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햇볕. 허허 좋네예.” - 이창동 ‘밀양’

밀양

“아저씨, 밀양이란 이름의 뜻이 뭔지 알아요?” 남편을 잃고 밀양에 정착하려 아들과 함께 내려온 신애(전도연)는 고장난 차를 고쳐준 종찬(송강호)에게 밀양의 뜻을 묻는다. 하지만 종찬에게 밀양은 ‘경기가 엉망이고, 한나라당 도시고, 부산이 가깝고, 인구는 많이 준’ 그런 동네다. 그에게 이름의 뜻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냥 사는 동네일 뿐. 신애가 그 뜻을 종찬에게 알려준다. “한자로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볕. 좋죠?” 그러자 종찬은 그제야 자신이 살던 동네의 이름이 그런 뜻이였다는 걸 알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한다. “비밀의 햇볕. 좋네예.”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 앞부분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앞으로 벌어질 신애의 비극과 그 속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의 곁에 끝까지 남아있는 종찬의 존재를 에둘러 설명한다. 아들이 유괴되어 시신으로 돌아오고 그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신애는 종교에 귀의해 평화를 얻었다 생각하지만, 막상 유괴범을 면회하고 나서는 절망에 빠진다. 유괴범 역시 종교에 귀의해 용서받았고 평화를 얻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그 누가 먼저 그 인간을 용서할 수 있냐며 신애는 아파한다. 종교를 저주하고 피폐해져가는 신애를 구원해주는 건 과연 뭘까. ‘밀양’은 그것이 종찬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늘 옆에 있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들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존재들.

 

혼자 머리를 자르려는 신애에게 종찬이 거울을 들어줄 때, 카메라가 틸다운되며 바람에 날려 바닥을 뒹구는 머리카락과 음지에 버려진 것들을 비추는 햇살을 담은 엔딩이 긴 여운으로 남는 이 작품은 묻는다. 당신의 밀양 같은 존재는 누구인가. 또 당신은 누군가의 그런 존재가 되고 있는가.(글:동아일보, 사진:영화'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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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월드’가 연쇄적인 복수극을 통해 담아낸 피해자들이 분노

원더풀 월드

“행복해지려고 하니까? 방송에서 그러더라구 잘 살아보겠다고.” MBC 금토드라마 ‘원더풀 월드’에서 권선율(차은우)은 왜 이렇게까지 했냐는 강수호(김강우)에게 그렇게 말한다. 권선율은 아버지를 차로 치어 죽인 은수현(김남주)에게 복수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준비했다. 교도소에 일부러 봉사를 다니며 은수현의 동태를 살폈고, 그의 남편 강수호가 한유리(임세미)와 불륜을 저지르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친 자매처럼 자라온 한유리와 남편 강수호의 불륜은 은수현에게는 지독한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권선율이 자신이 죽인 권지웅(오만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던 은수현이지만, 결국 밝혀진 한유리와 강수호의 불륜 사실은 그를 뒤흔들었다. 한번의 실수라고 하지만 아내 은수현이 충격을 받을 걸 걱정해 애써 그 사실을 숨기려 했던 강수호는 권선율을 찾아와 꼭 그렇게까지 해야했냐고 묻는데, 이에 대한 권선율의 답변이 의미심장하다. 

 

방송에 나와 강수호와 은수현이 “잘 살아보겠다”고 했던 그 대목에서 권선율은 분노했다는 것. 그건 피해자들의 분노가 어디서 촉발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건 바로 가해자들이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일이다. 흔히 연예인의 학교폭력 같은 사례에서 자주 등장하듯이, 가해자는 쉽게 잊어버리지만 피해자는 결코 잊지 못하는 과거의 상처는 그저 묻어두고 지내려 해도 어느 순간 분노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원더풀 월드’에서 굳이 강수호가 방송에서 주목받는 스타 앵커이고 은수현 역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 작가로 설정된 건 그래서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직업을 갖고 있다. 그러니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묻어두고 살고 싶어도 자꾸만 눈앞에 그 삶이 보이게 되고, 그들의 행복해지려는 모습은 피해자인 권선율에게는 더 큰 상처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건 은수현도 마찬가지로 겪었던 상처다. 그가 끝내 권선율의 아버지 권지웅을 차로 치어 죽인 건, 자신의 아들을 치어 죽이고도 그만한 처벌도 받지 않고 버젓이 살아가는 모습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억울함을 토로하며 권지웅을 찾아가 사죄하라고 요구했지만, 끝내 사죄하지 않는 뻔뻔함에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것. 

 

이처럼 피해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원더풀 월드’라는 역설적인 제목은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아들을 잃은 은수현이나 아버지를 잃은 권선율은 모두 자신이 믿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는 걸 경험했고 여전히 그 무너진 폐허 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너무나 ‘원더풀’한 모습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절망감은 결코 겪지 않은 이들은 가늠할 수 없는 크기가 아닐까. 

 

과연 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뒤얽힌 은수현과 권선율에게도 구원이라는 게 있을까. “죽음에 더 큰 죽음으로” 갚겠다는 권선율에게 은수현은 이렇게 말한다. “죽는 건 쉬워. 계속 살아내는 게 어려운 거지. 넌 내가 어떻게 버텼을 것 같니? 난 건우 엄마로서 후회하는 것도 부끄러운 것도 없어. 오직 그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왔어. 누구든 날 흔들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나를 죽일 순 있어도 이 마음을 죽일 순 없어.” 같은 고통을 겪었고 버텨내는 삶을 살아간다는 그 공감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될 수는 없을까. 이제는 무너져 회복될 수 없는 ‘원더풀 월드’에서 끝내 버텨내기 위해서라도.(사진:MBC)

‘반의반’, 보편적인 소통엔 실패했지만 색다른 시도

 

“반보기라는 말 알아요?” tvN 월화드라마 <반의반>에서 하원(정해인)은 한서우(채수빈)에게 전화해 그렇게 묻는다. 그러자 서우는 “반만 본다는 건가..”하고 자신 없는 추측을 한다. 하원은 “결혼하는 여자가 친정엄마 보고 싶을 때 딱 반 되는 지점에서 잠깐 보는” 것을 반보기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잠깐 반보기를 하자는 하원의 제안에 중간 지점에서 만난 두 사람. 하원은 대뜸 손을 내민다. 서우가 그 손 위에 손을 포개자 하원이 말한다. “짧고 애틋하게.” 그렇게 잠깐 보더라도 그 마음의 애틋함은 그래서 더 커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장면은 안타깝지만 12회로 조기종영을 결정한 <반의반>이라는 드라마가 건네는 말처럼 들린다. 짧지만 그래서 더 애틋한 드라마. <반의반>은 2.4%(닐슨 코리아) 첫 회 시청률로 시작했다. 아무래도 정해인이라는 배우의 멜로드라마라는 기대감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매회 시청률이 하락하면서 자칫 1%대 미만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제 아무리 시청률이라는 지표가 이제는 온전한 시청자들의 반응을 말해주지 않는 시대에 들어왔다고 해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수치가 되었다.

 

어째서 <반의반>은 시청자들과의 보편적인 소통에 실패했을까. 그건 애초에 AI라는 소재와 짝사랑을 엮어 풀어내겠다는 그 시도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AI도 낯선 데다 직접 만나기보다는 한 걸음씩 떨어져서 사랑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너무 더디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AI와 짝사랑을 엮어놓은 그 시도 자체가 나쁘다 보긴 어렵다. 둘의 공통점은 이 드라마가 은연 중에 말하고 있는 “없는 데 있는 것”이라서 손에 잘 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쥐고 흔들기도 하는 그런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다.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가 되기 어렵다는 건 이미 사라져버린 이를 잊지 못하고 AI를 통해서나마 계속 대화를 이어가려는 하원의 0% 가능성 짝사랑과, 그런 하원을 옆에서 바라보며 빠져든 1% 가능성 짝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데서 나타난다. 이들은 골목길에서 카페에서 육교 위에서 녹음실에서 또 그들만의 아지트에서 만나지만 그들 사이에 놓인 어떤 장벽들(그것은 과거가 되기도 하고 잊지 못한 짝사랑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떨어져서 바라보는 사랑을 한다.

 

조기종영이 결정된 후 드라마의 빨라진 속도감과 그래서 급물살을 타고 있는 하원과 서우의 관계에도 이들의 사랑은 반보기를 하듯 여전히 조심스럽다. 떠나보낸 자들의 상실감을 치유해주는 디바이스로 손을 잡아주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솔루션을 개발하려는 하원이 서우에게 손을 인식하게 하고 직접 잡지 않고도 잡은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하게 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사랑법을 잘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한 걸음 떨어져서 하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자식을 떠나보내던 날 늦게 도착해 잡지 못한 손 때문에 절망하는 김민정(이정은)은 자신의 예전 밝았던 목소리를 담은 AI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제는 그 밝은 소리를 낼 수 없는 자신을 되새기며 허공에 대고 이제는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아이의 손을 잡고 싶어 절망한다. 그 순간 옆에서 그 광경을 보던 하원이 그 손을 대신 잡아준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서 채워지지 않는 어떤 상실감은 없는 존재에 대한 집착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대신 그걸 공감하는 누군가의 또 다른 손길이 위로를 대신해줄 뿐.

 

늘 한 발 떨어져 있고, AI와 식물, 음악연주 등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심지어 손과 손 사이를 살짝 떨어뜨린 채 잡는 걸 대신하는 <반의반>의 낯선 사랑법은 시청자들과의 보편적인 소통에서 실패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마치 노르웨이로 떠나버린 아내에 절망하며 즉흥적으로 홀에서 쳤던 강인욱(김성규)의 피아노 연주처럼 낯선 미완의 곡이 되었다. 좀 더 선명하고 효과적인 전개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떤 이들에게는 그 작은 풍경 하나, 대사 몇 마디 같은 것들이 단 몇 초 동안이나마 위로를 줬을 거로 생각한다.

 

“없어졌어야할 곡이에요.” 강인욱은 그 곡에 대해 그렇게 말했고, “그런 게 어딨어요?”라고 서우는 말했다. 서우는 “누구한테는 정말 힘들 때 이게 도움이 됐을 수도 있고” 실제로 그 곡이 폭설 속에서 두려움에 떨던 지수(박주현)가 전화로나마 들으며 위로를 받았던 곡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비아냥대듯 “음악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의구심을 자아내는 인욱에게 “네 몇 초간 구원했어요”라고 분명히 말한다. 분명 이 드라마가 그럴 것이다. 몇 초 간이라도. 짧고 애틋하게.(사진:tvN)

‘아무도 모른다’, 진실에 접근할수록 먹먹해지는 건

 

진실에 접근해갈수록 감정은 복잡해진다. 그 감정은 나쁜 어른들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에 대한 분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디착한 아이들의 마음과 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진실에 다가가는 좋은 어른들에 대한 먹먹함이 더해진 것이다. SBS 월화드라마 <아무도 모른다>는 어떻게 이렇게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된 것일까.

 

10회는 그간 제목처럼 ‘아무도 몰랐던’ 은호에게 벌어진 사건의 전모가 한꺼번에 밝혀진 회차였다. 은호가 왜 밀레니엄 호텔 옥상에서 뛰어내렸는지, 또 은호를 철거될 건물로 데려가 폭력을 가했던 민성(윤재용)의 운전기사가 어째서 목을 맨 시신으로 발견됐는지, 그리고 은호가 구해준 장기호(권해효)와 그의 행방을 좇는 백상호와 그 일당들은 이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가 모두 드러났다.

 

장기호가 무언가 백상호와 그 일당들에게 약점이 될 만한 것을 빼돌렸고, 그것을 일당들을 피해 도망치다 도움을 받은 은호에게 전해준 것이 사건을 복잡하게 만든 이유가 됐다. 백상호는 그 물건을 가진 은호를 잡으려했고 그래서 그에게 폭행을 가하던 운전기사를 제지하게 됐다. 그렇게 은호를 구해냈지만 그것은 물건을 찾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밀레니엄 호텔에 데리고 간 백상호의 정체를 알아채고 은호는 도망쳤고 비상용 완강기를 옥상에서 타고 내려오다 이를 막으려 하자 스스로 뛰어내린 것. 결국 이렇게 사건이 커지자 운전기사도 목 매달아 죽이게 됐던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른다>는 이런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을 어째서 쉽게 보여주지 않았을까. 거의 오리무중에 가깝게 시청자들을 몰아넣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인다. 정말 아무도 모르는 그 사건의 진실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차영진(김서형)과 이선우(류덕환) 그리고 형사들의 그 모습 자체가 주는 절실함과 신뢰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무엇보다 진실이 하나씩 드러날 때 보이게 되는 인물들의 진면목과 진심을 꺼내놓기 위함이었다.

 

그 과정에서 지나는 행인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언제든 내밀었던 착한 은호는, ‘정의’보다 ‘구원’이라며 사람의 약한 부분을 도와주고 대신 그를 이용해먹는 백상호(박훈)가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다는 게 드러난다. 은호로 인해 비뚤어질 뻔 했던 동명(윤찬영)도 또 부정 시험을 치렀던 민성(윤재용)도 끝내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백상호는 구원을 미끼로 아이들까지 포섭해 악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악의 축이었다.

 

이러한 진실과 함께 드러나는 선명한 실체들 속에서 단연 빛나는 인물은 차영진이다. 그는 학창시절 연쇄살인범에게 친구가 살해당한 아픔을 겪고는 끝까지 그를 잡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던 인물.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은호가 당한 사건을 추적하면서 차영진은 시청자들이 느끼는 분노와 먹먹함을 동시에 전해주는 인물이 됐다. 백상호와 그 일당들이 저지른 범행들에 분노하게 되면서 동시에 그런 위협 속에서도 착한 마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맞섰던 은호의 용기에 먹먹해지는 것.

 

<아무도 모른다>는 그래서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에 따뜻함이 더해진 독특한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이가 어른보다 나은 은호 앞에서 눈물 흘려주며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냉철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가진 차영진이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킨다.

 

차영진은 은호의 엄마에게 “그 누구도 엄마를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해 그의 마음을 되돌리기도 하고, 은호 일이 자신 때문에 벌어졌다 자책하는 민성에게 “너의 잘못은 은호가 당할 폭력을 외면한 것” 딱 거기까지라며 “네 탓이 아니다”라고 위로해주는 인물이다. 그러면서 백상호 앞에서는 무섭도록 냉철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아무도 모른다>가 스릴러이면서도 따뜻함이 느껴지고, 분노하게 되면서도 먹먹해지는 건 이 드라마의 완성도 높은 대본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이 모든 걸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 전해준 김서형이라는 배우의 진가 덕분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몹시도 진실이 궁금해졌고, 그 궁금증을 따라가다 만난 진실 속에서 분노했으며 먹먹해졌다.(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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