날 김진평의 부하로 경우진(온주완)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의 아내 종가흔(임지연)은 마치 이 관사처럼 쓸쓸한 김진평의 마음으로 들어온다. 흥미로운 건 김진평의 아내 이숙진(조여정)이 그가 모시는 군단장의 딸이라는 것이다. 이숙진은 김진평에게 여자라기보다는 야망의 파트너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가 하려는 것은 김진평을 장군 만드는 일이다. 사랑을 나누는 것조차 아이를 낳기 위한 목적성에 충실함을 보이는 그녀. 이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이를 벗어나려는 김진평의 욕망은 종가흔이라는 여인에 대한 중독적인 사랑으로 폭발한다.

 

<인간중독><색계>와 비교되고, 신예 임지연이 <색계>의 탕웨이와 비교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두 영화가 가진 이야기 구조나 영화적인 분위기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두 영화 모두 결코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과 욕망을 그렸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파국을 다뤘다. 파격적인 베드 신을 담고 있지만 결코 경박하게 느껴지지 않는 우아함이 있다. 그것은 그 안에 선명한 주제의식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중독>이나 <색계> 모두 남녀 간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이 등장한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불륜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뭇 다른 지점들이 발견된다. <색계>즉 욕망이, ‘’, 어떤 넘지 말아야할 경계를 위험하게 넘나들며 만들어지는 비극을 다룬다. 여기서 경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진 장벽이다. 친일파인 이(양조위)와 그를 제거하려는 항일단체의 스파이 막부인(탕웨이) 사이에 놓여진 넘지 못할 경계.

 

반면 <인간중독>은 지금껏 김대우 감독이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빌어 늘 얘기해왔던 계급구조가 남녀의 사랑을 막는 장벽이다. 군대 사회 안에서 김진평은 갑자기 계급의 틀을 벗어나 사랑과 욕망에 빠져든다. 그것은 타인이 보기엔 탈선이지만 그에게는 운명적인 사랑으로 다가온다. 영화가 마치 사랑과 계급사회의 대결처럼 여겨지는 건 실로 김대우 감독의 의도가 깃들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선택하는 순간, 그는 계급사회 바깥으로 내던져진다.

 

<음란서생>이나 <방자전>이 조선시대라는 사회적 배경을 가져와 당대의 계급사회가 갖는 구조 속에서 그것을 뛰어넘는 음란과 사랑을 대결시켰다면, <인간중독>은 그 계급사회가 엄존하는 1969년의 군대사회를 배경으로 파국적인 사랑을 그려낸다. 이것은 김대우식의 허위 가득한 세상에 대한 도발이다. 사실 민주화된 사회라고는 하나 그 껍질을 벗겨보면 여전히 존재하는 계급구조에 대한 도전.

 

<색계>를 통해 금기된 욕망을 우아하게 풀어내는 쾌감을 느낀 관객이라면 <인간중독>이 보여주는 계급 사회 속에서의 도발적인 욕망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적 성취에 있어서 그 심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중독>은 꽤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멜로드라마라는 익숙한 형식과 그 파격 속에서 보여주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멜로만큼 흥미롭게 관찰되는 계급의 풍경이지만.

<땡큐>, 박찬호와 혜민스님은 어떻게 소통했을까

 

박찬호의 거대한 손가락이 하나에서 여섯까지 펴지면서 ‘귀요미’를 연발하자, 혜민스님도 초절정의 ‘귀요미’를 따라해 보여준다. 메이저 리그를 주름잡던 코리안 특급 박찬호, 그리고 베스트셀러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대중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준 혜민스님. 이 너무나 달리 살아온 두 사람이 ‘귀요미’ 동작 하나로 하나가 된다. 그걸 바라보는 차인표는 뜨악해 하면서도 결국에는 자신의 버전인 ‘분노의 귀요미(?)’를 보여준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무장해제 시킨 걸까.

 

'땡큐'(사진출처:SBS)

<땡큐>, 이건 토크쇼일까. 버라이어티쇼일까. 이 파일럿 프로그램에 출연한 차인표와 박찬호 그들 스스로가 예능도 아니고 다큐도 아니고 교양도 아닌 프로그램이라고 말한 것처럼 <땡큐>는 그동안 넘어서지 않았던 수많은 프로그램의 경계들을 훌쩍 뛰어넘는다. 스님, 배우 그리고 야구선수가 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그렇고, 이들이 강원도 산골로 48시간의 여행을 떠나는 버라이어티쇼적인 요소와 중간 중간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토크쇼적인 요소가 뒤얽혀 있는 것도 그렇다. 도대체 <땡큐>의 정체는 뭘까.

 

사실 정체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서로 이질적인 조합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차츰 차츰 그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을 허물어뜨리는 그 소통의 과정을 본다는 것이다. 차인표의 기타 반주에 혜민스님이 ‘Perhaps Love’를 부르고 박찬호가 그 노래와 광경을 바라본다. 박찬호가 열등감이 많았던 어린 시절을 얘기하면 혜민스님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열등감 해소법을 알려준다. 물론 혜민스님이 늘 상담역만 해주는 건 아니다. 자신의 책에 대해 “값싼 힐링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는 혜민스님의 얘기에는 박찬호가 자신의 미국에서의 무명시절을 얘기하며 ‘그저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를 알려준다.

 

함께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으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결혼과 연애 이야기를 한다. 두 유부남의 결혼스토리와 스님의 출가 전 연애이야기까지. 사실 어디서도 듣기 어려운 이런 이야기들이 가능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갖는 독특한 방향성 때문이다. <땡큐>는 이질적인 인물들의 조합과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자체가 소통을 지향하고 있다. 스님과 배우 그리고 야구선수는 서로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이 48시간의 어우러짐 속에서 그것이 형태만 달랐지 삶의 양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 소통의 과정을 체험하거나 들여다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흔히들 토크쇼의 위기를 말하는데, 이것은 넓게 보면 소통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다. 토크쇼는 그 형식이 무엇이든 소통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 첫 번째다. 그런 토크쇼가 소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지나치게 형식에 연루되거나 본래 목적인 소통이 어느 순간 희석되어 버리는 느낌 때문이다. 게스트가 단체로 나오면 신변잡기로 흐르기 십상이고, 일인 게스트로 나오면 자칫 그 사람의 홍보쇼가 되어버린다. 때로는 MC들이 너무 전면에 나서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형식을 파하고 카테고리화 되기 마련인 게스트 섭외를 파하고 또 심지어 게스트와 MC의 경계를 파한 <땡큐>는 작금의 토크쇼 위기에 하나의 대안을 제시해준다. 이들은 스튜디오라는 답답하고 규격화된 공간을 벗어나 때론 산장에서 담소를 나누고 때론 계곡물에 입수를 하며 때론 산사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연예인과 비연예인 게스트로 나뉘던 기존 토크쇼와 달리 연예인이건 스포츠선수건 아니면 스님이건 상관없이 한 곳에 모여 어린아이처럼 뒹굴면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 직업적 편견은 사라져버린다.

 

가장 흥미로운 건 전체를 진행하는 MC 없이도 가능한 토크쇼라는 점이다. MC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토크쇼의 형식을 규정해버린다. 누가 MC가 되느냐는 그래서 토크쇼의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다. 하지만 MC가 없이 때로는 차인표가 때로는 혜민스님이 또 때로는 박찬호가 질문하고 답하는 이 자연스러운 대화는 우리가 토크쇼라는 형식에 매몰되면서 잃어버렸던 것이기도 하다. MC와 게스트를 구분할 수 없으니 중심과 변방이 있을 수 없다. 그저 툭툭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던지고 받는 것으로 충분한 셈이다.

 

사실 소통에는 형식도 구분도 필요 없다. 그저 통하면 되는 것이다. <땡큐>는 파일럿 프로그램이지만 그런 점에서 기존 토크쇼의 위기에 한 가지 해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토크쇼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소통의 즐거움이다. 그것을 위해서 이질적인 게스트들을 한데 모아놓거나, 산사나 계곡 어디든 못갈 것이 무엇인가. 굳이 이야기에 강박증 걸린 것처럼 취조하듯 좁은 스튜디오에 몇 시간씩 감금(?)시켜놓고 어떻게 진정한 소통에 이를 것인가. 대중들은 이제 진짜 이야기를 원한다. <땡큐>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아랑>,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걸까

 

<아랑사또전>은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걸까. 보면 볼수록 기묘한 사극이다. 판타지 멜로인 줄 알았는데 액션에 미스테리에 심지어 공포까지 장르를 넘나든다. <전설의 고향>에서 봤던 억울하게 죽은 처녀귀신과 그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사또 이야기처럼 시작했지만, 그것은 이 사극의 1%도 안되는 전제에 불과했다.

 

'아랑사또전'(사진출처:MBC)

귀신을 보는 사또 은오(이준기)는 처녀귀신 아랑(신민아)이 가진 비녀가 자신이 어머니에게 줬던 것임을 알아채고 그녀의 죽음을 밝히는 일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갑자기 홍련(강문영)이라는 미스테리한 존재가 등장하면서 복잡해진다. 인간을 해하는 절대악이자 요괴인 홍련은 등장인물들과 모두 관련을 맺고 있다. 그녀는 은오의 어머니(아마도 죄를 짓고 쫓겨난 선녀 무연이 몸을 빌린)이고, 저승사자 무영(한정수)의 동생이며 아랑의 죽음과 관계된 인물이다.

 

홍련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는 미스테리하고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야기가 하나씩 단서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흘러가며 알 듯 모를 듯한 대사 몇 마디로 단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마치 미로를 걷는 듯한 곤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점이 은오나 아랑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전지적 시점에서 모든 인물로 흩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옥황상제(유승호)나 염라대왕(박준규)의 시점이지만 이들은 좀체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에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극이 갖는 인물들 간의 계층적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은오는 자기 스스로 “귀신들린 얼자”라고 표현하며 출신이 만든 한계와 설움을 드러내지만, 정작 이 사극에는 양반과 상놈 사이도 수평적 관계로 그려진다. 은오와 그의 하인 돌쇠(권오중)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나아가 이 사극은 인간과 귀신 혹은 인간과 천상의 인물들(옥황상제나 염라대왕, 저승사자 같은) 사이에도 위계를 그다지 느낄 수 없다.

 

이것은 양 사이에 걸쳐진 인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은오는 인간이면서 귀신을 보는 존재이고 아랑은 귀신이면서 시한부 생을 부여받은 인간이다. 홍련은 혼은 타락한 선녀이면서 동시에 육체는 은오의 어머니인 인물이다. 이 사극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은오와 아랑, 홍련이 이렇게 걸쳐진 인물이기 때문에 천상과 인간세계의 경계가 깨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 인간세계의 반상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랑은 “죽으면 다 똑같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경계 짓기가 무의미하다는 걸 얘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아랑사또전>은 이 구별 없는 세상을 그리려 한 것일까. 귀신과 인간이 공존하고, 천상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세계를 그림으로써, 인간 세계 속의 구별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부질없는 욕망의 소산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경계가 없는 기묘한 사극, <아랑사또전>은 그래서 불친절한 문제작이다. 액션이면 액션, 멜로면 멜로, 공포면 공포까지 각각의 장르들은 그 자체로 보면 꽤 괜찮은 완성도를 갖고 있지만 이것을 한꺼번에 이어 붙이고, 단계별로 이야기를 전개하기보다는 동시다발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이야기는 복잡해졌다. 이렇게 단서들을 꼭꼭 숨김으로 해서 반전을 노린 면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반전효과가 적은 것은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면서 기대감 또한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전은 기대감을 배반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먼저 이야기를 이해시키고 몰입시켜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렇게 끊임없는 이야기의 미로 속으로 빠뜨린 후, 결국에는 간단한 액션으로 문제를 풀어내거나 아랑과 은오의 멜로로 이야기를 끝맺음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허무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시청자들을 미로 속에 넣고 한껏 혼란에 빠뜨리는 작가의 악취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아랑사또전>은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좀체 알려주지 않는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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