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송포유> 논란, 좀 더 섬세한 배려가 있었다면

 

추석 특집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된 <송포유>는 애초의 기획의도와는 정반대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제목에서부터 풍겨나듯이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처럼 ‘일진 미화’ 같은 것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이런 목적을 갖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은 없을 테니까.

 

'송포유(사진출처:SBS)'

오히려 <송포유>는 이런 사회적인 마찰이나 불편한 시선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뤄지는 기적의 ‘하모니’를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합창을 소재로 한 여러 프로그램들이 보여줬던 것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목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하모니를 이룰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소통의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게다.

 

이런 프로그램이 주는 감동을 우리는 <남자의 자격> 하모니 편이나, 영화 <하모니> 그리고 지난 2011년 12월에 <SBS 스페셜>에서 방영되었던 ‘기적의 하모니’를 통해서도 본 적이 있다. 특히 ‘기적의 하모니’에서 김천 소년교도소 소년수형자 합창단의 멘토로 출연했던 이승철은 당시에 그가 느꼈던 소통의 경험이 이번 프로그램 출연의 가장 큰 이유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좋은 의도와는 별개로 <송포유>는 불편한 방송이 되어버렸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그 첫 번째는 <송포유>가 영화 같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미셸 파이퍼가 교사로 출연했던 <위험한 아이들> 같은 영화는 그것이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영화라는 허구적 장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불편함보다는 감동을 안겨준다.

 

하지만 <송포유>는 다르다. 거기 출연하는 아이들이 지금은 달라졌다고 해도 과거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고통으로 각인된 실제 아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주목된다는 것 자체가 피해를 입은 학생들에게는 모순처럼 여겨질 수 있다. 가해를 한 아이들은 방송에 나와 주목받고 심지어 폴란드 합창대회에 나갈 기회가 주어지지만 정작 피해를 입은 학생들은 그걸 바라봐야 하는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송포유>가 서 있는 예능과 다큐 사이의 어정쩡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어찌 보면 심각한 이야기일 수 있는 문제 학생들을 다루면서 <송포유>는 다큐적인 깊이로 들어가기보다는 예능적인 가벼움으로 건드린 면이 있다. 즉 이렇게 문제 학생들이 되어 끝단에 몰려 있는 아이들이 왜 그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부모와 사회의 책임은 없는지, 피해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은 없는지 그래서 그 아이들은 과거를 후회하는지 등등 다차원적인 접근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 프로그램을 예능으로서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능적인 차원으로만 접근해 아이들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들만을 보여준다면 거기에는 왜 이들이 방송에까지 나와 기회를 얻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거가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 <송포유>는 2편까지 마치 조폭처럼 험악한 아이들과 그들이 반항을 하면서도 합창 연습을 하는 장면들만 들어갔을 뿐, 그들의 내면은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송포유>가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구성되면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이 그랬듯이 꽤 긴 호흡으로 접근해 아이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필요하다면 피해 학생들의 이야기까지 같이 다뤄졌다면 <송포유>는 진정한 기적의 소통이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 3회 분량으로 다뤄지면서 이런 세세한 이야기들은 그저 훑고 지나가버린 상황이 되었다.

 

다큐와 예능을 퓨전하는 것이 최근 예능 프로그램의 트렌드지만 이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때로는 지나친 미화나 경직성으로 비판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퓨전이 가진 위험성이기도 하다. <송포유> 논란은 바로 이 예능과 다큐가 접목되는 최근 트렌드가 어떻게 접근되느냐에 따라 얼마나 민감해질 수 있는가를 드러낸 안타까운 사례가 되었다.

 

물론 방송이 교조적일 필요는 없다. 또 잘못을 저지른 문제 학생들이라고 해서 그저 방치하고 배제하며 때로는 격리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즉 이 문제를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으로 보는 시각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좋은 의도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모든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송이라는 결과다. 문제 학생들뿐만 아니라 피해 학생들까지 고려한 좀 더 섬세한 배려와 사회적인 접근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진짜사나이>의 가치, 군대와 일반인의 소통에 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진짜사나이>는 진짜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미 군대를 다녀왔거나 아직 군대에 가보지 않았던 사나이들이고(심지어 외국인도 있다) 군부대에서 일반사병들과 실제로 일주일씩 머물며 병영을 체험한다. 방송은 그 체험을 포착해 예능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 진짜 날 것의 군대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서도 안 된다. 군 기밀이라도 유출된다면 큰 일이지 않은가.

 

'진짜사나이(사진출처:MBC)'

<진짜사나이>의 내무반은 그래서 특별히 방송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김수로와 샘 해밍턴, 류수영, 서경석, 손진영, 그리고 장혁과 박형식이 일반사병들과 함께 일주일 간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특별한 내무반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서 함께 일주일을 지내는 일반사병들도 선별된 병사들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특별하게 마련되고 통제되지 않는다면, 방송은 그 자체로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사고를 미연에 예방하기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출연자들이 진짜 군인이 아니고, 내무반이 실제 내무반이 아니며, 일반사병들도 선별된 병사라고 해서 이것이 전부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이 함께 유격훈련을 뛰면서 헬기 레펠을 하고 화생방 훈련을 하거나 행군을 하면서 흘린 땀과 눈물을 어찌 가짜라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진짜 군인들과는 다소 다른 체험일 수 있다는 것일 뿐, 일반인들에게 그것은 짧게나마 군대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진짜 체험일 것이다. 군 소재 예능을 하기 위해 연예인이 실제로 군대를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것은 <진짜사나이>가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치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그것은 예능이 아니라 다큐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다큐는(실제로는 르뽀에 가깝겠지만) 아마도 비방용이 더 많을 수밖에 없을 게다. 군 기밀에 가까운 장면들도 많을 테고, 때로는 군대의 내밀한 사병들 간의 마찰과 충돌도 적지 않을 게다. 그것을 방송으로 다 내보내다보면 그것은 리얼리티를 빙자한 막장 방송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진짜사나이>가 보여주려는 것은 도대체 뭘까. <진짜사나이>는 예능이라는 본분에 맞게 적절한 선까지의 ‘군대 체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체험에 들어간 연예인들의 소임은 자신이 진짜 군인임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군인처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며 때로는 그 와중에도 어떤 보람과 가슴 뭉클함을 느끼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진짜 군인일 수는 없다. 일반인으로서 군대 체험을 하는 것일 뿐.

 

<진짜사나이>의 방송 프로그램적인 가치는 바로 이 일반인과 사병들이 한 막사에 들어가 일주일을 함께 생활하며 소통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군인과 일반인들을 한 곳에 넣고 벌어지는 화학작용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너무 다른 존재처럼 여기며 심지어 군바리라고 비아냥대던 그들이 사실은 우리의 동생들이고 아들들이며 오빠들이라는 사실이다. <진짜사나이>를 통해서 군대는 그래서 좀 더 우리에게 가까운 곳이 된다.

 

군대가 비리나 사건사고가 비일비재하게 터지는 곳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폐쇄적인 집단으로서만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기 싫은 곳이지만 의무이기 때문에 억지로 가야하는 곳. 그래서 간 사람은 마치 다른 세계로 간 듯이 치부하며 그 속에서 암암리에 벌어지는 일들도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그저 수긍하던 그런 곳이 군대가 아니었던가. 물론 군 당국이 개입하기 때문에 좋은 면만을 끄집어내고 그것이 전부인 양 호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믿어줄 만큼 대중들은 바보가 아니다.

 

국가 안보와 밀접한 군 기밀이 아니라면 이제는 군대도 좀 더 개방적일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한 첫 발은 군대를 좀 더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곳으로 인식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진짜사나이>가 가진 목적이며 의도이고 가치다. 따라서 <진짜사나이>는 실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바람직한 진짜 군인의 위상과 이미지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인 것만은 분명하다. 만일 이 프로그램이 대중들에게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꿔주고, 그래서 대중들이 좀 더 군대에 관심을 갖게 되며 그로 인해 군대 문화에도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생길 수 있다면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

<정글> 병만족의 생고생, 재미는 없는 이유

 

<정글의 법칙> 히말라야편에서 병만족의 웃음을 찾는 것 쉽지 않다. 이들이 서 있는 공간이 웃음을 허락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말 그대로 고행의 연속이었다. 고산병으로 숨 쉬는 것조차 불편한 그 곳을 20킬로가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극도로 예민해진 병만족이 말다툼을 하는 장면은 그들이 얼마나 힘겨운 고투를 벌이고 있는가를 말해주었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그 와중에도 김병만의 희생과 도전정신은 보는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오지은의 무거운 배낭까지 대신 짊어지고 오르는 모습은 마치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보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목적지인 폭순도 호수까지 가까스로 올라가 그 절경 앞에 감탄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산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정준은 숨을 쉴 수가 없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날 것의 생고생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고, 그래서 그 땀이 보여주는 진정성이 분명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글의 법칙>이 그간 시청자들에게 전해주었던 즐거움과 재미는 상대적으로 사라져버렸다. <정글의 법칙> 히말라야편은 마치 등산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깨알 같은 재미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한 편 내내 산을 오르고 오르며 고통스러워하는 병만족의 모습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번 히말라야편은 현지 적응 훈련으로 들어간 바르디아 정글에서도 생각만큼의 재미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야생동물 관찰이라는 새로운 재미요소가 있었지만 그것이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지루해진 것도 사실이다. 야생의 뱅갈호랑이를 보는 장면은 물론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 과정은 오로지 기다리는 것일 수밖에 없다. 먹거리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운 척박한 환경이기 때문에 야생동물을 찍은 대가로 음식을 제공하는 방식이 반복됐는데 이것 역시 <정글의 법칙> 특유의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했다.

 

그나마 이번 편에서 발견한 웃음은 안정환이었다. 그는 깨알 같은 농담으로 고생하는 병만족들의 웃음을 잃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번 히말라야편은 <정글의 법칙> 특유의 다큐와 예능 사이에 놓여진 재미가 상당부분 사라져 버렸다. 사냥의 재미도 찾기가 어려웠고 힘겨운 와중에도 즉석에서 상황극을 할 정도로 여유 있는 웃음은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숨어서 야생동물을 내내 관찰하거나, 하루 종일 산을 오르는 장면만이 반복되서 나온 느낌이다.

 

이것은 히말라야라는 공간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다. 극에서 극으로 바뀌는 기후와 그냥 서 있는 것조차 힘든 고산지대의 특성이 웃음이 사라지게 된 원인이라는 점이다. 결국 히말라야라는 공간은 그림은 멋있지만 다양한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예능의 공간으로서는 너무 혹독했다는 점이다.

 

<정글의 법칙>이 다큐와 변별력을 가질 수 있는 건 거기에 여유와 웃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예능적인 포인트가 없다면 굳이 <정글의 법칙>을 볼 까닭이 없다는 얘기다. 물론 지난 뉴질랜드편에서 불거져 나온 진정성 논란에 대한 해답으로서 히말라야 같은 극한의 오지를 선택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글의 법칙>만이 갖고 있는 다큐와 예능 사이에서 벌어지는 재미는 담보할 수 있었어야 한다.

 

<정글의 법칙>은 생존을 위협하는 극한의 정글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그 안에서 또한 도시인들이 느끼기 어려운 자연이 주는 행복감을 전해주었던 프로그램이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은 불편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때문에 누리게 되는 관계의 해방이나 자유 같은 즐거움이 병존하는 곳, 그곳이 바로 <정글의 법칙>이 아니었던가. 극한의 오지에서 생고생을 하는 병만족의 노력은 그래서 그 진심이 전해지지만, 안타깝게도 재미는 그다지 없는 편이다. 다큐가 아닌 예능 <정글의 법칙>이 살아나야 이 프로그램만의 독특한 매력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정글>의 초심은 다큐가 아니라 예능이다.

 

<정글의 법칙(이하 정법)> 뉴질랜드편의 짧은 예고 속에서는 이번 논란의 시발이 되었던 박보영이 “언니 나 이거 안하면 안돼?”라고 하는 말이 짧게 삽입되었다. 아마도 뉴질랜드라는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멋진 풍광의 지상낙원에서 뜻밖의 상황을 맞이한 그들이 겪게 되는 고생담이 이어질 것이란 예고다. 부제도 ‘뜻밖의 여정’이다.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피터 잭슨 감독이 찍은 <호핏 : 뜻밖의 여정>에서 따온 부제겠지만, <정법>이 뉴질랜드에서 맞닥뜨린 뜻밖의 상황을 말하는 제목이기도 할 것이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어딜 가든 여전히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은 아마도 <정법>의 현실일 게다. <정법> 아마존편의 마지막회에서 제작진들의 고생담을 편집해서 보여준 것은 이번 논란에 대한 제작진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정글에서 넘어지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고 끝까지 촬영에 임하고, 때론 온몸이 긁혀 피가 나도 촬영을 포기하지 않는 제작진의 모습 속에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고생담이 진짜라는 걸 보여주고픈 <정법>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사실 국내에서 1박2일로 여행을 간다 해도 그것이 촬영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그 자체도 고생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해외에서 20여일 가까이 강행되는 촬영은 오죽할까. 하지만 제 아무리 고생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감도 있기 마련이다. <정법> 아마존편의 마지막회는 정글 속에서 오히려 느끼는 행복을 잘 보여주었다.

 

마지막날을 위해 김병만이 민물새우를 어떻게든 잡으려는 그 의지는 이미 가족이 된 병만족에 대한 그의 애정이 그대로 묻어났고, 그렇게 잡은 새우와 사유지 주인이 제공한 통돼지로 바베큐 파티를 벌이는 장면이나, 박솔미가 한 자 한 자 적어 보낸 진심어린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는 정글이기 때문에 더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정법>이 작금의 논란을 넘어설 수 있는 길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제작진에게 정글에서 겪는 고생담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지만 적어도 프로그램에 있어서는 고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 정글에서도, 아니 정글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알려주는 것은 <정법>이 지금 현재 처한 현실에서 어쩌면 꽤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다큐적인 요소와 예능적인 요소가 섞여있는 것이 바로 <정법>만의 특징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둘 중 어디에 더 가까운가를 말하라면 아마도 예능일 것이다. 그 곳이 정글이라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김병만과 병만족을 통해 어떤 웃음을 기대한다. 사실 이 부분은 <정법>만이 갖는 특별한 매력이기도 하다. 처음 <정법>이 아프리카의 악어섬에 들어갔을 때도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 힘겨운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콩트에 가까운 예능을 선보이던 김병만의 모습이었다. 정글에서도 여전한 달인의 모습에 <정법>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던 것.

 

그 진위가 어떻든 이미 진정성이 훼손되어버린 상황에서 <정법>의 고생담은 어쩌면 시청자들에게 그다지 어필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실제로 겪은 고생담을 의도적으로 편집해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거기서 실제 고생한 출연진과 제작진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법>이 작금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떤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는 그것이 고생담만이 아니라 그 안에 즐거움과 설렘, 심지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이 함께 했다는 것을 균형 있게 보여주는 일이다.

 

고생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다큐적인 요소가 전면에 강조될 수 있다. 이것은 작금의 <정법>에게는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닐 수 있다. 고생 보다는 ‘뜻밖의 여정’에서도 느낄 수 있는 행복감과 여유를 동시에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물론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이것이 결국은 예능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줘야 한다. 그러려면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정글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갖게 되는 휴식조차 프로그램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과감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생과 휴식의 자연스러운 병치는 그 자체로 다큐와 예능의 상승효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정글의 야생과 고생만을 집중해서는 정글이 또한 제공할 수 있는 행복감을 놓칠 수 있다. 마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전하려 애쓰던 영화 <인생의 아름다워>의 로베르토 베니니처럼, 혹은 달인이 되기 위해서 그토록 고생을 하면서도 그 고생담을 얘기하기보다는 대중들에게 오히려 웃음을 제공해왔던 김병만처럼, 정글 속에서도 웃음과 행복감을 전해 주려할 때, <정법>의 훼손된 진정성은 어쩌면 회복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속으로는 울고 있어도 겉으로는 웃음을 주는 예능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정법>의 초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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