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이 끔찍한 건 그것이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 <맨홀>의 배경은 강북의 한 마을이다. 어둑한 밤길 마치 공무원들처럼 복지부동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공권력 속에서 그나마 행인들을 지켜주는 것이라면 가로등과 CCTV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맨홀>의 연쇄실종사건이 벌어지는 강북의 그 마을에는 그 가로등과 CCTV를 공권력이 아니라 살인자가 쥐고 있다.

 

'맨홀(사진출처:화인웍스)'

가로등을 마음대로 꺼버리고 그 어둠 속에서 살인자는 일종의 인간사냥을 벌인다. CCTV? 그것은 범죄자들을 찍는 사회적 안전장치가 아니라 사냥감이 어디로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범죄자의 천리안이다. <맨홀>에서 본다는 것은 하나의 특권적인 위치를 만들어낸다. 살인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공권력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한 치 알 수 없는 어두운 지하의 그 미로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건 우리에게 끔찍한 경험을 선사한다.

 

<맨홀>은 스릴러 장르지만 그래서 공포에 가깝다.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단지 자극적인 장면들 때문에만 생겨나는 건 아니다. 이 맨홀로 상징되는 어두운 지하세계가 현실의 무언가를 자꾸만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밑에서는 끌려 들어간 사람들이 끔찍한 일을 겪는다는 건 우리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바라보게 만든다.

 

<맨홀>의 피해자들을 보면(당연히 그 배경이 강북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서민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택시기사가 아버지인 딸이 있고,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가진 동생과 부모를 여의고 그 동생을 돌보는 착한 언니가 있다. 만일 피해자가 기득권층이었다면 이 영화를 통해 그나마 어떤 사회적 분노를 발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피해자들을 그저 선량한 서민들로 보여준다. 심지어 가해자마저 폭력의 피해자로 그려진다.

 

즉 이 <맨홀>이라는 세계에는 지워져 있는 세계가 있다. 그것은 이러한 끔찍한 사건들이 한쪽에서는 벌어지고 있는 데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기득권층의 세계다. <맨홀>은 그래서 피해자들끼리 벌이는 약육강식 같은 느낌을 보여준다. 강북이라는 맨홀 위의 공간과 그 맨홀 밑의 공간은 또 그 안에서도 어떤 위계를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맨홀 위와 아래가 치열하게 싸우는 이야기를 다룬다. ? 살아남기 위해서.

 

<맨홀>은 그래서 영화적인 통쾌함을 선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네 현실이 그러하듯이 없는 자들이 없는 자들끼리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풍경을 거칠게 담아낸다. 영화는 어두울 수밖에 없고, 때로는 그 공포의 시간이 차마 쳐다보기 힘든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나마 그 안에서 인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서로간의 끈끈한 가족애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조차 처절한 현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맨홀>이라는 영화 속에서 정유미, 정경호, 김새론은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난다. 사실 이 영화를 끝까지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건 이들의 호연 덕분이다. 정유미는 단단한 연기로 영화에 추진력을 만들어낸다. 동생 역할을 하는 김새론은 아마도 괴물을 다루는 영화 속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만들어낸 배우가 아닐까 싶다. 정경호는 이번 작품을 통해 독특한 비주얼의 살인마 이미지를 각인시켜주었다. 이 세 명이 만들어내는 연기의 합은 이 지하세계에서의 쫓고 쫓기는 과정을 바라보는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마지막 맨홀 바깥으로 카메라가 나왔을 때 우리는 그 세상이 낯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토록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는 지하에 비해 너무나 평온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마치 맨홀 속 같은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현실 속에 살아가면서도 문을 꼭꼭 닫아걸고 아무런 일도 없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삶.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 그 삶의 무시무시함을 이 영화는 맨홀이라는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얼음들이 떠올리는 세월호 참사의 안타까운 아이들

 

아이들은 착하게도 끝까지 어른들의 통제에 따랐다. 하지만 그 어른들은 심장 따위는 없는 얼음들같았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을 희생시켰다는 죄책감과 부채의식 때문인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켜내지 못한 아이들의 모습을 아프게도 떠올리게 만든다.

 

'악동뮤지션(사진출처:YG엔터테인먼트)'

<표적> 같은 영화를 봐도 먼저 비리로 얼룩진 무능한 공권력이 떠오르고, <엔젤아이즈> 같은 드라마를 보며 남녀 주인공의 멜로에 빠져들다가도 119소방대원들이 마주하는 긴급 재난과 응급 상황들에 덜컥 마음 한 구석이 내려앉는다.

 

<쓰리데이즈> 같은 스릴러 장르 드라마에서도 먼저 보이는 건 책임지는대통령의 리더십이다. <심장이 뛴다>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보여준 모세의 기적에서는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유독 안타까웠던 골든타임이 떠오른다. 지금 이 땅의 어른들의 마음이 모두 이렇지 않을까. 일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세월호와 거기서 희생된 아이들에 멈춰 있다.

 

이런 와중에 맞는 어린이날이니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유독 간절할 수밖에 없다. 무심코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악동뮤지션의 얼음들이라는 노래가 마음 한 구석을 후벼 파는 건 그래서일 게다. 물론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발표된 이 곡을 세월호 참사와 관계 지어 이야기한다는 건 과도한 해석일 수 있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가 우연히 벌어진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토록 많은 사건 사고들 속에서도 여전히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변화하지도 않았던 어른들의 예고된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동뮤지션이 어른들을 얼음들에 빗대 왜 그렇게 차가울까라고 질문하는 그 속에는 이미 변하지 않던 어른들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셈이다.

 

아이들조차 따뜻한 생명으로 보기보다는 차가운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선은 세월호가 침몰하는 과정에서도 저 혼자 살아남겠다고 탈출한 선장과 일등항해사 같은 얼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저 학교에서도 오로지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식의 입시지옥 속에 아이들을 밀어 넣고 있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얼음들이 만들어낸 경쟁체제의 시스템 속에서 늘 관리대상이었지 따뜻한 생명의 존재들이 아니었다.

 

얼음들이 녹아지면 조금 더 따뜻한 노래가 나올 텐데. 얼음들은 왜 그렇게 차가울까. 차가울까요.’ 악동뮤지션이 아이의 순수한 목소리로 얼음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심지어 준엄하게까지 다가온다. 배가 침몰하는 그 순간까지 천진함을 잃지 않았던 아이들이 아빠와 엄마 그리고 선생님을 걱정하던 그 목소리는 더 쟁쟁하게 귓전에 울린다. 아이들은 그 때조차도 끝까지 어른들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이날이다. 아이들을 위한 온전한 세상이어야 할 날. 그러나 얼음들의 중대한 과오를 눈앞에서 목도한 지금은 우연히 듣는 노래 한 자락마저 어른들을 비통하게 만든다. 어른들이 서둘러 도망치는 순간 한 아이는 두려워하는 친구를 위해 구명조끼를 벗어주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전해준 그 인간적인 따뜻함이 제발 얼음들을 녹여주기를. 유독 슬픈 어린이날이다.

<표적>, 공권력에 맞서는 히어로는 어떻게 가능한가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거두절미하고 총에 맞아 피 흘리며 쫓기는 여훈(류승룡)으로부터 시작되는 <표적>의 장르적 방점은 물론 액션에 찍혀 있다. 강렬한 인상만으로도 일단 기본 먹고 들어가는 류승룡이라는 배우는 이 영화를 위해 특공무술 특훈을 받아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몸의 액션을 보여준다. 총에 맞서 맨 몸으로 부딪치는 류승룡표 액션은 화려함보다는 묵직함이 어울리고, 특유의 감정 선이 덧붙여져 타격감에 통쾌함을 더해준다.

 

사진출처: 영화 <표적>

하지만 온전한 액션 영화 한 편을 보는 와중에도 흥미로운 설정들이 눈에 띈다. 그것은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역전이다. 거두절미하고 시작하는 추격전 속에서 쫓기는 자들은 자신이 왜 쫓겨야 하는 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희생양이 되어버린 쫓기는 자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깨닫게 되면서 여훈의 분노가 터져 나온다. 류승룡의 액션이 폭발하게 되는 건 그 분노가 대중들의 정서를 끌어안기 때문이다.

 

왜 무고한 이가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가. 조폭과 비리경찰은 액션 범죄물에 단골로 등장하는 악역들. 경찰이 비리경찰로 돌변하고 공권력이 주인공을 위협하는 요소로 돌변하는 순간, 류승룡의 액션은 틀에 박힌 추격전 양상을 벗어난다. 이제 이 안티 히어로는 공권력과 맞서 싸우는 인물로 돌변한다.

 

돈만 된다면 제 어머니도 죽일 존재들이라는 이 비리경찰들은 이 영화만의 특별한 장면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은 범죄물에서 흔히 생각하는 경찰서라는 안전을 상징하는 듯한 공간이 오히려 살육과 공포의 공간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여훈이 경찰서 하나를 완전히 때려 부수는 장면은 그래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추격자> 같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무능한 공권력은 이제 어느새 비리로 점철된 폭력적인 공권력으로 그려지고 있다. 때때로 누가 범죄자고 누가 경찰인지 아리송해지는 코미디 같은 설정이 영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건 지금 서민들이 갖고 있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보여준다. <표적>은 그 서민들을 지켜야할 공권력이 오히려 그들을 표적 삼아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상황을 그려낸다. 쫓기던 류승룡의 반격이 서민들의 분노를 덧붙여 통쾌함을 만드는 이유다.

 

류승룡과 더불어 김성령, 유준상의 기존 이미지를 깨는 반전 연기는 영화의 몰입감을 높여주는 가장 큰 요소다. <7번 방의 선물>에서 당하기만 하던 바보 연기를 했던 류승룡은 이 영화에서 분노의 히어로로 돌변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줄곧 고수해왔던 김성령은 이 영화를 통해 거친 액션의 주인공으로 변신한다. 착하고 선한 이미지의 유준상? 그의 변신은 그 이미지 때문에 더욱 큰 반전효과를 만들어낸다.

 

<표적>은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한 추격 액션 정도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반에 일어나는 반전 이후 마지막까지 흘러가는 류승룡의 액션은 기막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영화가 건드리는 현실에 대한 대중정서 덕분이다. 공권력과 맞서는 히어로라니. 그 설정에는 영화 속에서나마 답답한 현실을 풀어내주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 특히 요즘 같은 시절에.

<추격자>에서 <괴물>까지 인재를 꼬집는 영화들

 

그랬다면 어땠을까. 배에 화물을 과적하지 않았다면, 화물들과 자동차를 좀 더 단단히 고정했다면, 배의 무게를 잡아주는 밸러스트 탱크에 제대로 물을 채워 넣었다면, 배가 기울었을 때 제주가 아닌 진도에 바로 구조요청을 했다면, 승객들에게 서둘러 대피 공지를 냈다면, 선장이 선원들만 챙기지 않고 끝까지 남아 승객들을 먼저 챙겼다면 어땠을까.

 

'사진출처: 영화 <괴물>'

또 사고가 난 후에도 곧바로 정부가 자기 자식을 잃은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했다면, 발표에 우왕좌왕하지 않았다면, 초동대처에 재빨랐다면, 애초부터 바지선과 오징어잡이배를 동원하는 생각을 실종자 가족들이 아닌 정부가 먼저 해냈다면, 또 이제야 투입되는 각종 첨단 장비들이 좀 더 일찍 투입되었다면 어땠을까.

 

세월호 참사를 되짚어보면 어째서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일련의 선택들을 했는지가 의아할 정도다. 무수히 많은 선택의 기회들이 있었다. 거기서 제대로 된 선택들을 했다면 조금은 나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재난이 천재가 아닌 인재의 축적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왜 우리네 참사는 늘 인재일까. 영화가 현실일 수는 없지만 현실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를 그대로 말해주는 건 사실이다.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마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건 공권력의 무능이다. 결국 경찰에 잡히게 된 연쇄살인마가 풀려나게 되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게 되는 상황은 대중들이 바라보는 현실인식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공권력은 믿을 수 없다. 결국 믿을 건 나 자신 뿐이다.

 

<괴물>에서 문제가 되는 건 한강에 출몰한 괴물 그 자체가 아니다. 괴물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가 더 큰 문제다. 결국 정부는 시민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이들을 격리하고 심지어 조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를 양산해낸다. <괴물>이 말하는 진짜 괴물은 정부의 공권력인 셈이다.

 

<변호인>에서 멀쩡한 청년을 파괴하는 건 역시 잘못된 공권력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다고 용공세력으로 몰려 고문당하는 현실. <변호인>의 분노는 국가는 국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공권력의 오만에서 비롯된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카리브해에 있는 외딴 섬에서 통역 서비스조차 없이 수감생활을 하게 된 건 당시 재외공관의 무능 때문이다. 국민 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아낌없는 지원을 해야 할 당시 프랑스 한국대사관은 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인재 중의 인재다.

 

이것은 그저 영화의 이야기에만 머무는 건 아니다. 때때로 벌어지는 홍수나 폭설로 인한 재난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가 늘 듣는 단어가 있다. ‘인재라는 것이다. 사고는 물론 미리 대비하고 예방해야 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터졌을 때 그 대응체계는 실로 중요하다. 그 체계에 따라서 천재보다 더 큰 인재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만 터지면 정부의 무능을 발견하게 되는 끝없는 인재의 연속. 언제쯤 이 단어를 더 이상 보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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