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불호 갈렸지만 ‘스위트홈’이 K콘텐츠에 남긴 것들

스위트홈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이 시즌3로 그 대미를 장식했다. 반응은 호불호가 분명히 갈린다. 국내 크리처물이 이만한 성과를 가시적으로 냈다는 측면에서 호평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시즌2부터 확장된 세계관을 그려내는데 실패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많다. 확실히 시즌이 거듭될수록 대중적인 관심은 식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스위트홈’이 시즌3까지 펼쳐낸 다양한 상상들과 그걸 구현해낸 성과들은 부정할 수 없다. 

 

시즌3의 서사는 괴물이 된 자들이 죽음과 부활을 거쳐 신인류로 등장한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더해졌다. 신인류는 죽지 않는 존재가 되고, 그래서 중간 단계에 서 있는 특수감염인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신인류의 등장은 괴물화에 대한 반전의 인식들을 만들어낸다. 즉 시즌2에서 스타디움에 숨어 지내며 괴물이 되는 걸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괴물화 증상을 보이는 자들을 격리하려 했던 그 흐름은, 괴물이 되어야 그 다음단계인 신인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새로운 욕망을 더함으로써 뒤집혀버린다. 괴물화 증상은 숨겨야 할 사실이 아니라 드러내도 되는 일이 되고, 오히려 스타디움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자격(?)처럼 취급된다. 

 

물론 이건 이미 괴물화 단계에 들어선 이들의 입장이다. 괴물화 증상을 겪지 않은 인간의 입장은 또 그들과 다르다. 여전히 괴물이 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또 신인류로 돌아온 이은혁(이도현) 같은 인물은 죽지 않지만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인물로 욕망이나 두려움 자체가 없다. 이렇게 인간과 괴물 그리고 신인류라는 다양한 존재들을 동시에 세워 놓을 수 있었던 건 ‘스위트홈’이 가진 독특한 세계관 덕분이다. 욕망이 괴물로 탄생한다는 세계관. 

 

즉 이들이 괴물이 된 건 욕망 때문이다. 먹고 싶은 욕망, 날씬해지고 싶은 욕망, 강해지고 싶은 욕망, 누군가를 보호해주고 싶은 욕망 등등 저마다 가진 욕망에 따라 괴물들은 그 형상도 능력도 달라진다. 따라서 이들이 죽어 부활해 탄생한 신인류가 감정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 또한 의미를 갖는다. 욕망이 사라진 자들이라는 것. 즉 욕망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을 가르는 게 아니라 어떤 욕망을 갖는가가 다른 결과를 낼 뿐이라는 걸 ‘스위트홈’은 시즌3의 대혼전을 통해 그려낸다. 

 

임박사(오정세)처럼 인간이지만 괴물 같은 이들이 존재하고, 정반대로 탁상사(유오성)처럼 괴물이 되지만 인간편에 서서 그들을 구하려는 욕망을 가진 이들이 존재한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고 그래서 인간이든 괴물이든 아무런 경계를 세우지 않는 아이(김시아)가 있다면, 괴물이 된 후에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서이경(이시영)이 있고, 괴물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 욕망을 되돌리게 함으로써 인간으로 돌려놓는 능력을 가진 차현수(송강)가 있는 반면, 괴물의 다음 단계로서 신인류가 되어 무감해진 이은혁이 있다. 

 

‘스위트홈’은 인간과 괴물, 신인류가 서로 싸우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저마다의 종들이 버텨내려는 생존의 이야기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러 인간과 신인류가 공존의 길을 찾아가고, 기다릴 곳과 돌아갈 곳으로서의 ‘스위트홈’이 필요하다는 걸로 끝을 맺는다. 기억은 있지만 감정이 없는 단계에 들어선 이은혁이 또 특수감염인으로서 살아온 차현수가 감정을 드러내는 미소를 짓는 엔딩신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돌아갈 곳이란 공간의 의미만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감정이라는 것 또한 그 장면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크리처물이 갖기 마련인 보기 불편한 장면들과, 시즌2부터 세계관이 확장되며 생겨난 복잡한 서사, 너무 많은 변종 크리처들의 탄생이 만들어낸 혼돈, 게다가 시즌3에 와서는 이들이 맞붙어 생겨나는 더욱 복잡한 서사들. ‘스위트홈’은 확실히 대중적인 작품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시도된 VFX 기술의 무한확장은 분명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과거에는 구현되지 않아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영역들을 ‘스위트홈’은 이제 상상할 수 있는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이것은 마치 ‘스위트홈’ 자체가 이러한 상상력의 확장에 대한 욕망에 의해 발현된 작품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욕망이 만들어낸 세계는 상상하기 어려운 괴물 같은 것들이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놀라웠지만 점점 더 커진 욕망이 그 세계를 확장하면서 기괴해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비판의 과정을 거치며 이제 감정도 배워나가는 신인류 같은 보다 안정된 K콘텐츠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는 걸 ‘스위트홈’은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호불호가 갈렸지만 ‘스위트홈’이 시즌3를 거쳐 거둔 분명한 성과다. (사진:넷플릭스)

‘삼식이 삼촌’으로 첫 드라마 데뷔한 송강호

삼식이 삼촌

“사랑과 존경의 의미로 다들 그렇게 불러요. 삼식이, 삼식이 형님, 삼식이 삼촌. 전 너무 좋아요. 제 별명이요.”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삼식이 삼촌’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삼식이 삼촌 박두칠(송강호)이 하는 그 대사로 시작한다. 이 첫 대사는 16부작 ‘삼식이 삼촌’이라는 작품이 사실상 이 인물의 서사라는 걸 예감케 한다. 삼식이 삼촌을 연기하는 송강호는 특유의 힘을 쪽 빼서 과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목소리로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다. 시청자들은 궁금해진다. 도대체 왜 ‘삼식이 삼촌’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1950년대말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작품의 첫 회가 끝나갈 즈음, 이 대사의 의미는 삼식이 삼촌과 김산(변요한)이라는 인물이 던지는 ‘피자 이야기’로 분명해진다. “미국 사람들은 매일 그런 빵을 먹어. 심지어 먹다가 남겨. 우리도 공단만 완성이 되면 그런 빵을 먹다가 남기고 버릴 거야.” 삼식이 삼촌은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다. 전후 피폐된 경제로 먹고 사는 일조차 힘들어진 현실에 제 권력을 잡겠다는 정치인들과 격동기에 외자를 유치해 공단을 건립함으로써 돈 벌 기회를 잡으려는 기업인들 속에서도 삼식이 삼촌이 주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이유는 바로 이 먹고 사는 문제로 사람들을 설득하기 때문이다. 마침 국가 재건을 위해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믿는 김산이 등장하는데, 그 역시 피자 이야기를 한다. “피자 아세요? 드셔 보신 분? 의원님, 드셔 보셨습니까? 제가 유학시절에 피자집 다락방에서 살았습니다. 하루 한 끼 제대로 못 먹던 유학시절에 매일 피자 굽는 냄새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여러분 총칼이 아니라 경제입니다. 누구도 끼니 걱정하지 않는 나라. 하루 세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나라! 제가 유학시절에 가장 부러웠던 건 전투기도 항공모함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피자였습니다. 전 국민이 굶으면서 전쟁에 이기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쯤되면 알게 된다. 왜 ‘삼식이 삼촌’인지. 하루 세끼를 배불리 먹는 일이 가장 중요했던 50년대 말부터 60년대까지의 격동기를 이만큼 잘 설명하는 캐릭터가 없으니. 

 

삼식이 삼촌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그 시대의 한국인을 표상한다. 어찌 보면 먹고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는 살벌한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생계의 문제라 고개가 끄덕여지기고 또 ‘삼촌’ 같은 든든한 느낌마저 주는 인물. 그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삶이 개발시대를 거쳐 지금의 풍요를 만들어냈지만, 그 과정에서의 부정이 만들어낸 후유증도 적지 않게 남긴 인물로 그 시대의 공기를 이 인물은 고스란히 그려낸다. 배우로서 어떤 시대의 한국인을 그려낸다는 건, 어렵고도 부담되는 일이지만 송강호는 이를 마치 피자 하나 꺼내 먹듯이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소화해낸다. 

 

박찬욱 감독은 일찍이 송강호의 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연기를 그의 라이벌로 꼽히는 최민식과 비교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최민식이 고전주의자라면 송강호는 자연주의자”라고. 그건 그가 주로 맡았던 배역들이 대부분 주역보다는 주역의 뒤편으로 한 발 물러서 있는 인물들이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물론 중심에 서서 작품 전체를 앞으로 끌고 나가는 역할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돋보이는 건 다른 인물들과 함께 앙상블을 이루는 연기이고, 특히 상대 역할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을 때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로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후 이를 눈여겨 본 송능한 감독의 ‘넘버3’에서 지금도 대중들에게 회자되는 인물은 바로 송강호다.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며 그가 하는 일장연설 장면은 무수한 패러디가 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주인공보다 더 주목받는 장면을 인상적인 연기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이병헌만큼 송강호가 빛났고,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는 김상경만큼 송강호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이것은 박해일, 배두나, 변희봉, 고아성이 함께 한 ‘괴물’에서도, 이병헌, 정우성과 함께 했던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딘가 한 발 물러서 있다. 그래서 작품이 그리고 있는 세계를 좀더 관망하면서 거기에 맞는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들을 꺼내놓는다. 한 발 물러서 있어 오히려 도드라지는 역설이 가능해지는 이유다. 

 

송강호의 이런 면모가 가장 매력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전도연에게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겼던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였다. 남편과 사별후 어린 아이와 함께 밀양에 오게 되지만 아이마저 유괴로 잃은 후 모든 게 무너져 버린 신애(전도연)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주변을 맴도는 종찬 역할을 연기했다. 사실상 ‘밀양(密陽)’ 즉 ‘Secret sunshine’ 같은 존재로, 어둠 속에 갇힌 신애에게 작은 빛을 주는 그런 역할을 역시 ‘한 발 물러서 있는’ 모습으로 송강호는 연기함으로써 전세계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이런 자연스러운 면들은 그가 표현한 인물들이 너무나 한국적인 초상들을 그려내게 한 이유가 됐다. ‘변호인’의 국선변호인, ‘밀정’의 독립운동가, ‘택시운전사’의 5.18 민주화운동의 증언자, ‘기생충’의 반지하 서민 등등 그는 다양한 시대적 인물들을 연기했지만 그 인물들에는 모두 송강호 특유의 한국적인 정감 같은 것들이 묻어난다. 이것은 우리가 그 시대를 떠올릴 때 연상될만한 당대 인물들의 초상 같은 느낌이 있다. 

 

‘삼식이 삼촌’ 역시 마찬가지다.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압축성장을 해온 그 시기를 막연히 어둠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삼식이 삼촌’은 당대의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렸던가를 한국적인 느와르로 보여준다. 물론 그 욕망이 비뚤어진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만만찮은 후유증으로 남아 그가 연기했던 ‘택시운전사’의 비극과 ‘기생충’의 양극화로 훗날 돌아오게 되지만, 적어도 그의 설득력 있는 연기는 이 인물을 미워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 한 발 물러서 보면 다르게 보인다던가. 그것이 지나간 시대이건, 한 사람의 아픈 삶이건, 혹은 치열한 연기의 세계이건, 한 발 물러서 보면 보이는 게 다르고 그래서 그걸 더 잘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송강호만큼 잘 보여주는 배우도 없을 듯 싶다. (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무빙’, 자식 가진 부모들을 초능력자로 그린 건

무빙

“아 아 아빠 어 엄마 데리러 그 금방 갔, 갔다 올게. 강훈이 자, 자기 전에 올 게. 아빠 야 약속 꼭 지켜. 지, 진, 진짜 강훈이 자기 전에 올게. 저지지 진짜 약속 꼭 지킬게.”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에서 재만(김성균)은 아들 강훈에게 재차 약속한다. 꼭 자기 전에 돌아온다고. 

 

재만은 바보다. 정신 지체를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도 또 아들 밖에 모른다는 의미에서도. 밤이 늦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아내가 걱정된 재만은 그토록 아끼는 아들을 혼자 집에 두고 아내를 찾으러 나간다. 자기 전 꼭 돌아온다는 약속을 연거푸 하면서.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노점상 강제철거 반대 시위에 나섰던 아내가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본 재만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 

 

그는 초능력의 소유자다. 전경 1개 소대를 혼자서 때려 부술 정도로. 결국 이 사안이 보고되고 국정원의 민용준(문성근) 차장은 재생 능력을 가진 장주원(류승룡)을 부른다. 아내가 사망한 후 홀로 딸 희수를 키우고 있는 싱글 대디 장주원은 딸을 두고 작전에 나가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 잠든 딸이 혹여나 깰까 어둠 속에서 군화끈을 맬 때 틱 하고 현관 불이 켜진다. 잠에서 깬 딸이 아빠를 위해 현관문 불을 켜준 것. 그리고 “잘 다녀와”라고 말한다. 그런 딸을 아빠는 꼭 껴안는다.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무빙>이 14회 ‘바보’라는 부제로 그리고 있는 건 아빠들의 이야기다. 아빠들이 출퇴근길에 느끼는 감정들이 이 회차에서는 반복적으로 담겨진다. 아들 바보 재만도 딸 바보 주원도 현관 앞에서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홀로 자식을 두고 일을 나가는 그 발길에 우리네 샐리러맨 아빠들의 소회가 묻어난다. 

 

일찍 돌아올게. 금방 갔다 올게. 아빠들이 그렇게 다짐하듯 자식들에게 남기는 말들은 번번이 지켜지지 못한다. 가족을 위해서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에 야근에도 또 일의 연장으로 벌어지는 회식자리도 빠지지 못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볼 때 갖게 되는 그 미안함과 쓸쓸함이 이 초능력을 가졌지만 바보 아빠들인 재만과 주원의 얼굴에 교차된다. 

 

아이러니한 건 가족을 위해 야밤에도 불러내면 일을 하러 나가야 되는 아빠들을 세상은 맞붙여 싸우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붙잡혀 가는 아내를 구하겠다는 일념에 폭주하게 된 재만도 그를 체포하기 위해 투입된 주원도 그 일에 서로에 대한 사적 감정 따위는 없다. 그저 가족을 위해 그 생계를 위해 싸우고 있을 뿐이다. <무빙>이 이 회차에서 포착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현실이다. 저마다의 생계를 볼모삼아 사회의 전장에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서로 싸워야 하는 현실. 

 

하지만 이 싸움은 한 아이로 인해 그 양상이 바뀐다. 맨홀에 빠져 살려 달라 애원하는 아이를 발견한 주원과 재만은 서로 싸우기 위해 날렸던 주먹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날리기 시작한다. 벽을 부수고 아이를 구해낸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이 누군가의 가족과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는 걸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아이를 구해내고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약속보다 늦게 귀가했지만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아이들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그들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기막힌 한국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자식 가진 부모는 모두 초능력자가 된다는 서사가 이 ‘바보’라는 부제를 가진 14회에 담겨있다. 그들은 자식만 보이는 바보가 되고, 세상에 나가서는 ‘괴물’이 되기도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이가 안아주는 것만으로 모든 걸 위로받는 아이 같은 존재가 된다. 지금껏 그 어떤 작품이 이만큼 짠한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적이 있을까. <무빙>이라는 한국적 슈퍼히어로의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다.(사진:디즈니+)

‘썸바디’, 이 괴물은 왜 살벌한데 쓸쓸할까

썸바디

“무슨 소리일까요? 이 소리는 여기 직경 20미터 높이 50미터의 사일로 내부의 소리입니다. 여기 사일로 내부에 들어가면 아주 작은 숨소리조차 녹슨 철판에 난반사되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본인의 숨소리까지 느껴보실 수 있습니다. 이 사일로 내부에 있는 녹슨 철판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버텨왔을까요? 50년입니다. 50년 동안 여러분들의 목소리, 숨소리를 기다리고 있던 겁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썸바디>에서 성윤오(김영광)는 나포시청 도시재생 사업 공모전에서 바닷가 옆에 세워진 오래된 사일로에 대해 그렇게 브리핑한다. 거대한 괴물처럼 서 있는 사일로. 바닷가 옆 흉물처럼 보이지만, 성윤오는 그 내부에 들어가 자신이 내는 숨소리, 목소리를 온 몸으로 듣는다. 그리고 그 사일로가 누군가의 목소리 숨소리를 듣기 위해 무려 50년 동안을 기다려왔다고 말한다. 

 

성윤오는 건축가이지만, 이 장면에서 마치 그 녹슨 채 텅 빈 흉물처럼 서있는 사일로에 자신을 투영시키는 듯 말한다. 흉물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아주 작은 내면의 소리가 있다는 것. 물론 그 누구도 그 소리를 들으려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마치 저마다의 섬처럼 마주보고 서 있는 두 기의 사일로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다가가지 못하는 현대인들처럼 보인다. 어딘가 섬뜩하지만 쓸쓸하기도 한. 

 

이 사일로에 대한 느낌은 <썸바디>라는 드라마 속 성윤오라는 연쇄살인마가 주는 감정이다. 그는 잘 생겼고 키도 훤칠하며 말도 부드럽게 한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가장이다. 그 이면에는 연쇄살인마의 잔혹함이 숨겨져 있다. 누군가를 향해 살의를 드러내면 순식간에 잘 생긴 얼굴은 섬뜩해지고, 훤칠한 키는 위압감을 주며 부드러운 말투는 쌍스러운 욕지거리로 채워진다. 그런데 이 섬뜩함 뒤에는 어딘가 쓸쓸함 같은 것도 있다. 

 

그건 <썸바디>라는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데이팅 앱 ‘썸바디’에서 느껴지는 말끔함과 섬뜩함과 쓸쓸함 그대로다. 보여 주고 싶은 것들로만 가득 채워진 앱 속 사진이나 메시지들은 판타지화되어 보일 정도로 말끔하지만, 그건 일종의 가장이다. 그들은 모두 멀쩡해 보이고 심지어 행복해보이지만 실상은 저마다의 결핍 속에서 섬처럼 고립된 채 살아간다. 그래서 썸바디 같은 앱을 찾는다. 그건 진정으로 사람을 이해하게 해주고 연결해주지 못하지만 그럼에도(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연결되고픈 이들을 끌어 모은다. 

 

썸바디를 개발한 김섬(강해림)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인물이다. 제대로 된 감정을 모른다. 어려서 엄마는 그에게 여러 감정들을 읽어내는 걸 가르치려 했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다. 엄마는 그를 “톱니 없이 민둥하게 태어났다”고 했다. 관계의 톱니바퀴가 없으니 세상과 맞물리지 않는 삶. 하지만 섬은 “사실 바퀴가 필요 없다”며 감쪽같이 “모든 걸 흉내 내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섬이라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인물로 극대화해서 표현해냈지만, 이 인물의 무감함에서는 온라인으로 연결된 듯 착각하지만 사실은 섬처럼 떨어져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흉내 내는 삶이 느껴진다. 연쇄살인마 성윤오도 천재적인 프로그래머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을 갖고 있는 김섬도 톱니 없이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사실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이들은 스스로가 그렇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썸바디를 통해 처음 연결됐을 때 그들은 각별한 느낌을 갖는다. 마치 톱니 없는 존재가 톱니가 있는 바퀴들과 어울리지 못했지만, 또 다른 톱니 없는 존재를 만나 맨질한 맨살을 마주 대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랄까. 썸바디를 하는 이유로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과 연결되고 싶어서라는 그 답신이 김섬의 텅 빈 사일로 같은 마음에 거대한 울림으로 들어찬다. 

 

그리고 로드킬 당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고양이를 김섬이 죽이고는 “내가 괴물 같아요?”라고 묻자, 성윤오는 “아니요. 전혀”라며 이렇게 말한다. “고양이를 도와주고 싶어했던 거 알아요. 고통스럽지 않도록. 참 잘했어요.” 성윤오는 그 순간 김섬이라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심지어 누군가를 장난처럼 죽이는 괴물이지만. 

 

<썸바디>는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지만 그 안에 디지털 세계 속에서 섬처럼 고립되어 저마다의 욕망을 숨긴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쓸쓸함을 담았다. 그래서인지 김섬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가 평범하지 않다. 김섬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갖고 있고, 그의 절친 영기원(김수연)은 사고로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된 경찰이다. 또 기원과 가까운 임목원(김용지)은 성소수자 무속인이다. 김섬이 마음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영기원은 육체적인 소통(섹스)이 어렵고, 임목원은 신을 섬기는 존재로서 보통 사람들과는 소통이 다르다. 그래서 이 부족한 지점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끌어내고, 성윤오라는 연쇄살인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을 갖게 된다. 

 

<썸바디>는 그래서 이 연쇄살인마의 위협 속에서 그를 잡기 위한 스릴러로서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동시에 소통되지 않고 섬처럼 갈라진 이들 마음속에 자리한 쓸쓸함이나 고독 같은 것들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성윤오와 김섬의 관계는 공포와 섬뜩함이 느껴지는 연쇄살인마와 피해자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기묘한 멜로 관계로도 그려진다. 다만 이들의 멜로는 톱니 없는 자들의 쓸쓸함이 빚어내는 관계다. 결국 마지막에 보여주는 김섬의 선택은 그래서 저 로드킬로 죽어가는 고양이를 마주했던 그 상황과 겹쳐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김섬 역할의 강해림은 그가 드라마 속에서 만들었던 챗봇 ‘썸원’을 인간화한 듯한 그 캐릭터를 신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표현해낸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중심 축은 성윤오라는 살벌함과 쓸쓸함이 겹쳐진 연쇄살인마를 연기해낸 김영광이다. 그간 멜로의 달달한 역할들로 이미지화되어 있던 김영광은 말 그대로 광기어린 괴물 같은 연기를 보여준다. 연기자의 가능성은 어떤 캐릭터를 만나 드디어 열린다고 하던가. 그간의 나긋나긋한 연기를 훌쩍 벗어던진 김영광에게서 ‘연기 괴물’의 탄생이 엿보인다. 오랜 시간 그저 녹슨 채 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섬세한 소리들을 들려주는 사일로 같은 연기자였다는 걸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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