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만류가 있어 다큐 그 이상이 가능했다

 

<정글의 법칙>의 이지원 PD는 마다가스카르에 가기 전 많은 관련 프로그램 제작진들로부터 자문을 얻었다고 한다. <TV 동물농장>의 한 제작진은 “이미 다큐 등을 통해 마다가스카르의 동물들은 거의 다 찍었다”며 <정글의 법칙>만의 차별화된 영상이 가능할까 의구심을 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지원 PD 역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 이 고민은 사막을 빠져나와 마다가스카르의 숲으로 들어가는 날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그러다 여우원숭이들이 서식하는 숲으로 막 들어서면서 번뜩 아이디어가 이지원 PD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병만족을 ‘병만류’로 설정해 직접 동물 대 동물로서 마다가스카르의 생물들과의 교감을 갖게 하자는 것. 어찌 보면 대단해보일 것도 없는 아이디어처럼 보였지만, 바로 이 ‘병만류’라는 설정은 <정글의 법칙>만의 독특한 장면들을 잡아낼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주었다.

 

김병만은 원숭이처럼 나무 위로 올라가 여우원숭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바나나 키스(?)를 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정진운이나 류담, 리키 역시 여러 종류의 여우원숭이들(시파카, 브라운 리머 같은)과 스킨십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근거리에서 카멜레온이 색을 바꾸는 모습은 여느 다큐에서 이미 봐왔던 것들이지만 병만류들이 그 장면에 환호하고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손바닥 위에 올려보고 하는 장면들은 희귀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피그미 카멜레온 같은 희귀한 종을 만날 수도 있었고, 옆으로 뛰는 모습과 앉아있는 모습이 인간과 유사한 시파카 같은 여우원숭이와 직접 교감할 수 있었으며 그 와중에 다큐에서도 촬영하기 힘든 새끼 시파카를 포착하기도 했다. 또 먹거리를 찾아 나선 병만류의 류담, 박정철, 노우진은 많은 식물들을 발견해 보여주었다. 브래드 프루트의 사촌격인 잭 프루트, 별 모양으로 생겨 달콤 시큼한 맛을 자랑하던 스타 프루트, 블루베리처럼 생긴 인디언 라즈베리, 고구마 모양의 카사바가 소개됐다.

 

물론 이러한 식물들이 소개되는 방식 역시 병만류가 직접 먹이(?)를 찾아나서는 과정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에 훨씬 더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될 수 있었다. 만일 다큐였다면 그저 교과서적으로 식물을 찍어주고 이름을 소개하는 정도로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이 이처럼 직접 먹어보고 체험함으로써 다른 느낌의 영상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병만류’라는 아이디어에는 인간과 자연을 갑과 을로 보지 않고 동물 대 동물의 수평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들어있다.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마다가스카르의 자연과 직접적인 교감이 가능했던 것. 인간의 관점으로 자연을 만지는 것 자체가 훼손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을 같은 동물의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자연스레 넘어설 수 있었던 것. 물론 여기에는 마다가스카르라는 자연 속에서는 오히려 더 멸종(?)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병만류의 생존도 바탕이 되어 있다.

 

하지만 병만류의 생존은 자연법칙이 보여주는 적자생존이 아니다. 이미 사막에서 류담이 쓰러졌을 때 그를 챙겨주고 함께 하려 노력하는 병만류의 모습에서 드러나듯(만일 적자생존이라면 류담을 버리고 가는 것이 맞지 않을 게다) 그들은 공존하는 것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공존의 길이 그토록 어렵게 여겨지는 시대에, 인간이 아닌 하나의 동물인 병만류로 돌아간 그들이 마다가스카르의 동물들과 어우러져 보내는 한 때의 장면들이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전해주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슈퍼피쉬>, 오랜만에 느끼는 다큐의 맛

 

새롭게 <메이퀸>과 <다섯손가락>이 동시에 시작했던 지난 8월18일,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통상적으로 주말극의 동시출격으로 시선이 가기 마련이지만, 이 날 이 두 드라마는 <슈퍼피쉬>라는 다큐멘터리에 무릎을 꿇었다. 시청률 13.8%. 같은 시간대의 <메이퀸>과 <다섯손가락>은 11%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그 후에는 자극으로 무장한 주말극이 이 다큐멘터리의 시청률을 앞질렀지만, 그래도 12%대의 고른 시청률을 유지한 <슈퍼피쉬>의 저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슈퍼피쉬'(사진출처:KBS)

<슈퍼피쉬>의 그 놀라운 저력은 그림 같은 압도적인 영상과 그 속에 담겨진 흥미로운 내용이 잘 어우러진 결과다. 거친 목탄으로 그려진 그림에서 시작해 서서히 영상으로 바뀌는 오프닝은 <슈퍼피쉬>의 영상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준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긴 크기의 참치가 펄떡 펄떡 뛰고, 고대 로마시절부터 전해져온 참치 잡이 방식인 마탄차(학살이란 뜻이다)는 바다를 피와 희뿌연 정액으로 물들인다. 말리의 안토고 호수에서는 1년에 딱 한 번 허락된 고기잡이를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호수로 뛰어드는 장관을 연출한다.

 

라오스 곤파펭에서는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듯한 급류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 물고기 잡이가 벌어지고, 중국에서는 삼키지 못하게 목줄을 감은 가마우지를 이용한 물고기 잡이를 보여준다. 이 모든 장면들은 고속 카메라에 담겨 펄떡임 하나, 튀는 물방울 하나까지 세세하게 담겨진다. 육안으로라면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다큐 안에 그득 채워지는 것은 고속 카메라, 헬리 캠 같은 인간의 시각을 넘어서는 카메라 영상 기술 덕분이다.

 

하지만 <슈퍼피쉬>에 빠져들게 한 것은 이런 시각적인 스펙터클 때문만이 아니다. 물고기의 생태가 아닌 물고기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시간적으로는 태곳적부터 현재까지, 공간적으로는 전 지구 곳곳까지 파고 들어가 살펴보는 이 다큐의 지적인 호기심은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이 다큐는 사냥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물고기를 잡아 단백질을 지속적으로 섭취할 수 있었던 것이 어떻게 문명의 발달과 관계를 맺는지를 보여주고, 쉬 상하기 마련인 물고기를 오래도록 저장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보여주며, 물고기가 종교와 만나 어떻게 세계사를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실로 지구와 인간의 역사는 물고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이 이 다큐의 증언이다.

 

<슈퍼피쉬>가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 시선이다. 지중해에서 북유럽, 아프리카, 중국, 라오스, 호주 등등 거의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이 다큐는 지구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고기와 인간의 공존을 마치 옆 동네 일처럼 담담히 펼쳐 보여준다. 바로 이런 시선은 굳이 지구촌 운운하지 않아도 우리 인류가 국가와 민족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의 삶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동질성을 드러내준다. 물고기를 주제로 하지만 거기서 보편적인 인류사의 중요한 자산인 쌀, 소금, 종교 같은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얼마 만에 맛보는 다큐의 맛인가. KBS의 <차마고도>, <누들로드>나 MBC의 <남극의 눈물> 같은 눈물 시리즈 다큐 이후 오랜만에 느끼는 다큐의 전율이다. 주말 저녁 비슷비슷한 자극적인 설정으로 치닫는 주말극에 지친 이들에게 그래서 <슈퍼피쉬>는 편안하고도 놀라운 지적인 여행을 떠나게 해주었다. 일상화된 영상의 시대, 일상적인 다큐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럴수록 제대로 된 다큐에 대한 갈증도 커지고 있다. <슈퍼피쉬>는 오랜 만에 그 다큐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진짜 야생으로 가는 다큐, '1박2일'은?

'1박2일'(사진출처:KBS)

다큐를 표방해온 '1박2일'. 그런데 최근 들어 다큐는 더 독해졌다. 과거 '1박2일'이 모델로 삼았던 건 '6시 내 고향'이나 '전국노래자랑' 같은 편안한 교양 프로그램 속의 다큐적인 영상이었다. 그 때는 그것이 대중들에게 다큐로 인식되었으니까. 그래서 연예인들이 전국을 떠돌며 한 끼 식사에 목숨을 걸고, 야외취침을 하며, 아침에 퉁퉁 부운 맨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참신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그 다큐가 달라졌다. 리얼리티 시대에 들어서 다큐는 좀 더 야생의 상황 속으로 뛰어들었다. EBS의 '극한직업' 같은 다큐는 고열 속에서 작업하는 이들이나, 폭풍 속에서 조업하는 이들이 처한 거친 야생의 장면들을 포착해낸다. 디스커버리 채널은 아예 극한의 자연을 특화된 소재로 다큐를 양산해오고 있다. 그 유명한 '인간과 자연의 대결'이나 '목숨을 건 포획' 같은 프로그램은 대표적이다.

'1박2일'에서 5대어선 특집을 기획한 건 아마도 현재 달라지고 있는 다큐(실제로는 대중들의 다큐를 보는 인식이 달라지는 것이지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영석PD가 아예 대놓고 자신이 즐겨보는 프로그램이라며 '극한직업'과 '목숨을 건 포획'을 내세운 건 그런 이유다. '정글의 법칙' 같은 프로그램이 아예 출연자들을 극한의 정글 속에 던져놓고 생존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마당에, 야외취침이나 겨울바다 입수 같은 걸로 야생을 표방하기는 어려워졌다.

새벽에 고기잡이(?)를 나선 다섯 멤버들은 3미터 높이의 파도와 싸워가며 조업을 하는 체험을 했다. 대게 잡이를 나간 이수근은 심한 파도와 바람으로 피디마저 멀미로 쓰러진 상황에서도 꿋꿋이 일을 하며 방송을 이어갔다. 은지원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열심히 아귀를 끌어올렸고, 그 와중에도 아귀를 무서워하는 자신을 연출하며 예능을 선보였다. 복어를 잡으러간 김종민은 결국 멀미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중에 뭍으로 돌아온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의지하고는 상관없는 것 같다"며 그 힘겨웠던 시간을 토로했다.

가장 오랫동안 조업을 한 엄태웅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묵묵히 오징어잡이서부터 포장 일까지를 척척 해냈다. 한편 공교롭게도 생일날 문어 잡이를 간 이승기는 토하고 눈물을 훔치면서도 방송을 이어가는 프로 근성을 보여주었다. 어떻게든 책임감 있게 버텨내려는 그 안간힘은 애써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 속에 들어있었다. 그렇게 자연 앞에 무릎 꿇게 되는 작은 인간을 발견하는 시간. 뭍으로 돌아온 김종민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가리키며 "보이십니까. 저 바다 잔잔한 거."라고 말했다. 겉으로 보는 것과 진심으로 체험한 바다의 차이. 이것이 '1박2일'이 5대어선 특집으로 포획한 가장 큰 수확, 바로 진짜 야생의 경험이다.

이제 '1박2일'의 시즌1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시즌2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것인가. 이것은 실로 어려운 문제지만, 적어도 다큐를 넘어 야생을 표방하는 '1박2일'이라면 이제 더 독해지고 더 야생으로 달려가고 있는 다큐들의 면면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5대어선 특집'은 '1박2일' 시즌2라는 배가 가야할 적어도 한 가지 방향은 알려준 셈이 아닐까. 물론 매번 극한 체험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능이 리얼을 점점 강조하기 시작한 마당에, 그 누가 진짜 야생의 헤게모니를 쥐고 가는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도 더 치열해질 거라는 점이다.

일상 속으로 들어온 다큐의 특별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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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의 만남'(사진출처:KBS)

사람만큼 진한 향기를 내는 소재가 있을까. 특히 그 사람과 첫 만남을 가질 때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여러 번 만나 향기에 익숙해지고, 그래서 무덤덤해지는 만남처럼 흥이 깨지는 일도 없다. 피천득의 '인연'이나 조동진이 부르는 '제비꽃' 속의 만남들이 가슴에 아련히 남는 것은 그 긴 세월 동안 단 몇 번의 만남을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번의 만남'이다. 이 인물다큐는 단 세 번의 만남이라는 제한으로 오히려 만남의 향기를 더 진하게 전한다.

'세 번의 만남' 속에서 장재인은 갑작스럽게 신데렐라가 된 그 변화에 놀라는 얼굴로 다가왔다가, 힘들 때 이대 앞에서 사먹던 치즈케이크와 홍대 클럽에서 봤던 오디션, 그리고 노래가 좋아 자퇴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홍대 클럽으로 오고 '슈퍼스타K'를 하게 된 얘기들을 들려주는 꾸밈없고 인간적인 얼굴을 조금씩 보여준다. 마치 짧은 만남 속에서 어떤 깊은 순간을 포착하려는 듯, 카메라는 장재인의 손 때 묻은 노트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에서 신데렐라가 아닌 싱어 송 라이터 장재인을 찾아낸다.

사실 '세 번의 만남'의 카메라는 무덤덤할 정도로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다만 꼼꼼하게 인물과 인물 주변의 것들을 담아내면서 그 인물이 가진 매력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뿐이다. 악역 전문 프로레슬러에 종합격투기 해설가, 7권의 책을 쓴 작가, 칼럼니스트, IT전문가, 프랜차이즈 사업가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낭만레슬러 김남훈을 만났다고 해서 카메라가 호들갑을 떠는 일은 없다. 그 일상들을 마치 일기 쓰듯 기록하고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이 무덤덤함도 세 번이라는 제한 속에서는 그 인물을 오히려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힘이 있다. 마치 울지 않고 슬픔을 연기하는 연기자가 더 큰 슬픔을 전해줄 수 있듯이.

'세 번의 만남'이 인물과의 만남을 다루는 것처럼, '그 날'이라는 휴먼다큐 역시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인물이다. 다만 그 인물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그 날'에 집중하는 형식이 다를 뿐이다.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인 '그 날'을 중심으로 이 다큐멘터리는 그 날의 이전과 그 날 당일, 그리고 그 날 이후를 조명한다. 특정한 날이 어떤 클라이맥스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큐는 어떤 극적인 형식을 얻게 된다.

한류팬 다나하시씨의 실종을 그녀를 찾기 위해 찾은 그녀의 딸들의 시선으로 다룬 '엄마가 실종된 그 날' 편은 마치 추적하듯 엄마가 실종된 그 날의 길들을 되밟는다. 자신의 간 절반을 내주고 그것도 모자라 신장까지 아버지에게 떼어준 수홍씨의 '그 날'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더 감동적이다. 2PM이 일본을 처음 진출하던 '그 날'의 흥분과 설렘은 또 어떻고.

'세 번의 만남'과 '그 날' 같은 다큐멘터리는 '다큐3일'이나 '미지수' 같은 일상화된 다큐들이 등장하면서 새롭게 진화된 형식으로 탄생한 것들이다. 공통점은 시간적 제한이다. '세 번의 만남'은 횟수를 제한했고, '그 날'은 시점을 제한했다. 이렇게 된 것은 물론 대작 기획형 다큐멘터리가 갖는 한계들, 예를 들면 제작비나 제작기간 같은 것들을 뛰어넘기 위한 것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제한 자체가 새로운 시각을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보다 일상의 반짝반짝하는 순간들을 포착하게 된 다큐는 확실히 재미있어졌다.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의 말투를 빌자면, "다큐, 당신은 언제부터 이렇게 재미있었나"하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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