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경과 언론의 ‘조작’, 진실에 다가가려는 역발상

여론조작. 사실 이 만큼 우리네 대중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건 없다. 그 여론조작에 관여하는 건 검찰과 경찰 그리고 거대 언론이다. 이들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조하며 권력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사건을 조작한다. 검찰이 밑그림을 그리면 경찰은 행동하고 거대 언론은 그럴 듯한 소설(?)로 여론을 조작한다. 이런 일이 과연 현실에 있을까 싶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네 현실은 이런 소설 같은 이야기가 가끔씩 실제로 벌어지기도 한다. SBS 월화드라마 <조작>이라는 드라마가 그럴듯한 이야기로 들리는 건 그래서 이러한 현실이 만들어낸 갈증 때문이다. 

'조작(사진출처:SBS)'

<조작>의 맨 꼭대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언론 대한일보의 구태원(문성근)은 현재까지 이 적폐 시스템의 머리 격이다. 구태를 상징하는 이 인물은 권위 있는 언론인 척 하면서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호도한다. 여론조작을 위해 검찰을 마치 제 수하 부리듯 좌지우지한다. 임지태(박원상) 검사 같은 인물은 대한일보의 뒤를 봐주면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한다. 그는 자신들이 충실한 개라고 말하며 짖으라면 짖고 덮으라면 덮는 것이 자신들이 할 일이라고 말한다. 한편 전찬수(정만식) 같은 부패경찰 역시 구태원의 수족이 되어 여론조작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이런 그림은 우리가 많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봐왔던 것들이다. 적폐세력이라고 자주 등장하는 부패한 검찰과 경찰 그리고 언론의 공조는 이미 <내부자들> 같은 영화를 통해 많은 대중들의 공분을 이끌어낸 바 있다. 그래서 <조작>이 그리고 있는 현실이 특별할 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적폐세력들과 대적하는 방식은 조금 독특하다. 그것은 저들이 하는 방식의 역공조를 통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일보의 구태원이 있다면 그에 대적하는 인물로 스스로를 기레기라 자청하며 오히려 그런 변칙적인 방식으로 진실에 접근해가는 애국신문의 한무영(남궁민)과 바보행세를 하며 대한일보의 스플래시팀을 부활시키고 그래서 마지막 반전을 도모하는 이석민(유준상) 기자 있고, 임지태 같은 부패 검사가 있다면 그가 덮으라는 진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파헤치려는 권소라(엄지원) 같은 검사가 있다. 전찬수 같은 행동대원격의 부패경찰이 있다면 그와 대적하는 양추성(최귀화) 같은 애국신문을 돕는 의리파 깡패가 있다. 

그래서 이들은 저들과 대적하기 위한 역공조 팀을 이룬다. 영세하지만 진실을 위해 할 짓 안할 짓 다 하며 파헤치는 한무영과 애국신문이 권소라 검사 같은 인물과 공조하며 저들의 커넥션과 싸워나가는 이야기는 같은 방식을 통한 대결이라는 점에서 흥미진진해진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그 정도가 아니면 대적할 수 없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역공조는 어떤 공감대를 갖게 만든다. 

그 끝에 서 있는 건 결국 대중들이다. 부패 언론에 의해 호도되는 진실이 여론을 조작하는 그 흐름이 있다면, 그 흐름과 맞서 그 여론 조작의 실체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흐름이 있다. 그 사이에서 대중들은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구태원이 말하는 대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여론 전쟁이라는 표현은 이 드라마를 가장 잘 설명하는 대목이다. 

조금 뻔할 수 있는 현실적 문제의식을 가져왔지만 <조작>이 흥미로워지는 대목은 바로 그 문제의식과 맞서는 방식으로서 저들의 방식을 정반대 방향으로 활용한다는 그 지점이다. 부패한 검경과 언론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인 조직에서 소외된 검사와 기자 그리고 기레기 언론의 공조. 물론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이런 판타지적 구도만으로도 흥미롭게 응원의 마음을 갖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네 비뚤어진 현실이 그만큼 공고하다는 뜻이니까.

진실의 은폐, <솔로몬의 위증>이 건드리는 것들

 

저희 반에 빈 책상만 네 개예요. 그게 어른들의 보호고 도움이에요? 그럼 전 안 받을래요. 필요 없어요.” 고서연(김현수)이 말하는 빈 책상 네 개. 어째서 이 빈 책상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더 큰 잔상으로 남을까.

 

'솔로몬의 위증(사진출처:JTBC)'

JTBC 금토드라마 <솔로몬의 위증>은 학교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한 학생 이소우(서영주)로부터 시작한다. 평소 그를 괴롭혀온 최우혁(백철민)과 그 친구들에 대한 미심쩍음이 있었지만 학교는 서둘러 이를 덮으려 하고 경찰은 자살로 사건을 종결하려 한다. 사실 학내 폭력사태나 혹은 자살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걸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학교 이야기는 우리가 신문지상에서 너무나 많이 읽어온 것들. 그래서 <솔로몬의 위증>은 일본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 원작이지만 어쩐지 우리의 이야기 같은 현실감을 준다.

 

물론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평소 최우혁과 그 친구들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이주리(신세휘)가 그를 따르는 박초롱(서신애)과 함께 최우혁이 이소우를 죽였다는 고발장을 만들어 서연의 집 앞에 놓아두게 되고, 이를 입수한 언론이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터트리자 두려움을 느낀 초롱은 주리와 말다툼 끝에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가 된다. 즉 한 학생이 죽고, 다른 한 학생은 혼수상태가 되며 다른 학생은 그로 인해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물론 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고서연은 친구들의 책상이 하나씩 비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학교에서 벌어진 한 학생을 둘러싼 추리극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사실은 사회 고발극에 가깝다. 드라마가 고발하려는 건, 한 학생의 죽음이라는 중차대한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그 진실을 제대로 알려 하기보다는 자기들 유리한대로만 처리하려는 어른들이다. 그 어른은 다름 아닌 학교와 경찰과 언론이라는 탈을 쓰고 있다.

 

학교는 그럴 듯한 추모식을 거창하게 열었지만 그건 죽은 학생을 진심으로 추모하려하기보다는 서둘러 자살로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함이었다. 경찰은 고발장을 보게 된 후 이 사건으로 갖게 된 학생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심리 상담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아이들에게서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한 구실이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파헤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박기자(허정도)흥미에 더 관심이 많다. 흥미롭고 자극적인 보도를 내기 위해 그는 금수저 천지인 정국고에서 위선과 허위를 폭로하면서 정의를 수호하는” ‘정국고 파수꾼이라는 가명의 SNS 계정을 추적하려 한다.

 

박기자는 본래 사람은 자기 유리한대로 움직이는 것이라며 학생들은 가만있는 게유리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2학년은 어른들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나이라며 너 네가 어른들 도움 없이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서연은 안다. 어른들의 보호와 도움이라고 했지만 결국 자기 반에 빈 책상만 늘어가게 됐다는 것을.

 

결국 <솔로몬의 위증>은 그래서 이렇게 진실을 덮으려고만 하거나 혹은 자기들 유리한대로만 하려는 어른들에 대항해 아이들이 직접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을 담는 드라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네 부끄러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부끄러운 현실들을 염두에 둔다면 아이들의 이런 반발에 심정적 지지가 가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그래서 <솔로몬의 위증>은 광화문 촛불 집회 현장에 나온 학생들이 또박또박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던질 때 어른들이 갖게 되는 어떤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특히 교실에 빈 책상을 볼 때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아이들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소수의견>, 대한민국을 피고로 세운 까닭

 

<소수의견>이 영화 시작과 동시에 자막으로 넣어놓은 특정한 사건, 사실과 관계가 없다는 얘기는 거꾸로 들린다. 오히려 그 자막은 이 영화가 특정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얘기처럼 보인다. 철거와 대치하는 원주민과 전경들, 그리고 투입되는 용역깡패들, 화염병과 물대포, 그리고 그 대치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 이런 풍경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굳이 용산참사를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네 현대사에서 이 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사진출처: 영화 <소수의견>

철거는 아마도 포크레인으로 상징되는 우리네 도시들의 화려한 겉면 속에 남겨진 깊은 생채기일 것이다. 포크레인은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남긴다. 그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본래 있던 자연적인 상태가 뜯겨져 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래 있던 자연적인 상태 위에 다른 걸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증거를 덮어버리려 하지만 그 상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포크레인이 뜯어낸 곳에서 두 명이 죽음을 맞이한다. 한 명은 경찰이고 다른 한명은 철거에 대항하던 원주민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 경찰을 죽게 한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그 현장에 있던 원주민이다. 두 개의 관점이 쟁점화된다. 검찰은 경찰이 죽었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춰 이 사건은 원주민의 의도적인 살해라고 주장한다. 한편 변호인은 아들이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을 밝혀 그 경찰의 죽음이 정당방위에 의한 것이라는 걸 납득시키려 한다.

 

죽은 두 아들들에게는 모두 살아있는 아빠들이 있다. 그래서 이 법정싸움은 당연히 이 아빠들 간의 대립이 될 법도 한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과잉진압을 하게 된 경찰의 뒤에는 그들을 그렇게 움직인 권력자들이 있고, 그 권력자들을 움직이는 건 그 철거가 가져올 이익이다. 그러니 마치 포크레인이 땅을 푸고는 서둘러 그걸 덮어버리는 것처럼 권력자들은 검찰이든 경찰이든 법이든 언론이든 뭐든 이용해 이 사건을 덮어버리려 한다.

 

그러니 법정싸움은 아빠들의 대립이 아니다. 그건 이 사안을 만들어내고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덮으려는 국가와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소수 개인의 대결이 된다. 대한민국을 피고로 세우는 발상은 이 사건이 어느 개인의 부딪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무수히 얽혀 있는 권력과 관계자들에 의해 생겨난 일이라는 걸 말해준다.

 

정작 아빠들은 자신들의 자식들이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입장에 서 있다. 죽은 경찰의 아빠가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고라고 말한 대목은 영화가 왜 대한민국을 피고로 세우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즉 아빠들이나 죽은 자식들은 서로 대립할 이유가 없었고 그런 죽음을 맞이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그들을 대립하게 했고 희생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건 사건이 아니라 사고였다. 누군가에게 의해 내몰리면서 벌어진.

 

권력의 부패나 누군가의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본화라는 이름의 개발은 국민을 희생자로 만든다. 도시화라는 미명하에 포크레인을 들이대고는 그 안에서 쏟아지는 서민들의 피눈물은 금세 마치 없었던 일처럼 덮어버린다. 때로는 희생자는 가해자가 되어 법정에 세워지기도 한다. 약자로서의 서민들은 늘 소수의견취급 받는다. 얻어맞아 피를 흘리고 있지만 덮어버리면 무시되는 소수의견.

 

영화는 그 소수의견이 절대 무시될 것들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또 서민과 서민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걸 통해 이득을 가져가려는 저 뒤편의 움직임들을 이 영화는 조망하게 해준다. 끊임없이 서민들의 이야기를 소수의견으로 치부하며 덮으려는 시도들이 영화 속에서 반복될 때마다 터져 나오는 한숨은 그것이 영화 속 극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이한 한국형 리얼리티TV, 자리잡고 있나

 

<진짜사나이>의 영향일까. SBS는 <심장이 뛴다>를 정규 편성했고 KBS는 <이상무>를 파일럿으로 방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진짜사나이>가 군인을 소재로 했다면 <심장이 뛴다>는 소방관을, <이상무>는 경찰을 소재로 하고 있다. 항간에는 비슷한 콘셉트 베끼기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맞는 얘기다. 분명 관찰카메라를 내세운 <진짜사나이>가 포문을 연 것은 사실이니까.

 

'심장이 뛴다(사진출처:SBS)'

하지만 이 군인이나 소방관(119 대원), 경찰 소재의 프로그램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군인을 소재로 한 예능은 89년 시작해 96년까지 방영되었던 <우정의 무대>가 있었고, 소방관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도 <긴급구조 119>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으며, 경찰 역시 <경찰청 사람들>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즉 형식은 다르지만 소재는 이미 다뤄졌던 것.

 

최근 들어 소방관이나 경찰 소재의 예능 프로그램이 연예인이 출연하는 관찰카메라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데는 그만한 우리 예능만의 역사적 흐름이 있다. 즉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서구에서 생겨난 리얼리티TV의 영향이 그것이다. 즉 90년대 <경찰청 사람들>의 탄생 이면에는 <캅스(미국)> 같은 경찰 소재의 리얼리티TV가 있었고, <긴급구조 119> 역시 <Rescue 911(미국)> 같은 소방관 소재의 리얼리티TV가 있었던 것.

 

하지만 이 리얼리티TV의 경향을 이어받아 <빅브라더>나 <서바이버> 같은 서구의 리얼리티쇼가 21세기에 등장하지만 이 경향이 우리나라에까지 그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일반인 출연자에 대한 사생활 노출에 정서적인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인 대신 연예인을 출연시키고 이를 캐릭터쇼로 만든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하게 되었다. <무한도전>은 그 시작점이고 그 후로 <1박2일>이나 <런닝맨> 같은 흐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진짜사나이>를 비롯해, <심장이 뛴다>, <이상무> 같은 관찰 카메라를 이용한 예능 프로그램은 이미 90년대에 등장했던 리얼리티TV에 우리 식의 연예인 출연 리얼리티쇼가 접목된 형태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프로그램에 연예인만이 아니라 일반인 출연자들도 함께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어찌 보면 정서적인 반감 때문에 일반인 출연 리얼리티쇼가 나오지 못했던 21세기 초의 예능 경향이 지금에 와서야 조금씩 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연예인과 일반인이 함께하는 관찰 카메라형 리얼리티쇼는 일반인 리얼리티쇼로 가는 과도기적인 예능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예능 프로그램에 있어서 이른바 ‘베끼기 논란’이 자주 벌어지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MBC 예능에서 포문을 연 이른바 ‘관찰 카메라’ 예능이 한때 트렌드를 이끌었던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형식을 조금씩 대체해가는 변화의 지점에 지금의 예능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즉 이 형식을 주도한 MBC 예능이 이 변화의 선봉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 변화에 동승하는 관찰 카메라 형식의 예능들을 모두 베끼기라 말하기는 이제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무한도전>이 있어서 <1박2일>도 <남자의 자격>도 또 <런닝맨> 같은 프로그램도 가능했던 것처럼, <진짜사나이> 같은 프로그램이 있어 좀 더 다양한 소재의 관찰카메라 예능이 나오는 것이 그다지 예능 전체의 발전을 위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형식을 가져왔다고 해서 그 소재 자체가 가진 특성들에 맞는 저마다의 스토리텔링을 개성화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저 소재만 달리할 뿐 스토리텔링 방식을 똑같이 한다면 그것은 창의적인 재해석이 아니라 진짜 베끼기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군인 소재의 관찰 카메라 예능이 뜨자, 소방관, 경찰 소재의 예능이 나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잘못된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우리네 방송의 특유한 흐름과 역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부터다. 소재만 살짝 바꿔 너도나도 비슷한 스토리를 반복하게 된다면 자칫 이 새로운 트렌드로 각광받는 관찰 카메라 예능은 너무 빠른 소비를 맞을 수도 있다. 지금의 이 변화들은 소재적으로 풍성해지는 결과가 될 것인가. 아니면 짝퉁 예능들이 쏟아져 나와 오히려 소비만 빠르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인가. 주목해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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