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아빠는 왜 딸 보호에 집착하게 됐을까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이하 동상이몽)>에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딸의 옷차림에 집착하는 아빠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핑크색 옷이 남자들을 자극한다며 딸이 입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막기도 하도, 핫팬츠를 입은 딸에게 심지어 그런 건 쓰레기들이나 입는 것이라고 폭언을 하는 아빠. 통금시간도 8시로 정해놓고 1분만 늦어도 잔소리를 늘어놓는 그는 제아무리 보호 차원이라고 해도 과도하다 싶었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사진출처:SBS)'

하지만 <동상이몽>이 늘 그러하듯이 아빠의 입장을 대변하는 화면에서는 그가 왜 그렇게 과도하게 딸의 보호에 집착하게 됐는가가 드러났다. 딸이 핫팬츠 차림으로 찍어 SNS에 올린 사진을 누군가 캡처해 인터넷에 게시해놨는데 거기에 입에 담지 못할 악플과 음란한 댓글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는 것. 그걸 보게 된 딸이 엄청난 충격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아빠가 그토록 딸의 옷차림에 신경 쓰고 통금시간을 정해 잔소리를 늘어놓은 이유는 바로 그 충격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물론 성격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보다 이처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세상에 아리따운 딸이 노출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큰 불안으로 자리했던 것.

 

<동상이몽>은 물론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너무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짧게 방영된 딸의 사진이 게재된 SNS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이른바 투명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의 저변을 타고 우리에게 일상화되어 있는 셀카 문화는 이 투명사회가 작동하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다. 스스로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과시하듯 드러내는 것이 마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사회. 이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전시되는 가치로서 매겨지기 마련이다. 즉 전시되지 않으면 소외감을 느끼는 사회라는 것.

 

하지만 이렇게 부추겨진 전시는 <동상이몽>이 보여주듯 그 자체로 이상하게 소비되거나 심지어 범죄행위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사생활이 공개된 이도 피해자로 만들지만 누구나 그런 사진 아래 버젓이 자극적인 댓글을 달아야 될 것 같은 환경 속에서 아무 생각없이 댓글을 단 이들 또한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동상이몽>의 아빠는 심지어 이런 내막을 모르고 봤을 때는 너무나 집착이 과도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할 정도로 비춰졌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아빠의 잘못인가. 그런 과도한 집착을 하게 만드는 이 사회의 불안함이 그 진짜 원인이 아닐까. 그 모습이 심지어 병적이라면 정상적인 아빠를 그렇게까지 몰고 간 사회 역시 병적이라는 얘기는 아닐까.

 

<동상이몽>은 결국 아빠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고, 딸 역시 아빠를 사랑한다는 걸 보여줬다. 그렇다면 이들의 갈등을 만들어낸 건 도대체 뭘까. 우리가 매일 같이 당연한 듯 하고 있는 투명사회의 무수한 강령들, 즉 자신을 과시하듯 전시함으로써 존재가치를 인정받거나 그런 전시된 것에 자극적인 코멘트를 다는 것이 하나의 문화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사회가 만들어내는 불안 요소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출만 보이는 스텔라, 노출 마케팅의 함정

 

노출만 보지 마시고 다양한 시선으로 봐 주셨으면 한다.” 스텔라의 여섯 번째 싱글 떨려요언론 쇼케이스에서 막내인 전율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노출이라고 해서 너무 안 좋게만 보일까봐 사실 걱정이 된다.” “여자가 섹시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스텔라는 쇼케이스에서 줄곧 노출에 대한 우려와 입장을 드러냈다.

 


사진=디엔터테인먼트파스칼

쇼케이스에서 보여준 무대 역시 보이는 건 안무였다. 이미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이제는 식상할 만도 할 안무들이 이어졌다.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쑥 내밀고 가슴을 손으로 쓸어 모으는 듯한 동작들이 반복됐다. 아예 무대에 누워 유혹하는 듯한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다. 노래가 끝났지만 무슨 노래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노출의상과 야릇한 동작들만 아른거릴 뿐이다.

 

스텔라의 뮤직비디오는 티저와 스틸컷이 올라온 것만으로도 그 파격적인 노출에 대한 논란이 터져 나왔다. 끈 팬티를 밖으로 드러낸 치파오 의상을 보여준 자켓 이미지가 논란을 일으켰고, ‘떨려요뮤직비디오에서는 전라처럼 중요부위만 가린 여성의 신체가 보여지기도 했다. 쇼케이스에 대해서는 이른바 엉밑살(엉덩이 밑의 살)’ 노출이 화제가 되고 있다.

 

노출만 보지 말라고 하지만, 그 말은 마치 노출을 보라는 말처럼 달리 들린다. 실제로 반라의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 여성 신체의 중요 부위들이 춤 동작이라는 미명 하에 전시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노래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다. 그것은 마치 선정적이기를 작정한 무대에서 배경음악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노출이 가진 양면성은 그 한계 또한 명확히 드러낸다. 물론 스텔라가 이런 화제가 되는 건 2011년 데뷔해 별다른 주목을 못 받다가 작년 마리오네트가 소개되고 나서부터다. ‘마리오네트는 그 노출과 선정성 때문에 세간에 논란을 일으켰다. 스텔라로서는 이런 결과가 무시 못 할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번 과감하게 보여준 노출은 더 큰 자극을 요구한다. 그러니 파격은 계속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노출이 만들어내는 논란과 화제로 주목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들의 걸 그룹으로서의 존재감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시선은 잡아끌었는데 그 관심이 자연스럽게 음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노출은 그저 노출로서 끝날 뿐이다.

 

걸 그룹들이 여름철만 되면 저마다 노출을 콘셉트로 들고 나오는 건 이제 이상한 일도 아니게 되었다. 너도 나도 노출을 하다 보니 오히려 그렇지 않은 콘셉트가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노출을 해도 결국 살아남는 걸 그룹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음악적인 실력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씨스타나 걸스데이, AOA, EXID 같은 걸 그룹을 보면 노출 콘셉트를 갖고 있어도 음악이 들린다. EXID위 아래가 음원차트 역주행을 한 건 그들의 파격적인 안무동작 때문이 아니다. AOA짧은 치마사뿐사뿐같은 곡이 대중들의 귀에 달라붙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스텔라에게서는 안타깝지만 그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 일단 나오기만 하면 노출 논란으로 시끄럽긴 한데 남는 음악이 없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스텔라의 절실함은 이해하지만, 그래서 일단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노출 또한 감수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런데도 노래가 주목되지 않는 건 치명적이다. 이러니 노출만 보지 말라는 말이 이해가 갈 수 있겠는가.



<간신>이 노출을 쓰는 방식은 에로티즘이 아니다

 

파격. 아마도 영화 <간신>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그것은 파격이 될 것이다. 지금껏 연산군의 폭정을 다룬 사극들이 그토록 많이 쏟아져 나왔어도 이처럼 폭력적이고 광기에 휩싸인 연산군은 심지어 낯설게 다가올 정도다. 갑자사화를 짧게 묘사하면서 시작하는 방식은 마치 <글래디에이터><300>의 한 장면처럼 핏빛 폭력을 심지어 경쾌한 터치로 그려낸다. 연산군은 발가벗은 궁녀들이 기묘한 포즈를 취하게 하면서 그걸 그림으로 담아놓는다. 목이 날아가고 팔이 잘려지는 폭력은 살벌할 정도로 리얼하고, 음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노출은 놀라울 정도로 과감하다.

 

사진출처: 영화 <간신>

거의 끝까지 밀어붙이는 듯한 폭력과 노출은 그래서 서로 그 살을 뒤섞으며 기묘한 긴장과 이완을 만들어낸다. 육체와 살은 이 두 감정을 하나로 보여주는 오브제가 되어 피를 튀기거나 흥건한 땀에 젖는다. 때로는 고통의 원천으로도 보이고 때로는 쾌락의 끝으로도 보이는 이 살들은 그래서 어느 비등점을 넘어서면 기묘한 슬픔 같은 걸 드러내기도 한다.

 

연산군이 채홍사를 통해 1만 명의 궁녀들을 끌어 모아 실제로 꾸렸다는 흥청이 망청이 되어가는 과정은 육체에 쓰여진 쾌락과 고통의 기록처럼 보인다. 채워지지 않는 모성에 대한 결핍을 1만 명의 여성들의 살을 통해 채워 넣으려는 연산군의 광기. 그 폭정에 휘둘려 억지로 끌려오거나, 채홍사의 사적 복수에 의해 끌려온 누군가의 여식들, 그리고 가난한 부모가 먹고 살기 위해 팔아치운 자식들은 이 광기 아래 살아가는 백성들의 분신들처럼 보인다. 연산군에 의해 자행되는 육체의 유린은 그래서 권력이 착취하고 유린하는 백성들의 고혈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로운 건 폭력과 노출이 거의 끝까지 밀고 나갈 정도로 파격적이지만 그것이 그리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파격적인 성행위를 선보이지만 그것은 마치 현대무용의 한 장면처럼 육체의 퍼포먼스로 보이고, 실제로 이런 장면들 앞에서 연산군은 그것을 화포에 그림으로 담아내는 예술적 행위에서 오히려 더 쾌감을 느낀다. 즉 이들의 성적 행위들은 에로틱하다기보다는 무언가 예술적인 표현을 위해 구성된 행동처럼 다뤄진다.

 

그래서 그 동작들은 힘겨운 백성들의 삶을 표현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권력자 앞에서 피를 튀기며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검투사들처럼, 온 몸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파이널 매치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왕의 여자가 되려 싸우는 여자들의 육박전은 슬픔이 묻어나고 때로는 그들을 각성시키기도 한다. 검투사들이 그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과정을 거치며 반란을 꿈꾸게 되듯이.

 

<간신>은 그래서 폭력과 노출 수위만을 두고 보자면 대단히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그 폭력과 노출이 에로티즘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 상업적인 영화라고 보기가 힘들어진다. 19금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생각보다 야하지 않았다는 느낌은 그래서 두 갈래 평가로 나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별로였다거나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는. 어쨌든 <간신>은 그런 점에서 독특한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토록 강렬한 폭력과 노출을 보여주면서도 그리 자극적으로만 치닫지 않는 그런 작품. 그래서 나아가 누군가의 쾌락을 위해 바쳐지는 고통의 몸들이 지금의 민초들과 겹쳐지는 어떤 지점에 이르게 하는 그런 기묘한 작품.

 

섹시 이미지면 다 통용되는 사회의 위험성

 

“SNS에 올리고 기사 안 된 적 없어요. 항상 메인에 뜨고요.” 디스패치가 공개한 클라라의 메시지 내용 중에는 이런 글이 들어가 있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녀를 그 자리에까지 순식간에 올린 것이 다름 아닌 섹시 이미지라는 걸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클라라 시구(사진출처:SBS)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몸에 딱 붙는 줄무늬 레깅스를 입고 시구를 하면서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시구를 잘 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대단한 발언을 해서도 아니다. 착 달라붙는 옷이 만들어내는 섹시 이미지의 힘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노이즈도 따라붙었다. 시구라는 기능적인 일에 어찌 보면 전혀 무관할 듯한 섹시 이미지의 등장은, 이후 너도 나도 섹시한 의상을 입고 시구를 하는 연예인들로 이어졌다. 섹시한 이미지로 단 한 번의 눈도장이 그만한 파괴력을 갖는다는 걸 인지한 까닭이다.

 

클라라의 사례는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섹시와 노출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잘 드러내준다. 일단 섹시라는 단어가 붙은 기사는 우선 들여다보게 되는 본능적인 욕망을 생산하지만, 동시에 불쾌감도 만들어낸다. 뭐 특별한 능력이나 준비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이미지만으로 영화에 덜컥 캐스팅되거나 가수로 음원을 발표하는 걸 보면, 오랜 시간동안 엄청난 노력과 준비를 하면서도 캐스팅되지 못하는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얼마나 클 것인가.

 

클라라는 시구 하나로 주목받은 후 최근에는 영화도 찍고 음원도 발표했다. 그러다가 이중계약으로 소속사와의 분쟁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사적인 메시지들이 공개됐다. 클라라가 주장한 성적 수치심의 진위를 떠나서 그 메시지들 속에는 우리 사회가 섹시 이미지 하나면 얼마나 손쉽게 일들이 처리되는가에 대한 단초들을 읽어낼 수 있다.

 

걸 그룹들의 노출경쟁에 대한 논란과 비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끊임없이 터져 나옴으로써 오히려 그 비판마저 홍보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이제 쩍벌에 엉덩이를 실룩이는 장면들은 노출경쟁속에서 심지어 식상한 이미지가 될 정도다. 그들의 노래가 가진 감흥보다도 섹시 이미지가 우선되는 사회다.

 

심지어 나인 뮤지스 같은 걸 그룹은 앨범 재킷 표절이라는 사안이 사실로 드러났지만, 바로 다음날 란제리룩의 티저를 내보냈다. 그 후로 이어지는 건 얼마나 뇌쇄적인가를 강조하며 공개하는 안무동작이다. 이런 일련의 행보에서는 표절이라는 사안의 심각성도 섹시 이미지라면 쉽게 덮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과연 이건 합당한 일일까.

 

최근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클라라라는 인물에 대한 감정 속에는 그래서 섹시노출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씁쓸함이 깔려있다. 메시지에 삽입된 란제리 화보를 두고 유혹이다 업무다 라는 공방이 오고가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엿보이는 건 우리 사회에서 섹시 이미지가 갖는 파괴력이다. 때로는 심각한 문제나 사건들도 가려버릴 수 있는 그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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