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비행기에서 유독 갑질 논란이 많을까

 

바비킴이 비행기 안에서 음주난동을 부리고 심지어 성희롱까지 했다? 이렇게 처음 나온 뉴스보도는 또 다른 갑질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유독 항공기에서 갑질사건들이 쏟아져 나온 탓이기도 하다. ‘라면 상무이야기도, 팝핀현준이 항공기 협찬 관련해 불만을 토로하면서 나온 논란도, 무엇보다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땅콩 하나 때문에 항공기를 돌려 국민적인 공분을 일으킨 사건도 모두 비행기의 좌석에서 벌어진 갑질 논란들이다.

 

'비정상회담(사진출처:JTBC)'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비킴의 이번 사건은 바비킴보다는 오히려 대한항공측이 더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이 됐다. 드라마 <피노키오>가 과도한 살빼기를 시도하다 사망에 이른 한 여인의 에피소드(과도한 다이어트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딸에게 이식을 하기 위한 모성애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드러난 사건은 그 내막을 모르면 엉뚱한 이슈를 양산하기 마련이다. 바비킴 사건이 딱 그렇다.

 

문제는 그간 자신이 쌓아놓은 마일리지로 정당하게 요구될 수 있는 비즈니스석 업그레이드가 어떤 이유에선지 직원의 실수로 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됐다. 게다가 비즈니스석에는 여유 좌석이 있었고 심지어 다른 손님은 그 자리로 옮겨 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바비킴만 거부된 사안은 그를 흥분하게 했던 것.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런 그에게 계속해서 와인을 갖다 줘 만취상태에 이르도록 방치했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얼마나 음주 상태에서도 참을 수 있는가 하는 한 사람의 인내력 테스트를 제대로 한 셈이다.

 

물론 그 상황에서 음주난동을 부리고 성희롱에 가까운 이야기를 한 바비킴은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분명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게 어떤 상황이든 비행기 안에서의 난동은 심각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나오게 어떤 원인제공을 한 건 대한항공측이다. 바비킴 같은 연예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런 음주난동을 의도적으로 부릴 까닭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갑질의 이야기는 거꾸로 뒤집어진다. 즉 요즘 툭하면 터지는 손님은 왕이란 명목으로 벌어지는 갑질이 아니라, 항공사가 정당한 요구조차 제 맘대로 들어주지 않는 갑질로 역전되는 것. 물론 조현아 전 부사장으로 인해 가뜩이나 대한항공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는 대중들의 심리가 작용한 탓도 있지만 거기에는 서민들이 비행기를 타게 될 때마다 느끼는 그 놈의 클래스가 주는 상대적 박탈감도 들어가 있다.

 

비행기가 어느 때인가부터 갑을 정서를 떠올리게 하는 곳으로 인식되게 된 것은 그것이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의해 클래스가 나뉘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내면 다리도 쭉 펼 수 있고 심지어 비행 중 라면도 먹을 수 있는 기내서비스의 퍼스트 클래스에 탈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앉아 있다기보다는 거의 짐짝처럼 쳐박혀 갈 수밖에 없는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야 한다. 이것은 <설국열차>의 머리 칸과 꼬리 칸의 현실 그대로다.

 

그러니 우리 같은 서민들은 마치 탕수육 하나 먹으려고 짜장면 쿠폰을 모으듯이 마일리지를 모은다. 하지만 그 마일리지라는 것이 100 프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성수기는 아예 제외되고 성수기가 아니라도 빈 자리가 있어야 가능한 게 마일리지다. 그래서 자리를 업그레이드시키는데 주로 쓰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좌절될 때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물론 바비킴이 이런 우리네 서민들의 상황과 똑같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비행기에서의 갑질 논란에서부터 이번 바비킴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정서에는 분명 비행기 안에서 클래스로 나뉘어지는 그 갑을정서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특이하게도 바비킴의 경우 그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항공사에 대한 비난여론이 커진 것은 그 갑질이 고객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항공사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바비킴이 잘한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벌어지게 만든 항공사는 더더욱 잘한 게 없다. 도대체 클래스가 뭐고 돈이 뭐라고 텅텅 빈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이 남아 있어도 돈 낸 만큼 좁고 불편하게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 가본 사람이라면 이번 사안의 불편한 정서가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수단에까지 자본의 논리로 붙여지는 클래스. 현대판 계급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왕가네 식구들>, 비정상 캐릭터들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

 

드라마를 보면서도 공분이 생긴다? <왕가네 식구들>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다. 문영남 작가의 드라마가 늘 그러하듯이 <왕가네 식구들>에도 여지없이 찌질함의 극치와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울화통 캐릭터가 등장한다. 딸 차별하는 엄마 앙금(김해숙)과 정신병자에 가까운 사치와 과시욕으로 살아가는 첫째 딸 수박(오현경)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왕가네 식구들(사진출처:KBS)

엄마와 딸이 세트로 거의 정신병에 가까운 막장 짓을 해대니 다른 가족이 정상적일 수가 없다. 이앙금의 차별로 둘째 딸 호박은 늘 구박당하는 자신에 익숙할 만큼 피해의식에 절어 있다. 먹을 거 안 사먹고 지독하게 돈을 모아 집을 샀지만 엄마와 언니는 축하해주기는커녕 비난만 한 가득이다. 마침 수박네가 사업에 망해 힘겨워하는데 혼자만 살 궁리한다는 것. 이름이 벌써 수박과 호박이니 이건 아예 작가가 대놓고 차별하겠다 선언한 캐릭터들이나 마찬가지다. 호박에 줄 간다고 수박이 안 된다는 얘기.

 

수박의 남편 민중(조성하)은 사업에 실패해 택배 사업에 뛰어들어 돈 몇 만 원 벌려고 달동네를 허리가 부러지도록 뛰어다니지만, 아내 수박은 이런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채를 빌려 3백만 원이나 하는 유모차를 사고 초라한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모텔에서 지낸다. 그러니 하고 싶은 것 무엇이든 하라고 장인 왕봉(장용)이 말하자 민중은 운동장에 드러누워 오열을 터트릴 수밖에 없다. 수박 때문에 남편도 정신병자가 되기 일보직전이다.

 

이런 민중에게 장모라는 사람은 보듬어주기는커녕 차라리 헤어지라는 막말을 해댄다. 이렇게 제멋대로인 여자를 아내로 둔 왕봉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게다가 그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감선생님이다.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지만 이런 가족을 보며 막막한 생각밖에 더 들겠는가. 그나마 이 가족의 버팀목으로 서있는 자신이기 때문에 정작 자신의 고민은 아무에게도 토로하지 못한다. 그 역시 언제 쓰러질 지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인물이기는 마찬가지.

 

한편 허세만 가득한 호박의 남편 허세달(오만석)은 장모의 차별대우를 똑같이 받아오면서 아내가 집을 사자 기고만장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진 않았지만 이 캐릭터는 장차 조강지처 호박을 놔두고 바람이 날 모양이다. 호텔 상속녀 은미란(김윤경)이 대놓고 들이대기 때문인데, 왜 그녀가 허세달에게 그러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결국 호박의 뒤통수를 치는 불륜 행각으로 대국민 울화통을 터트리려는 캐릭터라고 밖에.

 

<왕가네 식구들>은 정상이 아니다. 엄마가 정상이 아니니 자식들이 정상일 리 없고, 그들과 가족으로 얽힌 인물들이 제 아무리 정상적으로 살아보려 해도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온 가족이 비정상적인 상태로 빠져들게 되는 것. 실로 한 가족에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가진 이가 있을 때 그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 그 관계가 타인까지 비정상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청자는 어떨까. 시청자들에게 일일드라마가 주말드라마 같은 가족드라마들은 일종의 유사가족 관계를 형성한다. 집에서 온가족이 둘러 앉아 이들 가족드라마를 보면서 때론 공감하고 때론 혀를 차는 건 그 때문이다. 물론 갈등 없는 가족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것도 어느 정도다. 정신병에 가까운 인물들이 끊임없이 울화통을 터트리는 행동들을 보여주는 것이 드라마 속 캐릭터들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에게도 똑같이 스트레스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정신병적인 양태를 극단으로 보여주는 드라마는 그걸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주말 저녁, 온 가족이 모여 있는 시간에 왜 KBS 같은 공영방송이 이런 비정상적인 가족의 행태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물론 훈훈한 가족이야기만을 그리라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대중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가족의 문제도 표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드라마는 차츰 진행되면서 어떤 갈등의 해결이나 화합의 분위기를 만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드라마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점에서 결과가 정상적이라고 해도 과정 대부분이 비정상적이라면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

 

물론 백분 양보해서 이런 가족들도 분명 실제로 있을 것이다(아니 어쩌면 많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기획의도에 연어족, 갱거루족, 처월드, 편애, 학벌지상주의 등을 예로 들며 이것이 2013년 현실적인 가족의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게 진짜 현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획의도에 적혀 있는 것처럼 이 드라마가 ‘현실에 지치고 피곤한 우리들의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줄 통쾌한 웃음과 진한 감동’을 주고 있는 지는 미지수다. 혹 이것은 명분일 뿐 시청률이 진짜 목표는 아닌지. 살기도 힘겨워 죽겠는데 공영방송의 드라마마저 심지어 공분의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4대강 살린다더니 흐르지 않는 강이 강인가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일까. ‘4대강 살리기’ 사업이 검토되던 단계부터 재앙을 예고하는 목소리들이 많았지만 그 소리들은 거대한 포크레인 소리에 덮여버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보를 만들었다고 해서 물이 썩느냐. 물이 썩도록 보를 만들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라며 TV에 나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지만 <SBS스페셜>이 취재한 4대강의 현실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SBS스페셜(사진출처:SBS)'

물론 전부터 녹조 현상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낙동강 곳곳의 녹조는 더 오래 더 넓게 퍼져 있었다. ‘녹조라떼’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 자연재해를 대비하고 수질을 개선하며 기후환경 변화에 대비한다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시작된 사업이지만, 상식적으로 흐르는 물을 막고 모래를 퍼내 거대한 물그릇을 만드는 것이 이런 명분을 현실화해줄 거라 믿기는 어려운 일이다. 강은 흘러야 강이고 고이면 썩게 된다는 것은 어린 아이도 알 일이 아닌가.

 

이 녹조의 주범은 남조류로 치명적인 독성을 지녔지만 아직까지 해독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1996년 2월 브라질에서는 한 병원에서 이 남조류 때문에 무려 50여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많은 조사와 자료에 의해 4대강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지만 정작 정종환 전 국토해양부 장관은 여기에 대해 “썩고 있다 라는 거는 근거를 가지고 얘기해야지 우리가 지금 확인한 바로는 전혀, 수질이 좋아지고 있는데”라며 이를 부인했다.

 

<SBS스페셜>이 입수한 금강의 4대강 사업에 대한 수질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1년 중 다섯 달이 암모니아 기준치를 넘어섰고 발암물질 및 청색증 발생 우려가 있어 상수원수로 사용이 곤란하다고 한다. 실제로 금강은 4대강 사업 이후 세 차례나 물고기 떼죽음 사태가 벌어져 문제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문제는 강에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강의 흐름을 막고 물의 양이 많아지자 인근 농지에도 그 영향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 수박재배로 유명한 경북 고령에서는 물이 농지로 차올라 수박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농민 곽상수씨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인디언들은 조그마한 변화가 있는 의사결정을 할 때는 애들한테 물어본다 하잖아요. 일은 우리가 추진하더라도 결국 앞으로 감내해야할 당사자들은 애들이잖아요.”

 

상식적으로 강물 수위를 높여 홍수 조절을 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고, 수질을 깨끗하게 하겠다면서 강물의 흐름을 막는다는 게 상식적인가. 문제는 이렇게 비상식적인 대규모 사업이(수십 년이 걸려도 모자랄 판이다) 거의 3년이 채 안된 기간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법은 무시되었다. 사전환경성 검토, 환경영향평가 심의, 문화재지표조사와 심의, 국책사업 예비타당성 검토, 하천법에 의거한 중앙하천관리위원회 심의 등이 거의 하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소위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정부의 시녀로 전락했고 그 와중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려는 이들은 조직에서 배제되거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34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고 40조원의 생산유발효과를 낼 수 있다 공언하던 단군 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은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의 강을 망가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 불필요한 토목공사들은 결국 4대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토목사업 그 자체를 위한 것일 뿐이었다. 마치 연말만 되면 예산을 쓰기 위해 멀쩡한 아스팔트를 벗겨내고 다시 씌우는 것처럼.

 

여기 들어간 돈이 무려 22조2천억 원이다. 4개의 해군기동단을 만들 수 있고, 나로호 44개를 발사시킬 수 있으며, 평창 동계올림픽을 두 번 치를 수 있는 돈이다. 또 비정규직 전부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고, 4년간 모든 3-5세 유아의 무상교육도 가능하다. 반값등록금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돈이다. 김정욱 서울대환경공학과 명예교수는 4대강 사업을 한 마디로 “총체적 사기”라고 정의했다. 이상돈 중앙대 법학과 명예교수는 4대강 사업이 “국토환경에 대한 반역”으로 “내란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낙동강 인근의 아이들이 그린 낙동강의 그림은 충격적이었다. 유려히 굽이굽이 흐르던 강은 사라지고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구획된 강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때론 에둘러 돌아가는 그 자연의 아름다운 흐름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고 그만한 역사와 삶의 흔적들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 땅을 살아온 우리네 국민들과 동격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그 강에 기대어 살아온 것이 아닌가. 결국 포크 레인이 남긴 깊은 상처는 강만이 아니라 국민들을 향해 있었던 것.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을 파괴시키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대중들이 공분하는 이유일 게다.

<황금의 제국>, 이 지옥에서 살고 싶은가

 

또 다른 <추적자>를 기대했다면 실망했을 수 있다. <황금의 제국>에는 <추적자>에서 보여졌던 서민 대 재벌의 대결구도가 본격적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추적자>의 백홍석(손현주)과 <황금의 제국>의 장태주(고수)는 같은 서민의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그 변해가는 모습이 다르다. 백홍석이 가진 자들의 편에 선 잘못된 사법정의와 맞선다면, 장태주는 “당신 아버지 최동성 회장은 그렇게 살아도 되는데 난 왜 안돼죠?”하고 되묻는 인물이다.

 

'황금의 제국(사진출처:SBS)

장태주가 살아보겠다는 그 최동성(박근형) 회장은 “수십 번의 고소를 당했고 몇 번이나 검찰 조사를 받았고 시멘트 공장으로 시작해서 불량 시멘트로 큰 돈을 벌고 멀쩡한 회사를 자금압박해서 인수하고 마흔 두 군데의 계열사를 만든” 인물이다. 장태주가 최동성 회장처럼 살겠다 마음먹는 근거는 아버지가 남긴 말 때문이다. “아버지가 한 번도 못 이겨본 이 세상에서 태주 니는 꼭 한번 이겨봐라.”

 

즉 <황금의 제국>에 가난한 자의 선함과 부자인 자의 악함 같은 단순히 빈부 차이로 나눠지는 선악대립구도 따위는 없다. 다만 황금의 법칙으로 굴러가는 돈이라는 감정 없는 괴물이 있을 뿐, 선함으로 호소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없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이겨야 한다. 착하게 살았다며 자기 위안에 빠지는 일은 이 ‘황금의 제국’에서는 패자의 넋두리가 될 뿐이다.

 

<황금의 제국>에는 이처럼 정의의 수호자나 서민의 대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추적자>가 정의를 수호하려는 서민의 주인공을 내세워 만들어낸 ‘공분’이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카타르시스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황금의 제국>은 이러한 단순 해소의 카타르시스보다 더 중요한 대결의식을 보여준다.

 

재벌가 하나가 무너진다고 해서 이 ‘황금의 제국’이 사람 냄새 나는 곳이 될 것인가. 시스템이 건재한 이상 또 다른 제국의 지배자가 그 자리에 생겨날 것이다. <황금의 제국>이 겨냥하는 것은 그래서 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내는 그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은 제목이 말해주듯 ‘돈’의 흐름이 지배한다.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의 악역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게 이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악역은 ‘돈’이 만들어내는 자본의 시스템 그 자체이니까.

 

최동성 회장의 집안은 ‘황금의 제국’의 축소판이다. 가족이 모여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말 한 마디로 회사의 사장이 바뀌고 수만 명 노동자들의 운명이 바뀌며 수백 억 원의 손실을 입혔어도 용서가 되는 곳. 최동성 회장의 병환이 깊어지면서 형제와 자식들 간에 회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이전투구는 이 곳이 과연 한 가족의 보금자리가 맞는가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동생이 형에게 총을 겨누며 위협하고, 그 형은 동생의 자식을 교도소로 보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들며 그 동생의 아들은 큰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가는 곳. 또 지주회사 쟁탈전을 벌이면서 형제들 간에 자기 지분과 회사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곳. 그 곳이 바로 황금의 제국의 축소판인 최동성 회장의 집안 풍경이다. 혈육이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이곳을 최동성 회장은 어떻게 느끼겠는가.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태주는 그 최동성 회장처럼 살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는 성진그룹의 새로운 회장이 된 최서윤(이요원)에게 ‘해님 달님’ 동화를 얘기하면서 자신은 동아줄을 잡기보다는 쫓아오는 호랑이와 싸우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야망’ 같은 것이겠지만 그 야망이 불러올 비극적인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가 꿈꾸는 최동성 회장의 삶은 결국 그 지옥 같은 황금의 제국 속에서 초라한 죽음으로 끝을 맺을테니 말이다.

 

본래 돈은 모두를 평등하게 구분 짓는 힘을 가졌다. 즉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 가진 만큼으로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태생으로 신분이 결정되던 시대를 무너뜨리고 근대사회를 만들어내는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돈이 상징하는 평등한 사회는 이뤄졌는가.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그러자 없는 자는 더 적게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렇다면 많이 가진 자는 진정 ‘황금의 제국’의 제왕이 되었을까. 이것은 환상일 수밖에 없다. ‘황금의 제국’의 주인은 오로지 하나, ‘황금’일뿐이니까. <황금의 제국>이 최동성 회장의 몰락과 장태주의 끝없이 타오르는 야망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은 그래서 <추적자>의 다소 낭만적인 카타르시스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황금의 제국>이 <추적자>보다 더 도발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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