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시터>, 신윤주와 김민준의 연극 같은 연기는 왜?

 

KBS 4부작 월화드라마 <베이비시터>는 아예 대놓고 19금 딱지를 붙이고 나왔다. 베이비시터로 들어온 석류(신윤주)는 마치 의도적으로 접근한 듯 은주(조여정)의 남편 상원(김민준)을 유혹하고 결국에는 선을 넘어버린다. 석류에게 이끌리듯 키스를 하려다가 망설이는 상원을 오히려 석류가 키스해버리는 장면은 이 드라마가 하려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베이비시터(사진출처:KBS)'

결국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평범해 보이고 또 어찌 보면 남부러울 것 없이(오히려 부러울만한) 사는 한 부부가 석류라는 베이비시터에 의해 파국에 이르는 이야기를 이 드라마는 다루고 있다. 그만큼 그 행복해 보이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거라는 걸 베이비시터라는 특수한 존재(마치 현대판 하녀 같은)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

 

그런데 19금이라는 파격에 불륜을 첫 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서일까. <베이비시터>는 첫 회부터 연기력 논란이 불거져 나왔다. 은주 역할의 조여정은 잘 어울리지만, 어딘지 석류 역할의 신윤주와 상원 역할의 김민준의 연기가 어색하다는 것. 실제로 이들의 대사나 연기는 마치 대본을 읽는 듯 경직된 느낌마저 준다.

 

영화 <동주>에서 꽤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줬던 신윤주였던지라 <베이비시터>에서 왜 저렇게 어색한 느낌의 연기를 보여주는지가 의아하게 여겨질 만하다. 또 그녀와 불륜에 빠지는 상원 역할의 김민준 역시 그 연기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의 대본이나 연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베이비시터>는 저 유명한 <하녀>라는 작품처럼, 계급적인 갈등이나 자본화된 삶의 이야기를 불륜과 파국이라는 파격적인 이야기 속에 담아내고 있다. 극단적인 인물의 얼굴 클로즈샷을 통한 미세한 감정을 포착하는 연출이나, 공간을 구획하여 마치 집에서 벌어지는 서로 다른 이면을 동시에 들여다보게 해주는 연출은 세련되게 작품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담아낸다.

 

그럼에도 신윤주와 김민준의 연기력 논란이 나온 데는 이 작품이 가진 연극적인 요소들 때문으로 보인다. <베이비시터>는 형식적인 가족의 모습이 그 연극적인 대사를 통해서 전해진다. 즉 일상어라기보다는 마치 연극을 하는 듯한 대사들이 오가고 그들의 행동 또한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어딘지 어색한 연극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밥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는 마치 무언가 속내를 숨긴 채 겉으로는 행복한 가족이라고 연기하는 듯한 모습이다. 실제 삶은 작은 유혹에도 흔들리고, 심지어 베이비시터로 온 인물의 행동 하나에도 질투를 느낀다. 베이비시터 석류는 바로 그 일 때문에 그 집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다른 데 있는 듯하다. 그러니 그녀가 하는 행동 역시 연극적일 수밖에 없다.

 

<베이비시터>라는 작품이 가진 이런 연극적인 요소들 때문에 이 작품에서의 연기는 결코 쉽지 않다. 속내를 숨기고 거짓을 가장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 연극을 하는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에게 느껴질 수 있어야 한다. 즉 오히려 이 인물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걸 연기자로서는 아예 드러내는 편이 시청자들에게는 더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신윤주와 김민준은 아직까지 그 캐릭터가 다 나오지 않아서인지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첫 회라서 그럴 수 있다. 차츰 이들의 연극적인 삶 자체가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라는 게 드러나게 된다면 조금은 이들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분명한 건 연극적인 삶을 사는 이들을 연기하는 것과 연극 같은 연기를 하는 건 다르다는 점이다. 전자를 해야 하는 <베이비시터>는 쉽지 않은 연기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상류사회>, 그건 사랑일까 욕망일까

 

상류사회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그 하나는 선망이자 판타지다. 서민들이라면 도무지 가질 수 없는 화려하고 부유한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 이걸 드라마로 다루면 주로 신데렐라가 나오는 멜로가 나온다. 다른 하나는 계급적인 시각이다. 죽어라 열심히 살고 있는데 누구는 점점 더 잘 살고 누구는 점점 못 살게 되는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걸 드라마로 다루면 사회극이 나온다. 그렇다면 아예 제목부터 <상류사회>인 이 드라마는 어떤 시각을 보여주고 있을까.

 

'상류사회(사진출처:SBS)'

<상류사회>는 이 두 가지 패턴화된 시각을 여지없이 깨버린다. 회장 아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흔한 신데렐라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서민 중의 서민으로 보이는 알바생 이지이(임지연)는 그를 쫓아다니는 재벌가 아들 유창수(박형식)에 대해 무조건적인 호감을 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진 자들은 다 그러냐며 밀어내고 대신 서민의 아들이라는 최준기(성준)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봐온 재벌가 아들과 서민 캔디의 조합하고는 조금 다른 풍경이다.

 

한편 재벌가 딸인 장윤하(유이)는 신분을 속인 채 마트에서 알바를 한다. 절친인 이지이에게조차 신분을 속이고 살아가는 그녀는 창수가 지이에게 접근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다. 재벌가들의 그저 그런 여성편력이라 생각하는 것. 이지이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는 그녀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에 오히려 로망을 느낀다. 정략결혼을 시키려는 엄마와 달리 그녀는 소박한 사랑과 결혼을 꿈꾼다. 이것 역시 흔히 보던 재벌가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상류사회에 대한 계급적 시각을 드러내는 것일까. 윤하네 집안만을 보면 그런 것처럼 보인다. 윤하가 그토록 서민적인 소박한 삶에 대한 로망을 느끼는 건 권위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집안의 분위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기보다는 사업체에 가까운 그 곳은 결혼조차 기업 간의 계약처럼 다뤄지는 곳이다.

 

하지만 또 다른 상류사회의 일원인 창수는 이런 시각과는 또 다르다. 창수는 물론 일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친구인 준기에게조차 분명한 상사와 부하의 위치를 드러내지만, 자주 두 사람은 친구관계의 끈끈함을 드러낸다. 창수가 자신과 같은 상류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조금씩 지이 같은 서민여성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이 두 관계는 애매모호하다. 그것이 과연 진정한 우정인지, 그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의 감정인지 아직까지 모호한 것.

 

<상류사회>가 그리는 건 우리가 상류층에 대해 갖고 있는 밑그림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은 맞지만 청춘남녀의 사랑은 계층과 무관하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서로 다른 계층이 사랑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러한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을 그저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스파크들과 감정들이 우리의 통상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뛰어넘어 그려지는 건 <상류사회>가 가진 괜찮은 덕목이다.

 

최근 들어 가면코드가 하나의 트렌드처럼 등장하고 있다. 가면이 이렇게 트렌드가 된 건 일종의 편견을 없애주거나 편견을 벗어버리기 위함이다. 이 드라마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역시 그 가면을 벗기고 드러내는 상류사회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면이 있다.

 

편견의 가면을 벗으니 드라마는 상류사회를 소재로 다루었던 그 어떤 드라마들도 잘 보여주지 않던 새로운 관계들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윤하와 지이의 사랑 그 이상의 우정이 주는 감동 같은 것이다. 윤하의 실체를 모르는 지이는 자신이 마음에 두었던 준기가 윤하에게 관심을 보이자 선선히 친구에게 자신이 준기를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친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것. “유일한 친구면서 가족이야 넌.” 이 대사는 그래서 가족조차 기댈 곳이 되어주지 않는 윤하의 마음을 울린다.

 

사실 재벌가와의 사랑을 얘기하면서 쉽게 재단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욕망인지 도무지 헷갈리는 것이 실제일 것이다. <상류사회>가 어째 지금까지 봐왔던 재벌가 이야기들과 신데렐라 이야기의 변주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건 그 클리셰와 편견의 가면을 훌쩍 벗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민낯에서 발견되는 의외의 감동이나 관계 같은 것. 그것이 <상류사회>가 흥미로워지는 대목이다.

 

<풍문>, 상류사회의 전근대성, 그 시대착오의 쓴 웃음

 

이건 왜 사극을 보는 느낌일까. SBS <풍문으로 들었소>는 알다시피 지금 현재가 시대적 배경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딘지 사극을 닮았다. 한인상(이준)이 사는 집은 마치 조선시대의 거대한 권문세가를 연상시킨다. 한정호(유준상)와 최연희(유호정)는 이 권문세가의 주인들이고 그들의 비서들인 양재화(길해연)나 이선숙(서정연)은 사극으로 말하면 하인들 중에서도 집안의 대소사를 꾸리는 수노(首奴)에 가깝다. 물론 이 집에는 운전기사부터 유모까지 하인들(?)이 수두룩하다.

 

'풍문으로 들었소(사진출처:SBS)'

신분제가 사라진 지 백년이 넘게 흘렀지만 어찌된 일인지 <풍문으로 들었소>의 풍경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신분제의 틀에 멈춰져 있다. 물론 그 신분제는 태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태생으로 이미 빈부가 결정되는 자본주의의 시스템 안에서 태생적으로 결정되는 것과 그다지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과거의 신분제보다 더 나빠진 건 이들 상류사회의 일원들인 현대판 양반들에게는 거기에 걸맞는 소양이나 예의 또한 별로 기대할 게 없다는 점이다. 겉으로 보기엔 번지르르하게 보이고, 교양 있어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토록 속물이 없다. 이성을 강조하는 이 집안에서 최연희가 용하다는 점쟁이를 불러 부적을 붙이는 건 그 속물근성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장면이다. 체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은 뒤로는 돈이면 뭐든 다 해결해줄 것처럼 행동하지만 앞에서는 교양인인 척 하느라 속내를 숨기고 어색하게 웃기 바쁘다.

 

이런 집에 간판 집 딸 서봄(고아성)이 배가 남산만한 체 들어와 그 날 안방마님(?)의 침대에서 아기를 낳는 이야기는 그래서 대단히 흥미롭고 우스꽝스럽게 다가온다. 거기에는 <풍문으로 들었소>라는 작품이 가진 상류사회의 위선에 대한 신랄한 폭로가 들어있다. 아기를 낳은 서봄에게 흥분한 최연희가 교양 없이 쌍소리를 해대고 그러면 안 된다는 비서의 이야기를 듣고는 얼굴을 바꿔 교양인인 척 다시 찾아와 사과하는 모습은 그래서 섬뜩하면서도 우습다.

 

게다가 서봄으로부터 한인상을 떼어놓으려고 거의 감금에 가까운 일을 벌이는 한정호나, 거기서 탈출해 마치 도둑놈처럼 자기 집에 몰래 들어오는 한인상은 그 비정상적인 상황 때문에 웃음을 준다. 한인상과 서봄 본인들은 실로 절절한 비극의 주인공들이지만 그 상황은 희극이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집에 자기가 못 들어가고, 시댁에서 아이를 낳은 후 거의 갇혀 있으며 혼인신고를 마치 007 작전 치르듯 하는 이런 상황이 어디 정상적인가.

 

유배 갈 처지에 몰린 애 아빠가 몰래 집에 들어와 애 엄마에게 마치 감옥이나 되는 듯이 집안 구조를 가르쳐주며 그 감옥살이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장면은 또 얼마나 황당한가. 이런 장면들이 우습게 다가오는 건 그것이 조선시대에나 가능할 법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현재 상류사회의 전근대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 얼마나 기발한 착상이란 말인가.

 

중요한 건 이 드라마의 제목이 <풍문으로 들었소>라는 점이다. 이것은 이렇게 교양 있는(?) 상류사회의 집안에서 벌어져서는 도저히 안 되는 일들을 주인들이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코 그것이 감춰지기 어렵다는 걸 말해준다. 우선 그들 자신이 이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지만 그 많은 현대판 하인들의 시선과 입소문은 이 풍문들을 집 바깥으로 퍼져나가게 만들 것이다.

 

우리네 서민들이 가끔씩 보게 되는 상류사회에서 벌어진다는 전근대적인 일들(이를 테면 왕처럼 살아간다는 재벌가 이야기 같은)의 부조리가 풍문으로 떠돌 듯이 이 드라마는 그 풍문의 실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점은 이 사극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전근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가 현실에 던지는 도발일 것이다.

 

 

왜 비행기에서 유독 갑질 논란이 많을까

 

바비킴이 비행기 안에서 음주난동을 부리고 심지어 성희롱까지 했다? 이렇게 처음 나온 뉴스보도는 또 다른 갑질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유독 항공기에서 갑질사건들이 쏟아져 나온 탓이기도 하다. ‘라면 상무이야기도, 팝핀현준이 항공기 협찬 관련해 불만을 토로하면서 나온 논란도, 무엇보다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땅콩 하나 때문에 항공기를 돌려 국민적인 공분을 일으킨 사건도 모두 비행기의 좌석에서 벌어진 갑질 논란들이다.

 

'비정상회담(사진출처:JTBC)'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비킴의 이번 사건은 바비킴보다는 오히려 대한항공측이 더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이 됐다. 드라마 <피노키오>가 과도한 살빼기를 시도하다 사망에 이른 한 여인의 에피소드(과도한 다이어트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딸에게 이식을 하기 위한 모성애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드러난 사건은 그 내막을 모르면 엉뚱한 이슈를 양산하기 마련이다. 바비킴 사건이 딱 그렇다.

 

문제는 그간 자신이 쌓아놓은 마일리지로 정당하게 요구될 수 있는 비즈니스석 업그레이드가 어떤 이유에선지 직원의 실수로 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됐다. 게다가 비즈니스석에는 여유 좌석이 있었고 심지어 다른 손님은 그 자리로 옮겨 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바비킴만 거부된 사안은 그를 흥분하게 했던 것.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런 그에게 계속해서 와인을 갖다 줘 만취상태에 이르도록 방치했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얼마나 음주 상태에서도 참을 수 있는가 하는 한 사람의 인내력 테스트를 제대로 한 셈이다.

 

물론 그 상황에서 음주난동을 부리고 성희롱에 가까운 이야기를 한 바비킴은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분명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게 어떤 상황이든 비행기 안에서의 난동은 심각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나오게 어떤 원인제공을 한 건 대한항공측이다. 바비킴 같은 연예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런 음주난동을 의도적으로 부릴 까닭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갑질의 이야기는 거꾸로 뒤집어진다. 즉 요즘 툭하면 터지는 손님은 왕이란 명목으로 벌어지는 갑질이 아니라, 항공사가 정당한 요구조차 제 맘대로 들어주지 않는 갑질로 역전되는 것. 물론 조현아 전 부사장으로 인해 가뜩이나 대한항공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는 대중들의 심리가 작용한 탓도 있지만 거기에는 서민들이 비행기를 타게 될 때마다 느끼는 그 놈의 클래스가 주는 상대적 박탈감도 들어가 있다.

 

비행기가 어느 때인가부터 갑을 정서를 떠올리게 하는 곳으로 인식되게 된 것은 그것이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의해 클래스가 나뉘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내면 다리도 쭉 펼 수 있고 심지어 비행 중 라면도 먹을 수 있는 기내서비스의 퍼스트 클래스에 탈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앉아 있다기보다는 거의 짐짝처럼 쳐박혀 갈 수밖에 없는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야 한다. 이것은 <설국열차>의 머리 칸과 꼬리 칸의 현실 그대로다.

 

그러니 우리 같은 서민들은 마치 탕수육 하나 먹으려고 짜장면 쿠폰을 모으듯이 마일리지를 모은다. 하지만 그 마일리지라는 것이 100 프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성수기는 아예 제외되고 성수기가 아니라도 빈 자리가 있어야 가능한 게 마일리지다. 그래서 자리를 업그레이드시키는데 주로 쓰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좌절될 때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물론 바비킴이 이런 우리네 서민들의 상황과 똑같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비행기에서의 갑질 논란에서부터 이번 바비킴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정서에는 분명 비행기 안에서 클래스로 나뉘어지는 그 갑을정서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특이하게도 바비킴의 경우 그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항공사에 대한 비난여론이 커진 것은 그 갑질이 고객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항공사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바비킴이 잘한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벌어지게 만든 항공사는 더더욱 잘한 게 없다. 도대체 클래스가 뭐고 돈이 뭐라고 텅텅 빈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이 남아 있어도 돈 낸 만큼 좁고 불편하게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 가본 사람이라면 이번 사안의 불편한 정서가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수단에까지 자본의 논리로 붙여지는 클래스. 현대판 계급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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