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의 <피에타>가 보여주려는 것

 

“돈 받아오라고 했지. 병신 만들라고 했어? 인간백정 같은 놈...” 김기덕 감독의 새 영화 <피에타>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돈을 뜯어내며 살아가는 강도(이정진)에게 그의 고용주(?)는 이렇게 말한다. 고용주의 말대로 강도는 빌려간 돈을 받아내기 위해(이자가 무려 열배에 가깝지만) 청계천 공장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을 보험에 들게 하고는 손목을 절단하거나 다리를 부러뜨리는 식으로 돈을 갚게 한다. 말 그대로 인간백정 저리 가라 하는 인물이다.

 

'피에타'(사진출처:김기덕필름)

<피에타>가 이 인간백정을 내세운 것은 돈이라는 기괴한 장치가 만들어내는 자본의 폭력과 추악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고용주는 강도에게 돈을 받아오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는 자기 알 바가 아니다. 돈이라는 장치 뒤에 숨어 있기 때문에, 강도를 시켜서 자신이 저지른 죄는 숨겨지고 체감되지 않는다. 즉 돈을 받아내기 위해 병신을 만든 건 강도의 짓이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것.

 

이 짧은 장면은 자본이 만들어내고 있는 세상의 끔찍한 풍경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준다. 자본의 세상에서 모든 것을 치환시켜주는 돈이란 괴물은 모든 단면들을 말끔하게 만들어버리는 속성이 있다. 영화 속 자살을 결심한 한 사내가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계단에서 이제 사라져버릴 청계천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그저 죽기 직전의 넋두리가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었던 그 공장들은 자본에 의해 말끔하게 밀어내지고 저 멀리 세워진 빌딩들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것이다. 마치 한 노동자의 손목이 말끔하게 잘려져 버리는 것처럼.

 

그 땅에서 살아온 노동자들은 한 때 과도하고도 조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제 손목을 자본의 제물로 바치곤 했다. 지금의 자본의 풍경이 세워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 무덤들이 세워졌던가. 하지만 이 풍경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이제 누군가는 돈을 갚지 못해 손목을 대신 저당 잡히고, 또 어떤 누군가는 태어나는 자식 앞에서 해줄 것 하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스스로 손목을 자른다. 그것으로 받아낼 수 있는 보험금으로나마 자식에게 이 손 무덤의 노동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결국 이 말도 안되는 폭력을 가능하게 하고, 심지어 죄의식조차 없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돈이다. 저 강도의 고용주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돈 뒤에 숨어서 “그저 돈을 받아오라고 한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그것도 자신이 빌려준 돈을. 이것은 강도가 그 잔혹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으려고 한 그들이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돈이 모든 것의 가치척도가 되는 세상의 풍경이다. 돈을 빌려준 자는 받는 것이 정당하고 빌린 자는 갚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모든 게 정당화된다.

 

돈의 논리가 지상가치가 된 세상에서는 죽음이 만연하지만 그 죽음은 돈 뒤에 가려진다. 자본이 자연을 인공으로 채울 때, 생명은 죽어나가기 마련이 아닌가. 나무들이 뽑혀져 나간 후에야 그 위에 건물이 세워진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안에 살아가던 생명들은.

 

<피에타>는 원경에서 보면 스카이라인과 랜드마크로 웅장하게 보이는 그 말끔한 도시의 빌딩이 주는 안온함을 들춰내고, 근경으로 다가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폭력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영화다. 말끔한 도심의 이면에 놓여진 쓰레기더미와 비닐하우스촌, 방치되고 버려지는 공장의 기계들, 그 기계에 기대 살아가던 이들이 이제 그 기계에 제 살을 집어넣어야 살 수 있고, 급기야 그 기계에 몸을 걸어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영화다.

 

<피에타>는 바로 이 자본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또 한 축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것은 모성에 대한 이야기다. 마치 구원처럼 다가오는 모성은 과연 이 폭력을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그래서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 영화는 폭력으로 대변되는 남자와 모성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대결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양극화의 끝단이 만들어낸 자본의 살풍경이 남자와 여자로 표상되는 폭력과 모성의 대결로 다뤄진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피에타>는 우리 모두가 돈이라는 자본의 장치에 얽매여 살아가면서 보지 못했던(어쩌면 보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돈 저편의 세계를 불편한 진실로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이 저예산 영화가 자본 앞에 처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에 의해 말끔하게 채워지는 멀티플렉스들 그 이면에 놓여진 작은 영화들의 절규. 영화 속에서 자살을 택한 한 젊은 청년이 일기장에 마구 거칠게 적어놓은 것처럼, 김기덕 감독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돈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넌 뭐냐.


이범수와 안재욱, 그 카리스마의 정체

'샐러리맨 초한지'(사진출처:SBS)

'샐러리맨 초한지'에는 유방(이범수)이 세운 팽성실업이란 회사가 등장한다. 팽성실업의 '팽성(烹成)'은 '팽 당한 사람들이 성공을 이룬다'는 뜻이다. 천하그룹의 해고 노동자들을 모아 세운 이 회사의 출범식에서 유방은 두 가지를 약속한다. "딱 두 가지만 여러분께 약속드리겠어요. 여러분들이 열심히 일해가지고 수익이 많이 발생하면요. 그만큼 여러분들하고 수익을 많이 나눠가질 거여요. 그리고 또 하나 형사법에 저촉되는 짓만 안하시면요 여러분들이 절대 부당하게 해고당하는 일 없을 거예요."

아무리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대사라고는 해도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지는 건, 정반대의 현실 속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일 게다. "저도 대기업에 다녀봤지만 우리나라에 이윤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회사가 몇이나 돼요. 거의 없어요. 하지만 우리 팽성실업은요. 이윤보다 사람이 우선예요. 진짜예요. 우리 회사에서 가장 큰 재산이 뭔지 아세요? 뭐 같아요? 기술요? 아녜요. 기술 개발하면 돼요. 제품요? 아녜요. 제품 만들면 되는 거예요. 바로 여러분들이에요. 여러분들이 존재하니까 기술도 개발하고 제품도 만드는 거예요. 우리 회사에서 가장 큰 재산은 바로 여러분들예요."

사장이 이러니 직원들도 다르다. 회사가 투자를 받지 못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봉급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 물론 투자 유치에 성공한 유방은 그 고마운 마음만 받지만, 이런 노사 간의 관계는 이제 심지어 판타지로 여겨지는 현실이다. 그만큼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일자리에 대한 문제는 대중 정서의 가장 큰 밑바닥을 구성한다.

시대극으로서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진 것 같지만, '빛과 그림자'라는 드라마에서도 이런 대중 정서의 단면들이 묻어난다. 빛나라 쇼단의 단원들에게 가장 첨예한 문제는 스타가 되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당장 설 무대, 즉 생계가 보장된다면 뭐든 할 정도로 이들에게 일자리는 중요하다. 강기태(안재욱)가 빛나라 쇼단의 새로운 단장이 되어 이들에게 보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자리다. 그는 단원들의 무대를 확보하기 위해 심지어 캬바레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샐러리맨 초한지'의 유방과 '빛과 그림자'의 강기태가 주인공으로서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일자리' 덕분이다. 강기태는 어떤 식으로든 단원들이 일을 할 수 있게 뭐든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유방은 좀 더 민주적인 방식으로 일자리를 보전해주는 샐러리맨의 판타지를 채워주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두 드라마의 판타지와 인물들의 카리스마를 보면서도 동시에 생기는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이 드라마 속 노동자들의 요구가 가진 소소함 때문이다. 도대체 이들이 뭘 그렇게 대단한 걸 요구했단 말인가. 그저 생계를 위한 일자리가 아닌가. 물론 드라마지만 이 지극히 기본적이고 또 당연한 것들이 하나의 판타지가 되는 것은 그만큼 작금의 현실이 상식적이지 않다는 반증이 아닐는지. 왜 우리네 현실은 기초적인 것까지 판타지로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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