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장르 ‘빙의’, 인간미 넘치는 배우 송새벽의 진가

OCN 수목드라마 <빙의>는 섬뜩한데 웃기고 한편으론 짠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연쇄살인범이 등장하고, 여기에 빙의 소재의 귀신이 등장한다. 그러니 스릴러와 공포 장르가 섞여 긴장감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송새벽이 연기하는 강필성이라는 이른바 ‘영이 맑은 불량 형사’라는 캐릭터는 어딘지 코믹하다. 살인현장을 누비며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범인을 잡기 위해 뛰는 열혈형사지만, 편의점 바닥에 떨어진 구미를 벌레로 오인하고 깜짝깜짝 놀라는 새가슴이다. 밤마다 혼자 자는 밤이 무서워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자는 통에 간단한 영어회화를 구사하기도 하는 그런 인물.

그러니 그가 갑가지 영을 보는 눈이 열려 귀신을 마주하게 될 상황이 우습지 않을 수 없다. 귀신을 보고 오금이 저려 쓰러지고 소리 지르는 강필성은 그가 하는 형사라는 직업의 강인함과 상반된 면을 드러내며 웃음을 만든다. 그런데 이 강필성은 그저 새가슴인 겁 많은 형사 그 이상의 면모를 갖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입장을 들여다보는 남다른 감수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 행상을 하는 아주머니에게 단속 나왔다며 피하라 알려주는 형사이고, 하다못해 제 집에서 보게 된 귀신 부녀에게 무서워 쫓아내려 하다가 슬픈 눈빛을 보고는 오히려 제사를 지내주며 먹을 걸 주는 그런 인물. ‘영이 맑다’는 건 그의 이런 남다른 감수성에서 비롯된 착한 심성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는 그 인간적인 면모에 짠한 감정이 생겨난다. 

이건 <빙의>라는 형사물이 가진 독특한 특징이다. 기본적으로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형사 스릴러 장르를 갖고 있지만, ‘빙의’ 소재라는 오컬트적 요소가 들어가 있고 여기에 코미디와 휴먼드라마가 더해져 있다. 살해당한 엄마가 아이에게 인형을 사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귀신이 되어 슬퍼하는 모습을 본 강필성이 아이에게 인형을 대신 사다주며 엄마가 보냈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 복합적으로 얽혀진 장르와 그래서 감정 또한 복합적으로 만들어지는 <빙의>라는 드라마가 가진 색깔을 잘 보여준다. 심지어 이 드라마는 강필성과 영매인 홍서정(고준희)이 함께 수사를 하게 되는 과정과 더불어 두 사람 사이의 멜로까지 겹쳐놓았다. 이토록 자유자재로 장르가 뒤섞여 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잘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 강필성이라는 독특한 인물을 연기하는 송새벽이라는 배우의 진가가 보인다. 송새벽은 어떤 역할도 자신의 색깔로 소화해내는 독보적인 자기 세계를 가진 배우다. <방자전>에서 변학도라는 인물을 완전히 자기 스타일로 곱씹어 표현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그는 웃기면서도 섬뜩하고 때론 인간미 넘치는 그런 다양한 역할들을 자유자재로 선보인 바 있다. 지난해에는 <나의 아저씨>를 통해 화 많지만 그만큼 따뜻한 박기훈이라는 인물을 매력적으로 연기하기도 했다. 

그가 가진 독보적인 연기 세계의 핵심은 아무래도 ‘인간미’가 아닐까 싶다. <빙의>에서 어딘지 불량해보이지만 우스꽝스럽고 그러면서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건 한 인물을 단면적으로 연기하지 않고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면모들(그것이 반전요소를 갖고 있을 지라도)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그의 인간미 넘치는 연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국 한 가지의 얼굴만 갖고 있는 게 아니고 다양한 얼굴의 복합체라는 걸 송새벽은 연기를 통해 보여준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빙의>라는 작품은 송새벽에게 맞춤인 드라마로 보인다. 결국 이 드라마가 ‘빙의’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 건 단지 형사물에 오컬트적 요소를 더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이 형사물을 통해 담으려는 주제의식까지도 거기에 담겨져 있어서다. 우리가 흔히 ‘빙의된다’고 표현하는 건 어찌 보면 강필성이라는 인물이 그러하듯이 ‘타인의 입장을 들여다보고 되어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강필성이 그토록 겁이 많은 형사지만 사건에 열정적으로 뛰어드는 그 힘은 ‘빙의되듯’ 피해자의 입장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일 수 있다. 

반면 연쇄살인범은 살해현장에 거울을 놓아 피해자가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는 걸 즐긴다. 또 과거 끔찍한 연쇄살인범이었던 황대두(원현준)는 자신을 추적하던 형사 김낙천(장혁진)의 아내와 아이를 죽여 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그런 살인자였다. 그건 어찌 보면 빙의의 가학적인 활용처럼 보인다. 타인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느끼며 즐거워하는 살인범. 

<빙의>는 그래서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살인범과 그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이를 막으려 뛰어드는 형사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진다. 송새벽이 강필성이라는 인물을 겁에 질린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피해자의 고통을 들여다보며 더더욱 범인을 잡기 위해 뛰는 ‘인간적인’ 캐릭터로 그려내는 건 그래서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까지 연결되는 중요한 고리가 된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건 이 복합적인 감정들의 롤러코스터를 한 인간적인 형사를 통해 빙의할 수 있게 해주는 송새벽이라는 배우가 있어 가능해진 일이라는 점이다.(사진:OCN)

‘보이스2’의 공포에 가까운 몰입감, 용인되는 까닭

마치 영화 <곤지암>을 보는 것만 같았다. OCN 주말드라마 <보이스2>에 등장한 ‘인터넷 방송 비제이 고다윗 피습사건’ 얘기다. 미스터리한 공간을 찾아가는 인터넷 방송 비제이 고다윗(박은석). 군부대에 출몰했다는 좀비를 찾아가는 그의 모습은, <곤지암>의 공포를 안방극장에서 재연하기에 충분했다. 인터넷 방송이 갖기 마련인 거친 화면과, 마치 던전에 들어가듯 밀폐된 공간에서 하나하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과정들, 그리고 거기서 맞닥뜨린 기괴한 사건들까지. 

이 <곤지암>을 떠올리게 하는 미스터리한 사건이 <보이스2>에 등장하게 된 건, 고다윗의 방송을 보던 시청자가 골든타임팀에 신고를 하는 설정을 통해서다. <곤지암>은 그 방송을 하던 비제이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뤘지만, <보이스2>는 이 좀비가 출몰했다는 기이한 사건을 추적해가는 형사들의 관점으로 다뤄진다. 도강우(이진욱)는 좀비에게 피습됐다는 그 군부대의 폐건물을 찾아들어가 결국 공포에 질려 있는 고다윗을 찾아낸다. 

조금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 사건은 한번 보게 되면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만드는 게 사실이다. 드라마 후반부에 배치된 이 사건의 분량으로 인해 약 20분 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것. 그런데 이 공포물에 가까운 상황과 사건들의 배치는 <보이스2>가 가진 중요한 추동력이다. 

<보이스2>는 전작에서도 그랬듯이 1분 1초가 중요한 급박한 사건들을 다룬다. 그래서 아동 성폭행범을 찾는 이야기는 아이가 잡혀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는 그 공포의 전제 때문에 상황을 더 긴박하게 만들어냈다. 상황실에서 끊임없이 소리를 분석하고 정보를 취합하며 지시를 내리고, 현장에서 애타게 아이를 찾는 형사들의 모습들은 시청자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것.

일찌감치 연쇄살인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인물이 방제수(권율)라는 걸 공개한 건 이런 긴박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가 의도적으로 강권주(이하나)를 우연을 가장해 만나 자신이 해경이라고 소개하며 골든타임팀을 응원한다는 이야기를 건네는 장면은 그래서 더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평범하고 훈훈한 외모에 아파트 경비에게 친절한 모습까지 보이는 그가 집에는 죽은 어머니의 사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그렇고, 지하실에 소파를 좀 보관해달라고 했다 거절당한 이웃 아주머니가 자신의 험담을 하자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죽이는 상상을 하는 장면도 그렇다. 그가 연쇄살인을 조종하는 끔찍한 살인마라는 게 밝혀져 있어서 나올 수 있는 공포감이다. 

그리고 <보이스2>는 여기에 도강우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미스터리를 집어넣어 그 공포를 가중시킨다. 배 위에서 동료형사 나형준(홍경인)이 처참하게 손목이 잘려 죽는 첫 장면의 이야기는 그것이 도강우의 짓이었다고 의심하는 나홍수(유승목)와, 나아가 강권주에게 그 살인을 도강우와 함께 저질렀다고 말하는 방제수의 진술 때문에 궁금증을 갖게 한다. 과연 도강우는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기억을 조작했던 걸까.

이처럼 <보이스2>는 공포에 가까운 사건들을 가져와 그걸 해결하기 위해 급박하게 뛰어다니는 골든 타임팀의 이야기로 연결시킨다. 각각의 사건들이 매회 등장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담지만, 동시에 전체 이야기의 대립구도를 만드는 방제수와 골든타임팀의 구도가 조금씩 동시에 진행된다. 자칫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끔찍한 사건들이 자극으로만 치달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사건들을 현실에서도 종종 겪고 있다. 마치 <곤지암>을 보는 것 같은 공포물이 형사물과 만나는 장면들이 용인되는 이유다. 극도의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극적 장치이기도 하지만.(사진:OCN)

‘해피 데스데이’, ‘사랑의 블랙홀’의 공포 버전이랄까

세상에 이렇게 발랄한 공포영화가 가능하다니. <해피데스데이>는 여러 모로 관객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려주는 영화다. 공포영화라고 해서 봤는데 한없이 발랄해지고 심지어 달달해진다. 게다가 죽는 장면에서 공포가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에는 웃음이 터진다. 통쾌함도 있고 가슴 뭉클한 감동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게 해주는 장르가 퓨전된 영화지만, 그 흐름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영화를 본 분들은 아마도 대부분 그 즐거운 당혹감에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게다. 도대체 이 영화 정체가 뭐야?

<해피 데스데이>는 아마도 1993년 작 빌 머레이 주연의 <사랑의 블랙홀>을 본 관객분들이라면 반색할만한 공포영화다. <사랑의 블랙홀>은 매일 매일 똑같은 하루를 지내게 된 남자가 이를 통해 삶의 의미와 사랑을 이뤄가는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 <해피 데스데이>는 자신의 생일날 의문의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트리(제시카 로스)가 계속 같은 날 깨어나 같은 상황을 반복하는데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뤘다. 

‘해피버스데이’를 뒤집어놓은 제목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해피 데스데이>는 공포영화가 갖는 많은 상투적인 방식들을 뒤집는다. 공포영화가 공포스러운 건 죽음 때문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지만, <해피 데스데이>는 죽음 그 자체가 아닌 살아나 다시 그 끔찍한 죽음을 겪는다는 것에 공포가 있다. 즉 죽음은 그 자체로 공포의 끝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영화는 <사랑의 블랙홀>이 그러하듯이 그 끝을 다시 처음으로 돌려 무한반복되는 상황의 공포를 그린다. 

<스크림>이 그 기괴한 마스크 하나로 공포를 유발하듯이 <해피 데스데이>에도 마스크를 쓴 괴한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름을 돋게 만든다. 하지만 마스크는 단지 공포 유발의 장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마스크를 쓴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고, 트리는 계속 죽었다 살아나는 걸 반복하면서 그 범인을 찾으려 노력한다. 

흥미로운 건 이 반복되는 하루를 통해 트리가 조금씩 성장해간다는 점이다. 그는 그 특별한 생일날 계속해서 벌어지는 똑같은 일상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 삶을 바꿔보려 노력하기도 하고,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고 있던 상처를 들여다보고 그 치유의 방법을 모색하기도 한다. 공포영화 속에서 이런 성찰적 시선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다.

공포영화가 영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멜로 취향의 관객들에게도 이 영화는 꽤 특이한 멜로 경험을 하게 해준다. 공포 속에서 조금씩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의외로 발랄한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트리를 돕는 순수 청년 카터(이스라엘 브루사드)와 트리는 조금씩 마음을 나눈다. 공포영화에서 이렇게 풋풋한 멜로가 가능하다는 것도 흥미롭다.

영화는 말미에 가서 <사랑의 블랙홀>이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사실을 카터의 대사를 통해 알려준다. 트리의 상황이 <사랑의 블랙홀>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 하지만 이를 공포 형식으로 패러디한 <해피 데스데이>의 재기발랄함은 <사랑의 블랙홀>의 장치를 가져왔다고 해도 그 이상의 여운을 남긴다. 공포영화라는 장르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선입견들을 보란 듯이 뒤집는 데서 오는 어떤 통쾌함마저 느껴지는.(사진출처:영화 <해피 데스데이>)

‘애나벨’, 불길한 상상이 만드는 공포가 더 무섭다

영화 <애나벨 : 인형의 주인>은 개봉되기 전부터 무섭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 무서워 팝콘이 날아다니니 굳이 팝콘을 사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농담 섞인 이야기가 있었고, 그 유명한 <컨저링> 시리즈 사상 가장 무서운 작품이라는 평론가의 평가도 있었다. 

사진출처: 영화<애나벨:인형의 주인>

악령 들린 인형 하나 나오는 게 뭐가 그리 무서울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관객도 있고, 또 실제로 영화를 봤는데 생각만큼 무섭지 않아서 왜 그렇게 호들갑이었는가 하는 비판을 하는 관객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보며 “안 돼”, “가지마” 같은 말을 할 정도로 몰입하는 관객도 있다. 어째서 이런 다른 반응들이 나오게 된 걸까. 

<애나벨>은 사실 다 보고 나오면 내가 왜 그토록 긴장했던가가 놀랍게 느껴지는 공포영화다. 대부분의 공포 영화들이 실제적인 끔찍한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충격을 가하지만, <애나벨>은 보여주기보다는 보여주기 전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 침묵과 가려짐의 시간이 참을 수 없는 공포를 주는 영화다. 바로 그 장면과 장면 사이의 참고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관객이 스스로 머릿속으로 떠올리기 마련인 불길한 상상. 그것이 <애나벨>이 공포를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영화가 말하려는 악이 어떻게 우리의 정신 속으로 깃드는가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딸이 교통사고로 죽고 실의에 빠진 애나벨 인형을 만드는 장인 사무엘(안소리 라파글리아)과 그의 아내 에스더(미란다 오토). 그리고 12년 후 그들이 내준 집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섬뜩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소녀들. 애나벨 인형에 깃든 악령이 깨어나 소녀들의 영혼을 잠식해가는 그 과정이 주는 공포가 바로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영화 속에서 어떤 끔찍한 공포 상황을 겪게 되고 그로인해 희생되는 건 다름 아닌 상처받아 약한 정신을 가진 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약한 정신 속에서 깃드는 불온한 상상은 악이 자라나게 되는 씨앗이 되고 그것이 그의 영혼을 잠식해간다는 것. 딸의 죽음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하는 사무엘과 에스더가 그렇고,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 같이 놀아주지 않는 보육원 친구, 언니들에게 원망의 마음을 갖는 재니스(탈리사 베이트먼)가 그렇다. 

즉 사무엘과 에스더 그리고 재니스에게 그 악령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상처로 인해 그들 안에서 만들어진 ‘불길하고 불온한 상상’이 그 악령을 스스로 찾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재니스가 그 악령을 처음 맞닥뜨리는 장면은 그래서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그 힘을 통해 보복을 하려는 마음에 이끌리는 양가감정이 교차한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허수아비나, 그저 아이들 장난감일 수 있는 인형 그리고 장난감 총이나 그저 방치된 우물 같은 것들은 그래서 이 곳에 머무는 이들의 상상에 의해 공포의 존재로 깨어난다. 그리고 이런 체험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도 반복된다. 관객 스스로 이미 벌어지지도 않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영화를 보게 됨으로써 공포가 배가된다는 것. 

그래서 <애나벨>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유난히 많은 불길한 상상을 떠올린 이들이라면 그토록 무서울 수가 없는 영화지만, 공포영화가 너무 익숙해 그저 액면 그대로의 장면이 주는 공포를 기대했다면 조금 심심한 영화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잔인한 장면 없이도 소름끼치는 공포가 상상력만으로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걸 이 영화가 보여줬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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