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김제동과 김구라를 호명했나

연예인의 프로그램 하차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가장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개편의 목적이기도 한 프로그램의 쇄신을 위해 출연자를 교체했으리라는 것이다. 김제동이 '스타골든벨'에서 하차하게 된 것에 대해 방송사측에서 내세우는 명분은 이 정상적인 이유이지만 실상을 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스타골든벨'은 10% 이하의 시청률에 머물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그다지 좋은 성적표는 아니다. 이 프로그램이 이 정도의 시청률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것은 이 프로그램의 형식이 이제는 조금 낡은 과거의 것으로 여겨진다는데 있다. 즉 프로그램의 쇄신이 필요했다면 형식 자체를 고쳤어야 옳다. 김제동을 지석진으로 교체한다고 해서 프로그램이 쇄신되지는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절차상의 문제도 석연치 않다. 사전에 충분히 이야기하고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단 며칠 전에 통보하는 식은 절차상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혹자들은 이것이 실제로 방송가에 공공연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적어도 절차라도 정상적이었다면 구태여 이런 잡음 따위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여러 가지 석연찮은 교체의 이유 때문에 김제동의 하차는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김제동이 가진 대중적인 인지도에 정치적인 목적이라는 시선이 부가되자 이 상황은 정치권의 공방으로 이어졌다. 연예인의 정치 참여에 대한 이슈로 옮아간 것이다.

사실 연예인이 어떤 정치적인 발언을 하던 간에 그것은 한 국민의 소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네 정치 속에서 연예인이란 일종의 얼굴마담처럼 정치권이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은 아무런 정치적 의도가 없고 그저 인간적인 마음에서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늘 정치권에서 아전인수되는 경향이 짙다.

연예인과 정치권이 연루되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연예인이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져 희생양이 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은 바로 정치권이 연예인을 보는 시각을 잘 말해준다. 따라서 연예인의 정치참여는 대부분의 유경험자들이 말하듯이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다. 연예인이 자기의 일을 접어두고 아예 정치인이 되겠다고 나서기 전에는 말이다.

김제동의 '스타골든벨' 하차와 손석희의 '100분 토론' 하차를 두고 야권에서 들고 나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국정감사에서 여권이 내민 카드는 이른바 '막장, 막말 방송'에 대한 비판이다. 막장드라마와 막말 예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극으로 치닫는 현 방송 문화에 있어서 어찌 보면 이러한 지적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사안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면 이것 역시 연예인을 앞세운 정치 공방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진성호 의원이 구체적으로 김구라를 지칭하며 퇴출하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좁은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막장, 막말 방송'의 문제는 그 방송을 내보내는 방송사와 제작하는 제작자가 가져야 될 윤리적인 문제이지, 김구라라는 한 연예인이 책임지고 퇴출되어야 할 그런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역시 이 사안에서도 연예인들은 어떤 본보기나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진 느낌이 있다. 김제동의 경우를 보든, 김구라의 경우를 보든 어떤 정치적인 사안으로 비화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은 심한 소외를 겪는 양상을 보여준다. 연예인이 정치에 참여해 피해를 보았다거나, 정치가 잘못된 방송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특정 연예인을 거론하고 나서는 상황을 보면서 그 사안이 옳던 그르던 어딘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비판을 하는 이들이 정치인들이라는 점은 그 비판에 대해 공감할 수 없게 만든다. 막말과 막장이라고 하면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과연 모르고 있다는 얘기인가. 적어도 연예인들은 즐거움이라도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 아닌가. 연예인들이 정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여권이나 야권이나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연예인의 이름이 정치적 목적으로 여기저기서 호명되는 것이 불편할 따름이다.

대결토크쇼 '절친노트', 김구라에서 이경규로

'절친노트'가 패러디한 것은 영화 '데스노트'. 그 노트 위에 이름을 적으면 그 당사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데스노트'가 가진 신적 권위의 스토리텔링을 끌어온 '절친노트'는, 그 힘으로 사이가 나빠진 연예인들을 절친으로 만드는 갖가지 미션을 수행하게 만든다. 따라서 초창기
'절친노트'를 그 자체로 상징화하는 것은 그 메인MC를 맡았던 김구라와 문희준이었다. 김구라의 독설과 그 독설의 피해자였던 문희준은 '절친노트' 속으로 들어와 절친이 되는 모습을 리얼로 보여줌으로써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심어주었다.

이 당시 '절친노트'의 구조는 먼저 몹시 불편한 관계의 인물들이 만남을 통해 당시의 사건들(?)을 환기시키고, 노트가 시키는 대로 절친의 미션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가까워지게 만들며, 결국 속에 있던 앙금을 털어내는 그 과정을 보여줬다. 이것은 김구라가 가진 캐릭터의 힘을 프로그램화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독설의 김구라가 절친의 손을 내민다'는 그 스토리는 현재의 리얼 토크쇼가 요구하는 양면성, 즉 어색한 관계의 폭로와 변화해가는 마음을 보여주는 진정성의 리얼리티를 충족시켰다. 폭로와 감동이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요소는 이렇게 '절친노트'라는 틀 속에 들어와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불편한 관계의 인물들(연예인들)이 한정적이라는 데 있었다. 따라서 '절친노트'의 스토리는 조금씩 유화되어갔다. 몹시 불편한 관계는 어색한 관계로 격하되었고, 만남은 그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친해지기를 독려하는 과정으로 바뀌었다. '절친하우스' 같은 코너는 우리가 흔히 겪는 MT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절친노트'가 변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초창기 강한 토크를 선보였던 '절친노트'의 위기였는지도 모른다. 김구라의 독설가 캐릭터는 '절친노트'의 아이콘으로 작용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화해쪽으로만 기울게 됨으로써 토크쇼를 점점 밋밋하게 만들었다.

'절친노트2'가 김구라 대신 그 중심에 이경규를 세운 것은 여러 모로 의미가 있다. 이것은 김구라의 '절친노트'에서 이경규의 '절친노트'로의 이행이다. 여기서 이경규는 김구라가 하지 못했던 토크를 선보인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경규 특유의 대결토크다. 김구라처럼 원죄(?)가 없는 이경규는 출연진들을 노골적인 대결의 장으로 끌어낸다. 그 토크쇼에서 이경규는 토크에 불을 지르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때로는 옆자리에서 특유의 깐죽 토크로 대결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그 스스로 토크에 뛰어들어 분위기를 한껏 격앙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 속의 '절친파이터'는 이 촉매제 역할을 하는 이경규가 단연 돋보이는 코너다.

이경규가 메인으로 서면서 '절친노트'는 게스트 섭외에 있어서 그만큼 폭이 넓어졌다. 비교적 연령대가 높은 연예인들은 물론이고 어린 아이돌들도 이경규라는 캐릭터는 좀 더 쉽게 요리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그것은 연배가 갖는 자연스러움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토크가 갖는 폭로의 수위도 높아졌다. 후배 연예인들의 폭로 앞에서 쩔쩔 매는 이경규의 모습은 이제 이 프로그램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었다. 폭로를 통한 권위적인 모습의 해체는 대결토크가 갖는 자극적인 맛을 절친이라는 과제로 되돌리는 역할을 해준다. 김구라의 '절친노트'가 보여주었던 어색함의 리얼리티는, 이경규로 와서 솔직함의 리얼리티로 바뀐다.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것이 이경규의 '절친노트'가 가진 새로운 스토리다.

김구라에서 이경규로 바뀐 '절친노트'는 따라서 이제 좀더 안정된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경규의 절친노트는 김구라가 가진 독설의 아이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저 '무릎팍 도사'가 갖는 대결토크쇼의 대세를 끌어들였다. 토크가 갖는 폭로의 강도도 높아졌고, 그걸 통해 서로의 마음이 열리고 소통하게 되는 감동의 강도도 덩달아 높아졌다. 한때 김구라의 전성시대를 아이콘화 했던 '절친노트'는 이제 이경규를 그 자리에 세워놓고 있다. '절친노트'의 등장과 그 변화가 토크쇼의 변화와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어쩌면 이경규의 부활과 새로운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친노트’의 김구라 vs 토크쇼의 김구라

‘절친노트’에 출연하는 김구라는 한 때 자신의 독설로 소원해졌던 문희준과 함께 화해의 모습을 넘어 절친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김구라는 작년부터 자신의 독설로 피해를 보았던 연예인들에게 잇따라 사과를 해왔고, 그것은 ‘절친노트’의 기획의도 자체가 되었다. 독설과 화해의 당사자들인 김구라와 문희준은 함께 MC로 자리했고, 그들이 했던 절친을 위한 사과와 화해는 프로그램의 형식이 되었다.

절친과 독설의 김구라
김구라는 작금의 쇼들이 가진 직설어법의 살아있는 캐릭터다. 작년 한 해 김구라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김구라 자신이 말했듯이 지금 예능이 자신 같은 캐릭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직설어법을 김구라와 예능 프로그램 사이에 두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은 김구라화되었고, 김구라는 예능 프로그램화되었다.

그런데 리얼리티와 진정성을 앞세운 ‘절친노트’에서 김구라가 화해의 따뜻한 면면을 드러내려 노력할 때, 다른 한편에서 ‘라디오스타’나 ‘명랑히어로’에 출연한 김구라는 잇따른 막말로 파문을 일으켰다. 홍석천 관련 멘트는 성 소수자 비하라는 논란을 낳았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언급하며 끄집어낸 이대근, 마흥식 관련 발언도 부적절했다는 여론을 만들었다. 모두 리얼을 강조하는 이들 프로그램들 속에서 김구라는 절친과 독설의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도대체 어느 것이 김구라의 진짜 얼굴일까. 그것은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리얼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그것 역시 캐릭터라는 이름으로 연기되어지는 작금의 예능 프로그램 상황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특유의 독설 캐릭터를 가진 김구라를 예능 프로그램들이 소비하는 방식의 두 얼굴이다. 그렇다면 이 독설과 화해의 프로그램들은 과연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는 있는 걸까.

김구라의 홍석천 언급이 말해주는 것
인터넷 매체의 진짜 독설의 김구라가 지상파로 나왔을 때 그는 그 상업적 속성 때문에 본연의 아우라(?)를 상당부분 휘발시켰다. 왕비호(윤형빈)가 독설을 통해 오히려 호명된 연예인의 가치를 높이듯이, 김구라의 독설도 자기 스스로가 주장하듯(그가 아니면 누가 한물 간 연예인을 탑 프로그램에서 다시 거론하겠는가!) 조금씩 호명의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이 부분에서 쇼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독설과 절친은 어쩌면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얼굴처럼 보인다. 김구라가 홍석천을 언급했을 때, 성 소수자에 대한 비하의식이 그 말 속에 숨겨져 있다고 여론이 들끓었지만, 그가 홍석천을 언급하기 전까지 홍석천은 철저히 대중들로부터 커밍 아웃한 성 소수자로서 외면 받아왔다. 이것은 홍석천에 대한 이중적 시각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김구라는 홍석천과 절친한 사이라고 했고, 그래서 스스럼없이 농담을 던졌을 수도 있다. 김구라의 발언은 물론 부적절한 것이지만(사실은 편집을 하지 않은 제작진의 문제가 더 크다), 홍석천에게 진짜 형벌은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호명조차 되지 않는 자신의 상황이지 않을까.

‘절친노트’의 두 얼굴
“우리는 절친입니다.” 처음 만난 연예인들이 서로 질문과 답변을 하다가 서로 어색해지면 부르는 ‘절친노트’의 절친송. 이 노래는 이중적이다. 처음 만난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꽤 직설적이다. 김국진은 늘 그렇듯이 이혼한 사실에 대한 질문으로 공격을 받는다. 어떤 논란이나 궁금증을 갖게 했던 연예인이라면 바로 거기에 대한 질문이 날아가고 한 번으로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집요하게 그 질문은 계속 반복된다.

이 절친송의 형식은 그 질문-답변 구조만을 보면 여느 직설적인 토크쇼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분위기만은 정반대다. 그것은 이 노래의 후렴구로 달라붙어 있는 “우리는 절친입니다”라는 선언(?)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노래의 취지에 ‘친해지기 위한’이라는 전제가 붙기 때문이다. 탤런트 김동현이 나왔을 때, 김국진은 막말에 가까운 말들로 그와 절친하지 않는 관계 설정을 만들었다(이 절친하지 않은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프로그램의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이 과감하고 지나치게 솔직한(?) 질문과 답변의 자극성은 바로 그 절친이라는 태도로 인해 상쇄된다.

쇼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독설과 절친의 얼굴은 상반되어 보이지만 사실 그 속내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는 않다. 단지 쇼가 직설어법을 어떤 식으로 소비하느냐는 태도에 따라 달라 보일 뿐이다. 김구라는 바로 그 달라진 쇼 프로그램의 형식 속에서 제대로 소비되는 프로로서의 캐릭터일 뿐이다. 따라서 김구라로 대변되는 독설과 절친의 얼굴은, 김구라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현재 쇼 프로그램들이 가진 직설어법 성향을 드러내주는 얼굴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쇼 프로그램들은 지금 절친송을 부르고 있는 중이다. 자극적인 질문과 답변을 직설어법으로 풀어낸 후, “우리는 절친입니다”라는 후렴구를 붙여서.

토크쇼에서 퇴조한 독설, 무대개그로 옮겨가는 이유

한때 토크쇼의 대세처럼 보였던 독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경규의 버럭이 사라진 지는 오래고 박명수의 호통은 기력 빠진 아버지의 지청구처럼 힘이 빠진 지 오래다. 독설의 대명사처럼 자리잡았던 김구라는 잇단 사과방송을 통해 유한 이미지를 또한 획득했다. ‘라디오스타’같은 프로그램에서 김구라는 번번이 신정환에게 당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이른바 독설에 균형을 잡아갔다. 그의 독설은 과거의 그것처럼 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독설은 토크쇼가 아닌 무대개그에서 번창(?)하고 있다. 무대개그에서 왕비호(윤형빈)는 자타가 공인하는 현재의 독설가로 자리잡았다. 비슷한 유형으로 세 명이 나와 번갈아 가며 서로가 독하다고 과시하는 ‘독한 놈들’은 왕비호의 그 성공전략에 영향을 받은 코너다. 한편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은 이 독설을 연예계가 아닌 타 분야로 넓힌 사례다.

이처럼 독설이 토크쇼에서 점차 사라지고 무대개그 속으로 편입되는 이유는 무얼까. 그 해답은 왕비호의 그 특유한 의상에서 찾아질 수 있다. 딱 붙는 반팔 쫄티에 핫팬츠를 입고 등장하는 왕비호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연기하는 캐릭터다. 즉 왕비호의 독설은 일상의 리얼한 토크 속에서 우연히 던져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짜여진 틀 속에서 준비되어진 독설이다.

대본으로 준비된 독설에 사적인 감정은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다. 물론 다른 토크쇼 속에서도 김구라 같은 독설가가 사적인 감정을 실어 독설을 퍼부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리얼 토크쇼의 형식상 그의 독설은 사적인 감정까지도 리얼로 포장되곤 한다. 반면 무대개그 속에서의 왕비호는 이 사적 감정을 배제할 수 있는 안전막을 여러 겹 갖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무대, 비일상적인 의상, 분장 같은 것이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독설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웃음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권위적인 것이 독설로 인해 유쾌하게 해체됐을 때, 그 이완감 속에서 우리는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 독설이 웃음의 목적을 넘어서서 실제로 타인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게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된다. 무대를 넘어서서 현실까지 영향을 주는 개그 프로그램의 독설은 웃음이 아닌 불쾌감을 주게 된다.

방송에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독설은 토크쇼 어디에서든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회는 그 독설을 받아들일 만큼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경기침체로 인해(이것은 연예계도 마찬가지다) 그런 여유는 사라져버렸다. 여유 있는 자에게 날리는 독설은 그 자체가 관심의 표현으로 변모할 수 있지만, 여유조차 없는 자에게 던져지는 독설은 그 자체가 칼날이 된다. 왕비호가 톱스타들만 그 독설의 도마 위에 올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왕비호의 독설에는 정해진 룰이 있다. 그 독설은 그 틀 속에서 대중들과 웃음을 나누기 위한 어떤 게임일 뿐, 진짜 속내를 드러내는 독설은 아니다. 한번 웃고 나면 그뿐, 앙금이 남지 않는 독설. 그것은 어쩌면 이제 더 이상 독설이 아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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