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디슈’, 두 시간이 쫄깃한 남북 공조 소말리아 탈출기

모가디슈

류승완 감독의 신작 영화 <모가디슈>는 먼저 그 제목부터가 호기심을 유발한다.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 1991년 그 곳에서 벌어진 내전을 소재로 했다. 한국영화가 한국도 아닌 해외 배경으로, 그것도 아프리카라는 공간을 소재로 가져온 것만으로도 색다른 그림과 스토리가 기대될 수밖에 없다. 영화 시작부터 부감으로 보여지는 모가디슈의 이국적인 풍광은 그 곳에서 벌어질 대혼전을 예고하며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이 배경 위에 남북한의 외교 총력전이라는 대결구도를 세워두니, 영화는 더욱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이역만리의 땅에서 벌어지는 대한민국 대사관과 북한 대사관 사이의 치열한 외교전이 그것이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으로 국제사회에 발을 디딘 한국이 UN회원국으로 가입하기 위해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한 표를 얻으려 하고, 이미 이전부터 그 곳에서 입지를 마련하고 있던 북한 대사관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 하지만 이 남북 대결 구도는 내전이 벌어지면서 생존을 위한 ‘협력’의 구도로 바뀌게 된다. 

 

이쯤 되면 떠오르는 게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남북 간의 분단을 넘은 우정 이야기 같은 것이다. 실제로 <모가디슈>에서 한국 대사관 한신성 대사(김윤석)와 북한의 림용수 대사(허준호)는 외교전 속에서 티격태격하지만 생존상황을 맞이하면서 ‘휴머니즘’을 드러내는 인물들이다. 물론 각자 자국을 대표하는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는 그들은 쉽사리 선을 넘지 않는다. 하지만 음식을 나눠 먹고, 탈출하기 위해 저마다의 루트를 통해 타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서로를 챙기려는 인간애를 발휘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들의 구도로 보면 <모가디슈>는 자칫 섣부른 신파적 감정을 끄집어낼 수 있는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이 작품에서 감정 과잉을 유도하는 신파적 장면들을 되도록 배제하고 절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 함께 협력하며 탈출해야 하는 남북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과잉된 정을 담는 식의 설정 또한 피한다. 

 

대신 <모가디슈>는 마지막까지 어쩔 수 없이 협력을 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남북 간의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게 가능해진 건 한신성 대사를 돕는 안기부 출신 정보요원 강대진 참사관(조인성)과 북한의 림용수 대사를 돕는 태준기 참사관(구교환)의 팽팽한 대결구도 때문이다. 북한 대사관이 약탈당하고 갈 곳이 없어 한국대사관에 의탁하게 되는 그 상황 속에서 이 두 사람은 각자 서로 다른 의중으로 대결한다. 즉 강대진은 이들을 ‘망명자’로 만들려고 하고, 태준기는 아예 한국대사관을 무력으로 장악하려 한다. 이 팽팽한 대결구도가 있어 한신성과 림용수 사이에 만들어지는 화해적 분위기와 균형을 이루면서 지나친 ‘신파 구도’의 위험성을 벗어나게 된다. 

 

류승완 감독은 소말리아에서 벌어진 이 내전 상황을 마치 실제처럼 영화로 재현해낸다. 모로코에서 100% 로케이션으로 찍은 영화 속 장면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실제로 내전의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은 실감을 준다. 긴장감 가득한 내전의 풍경 속에서 가장 섬뜩한 건 아이들마저 마치 장난감총이나 되는 듯 소총을 들고 위협하고 총을 허공에 쏘아대는 장면이다. 내전이라고 하지만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폐허가 된 도시 풍광이나 그 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은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실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던가를 잘 표현해낸다. 

 

또한 흥미로운 건 <모가디슈>를 통해 류승완 감독이 보여준 색다른 액션이다. <모가디슈>는 결국 탈출기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공격하는 액션이 아니라 방어하고 도망치는 액션에 집중되어 있다. 추격하는 반군과 정부군의 총격을 피해 도주하고, 위험천만한 상황들 속에서 빠져나가는 그 과정들이 마치 실제 관객이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실감으로 전해진다. 

 

김윤석, 허준호 그리고 조인성의 연기는 이러한 실감을 몇 배로 몰입하게 해주는 힘을 발휘한다. 게다가 이 작품의 발견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구교환의 존재감은 특별하다. 이 영화가 신파로 흐르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은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었던 데는 구교환의 날 선 연기가 한 몫을 했다고 말하고 싶다. 이밖에도 정만식, 김소진, 김재화, 박경혜 같은 현실감을 채워주는 연기자들이 있어 <모가디슈>의 완성도는 더욱 높아졌다. 

 

한 마디로 <모가디슈>는 ‘선수들이 만든 작품’이다. 현지 로케를 통한 당시 상황의 완벽한 재현과 류승완 감독의 균형감 넘치는 연출 그리고 배우들이 제공하는 몰입감으로 두 시간이 순삭되는 액션과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코로나19로 극장 관객이 대폭 줄어든 상황이지만, 영화관에서 보길 권한다. 그래야 그 실감이 200% 느껴질 작품이니까.(사진:영화'모가디슈')

‘남한산성’이 촉발한 정치권 공방, 예나 지금이나...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치욕적인 삶은 살지 말아야 한다. 살아야 비로소 대의도 명분도 있다.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청의 대군에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당시 척화파였던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과 주화파였던 최명길(이병헌)이 치열하게 벌인 논쟁을 다뤘다. 유독 추웠던 그 해 겨울,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청군이 오기도 전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판이었다. 청군들은 칸이 직접 오는 시기에 맞춰 남한산성을 총공격할 준비에 들어간다. 

사진출처 : 영화 <남한산성>

인조(박해일)는 김상헌의 주장도 최명길의 주장도 허투루 들을 수가 없다. 한 나라의 군주로서 쉽게 무릎을 꿇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죽어가는 백성들과 군사들을 대의명분을 따지며 버티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살 수 있는 ‘말의 길’을 항상 열어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최명길을 통해 청과의 화친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김상헌을 통해 청과 맞서 일격을 가할 기회를 엿본다. 

공교롭게도 <남한산성>이라는 영화가 가져온 역사의 한 대목이 지금의 북핵 위기에 놓여진 우리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현 정치권의 여야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는 상황은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결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박원순 서울시장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영화 <남한산성>을 빗대 벌인 공방은 당시나 지금이나 갈리진 여야의 대립을 고스란히 재연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은 “얼마든지 외교적 노력으로 사전에 전쟁을 예방하고 백성의 도탄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민족의 굴욕과 백성의 도륙을 초래한 자들은 역사 속의 죄인이 아닐 수 없다”며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들이 잘못된 현실 판단과 무대책의 명분에 사로잡혀 임진왜란에 이어 국가적 재난을 초래한 것”이라고 영화 관람 후기를 남겼다. 

홍준표 대표는 “나라의 힘이 약하고 군주가 무능하면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 된다는 것을 새삼 알게됐다”며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고 전란의 참화를 겪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무능과 신하들의 명분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박원순 시장이 영화를 빗대 외교적 해법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한 반면, 홍준표 대표는 이 영화를 통해 ‘안보무능’ 프레임을 꺼내든 것. 

같은 영화, 나아가 같은 역사지만 그걸 보는 관점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너무나 다르다. 물론 영화 속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은 서로 입장은 달라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예우를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은 최명길이 얘기한대로 칸 앞에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인조에게 김상헌 같은 충신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자신은 영원히 역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입장이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영화 한 편을 놓고도 정치 공방을 벌이는 여야는 과연 어떨까. 영화 속 인물들처럼 저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이런 서로 다른 논평들을 내놓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정치적 대결을 위해 영화 한 편을 두고도 ‘아전인수’의 입장을 내놓는 것일까. 

영화 속에는 그러나 흥미롭게도 역사에 남은 실존인물들만이 아닌 날쇠(고수)라는 민초가 등장한다. 남한산성 마을 안에 자리한 대장간의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날쇠는 이러한 외세의 침략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조정대신들의 날선 말의 대결들 속에서 결국 죽어가는 건 민초들이라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다. 

농사를 짓기 위한 낫을 만들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낫을 무기로 들게 되지만 그의 말대로 민초들이 원하는 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봄에 씨 뿌려 가을에 거둬 추운 겨울을 날 수 있으면 되는 평범한 삶일 뿐이다. 그 작은 민초들의 삶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저들의 치열한 논쟁들이 바로 이 날쇠라는 인물 앞에서 너무나 허망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래서 결국 전쟁 속에서도 또 치열한 정쟁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또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가장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건 다름 아닌 민초들이다. 그 누구도 전쟁을 원치 않았고 그 누구도 대단한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굶지 않고 추위에 얼어 죽지 않을 정도의 삶을 원했을 뿐이다. <남한산성>은 그래서 최명길과 김상헌의 팽팽한 설전만큼 날쇠라는 인물의 한 마디가 더 큰 울림으로 남는 영화다. 전쟁이니 화친이니를 주장하기 전에 날쇠 같은 보통의 서민들을 먼저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는지.

<검은 사제들>, 밋밋한데도 이토록 몰입시킬 수 있는 건

 

영화 <검은 사제들>은 이야기가 복잡하지 않다. 전형적인 장르영화의 틀을 갖고 있고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다. 다만 특이한 건 오컬트라 불리는 이 영화의 장르적 특성이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 그 중에서도 악령 같은 주로 서구의 문화적 배경에서 자리를 잡은 장르다. <오멘>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영화들이 그 범주에 속한다.

 


사진출처:영화<검은사제들>

우리에게도 오컬트적 소재들은 어쩌면 서구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많은 무당들의 접신 이야기가 그렇다. 최근에 상영됐던 <손님>이나 <그 놈이다> 같은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무당 소재의 오컬트적 요소들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검은 사제들>이 다른 점은 악령을 퇴치하는 방식으로서 사제들의 활약을 거의 변형함이 없이 그대로 그려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한국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 있기 때문에 무당 같은 우리 식의 해석이 살짝 들어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검은 사제들>은 거의 오컬트 장르의 공식 그대로를 잘 살려내고 있다.

 

오컬트 장르의 이야기 구조는 초자연적인 사건(악령의 출연 같은)이 벌어지고 이를 추적하는 사제가 있으며 누군가의 몸속으로 들어간 악령을 우여곡절 끝에 그 사제가 끄집어내는 그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단순하다. 실제로 이 영화는 후반부의 반 정도를 한 공간에서 악령과 싸우는 사제들의 이야기로 채워 넣는다.

 

이 정도면 조금은 밋밋하게 여겨질 법도 한데 절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영화가 어떤 곁가지로 흐르거나 복잡한 스토리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굉장한 집중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해진 건 끊임없이 관객을 불안감으로 몰아넣는 감독의 연출력은 물론이고 김윤석과 강동원 그리고 박소담이 이끌어내는 놀라운 연기력 때문이다. 감독은 제대로 판을 벌렸고 그 위에서 김윤석과 강동원 그리고 박소담은 제대로 놀았다.

 

김윤석과 강동원의 케미는 이미 <전우치>에서도 본 바 있지만 이 작품에서 더 폭발하는 듯하다. 이 두 사람은 브로맨스의 느낌마저 주는데 악령을 퇴치하는 전면에 나서있는 김신부(김윤석)가 영화의 어떤 추진력과 안정감을 부여한다면 그를 보조하는 최부제(강동원)는 관객들이 빙의될 수 있는 친숙함을 준다. 결국 관객은 최부제에 몰입하고 김신부라는 가이드를 통해 오컬트의 현상 속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즉 강동원이 최부제라는 캐릭터를 통해 관객에게 어떤 두려움과 공포감을 부여한다면 김윤석은 김신부를 통해 그 두려움을 헤치고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김윤석과 강동원의 연기야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것이지만 <베테랑><사도>를 거쳐 차근차근 필모그라피를 쌓아가고 있는 박소담의 신들린연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영화에서 연기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 될까. 물론 작품에 따라 다르겠지만 <검은 사제들>의 경우에는 연기자 비중이 상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연기할 수 있게 연출이 판을 깔아준 덕이지만 이 영화에서 김윤석과 강동원 그리고 박소담의 지분은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다



<해무>, 부족한 스토리도 채워 넣는 미친 연기들

 

우린 이제 한 배를 탄 거여.” 영화 <해무>에서 전진호의 갑판장 호영(김상호)은 동요하는 선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대사는 이 영화의 상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 배를 탄 사람들이라는 상징을 <해무>는 영화적 상황을 통해 재연해낸다.

 

'사진출처: 영화 <해무>'

IMF라는 시대적 설정과 전진호는 그래서 당대의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그려진다. 감척사업 대상이 되어 배를 잃게 될 선장과 선원들. 그래서 고기로 채워져야 할 배가 조선족 밀항자들로 채워지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영화의 시작부분은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심성보 감독의 세세하고도 다이내믹한 연출이 돋보인다. 전진호 선장과 선원들의 노동과 일상을 카메라는 거칠고 녹이 슬어버린 갑판의 풍경과 그것을 그대로 닮아버린 인물들을 훑어나가며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힘겨워도 훈훈한 그 정경 속에는 바다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밀항자들을 태우기 위해 바다로 나가는 배에서 이 인물들은 저마다의 욕망 하나씩을 끄집어낸다. 선장인 철주(김윤석)는 배에 집착하고, 늘 선장을 따르던 갑판장 호영은 철주의 명령에 집착하며, 쫓기는 신세로 전진호에 숨어 지내는 기관장 완호(문성근)는 사람의 목숨에, 롤러수인 경구(유승목)는 돈에, 그리고 선원 창욱(이희준)은 여자에 집착한다. 그리고 막내 선원인 동식(박유천) 역시 사랑에 집착한다.

 

이 집착적인 욕망은 그러나 전진호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사건들로 인해 하나씩 파국을 맞게 된다. 극한의 상황에 몰린 그들에게 엄습해오는 해무(바다안개)처럼 그 가려진 시야 속에서 숨겨져 있던 끔찍한 욕망의 흔적들이 스멀스멀 갑판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그 욕망은 그들 스스로를 잡아먹는 괴물로 돌변한다.

 

극단 연우무대의 연극 원작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영화는 바다를 향해 나가면서도 전진호라는 폐쇄적 공간을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의 이야기는 그래서 마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연극적인 요소들은 영화를 기대하는 관객들에게는 낯설게 다가오기도 한다. 갑자기 서서히 고조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갑자기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급작스러움은 그래서 이 영화의 흠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시종일관 긴장되게 바라보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전진호 위에서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연기를 선보인 연기자들이다. 김윤석은 그 묵직한 존재감으로 전진호의 중심을 끝까지 잡아가고, 김상호, 이희준, 문성근, 유승목은 진짜 선원들이라 여겨질 정도로 영화의 미친 몰입을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건 박유천과 한예리의 결코 약하지 않은 연기의 존재감이다. 박유천은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온전히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연기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될 것 같다. 또한 조선족 처녀 역할을 놀랍도록 연기해낸 한예리 역시 이 베테랑들의 호연 속에서도 결코 퇴색함이 없는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2001년에 있었던 제7태창호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원작이지만 세월호 참사를 겪어서인지 <해무>는 훨씬 더 불편한 느낌을 선사한다. 선원들을 극한으로 내모는 현실은 다름 아닌 돈이다. 그 돈 몇 푼을 위해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바다 한 가운데 던져버리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래서 <해무>라는 제목처럼 안개에 가려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현실과 그 속에서 자행되는 폭력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해무>는 지나친 상징과 의미화에 집착함으로써 조금은 허무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보여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조금은 무게감을 갖는 영화로 현실을 반추해보고 싶은 관객이라면 나름대로의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 특히 연기자들의 미친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요소다. 박유천의 연기를 재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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