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돌풍 ‘겟아웃’, 무엇이 국내 관객들의 발길을 이끌었나

사실 영화 <겟아웃>이 우리네 대중들에게 알려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 영화가 있다더라는 정도였지만 이렇다 할 홍보가 진행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약 50억 정도가 들어간 해외영화이니 화려한 할리우드 영화와 비교해보면 저예산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도 공포 스릴러를 장르적 특징으로 갖고 있다는 점은 여러모로 국내 흥행에는 이점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사진출처:영화 <겟 아웃>

하지만 막상 영화가 국내에 개봉하자 <겟아웃>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개봉 이틀만에 <불한당>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고 “놀랍다”, “소름끼친다”는 반응들이 이어지면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여기에 이미 북미 지역에서 놀라운 반응을 얻고 있다는 소식과 비평 포털사이트인 로튼토마토 평점이 무려 99%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이 입소문에 기름을 끼얹었다. 무언가 대단한 작품이라는 것, 그리고 충격적인 전개의 영화라는 것이 국내 관객들이 <겟아웃>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게다가 ‘미국판 <곡성>’이라는 표현은 국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무언가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그럼에도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만들어낸 <곡성>과 비교되면서, <겟아웃>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졌다. <곡성>이 일종의 호기심과 궁금증이라는 미끼를 던져 관객들을 확 끌어당긴 것처럼 <겟아웃> 역시 막연히 그런 놀라움과 충격이 선사하는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감이 생긴 것. 

그렇다면 실제 <겟아웃>은 어떨까. <곡성>과 비교될만한 에너지를 가진 영화일까. 물론 <겟아웃>이 다루는 이야기의 공포는 미국의 인종차별주의를 연원으로 하고 있어 <곡성>이 갖고 있는 무속신앙적인 세계의 공포와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외지인에 대해 느끼는 공포감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은 <곡성>과 <겟아웃>이 충분히 비교될만한 지점이다. 

워낙 충격적인 후반부의 전개는 사실상 스포일러가 영화 자체를 망가뜨릴 수 있어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겟아웃>의 이야기 전개 속에 등장하는 시각이 주는 공포감이나 그를 통해 미국 사회에 여전히 깔려 있는 인종차별적 시선들이 그 충격적인 후반부의 장면들 속에 하나하나 녹여져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얼마나 촘촘하고 치밀하게 이야기와 영상을 구성해냈는가를 잘 보여준다. 

사실 공포 스릴러의 하나로 봐도 충분히 전율이 느껴질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공포 속에 <겟아웃>은 겉으로는 호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괴물처럼 그 기저를 어슬렁거리는 타자에 대한 공격성이나 지배욕 같은 걸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흑인으로서 살아오며 제 의지로 움직일 수 없고 다만 그 끔찍한 일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그들이 그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스릴러를 충분히 즐기고 나면 그 남는 메시지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아마도 인종차별이라는 소재는 국내 관객들에게 미국인들만큼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배타성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면 우리들 역시 쉽게 영화 속 이야기에 몰입될 수 있다. <곡성>처럼 미끼를 던지는 영화지만, 역시 <곡성>처럼 기꺼이 그 미끼를 물고 싶은 영화, 바로 <겟아웃>이다.

‘보이스’, 고통스런 고구마 전개에 점점 더 민감해진다

OCN 주말드라마 <보이스>가 만들어내는 몰입감은 놀랍다. 거의 영화에 가까운 긴장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등장하는 사건들이 너무나 끔찍하고 잔혹하다. 첫 회부터 등장해 주인공들인 무진혁(장혁)의 아내와 강권주(이하나)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는 해머처럼 생긴 철퇴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차례 피해자를 가격해 죽인다. 2회에는 칼로 찌르고 죽이려는 계모를 피해 세탁기 속에 숨어 경찰의 구조를 기다리는 아이의 이야기가 방영됐다. 4회에서는 범인을 홀로 추격하던 강권주가 오히려 범인들에게 잡혀 산채로 매장당하는 장면이 마지막에 흘러나왔다. 시청자들로서는 다음 회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보이스(사진출처:OCN)'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끔찍한 장면들이 거의 공포영화 수준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 보면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볼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고, 워낙 현실에서 사건사고를 많이 접하며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더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케이블 채널에서 시청률이 5%를 넘어섰다는 건 이런 간절한 마음이 얼마나 깊게 자리하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이런 몰입감에도 불구하고 너무 고구마 전개를 이어가고 해결시간을 지연하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을 낚고 있다는 비판 역시 슬슬 고개를 들고 있다. <보이스>는 워낙 강렬한 사건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어서인지, 한 회에 그것이 마무리되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 끝을 맺은 후 다음 회를 기약하는 방식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시청자들은 불편을 호소한다. 특히 지난 주 4회에서 마지막에 강권주가 포대자루에 묶여진 채 구덩이에 던져져 땅에 묻히는 장면을 보여주고 끝난 건 다음 주 5회까지 1주일 간의 잔상을 남긴다. 

물론 그건 시청자들의 시선을 계속 묶어두기 위한 드라마의 정당한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치 영화의 극적인 상황 속에서 갑자기 뚝 끊어버린 듯한 그 전개방식은 시청자들에게는 깊은 이물감으로 남을 수 있다. 아마도 5%라는 시청률에는 이런 불편함이 만들어내는 어쩔 수 없는 기다림이 작용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사실상 드라마가 늘 해오던 방식이다. 한 주에 2회를 방영하면 2회째에는 늘 다음 주를 위한 떡밥이 던져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이른바 ‘고구마 전개’를 통한 떡밥에 대해 시청자들은 몹시 민감해진 모양새다.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이 지성의 연기호평과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전개에도 불구하고 ‘고구마 전개’의 불편함을 호소하게 된 건, 그가 계속해서 당하는 장면만을 보고 있어야 하는 답답함 때문이다. 

<보이스>는 물론 계속 새로운 사건들이 등장하고 그것이 약 2회분에 걸쳐 해결되면서 범인이 잡히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큰 틀의 이야기를 보면 주인공인 무진혁과 강권주가 그들의 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한 진범의 손아귀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5회에서도 결국 붙잡게 된 범인이 갑자기 과거 아버지의 살해 현장을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를 던져 강권주를 광분하게 만드는 장면은 그래서 사이다로 끝난 것처럼 여겨졌던 상황을 다시 고구마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은 <보이스> 같은 진범을 찾거나 진실을 찾는 드라마들이 늘 사용하는 방식이다. 사건 해결을 뒤로 지연시킴으로써 계속해서 보게 만드는 방식. <보이스>의 연출을 보면 그것이 상당히 의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범인을 찾기 위해 학교로 간 무진혁과 강권주가 갑자기 나뉘어 수색을 하게 되고 누구나 예감했던 것처럼 강권주 앞에 범인이 나타나 사투를 벌이는 장면과 엉뚱한 곳에서 범인을 찾고 있는 무진혁을 교차해 보여주는 식은 이제 <보이스> 연출의 한 패턴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론 그건 드라마의 효과를 위해 차용한 방식이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고구마 전개의 지연방식에 대한 시청자들의 참을성은 갈수록 없어지는 형국이다. 그건 아무래도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워낙 현실의 전개 자체가 답답한 형국인지라 드라마 속에서도 그런 전개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이다. 물론 정당한 사유들이 있어 사건 전개가 지연되는 건 개연성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명쾌하게 제시되지 않는 지연은 자칫 불편함을 불러올 수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보이스>가 조심해야 될 부분이다.

<구르미> 애어른 박보검의 고군분투와 청춘들의 단상

 

그저 그런 달달한 로맨스 사극인 줄 알았다. 하지만 KBS <구르미 그린 달빛>은 후반부에 이르면서 그 달달함 속에 숨겨진 날선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그러고 보면 초중반까지 왕세자 이영(박보검)을 중심으로 남장여자 내시 홍라온(김유정)과의 멜로와 호위무사 김병연(곽동연), 반대편에 서 있지만 내심 동무관계의 끈으로 묶여진 김윤성(진영)과의 우정이 결국은 이 후반부의 날선 현실 인식을 위한 포석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어째서 이영이라는 왕세자를 보고 있으면 짠해지는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박보검 신드롬이라는 형태로까지 나타나게 된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구르미 그린 달빛(사진출처:KBS)'

<구르미 그린 달빛>은 단순히 구분해 크게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어른들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의 세계다. 그 어른들은 다름 아닌 김헌(천호진)을 중심으로 권력에 혈안이 되어 있는 조정대신과 후세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자식까지 버린 중전 김씨(한수연) 같은 인물들이다. (김승수)이 있지만 그는 왕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무능하다. 그 반대편에 세자 이영을 위시해 김병연, 김윤성, 홍라온 같은 아이들의 세계가 대립구도로 서 있다.

 

어른들의 세계는 신분과 세력의 서열구조를 지향하는 비정한 정쟁의 세계다. 어린 시절 동무로서 자라온 이영과 김병연, 김윤성은 이제 막 이 어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동무의 정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이 동무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대립하게 만든다. 자객을 보낸 후 그들을 새 세상을 꿈꾸는 백운회로 둔갑시킨 김헌이, 왕세자와 가까이 지낸 홍라온이 홍경래의 여식이라는 걸 밝히며 왕세자 역시 역도와 내통했다고 몰아세울 때, 동무였던 김병연이 세자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이 청춘들이 서로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모습으로 읽힌다.

 

김병연은 왕세자의 목에 칼을 들이댐으로써 세자가 백운회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동시에 붙잡힌 홍경래와 홍라온을 살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물론 그 스스로는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지만. 화살과 칼에 맞고 쓰러질 때 김병연은 과거 풍등에 적어 날린 글귀를 떠올린다. ‘마지막 순간은 오직 벗일 수 있기를.’

 

친구가 친구로서 남지 못하고 어떤 거리를 갖게 된 건 김윤성도 마찬가지다. 그와 왕세자 이영은 어린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할아버지가 김헌이라는 점은 서로가 가까이 지내기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하지만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김윤성은 여전히 이영을 위해 날아오는 칼을 막아서고 홍라온을 살리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결국 <구르미 그린 달빛>은 어른들로 인해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게 되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어른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지만 이들 청춘들이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을 다잡아야할 왕은 무능하다. 그러니 이 살벌한 어른들과 맞서고 있는 왕세자 이영은 너무나 가녀리고 애처롭게 느껴진다. 의외로 만만찮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왕세자와 신하의 관계가 아닌 친구와 연인이라는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그의 몸부림은 이 살벌한 전장에서 깊은 상처를 남긴다. 친구들이 스러져 나가고 고통을 겪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픔이란.

 

흥미로운 건 이 조정대신들이 두려움에 빠져 있는 왕을 미혹시키는 방식이다. 홍경래의 난이라는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틈만 나면 백운회를 운운하며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 지금의 우리네 정치 현실을 환기시키는 대목들이 아닌가. 게다가 그로 인해 힘겨워 하는 청춘들과 백성들이나, 오로지 사람이 개, 돼지가 아닌 사람으로 살겠다는 뜻을 체제전복으로만 오독해 버리는 조정대신들의 태도 역시 지금의 현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아이 같은 모습이지만 어른인 양 진지한 얼굴로 그들과 싸워나가는 이영과 청춘들의 이야기가 더더욱 짠해지는 건 이 현실의 잔상들이 사극과 엮어지면서 만들어내는 감정들 때문이다. 심지어 박보검 신드롬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 역시, 물론 박보검이라는 배우의 아우라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서 지금의 청춘들의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달달한 로맨스 사극이라고 보기엔 <구르미 그린 달빛>이 설계한 어른과 아이들의 대결구도는 서슬 퍼런 현실감각이 깔려 있다.

<미스 페레그린>의 명불허전 팀 버튼식 상상력

 

역시 팀 버튼이다. 기괴하지만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상상력. 팀 버튼이 아니면 도무지 구현해내기 어려웠을 세계가 바로 영화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이하 미스 페레그린)>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오즈의 마법사> 혹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현실 바깥에 이상한 세계가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모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 구조는 <미스 페레그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기에는 평범을 거부하는 별종들과 그 별종들에 대한 팀 버튼식의 독특한 시각이 들어가 있다.

 

사진출처:영화<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가만히 있으면 몸이 붕 뜨기 때문에 납덩이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하는 소녀, 심장을 넣어 인형을 맘대로 조종하는 소년, 날카로운 이빨이 숨겨진 입이 머리 뒤쪽에 있는 아이, 식물들을 순식간에 키워내는 능력을 가진 아이 등등. 이 별종의 아이들은 시간을 조종하는 능력을 가진 미스 페레그린(에바 그린)의 보호 하에 같은 시간에 멈춰서 반복되는 하루를 계속 살아간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미스테리를 뒤쫓다 이 세계로 들어온 제이크는 이 별종의 아이들을 쫓는 괴물들 할로게스트의 위협과 맞서게 된다.

 

팀 버튼의 성향이지만 여기에도 어른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가 부딪친다. 이 별종의 아이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지만, 어른의 형상을 한 할로게스트들은 이들을 잡아먹음으로써 괴물이 된 자신들을 회복시키려 한다. 할로게스트였던 괴물들은 그래서 아이들의 눈알을 뽑아 먹어 조금씩 사람의 형체로 돌아오지만, 그 행위 자체가 이미 그들이 괴물이라는 걸 말해준다. 제이크는 평범한 세계에서 지극히 평범한 소년으로 자신을 여기며 살아왔지만 이 특별한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서 자신 역시 별종이라는 걸 알게 되고 이 괴물 같은 어른들과 맞서게 된다.

 

영화의 초반부는 다소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다. 이 제이크라는 소년이 조금씩 이상한 세계를 알게 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별종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저 한 명씩 병렬적으로 소개를 통해서 보여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 지루함을 어떤 긴장감으로 끌고 가는 건 다소 팀 버튼식의 유머가 곁들여진 공포다. 아마도 이런 초반부의 느릿느릿한 행보는 팀 버튼에게 이 별종 캐릭터들 하나하나에 깃들인 상상력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일 게다. 그 캐릭터들의 독특함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미스 페레그린이 이 할로게스트의 수장에게 잡혀가고 그저 별종으로만 보였던 아이들의 능력이 하나하나 모여져 이 괴물들과 맞서는 힘이 되어가는 영화 중반부터 몰입감은 상상 그 이상이 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별종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낸다. 팀 버튼 자신도 그랬을 테지만 보통 사람들에 의해 배척되는 존재들이었을 별종들이 사실은 조금 우리와 다를 뿐 이상한 존재들은 아니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리고 이 별종에는 팀 버튼 같은 이상한 상상력을 하는 이들도 포함된다. 이 세계를 경험하는 제이크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만을 강요하는 그의 아빠는, 그래서 저 이상한 세계의 별종들을 잡아먹어 자신들의 목적(영생)을 달성하려는 할로게스트와 비슷하다. 결국 이야기는 아빠가 강요하는 보통의 세계에서 보통으로 살아가는 삶을 제이크가 조금씩 벗어나 별종이라고 불릴지라도 그 이상한 세계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상상력의 자유를 주창한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캐릭터들은 이 영화에 빠져들게 되는 가장 큰 이유다. 현실만을 강요받던 우리에게 이들 캐릭터들은 우리 역시 어떤 때는 그런 별종들을 상상했었다는 걸 환기시켜준다. 몸이 저절로 허공으로 붕 뜨는 그런 상상력. 현실에 발 딛고 무겁게 살아가다 점점 잊어버리게 됐던 그 상상력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즐거움이라니. 역시 팀 버튼다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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