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작가, 그 많은 경계들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가슴에 칼이 박힌 채 바로 그것 때문에 영겁을 살아가는 존재. 간단해 보여도 이런 캐릭터를 도깨비에 부여한 건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이하 도깨비)>가 참신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깨비의 이미지는 상당히 다른 무게감을 이 캐릭터에 안겨주기 때문이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깨비의 이미지가 뭔가. 혹부리 영감에게 속아 혹과 도깨비 방망이를 바꿀 정도로 아둔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하고, 도토리 깨무는 소리에 집 무너지는 줄 알고 줄행랑을 치는 겁많은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토대로 보면 도깨비는 인간을 살해할 만큼 악독하지 않고, 인간의 꾀에 넘어가 초자연적 힘을 이용당하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신이지만 조금은 희화화되어 인간적인 면면을 가진 캐릭터가 바로 도깨비다. 김은숙 작가가 다른 시도 아닌 도깨비를 선택한 건 실로 탁월했다고 보인다. 도깨비라는 존재는 서구로 보면 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캐릭터일 수 있지만 또한 우리네 고유의 개성을 가진 신이라는 점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갖고 있다. 이 점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이 콘텐츠가 보편적으로 먹혀들 수 있는 틈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가슴에 박힌 칼로 인해 영겁을 살지만 그것이 또한 죽지 못하는 것으로서 축복이자 저주가 된다는 희비극 설정은 자칫 허황될 수 있는 이야기에 무게감을 실어준다. 설화 속의 도깨비는 그래서 희화화된 존재지만 이 드라마 속의 도깨비는 비극성을 껴안은 진중한 면면과 동시에 도깨비 특유의 장난기와 가벼움도 갖고 있는 캐릭터가 된다. 이 설정을 통해 김은숙 작가는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그것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걸 캐릭터로 구현해낸다.

 

<도깨비>는 고려시대의 전쟁의 신이었던 김신(공유)의 이야기가 현재로까지 이어진다. 김신은 죽지 않는 존재로 계속 살아 현재까지 무려 9백년을 넘게 살고 있지만 그를 둘러싼 지은탁(김고은)이나 써니(유인나), 유덕화(육성재) 같은 인물들은 현생에 태어나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여기에 연기설 같은 것들이 끼어들면서 과거 고려시대의 김신과 그를 질투해 죽인 어린 왕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역시 죽음을 당한 왕비(김소현)가 현재 어떤 인물로 태어났는가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도깨비>는 자연스럽게 사극과 현대극을 뛰어넘는 장르적 퓨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설정이 더 흥미로워진 건 과거의 악연이 현재의 악연으로 이어지는 단순구도가 아니라 과거에는 악연이었지만 현재는 인연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구도가 예고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저 도깨비 캐릭터가 가진 희비극적 요소가 어른거린다. 즉 인연은 설렘을 동반하지만 그렇게 가까워진 사랑은 동시에 비극이 될 때 그 강도도 커지는 법이다.

 

이런 선택은 김은숙 작가가 마치 신데렐라 구박하듯 지은탁을 괴롭히는 이모네 집 사람들을 도깨비 김신이 벌주는 독특한(?) 방식에서 슬쩍 드러난다. 도깨비는 엉뚱하게도 벌이 아닌 금덩어리를 준다. 그래서 이모네 집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금덩어리에 좋아하지만 그것은 금세 지옥으로 바뀐다. 욕심이 상황을 비극으로 만드는 것.

 

이런 소소한 데까지 뻗어있는 이야기들의 면면들은 다름 아닌 김은숙 작가가 이제 인생을 좀 아는 고수라는 증거다. 행복은 비극과 연결되어 있고, 슬픔은 또한 행복이 되기도 하며 그래서 악연으로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굉장한 진중함이 사실은 가벼움과 공존할 수 있고, 시간이나 공간의 한계는 이야기라는 장치 안에서는 쉽게 그 경계가 무너진다.

 

물론 이런 것들은 이론적인 말일 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도깨비>라는 작품을 보다보면 너무나 쉽게 희극이 비극으로 또 비극이 희극으로 이어지고, 어떤 즐거워 보이는 욕망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바뀌어 버리며, 사랑이 주는 설렘이 다가오는 비극의 불안감으로 변화하는 걸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삶의 진짜 양태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것. 멜로 한 장르를 깊게 파왔던 김은숙 작가가 그간 꽤 많은 작품들과 세월을 통해 어떤 경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심증이 드는 대목이다.

김은숙 작가의 <도깨비>, 어떤 정서를 건드리고 있나

 

시간과 공간, 이승과 저승, 현실과 비현실 같은 경계들을 모두 뛰어넘었다. 고려시대 무신 김신(공유)은 자신이 지키던 주군의 칼날에 쓰러지지만 그를 지지하는 민초들의 염원에 의해 되살아나 영원히 살아가는 축복이자 저주를 받게 된다. 완전한 무()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도깨비 신부가 그의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야 한다는 신탁을 받은 채.

 

'도깨비(사진출처:tvN)'

tvN <쓸쓸하고 찬란하-도깨비(이하 도깨비)>는 우리네 전설과 야담에 등장하는 도깨비라는 특이한 존재를 소재로 담았다. 신성성을 가진 존재로서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도깨비는 민담 형태로 구전되면서 인간적인 면면들이 깃든 존재로 그려져 왔다. 신앙의 대상인 신에서부터 인간에게 당하기도 하는 모습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그런 존재.

 

<도깨비>는 그래서 그 특이한 존재적 특성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시간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고, 죽음을 뛰어넘어 불사하는 존재로서 그려졌으며, 서울의 한 복판에서 문 하나를 열고 캐나다의 거리로 나가는 공간적 한계도 뛰어넘는 존재이다. 드라마가 이런 주인공을 세운다는 건 그간 복작복작대던 드라마 특유의 이야기의 한계 또한 뛰어넘어야 함을 뜻한다.

 

<도깨비>는 그래서 동서를 뛰어넘어 다양한 이야기들을 끌어안았다. 사극에서부터 전형적인 신데렐라 구성의 가족이야기, 마치 <전설의 고향>을 현대식으로 해석한 듯한 도깨비와 저승사자의 이야기와 북유럽 하이랜더의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에 대한 판타지 장르까지 이 한 작품에 담겨졌다. 김은숙 작가 같은 베테랑이 아니면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그 중심구도는 김은숙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멜로가 자리했다. 도깨비 김신과 그에 의해 죽지 않고 태어나 자라게 된 지은탁(김고은)의 사랑이야기가 그것이다. 불사의 존재인 김신은 드라마 제목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쓸쓸하고 찬란한인물이다. 그가 바라는 지향점이 결국 무()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는 쓸쓸하다. 그런 그가 귀신을 보는 것 때문에 왕따 당하는 지은탁이라는 소녀를 만난다. 스스로가 도깨비 신부라는 그녀는 스스럼없이 김신에게 시집가겠다고 말하며 해맑게 웃는다.

 

드라마는 인물의 욕망에 의해 굴러가기 마련이란 점에서 보면 도깨비라는 존재가 가진 무()에 대한 욕망은 인간적인 욕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드라마가 현재의 시청자들의 욕망을 이끌어내는 존재는 지은탁이라는 소녀다. 그녀를 처음 보게 된 김신이 특이하게도 그녀에게서 미래가 읽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던지고, 그녀가 다름 아닌 김신에 의해 되살려져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걸 확인해주는 대목은 그래서 중요하다.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 엄마와 그 죽기 직전 간절한 기도를 하라고 얘기해줬던 삼신할매(이엘), 그래서 도깨비에 의해 살 수 있게 되어 얹혀 지내며 구박 받는 신데렐라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 어찌 보면 절망적일 수 있는 청춘이지만 그녀에게도 어느 한 순간의 찬란한 빛처럼 신이 깃든다. 바다 앞에서 절망적인 그녀가 읊조리듯 소원을 비는 그 순간에 신과 조우하며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민간 설화의 이야기를 통해 구전되며 만들어진 도깨비라는 존재는 어쩌면 당대의 힘겨웠던 민초들의 절망의 끝에서 기대게 되는 구복의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깨비>가 가진 이야기는 단지 남녀 간의 판타지 멜로라기보다는 우리 시대에 억눌린 어떤 정서 같은 것들이 절망적인 순간 기대게 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시간과 공간, 이승과 저승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을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 결국 그건 실체가 없는 판타지로서 쓸쓸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그 판타지가 누군가를 살아가게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찬란한.

예능-드라마 경계 허무는 무한상사가 말해주는 것

 

김은희 작가가 쓰고 장항준 감독이 연출한다. 아쉽게도 조진웅은 스케줄 때문에 합류를 못했지만 <시그널>의 연기자들도 대거 합류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시그널>이 다시 떠오른다. 본격 스릴러 장르로서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시그널>. 하지만 이건 <무한도전>에서 8월 방송을 목표로 준비 중인 무한상사이야기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무한상사는 알다시피 <무한도전>의 상황극 콩트 시리즈 중 하나로 만들어졌다. 즉석 상황극으로 시작했던 무한상사는 그러나 <레미제라블>이 주목받는 콘텐츠로 떠올랐을 때는 그 작품을 패러디한 뮤지컬로 기획되기도 했다. 이번 <시그널> 제작진이 합류한 무한상사가 추구하는 건 액션 블록버스터다. 역시 <무한도전>다운 시의적절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무한도전>이 늘 새로운 영역에 열려 있고 그 분야에 과감히 뛰어들어 도전해온 건 애초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번처럼 김은희 작가 같은 최고의 작가가 아예 대본 작업에 들어오고 장항준 감독이 연출하며 역시 <시그널>의 연기자들이 함께 하는 도전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이런 작가, 감독, 배우들의 예능에 대한 열려있는 자세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배우들 중에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는 걸 꺼리는 이들도 많다. 또 드라마 작가들 중에도 예능이란 영역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것은 아무래도 예능이라는 분야가 꽤 오랜 시간 동안 폄훼되고 평가절하 되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영역 간의 위계는 깨지고 있다.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의 <응답하라> 시리즈 성공은 그 신호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예능의 방식이 드라마에서 오히려 힘을 발휘했으니 말이다.

 

<프로듀사>처럼 예능과 드라마가 영역을 넘어서 시너지를 낸 작품도 나왔다. 최근의 이른바 성공하는 작가들 중에는 시트콤을 포함한 예능 작가 출신들이 더 많아지는 경향이 생긴 것도 우리가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예능의 방식(집단 창작 같은)이 사실은 얼마나 이 시대에 적합한 방식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김은희 작가 역시 시작은 <위기일발 풍년빌라>라는 시트콤을 통해서였다. 지금의 최고의 작가의 위치에 섰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건 예능적인 창작방식에 익숙한 열려 있는 자세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시그널>을 연출한 김원석 감독은 김은희 작가의 중요한 경쟁력으로 열린 마인드를 꼽기도 했다. 타인의 조언을 잘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것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

 

제 아무리 <무한도전>이라고 해도 예능 프로그램의 프로젝트에 김은희 작가가 선선히 나서 대본을 쓸 수 있었던 건 이런 드라마-예능 할 것 없이 위계 없는 그녀의 열린 마인드가 있어서다. 그러고 보면 최근 잘 되는 작가들은 대부분 열린 마인드로 집단 창작의 시너지를 만들어낸 작가들이다. 이번 무한상사에서 특히 기대되는 건 김은희 작가와 <무한도전>의 만남을 통해 드라마와 예능의 또 다른 시너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예능적 방식이 드라마에도 힘을 실어주었듯이 드라마의 방식이 예능에도 힘을 실어주기를.

'아가씨' 김민희와 김태리, 그녀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아가씨>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어느 곳에 지어진 대저택이다. 하필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삼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건 이 시대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이 많이 보여주던 민족주의적인 관점과는 무관하다. 다만 그 시기가 가진 혼종적 성격, 즉 문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차를 타고 들어가 세워져 있는 대저택이 일본식과 영국식 그리고 우리식으로 한 공간에 지어져 있는 모양새와 무관하지 않다. 공간이 그러하듯이 그 공간에 살아가는 이들도 혼종적 성격을 띤다.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 있고 조선어를 쓰는 일본인이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아가씨>

영화가 담는 시공간이 이처럼 혼종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건 <아가씨>에서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수한 경계와 구분들이 이 혼종적 시공간에서는 어딘지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그 느슨함은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대저택에 거의 감금되듯이 살아온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는 부모를 잃고 막대한 유산을 받았지만 그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손아귀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이 코우즈키와 히데코의 관계가 애매하다. 친인척 관계지만 코우즈키는 히데코에 대한 변태적인 애정을 갖고 있다. 외부에는 그것이 코우즈키가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건 영화의 말미에 가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아가씨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려는 가짜 백작(하정우)이 그녀에게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 숙희(김태리)를 하녀로 넣는 일종의 작전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연기를 한다. 혼종적 공간에서의 연기는 이들이 도대체 그 진심이 무엇이고 실체는 무엇인지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린다. 3부로 나뉘어 구성된 영화는 그래서 그 시점이 매 부마다 달라지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의 반전을 보여준다. 연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연기가 아니었고, 진짜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연기였다는 것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의 변주만으로도 <아가씨>는 꽤 흥미롭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는 점은 그간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모호함이 아니라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폭력적인 남성성의 세계로부터 두 여성이 유쾌한 탈주극을 벌이는 것이다. <아가씨>에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하고 그들이 모두 두 명의 남성에 포획된 존재들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상징성을 보다 명쾌하게 보여준다. 가짜 백작에 의해 작전에 투입된 숙희가 그렇고, 코우즈키에 의해 대저택에 감금된 채, 신사차림으로 가장한 남자들 앞에서 더럽고 도착적인 소설 강독을 하며 살아가는 히데코가 그렇다.

 

아가씨와 하녀라는 관계 설정은 아마도 남성성을 드러내는 무수한 성애 영화가 보여주곤 했던 기묘한 상상을 자극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직접 보기 전에는 <아가씨>라는 영화가 일종의 동성애 영화가 아니냐는 편견을 갖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주는 반전에는 오히려 더 효과적인 면이 있다. 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아가씨의 질문에 하녀가 그 속살을 만지고 성 행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1부에서는 말 그대로 남성성의 시각을 그대로 재연하는 듯 보이지만, 2, 3부에서 다시 보는 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코르셋처럼 남성성에 의해 짓밟히고 옥죄던 육체들이 아가씨와 하녀라는 서열 구조까지 한껏 벗어던진 채 서로를 온몸으로 위무하는 듯한 장면으로 치환된다. 두 여성이 첫 설렘을 갖게 되는, 골무로 날카로운 이빨을 갈아주는 장면 역시 다시 보게 되면 여성들의 연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 대저택 지하실로 상정되는 남성성의 세계는 점점 더 도착적인 느낌을 준다.

 

섹스는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저 성행위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이상하게 삐뚤어진 성의식을 갖고 있다. 마치 여성들을 위압적으로 짓눌러야 여성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사고방식. 그런 폭력적인 생각들은 지하실 가득한 무수한 성애 소설들의 판타지로 남겨져 여성들을 그 폭력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뒤늦게 이 지하실에 가득 채워진 성애 소설들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 숙희는 그래서 히데코와 함께 그 집으로부터 탈주하며 소설들을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그리고 마치 발기된 성기처럼 세워져 위압적으로 그녀들을 억압하던 상징물 뱀 대가리를 잘라버린다.

 

그렇게 여성들이 탈주해버린 대저택에서 남겨진 남성들은 그 폭력적인 성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대신 탈주한 여성들은 블라디보스톡행 배를 타고 자유의 항해를 한다. 그간 남성성의 억압을 상징하던 옷들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폭력적인 성행위가 아닌 행복한 성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코우즈키가 히데코를 훈육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구슬은 온전한 쾌락의 도구로 바뀐다.

 

사실 이렇게 선명하게 메시지를 담아내면서도 매번 반전에 반전을 이어가고 그리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적인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놀라운 성취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장면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 장면의 진짜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영상 연출은 그래서 이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들이 못내 궁금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들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그 장면에서는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혼종적 성격을 띠던 영화의 모호함은 보다 선명해진다. 가짜는 가짜임이 판명되고 진짜는 진짜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모두가 연기를 하는 듯 보였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 연기의 끝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상상력과 기획으로 강요되던 연기들이 벗겨지고 대신 진실 된 알몸이 드러날 때의 카타르시스는 그 어떤 섹스보다 강렬하다. 남성성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적인 양태들이 무너져 내리고 저 편 들판을 향해 달려 나가는 두 여성의 자유를 지지하게 될 때, 영화는 한없이 유쾌해진다. 성 의식에 대한 논제들이 그 어느 때보다 쏟아져 나오는 시기여서 일까. <아가씨>는 특히 더 흥미로운 동지의식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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