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빛낸 조인성과 송혜교의 연기

 

어디를 바라보는지 모를 송혜교의 텅 빈 눈빛은 단지 시각장애인이라는 캐릭터를 넘어서 그 안에 담겨진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체념, 절망을 담고 있었다. 돈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해 오빠 행세를 하려는 오수(조인성)에게 “사랑 따윈 필요 없어!”하고 외치는 오영(송혜교)의 그 대사 속에는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사진출처:SBS)

반면 버려진 길바닥 삶에서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오수는 멀쩡한 눈을 갖고 있으면서도 삶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공허한 눈빛을 보여주었다. ‘삶의 의미’ 따위는 필요 없다고 외치는 그지만 그것 역시 거꾸로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는 걸 말해주었다. 청부폭력배인 조무철(김태우)에게 칼을 맞고 죽음을 느낀 후에야 그저 “살아있으니 살아 봐야겠다”는 그는 그래서 그 삶의 이유를 찾는 중이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가 첫회 파격적인 1,2회 연속 편성을 했지만 그 144분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의 몰입감을 주었던 것은 이 두 인물이 주는 절망감이 그 눈빛만으로도 절절하게 묻어났기 때문이다. 재벌가의 상속녀와 길거리 건달이라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 있지만, 그들을 묶어주는 건 이 공통된 절망감이다. 비록 그것이 ‘돈’이라는 매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미 1년 전 오누이가 아니라 남남으로 만났던 그들이 1년 후 오누이 행세를 하는 건 마치 양자가 심적으로 합의한 연기처럼 보인다. 오영은 오수가 진짜 오빠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누구라도 곁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고, 오수 역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오영에게 접근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만으로 그녀를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는 듯하다.

 

지하철역에서 돈이 목적이라면 지금 자신의 등을 밀라며 지하철로 뛰어드는 오영과 그런 그녀를 내버려두기보다는 애써 살려내려는 오수의 절박함에는 이 오누이 연기에 가려진 속내가 드러난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절망과 상처를 위무해주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물론 그것은 오누이라는 가짜로 만들어진 외적 관계 때문에 결국 파국을 예고하지만.

 

이미 일본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으로, 또 문근영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리메이크작 <사랑 따윈 필요 없어>로 익숙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그 겨울>이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노희경이 가진 특유의 진지함과 조인성, 송혜교의 놀랍도록 발전한 내면 연기가 감각적인 연출과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삶에 대한 의미를 추구하는 노희경 특유의 색채는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상처받은 수컷 눈빛의 조인성과 절망과 공허함을 눈빛 하나에 담아내는 송혜교의 연기와 맞물려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무엇보다 깊어진 송혜교의 연기는 <그 겨울>이라는 작품의 쓸쓸한 정서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절박한 삶 속에서 뛰어다니는 조인성을 따뜻한 사랑과 삶으로 잡아끄는 송혜교는 그래서 그 시각 장애라는 틀이 오히려 하나의 흡인력이 되게 만들고 있다. 144분 간의 몰입감은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놓기에 충분했던 시간이다. <그 겨울> 바람이 불 것 같은 예감이다.

현실에서 드라마를 꿈꾸거나 드라마를 현실처럼 만들거나

드라마와 현실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을까. ‘그들이 사는 세상’의 9,10회의 부제인 ‘드라마처럼 살아라’는 말은 정지오(현빈)가 주준영(송혜교)에게 무심코 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던 것처럼 그 사이에 커다란 간극을 두고 있다. 드라마 PD로서 무언가 멋지게 살아가고 싶지만 현실은 당장 초짜 작가와 함께 단막극을 만들어야 하는 정지오는 까칠하고 인간미 없지만 시청률로 인정받는 손규호(엄기준)에게 자격지심까지 느낀다.

그의 현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그래도 사랑하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는 오픈카를 타고 멋지게 차려입고는 어딘가로 주준영과 드라이브를 가는 그런 드라마 같은 장면을 떠올린다. 드라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초라한 현실을 갖고 있는 그는 갑자기 나타나 “저 건물이 내 거야”하고 말하는 주준영의 어머니를 만나고는 심지어 자신이 만나고 있는 주준영 마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주준영에게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엔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만신창이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 같이 쿨해 보이던 그녀의 삶은 사실은 참 구질구질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외도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가 당장 발을 디디고 철야를 밥먹듯 하며 링거를 맞아가며 촬영을 해야하는 현장과, 그 속에서도 “보고 싶어 미치겠다”면서 찍어놓은 동영상으로 마음을 달래는 애인 정지오 사이에 놓여진 거리는 바로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드라마(판타지)와 현실의 괴리감은 또한 좋은 드라마와 인기 있는 드라마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정지오와 손규호로 대립되는 이 시청률은 낮아도 좋은 드라마와 시청률이 높아도 늘 그게 그거 같은 드라마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이 주인공인 이들에게는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과의 괴리감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정지오가 “드라마처럼 살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드라마는 도피처”라고 말하는 것처럼, 판타지를 끄집어내는 드라마와,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드라마 사이에서 사람들은 현실이 아닌 환상을 선택한다. 이것은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에 대해 한 편의 드라마를 쓸 정도로 잘 알고 있는 노희경 작가의 선택은 무엇일까. 표민수 PD가 인터뷰를 통해 말한 것처럼 이 드라마는 반(半)다큐멘터리적인 드라마다. 즉 판타지를 자극하기보다는 리얼리티를 끄집어내려 노력했다는 말이다. 만일 이 드라마가 판타지를 만들려 했다면, 드라마 제작현장은 좀더 치열하게 극화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그만큼 먼 거리에 위치한 애인 정지오에 대한 주준영의 그리움이 절절할 테니까.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러한 ‘온에어’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제작현장의 장면이 담담할 정도로 스케치에 머무는 것은 이 드라마의 ‘판타지보다는 현실 선택’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현실인 그들이 전혀 드라마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래서 노희경 작가가 선택한 것은 드라마(환상) 같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 같은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어쩌면 거꾸로 현실성보다는 판타지에 몰두하는 드라마들의 유행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만일 현실 같은 드라마가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면 “드라마처럼 산다”는 말은 더 이상 현실의 반대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적어도 이 현실 가득한 드라마를 보는 동안은 ‘드라마처럼 사는’ 셈이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판타지보다는 현실을 그리며, 이것은 노희경 작가가 자신은 물론이고 그 드라마를 보는 이들까지 드라마처럼 살게 하는 자신만의 노하우이기도 하다.

작가가 캐릭터를 사랑한다는 건

작가가 캐릭터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이니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작금의 드라마들을 펼쳐놓고 보면 이 당연한 질문에 당연하게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에덴의 동쪽’의 신태환(조민기)같은 악마의 화신이나 ‘타짜’의 정말 이름에 걸맞는 욕망의 포식자, 아귀(김갑수) 같은 인물을 두고 작가가 얼마만큼 이 캐릭터를 사랑하는가를 묻는다면 어떨까.

악역, 조역 가리지 않는 사랑
이것은 굳이 이들이 악역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똑같은 악역이라도 그가 왜 그런 악을 저지르기 시작했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그 역할은 살아있는 존재라기보다는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기 쉽다. 아쉽게도 신태환이나 아귀 같은 캐릭터는 그저 등장하면서부터 악역일 뿐, 그들이 왜 그렇게 악랄해졌는지 또 그들의 인간적인 고민은 무엇인지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적인 고민을 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이런 경우 이들은 주인공을 위한 소품이 되기 쉽다.

악역은 단지 작가의 캐릭터에 대한 애정도를 드러내주는 단적인 예일 뿐이다. 절대악은 없어도 온통 주역에게만 시선이 머무는 드라마 역시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 조역들은 모두 주역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그런 드라마들 속에서 작가의 캐릭터 하나하나에 대한 사랑은 느껴질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드라마 속 캐릭터들은 자연스럽게 살아있지가 않고 억지로 만들어진 설정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게 된다. 흔히들 ‘악역 없는 드라마’라는 말로 불리는 노희경 작가의 작품이 유독 조역에까지 세세한 배려를 하는 것은, 실제로 드라마를 살아있게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캐릭터에 대한 사랑은 드라마를 살린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남다른 이유
‘그들이 사는 세상’의 캐릭터들에 대한 노희경 작가의 사랑은 유독 남다른 것 같다. 그녀는 이미 ‘굿바이 솔로’에서 다중스토리 구조를 통해 한두 명의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닌 10여 명에 가까운 캐릭터들을 모두 주인공의 이야기로 끌어 모은 전적이 있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물론 약간씩의 비중은 다르겠지만 등장인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거의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그녀에게 각별한 것은 바로 그 모두가 주인공만큼의 애정으로 그려지는 이 드라마 속에서의 ‘그들’이 단지 대본 속의 캐릭터가 아니라, 바로 노희경 작가의 현실, 즉 그녀와 함께 일해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거의 한 회 분의 이야기를 채워 넣은 늙은 배우들에 대한 에피소드는 단적인 예다. 나이 들어감을 한탄하고 달라지는 세태를 개탄하면서도 그 젊은 세대들을 귀엽게 바라보고, 또 그들끼리 서로 외롭고 힘든 처지를 위무하는 장면들은 평소 노희경 작가가 그들을 얼마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던가를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드라마 중간 중간에 짤막한 에피소드들 속에 등장하는 스텝들의 대사들 속에도 들어가 있다.

힘겹게 몇 번씩이나 다시 찍고 찍기를 반복하면서도 PD의 “죄송하다. 다시 한번만 가겠다.”는 말만으로도 그저 충분한 카메라 감독, 만날 구박을 당하면서도 할 말은 똑 부러지게 다 하는 보조작가, 늘 화려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남다른 아픔을 품고 사는 윤영(배종옥)같은 주연배우, 그리고 무엇보다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현장에서 구르고, 철야를 밥먹듯이 하는 PD들에게 모두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반면 상대적으로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작가, 이서우(김여진)는 드라마 속에서 이렇게 어렵게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보조적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다. 실제 상황은 많이 다르겠지만(어쩌면 노희경 작가에겐 같을 지도!) 아마도 노희경 작가는 작품 속에서나마 작가라는 위치를 한껏 낮춰 다른 이들을 주목시켜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작가가 그 캐릭터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악역이 생길 수 있을까. 재수 없는 손규호(엄기준)도 남모르는 아픔이 있다는 게 느껴지고, 고압적인 원로배우인 오민숙(윤여정) 역시 표현되지 않는 귀여움이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면모는 단선 적인 악역을 세워두고, 작가 마음대로 캐릭터를 움직이는 그런 드라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시청률을 위해서 드라마 속 인물 하나쯤은 손쉽게 죽여버리는 요즘 세태에 노희경 작가의 이 사랑은 시사하는 바가 그만큼 크다.

사람들 간의 피상적인 이해는 서로를 넘어야할 적으로만 간주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한 꺼풀을 벗기고 좀더 이해의 폭 안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는 상대방이 역시 나와 같은 부족한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노희경 작가는 바로 그것, 즉 인간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작가가 캐릭터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 세계의 구성원을 그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들은 다름 아닌 우리들이고, 그녀가 사랑하는 그 세상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베바’, ‘바화’ 그리고 ‘그사세’, 그 삼박자 드라마들의 세상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MBC 수목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초기 기획단계에서는 기대작이 아니었다. ‘태왕사신기’의 끼워팔기용 땜빵드라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 물론 이재규 감독은 이 기사가 오보라고 밝혔지만 그만큼 타 작품에 비한 기대감은 적었다는 말이다. 반면 ‘베토벤 바이러스’와 경쟁하고 있는 ‘바람의 나라’는 기획단계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작품이다. 고구려 사극의 원조격인 김 진 원작의 동명의 이 드라마는 해외로케와 스펙터클한 영상으로 초반부터 시선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역시 답은 작품에 있었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클래식이라는 마니아적인 소재를 갖고도 훌륭한 캐릭터와 탄탄한 대본, 그리고 환상적인 연출로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다. 마니아성과 대중성을 모두 얻은 데는 홍진아 홍자람 자매라는 작가의 역량과 ‘다모’를 연출했던 이재규 감독의 재기 넘치는 연출력, 그리고 무엇보다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연기력이 삼박자를 이룬 데서 비롯된다.

한편 뒤늦게 시작해 시청률은 아직 낮지만 특유의 완성도 높은 작품성으로 승부하는 ‘바람의 화원’은 조금씩 그 세찬 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신윤복 신드롬이 일어날 정도의 화제를 가져온 이정명 원작의 힘이 그 바탕에 있고, 그 작품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연출해내는 장태유 감독의 장인정신이 뼈대를 세웠으며, 그 위에 문근영을 위시한 연기자들의 신들린 연기가 살을 만들었다.

월화 드라마로 새롭게 시작하는 ‘그들이 사는 세상’ 역시 이 삼박자 드라마(?)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두 말할 필요가 없는 노희경 작가의 대본과 표민수 PD의 연출, 그리고 그 위에 한바탕 신명나는 연기를 펼칠 송혜교와 현빈이라는 연기자가 그 주역이다. 무엇보다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이 작품을 노희경 작가는 작품성뿐만 아니라 대중성까지 확보할 역작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작년 ‘인순이는 예쁘다’로 시청률은 낮았지만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선보여주었던 표민수 PD의 촘촘하고 섬세한 연출력은 기대감을 더 갖게 만든다.

언제부턴가 우리네 드라마 판은 자본력과 스케일, 화제성 같은 것이 작품성 그 하나보다 더 중요해진 세상이 되었다. 압축적으로 영상미학을 보여주는 드라마보다는 50부, 100부작이라는 대작의 간판이 더 앞에 걸려지고, 해외 로케이션이나 사회적인 논란거리를 담은 소재 같은 것들이 작품 그 자체보다 우선되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결국 대본과 연출, 그리고 연기라는 이 삼박자 위에서 춤추지 않으면 거추장스러운 화제성의 옷만 걸쳐 입은 추한 춤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 삼박자 드라마가 부디 ‘그들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세상’이 되기를 기원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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