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온 판사’의 박신혜, 러블리한 악마 캐릭터의 탄생

지옥에서 온 판사

“이게 진짜 재판이야.” SBS 금토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에서 강빛나(박신혜)는 지옥에 가는 게 마땅한 가해자들을 처단하며 그렇게 말한다. 그는 지옥에서 온 악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사망한 판사 강빛나의 몸으로 들어왔다. 지옥의 총책임자인 악마 바엘(신성록)에 의해 인간세상으로 보내졌고 죄인들을 지옥으로 보내야 하는 벌이 내려졌다. 세계관 설정부터가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지옥에 악마에 판사라니.

 

하지만 그런 이유로 지상에 내려와 판사로서 활동하게 된 악마 강빛나가 벌이는 가해자 처단은 시청자들에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그 이유는 가해자들이 너무나 잔혹한데 그들이 저지른 벌에 비해 처벌이 솜방망이인 현실 때문이다. 첫 번째 가해자로 등장한 인물은 심각한 교제 폭력을 저지르고도 300만 원의 벌금형만 받고 나와 또 다시 피해자를 찾아가 끔찍한 폭행을 저지른 자다. 강빛나는 그에게 나타나 그가 피해자들에게 저지른 대로 고스란히 당하며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결국 “죽을 죄를 지었다”고 말하게 되면 “그럼 죽어”라며 지옥으로 보낸다.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을 둘이나 살해한 후에도 아이까지 상습적으로 학대해온 범죄자나 일가족을 살해한 범죄자 같은 끔찍한 사건들이 드라마에 등장하고, 법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가해자들을 시원하게 처단하는 악마 판사의 모습이 보여주는 카타르시스에 시청자들은 대리만족을 느낀다. 

 

악마가 하는 처단이라 그런지, 판타지가 섞여 있지만 그래도 잔혹한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 잔혹함이 자칫 지나친 폭력성과 자극으로만 느껴지지 않게 해주는 장본인이 바로 박신혜다. 그는 ‘러블리’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배우이니 말이다. ‘천국의 계단’에서 여주인공인 한정서의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한 박신혜는 그 후에도 주말드라마 ‘깍두기’, ‘미남이시네요’, ‘넌 내게 반했어’, ‘상속자들’, ‘피노키오’, ‘닥터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그리고 최근에 방영된 ‘닥터 슬럼프’까지 러블리한 여성 캐릭터를 주로 맡아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러블리한 아우라의 원천은 건강한 에너지다. 과거 드라마 ‘닥터스’를 함께 했던 고 김영애 선생님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박신혜에 대해 한 말이 그 단서를 알려준다. “신혜는 발이 땅을 딛고 서 있는 아이 같아요. 땅을 튼튼하게 짚고 서 있는 참 밝고 건강한 아이. 이쪽 일하다 보면 땅에서 붕 떠 있는 아이들이 많은데 신혜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좋은 배우가 될 것 같고, 좋은 여자, 좋은 엄마가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함께 호흡 맞추는 게 예뻤어요.”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아이 같은 건강함에서 나오는 러블리함. 그런데 그 러블리함은 지옥에서 온 판사 같은 하늘에 붕붕 띄워진 캐릭터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눈빛이 악마로 변할 때는 섬뜩한 면을 주지만, 그 처단하는 모습에서는 마치 천진한 아이 같은 깨발랄함이 느껴지니 말이다. 그 건강하고 발랄한 러블리한 면모들이 있어 자칫 과도한 잔혹함으로 흐를 수 있는 장면들이 중화된다. 박신혜라는 배우가 가진 힘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박신혜는 애초부터 이 길을 꿈꿨던 배우가 아니다. 그의 데뷔 과정을 보면 독특한 면이 있는데, 잘 알려진 이승환과의 인연이 그것이다.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다니던 교회에 이승환 팬이니 선생님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박신혜의 사진을 당시 이승환이 운영하는 회사 드림팩토리 클럽(지금은 이승환 1인 회사로 운영되고 있다)에서 공고한 뮤직비디오 배우 오디션에 보낸 게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오디션에서는 떨어졌지만 다음 앨범인 이승환의 ‘꽃’ 뮤직비디오에 발탁됐다. 그래서 박신혜의 본래 꿈은 가수였지만 노래를 표현하기 위해 연기수업을 받던 중 배우가 더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결국 ‘천국의 계단’의 아역오디션을 보면서 배우의 길로 들어오게 됐다. 당시 이승환의 드림팩토리가 어려워져 문을 닫게 되면서 박신혜는 다른 회사로 옮겨가게 됐지만 그 때의 경험들은 아마도 밴드 이야기를 소재로 담은 ‘미남이시네요’에서도 좋은 자양분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박신혜가 남장여자 고미남 캐릭터로 나온 이 작품은 일본에서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이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정용화와 ‘넌 내게 반했어’를 이어서 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장여자 캐릭터로서 남자들 사이에서 털털한 모습을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박신혜의 특유의 건강한 러블리함으로 그들 사이에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김은숙 작가의 ‘상속자들’을 하면서 그는 드디어 ‘한류퀸’으로서 떠올랐다. 미국, 중국, 일본은 물론 아시아권까지 월드투어 팬미팅을 한 첫 국내 여자 배우가 됐다. 

 

이제 겨우 30대지만 10대부터 연기를 해온 박신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역할들을 소화했다. 멜로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들이 많았지만 ‘피노키오’나 ‘닥터스’처럼 전문직 장르물도 소화했고, 게임과 현실이 오버랩되는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는 실제 전직 기타리스트인 호스텔 주인과 게임 속 신비로운 NPC 캐릭터 엠마의 1인2역을 연기했다. 어려서부터 무용이나 서핑 같은 다양한 스포츠를 해왔던 그는 액션 연기도 잘 소화해 ‘#살아있다’ 같은 좀비 영화나 ‘콜’ 같은 액션이 많은 스릴러, ‘시지프스:the myth’ 같은 SF 판타지에서도 이물감 없는 연기를 펼쳤다. 

 

‘지옥에서 온 판사’가 큰 인기를 끄는 건 이 작품의 강빛나 캐릭터가 가진 전복적인 요소들이 그 자체로 반전의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이다. 대부분 범죄물에서 여성들이 피해자로 등장하고 심지어 그 피해자가 당한 범죄의 판결도 주로 남성 판사들이 함으로써 억울한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성별 구도를 뒤집어 놨다. 여성이 늘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가 아닌 처단자의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이 인물 자체의 매력도 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박신혜가 가진 특유의 건강함이 주는 매력이 더해짐으로써 악마조차 발랄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변주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고 김영애 선생님이 표현한 것처럼 그 건강함은 허공으로 붕붕 띄워지는 상황 속에서도 굳건히 땅에 발을 딛고 있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감을 잃지 않는 건강함, 이건 박신혜만이 아닌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글:국방일보, 사진:SBS)

'의문의', 이런 허술한 대본으로 제대로 된 일승 가능할까

뭐 이런 허술한 드라마가 있을까. 이야기와 액션은 폭주하지만 시청자들은 그 폭주하는 전개에 이입이 잘 되지 않는다. 이유는 너무나 기본적인 걸 이 드라마가 지키지 못하고 있어서다. 개연성 부족. 사형수가 ‘어쩌다 탈옥수’가 된다는 그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그럴 듯한 과정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새로 시작한 SBS 월화드라마 <의문의 일승>. 이렇게 해서 과연 일승이라도 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드라마가 현실성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만화 같은 전개라고 해도 나름의 개연성은 주어야 하지 않을까. 무슨 감옥이 마음만 먹으면 나갔다 들어왔다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버렸을까. 또 탈옥한 마당에 시체를 처리하는 의문의 인물들을 만나 쫓기게 되는 상황이 마침 벌어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의문의 일승>에 대한 기대를 만든 건 윤균상과 정혜성 같은 매력적인 배우가 주인공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윤균상은 <육룡이 나르샤>, <역적>, <닥터스> 같은 작품을 거치며 성장 가도를 걷는 배우이고, 정혜성은 <구르미 그린 달빛>과 <김과장>을 통해 매력적인 연기자라는 걸 증명했던 배우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의 조합이 어떤 그림을 그려낼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배우들이 출중해도 역시 드라마는 대본과 연출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의문의 일승>은 대본이 너무 허술하다. 사형수에서 탈옥수 그리고 이제는 형사 역할로 변신하는 인물이 바로 오일승(윤균상)이다. 결코 쉽게 납득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 변화 과정에 대한 디테일한 설득이 이뤄져야 비로소 이 이야기가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오일승이 탈옥을 결심하게 되는 그 이유도 사실 너무 약하다. 자신 때문에 살인 공범 누명을 쓰고 감방에 들어온 딱지(정성우)의 여동생 은비(김다예)을 노리는 감옥 동기의 살인을 막기 위해서가 그 탈옥의 이유다. 그렇게 탈옥해 은비를 살해하려는 범인을 막는 과정도 저게 가능할까 싶은 개연성의 부족을 보인다. 

옥상 물탱크에 묶어놓고 물이 차올라 죽을 위기에 처한 은비를 구하는 과정은 시청자가 바라보기에 끔찍한 장면일 수밖에 없다. 은비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오일승이 형사들과 대치하고 결국 물탱크에 구멍을 내서 구하고는 유유히 사라지는 그 과정도 어떻게 된 것인지 생략되어 있다. 대본도 대본이지만 이 물탱크에서 은비를 구해내는 과정의 연출은 스펙터클하긴 해도 잘 납득이 되진 않는다. 

아마도 <의문의 일승>은 다소 만화적인(그렇다고 모든 만화가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야기에 연출을 의도하고 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납득되지 않는 상황의 반복 끝에 남는 건 잔인하고 자극적인 장면들뿐이지 않을까. 특히 강간살인을 의도하는 범인의 면면들은 너무 자세하게 등장해 보기에 불편할 수 있었다. 

첫 회이기 때문에 시선을 잡아끌려는 목적이 강했을 것이다. 그래서 좀 더 스펙터클하고 빠른 전개를 보여주려 했을 테지만, 인물과 스토리에 대한 납득 없이 그저 보여주기식 전개는 오히려 드라마에 대한 몰입만 방해할 뿐이다. 이런 대본과 연출로는 제 아무리 윤균상 같은 배우라도 매력을 드러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첫 방의 부족한 면들은 과연 <의문의 일승>은 채워나갈 수 있을까.(사진:SBS)

‘마녀의 법정’의 사회적 의제 vs ‘사랑의 온도’의 사적 멜로

사실 액면으로만 봤을 때 SBS 월화드라마 <사랑의 온도>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이 이토록 차갑게 식어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따뜻한 말 한 마디>, <상류사회>, <닥터스> 같은 작품을 통해 믿고 보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하명희 작가의 작품이고, 작년 <또 오해영>에 이어 <낭만닥터 김사부>로 스타덤에 오른 서현진과 신인배우답지 않게 급성장하고 있는 양세종이 출연한 작품이다. 

'마녀의 법정(사진출처:KBS)'

실제로 이 드라마는 초반 괜찮은 반응을 이끌었다. 인물들 간에 벌어지는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였고 드라마의 색깔에 맞게 따뜻한 연출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서현진, 양세종, 김재욱 같은 배우들의 호연이 그 인물의 섬세한 심리변화를 제대로 표현해줘 잔잔하면서도 결코 약하지 않은 극적인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해줬다. 

반면 KBS <마녀의 법정>은 방송 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기대감을 주는 작품은 아니었다. 정도윤 작가는 시청자들에게 낯설었고, 물론 전광렬이나 김여진의 출연이 드라마에 무게감을 주었지만 주인공들인 정려원이나 윤현민은 <사랑의 온도>와 비교해보면 그렇게 뜨거운 관심을 받는 배우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첫 회에 6.6%(닐슨 코리아)의 시청률이 나온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로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첫 회에 좋은 인상을 남긴 <마녀의 법정>은 2회에 9.5%의 시청률로 반등했고 4회만에 최고 시청률 12.3%를 찍었다. 그리고 줄곧 월화드라마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반전의 주인공이 됐다. <사랑의 온도>의 추락과 <마녀의 법정>의 상승곡선은 시청자들의 이동을 명확히 보여준다. MBC <20세기 소년소녀>는 논외의 작품이 되었다. 줄곧 2%대의 시청률로 역대 최하의 기록을 세우며 시청자들의 관심에서는 멀어진 지 오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비쌍곡선이 말해주는 건 뭘까. <마녀의 법정>이 던지고 있는 사회적 의제가 <사랑의 온도>가 자꾸만 빠져 들어가는 사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압도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드라마가 가진 세련미는 <사랑의 온도>가 훨씬 나은 면이 있지만, 소재나 이야기만을 두고 보면 <마녀의 법정>이 다루는 사건들이 훨씬 더 다채롭다. 

<마녀의 법정>은 직장 내 성추행 사건은 물론이고, 최근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일반인 동영상 유출사건, 아동 성폭행 사건 그리고 성폭력 살인사건까지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들을 다루고 있다. 성 평등한 사회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는 요즘, <마녀의 법정>의 이야기들은 그 소재만으로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밖에 없다. 

여기에 마이듬(정려원)과 여진욱(윤현민)이라는 통상적인 남녀 캐릭터의 선입견을 깨는 검사들이 사건을 해결해가며 성장하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성 역할을 뒤집어보는 묘미를 선사한다. 승소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이듬과 오히려 피해자의 입장을 깊이 공감하며 사건 해결만이 아니라 그 아픔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진욱의 합은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감성의 결합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다시금 보게 되는 건 마이듬을 연기하는 정려원이라는 배우가 가진 저력이다. 꽤 오래도록 여러 작품을 연기해온 그 공력이 이제는 훨씬 자연스럽게 그의 연기에서 묻어나오고 있다. 냉철하면서도 때론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마이듬이라는 캐릭터를 정려원은 충분히 공감하게 연기해 보여준다. 

반면 ‘사랑의 온도차’를 보여주겠다던 애초의 의도에서 점점 치정으로 치닫고, 결국 부모와 현실이라는 장벽에 부딪쳐 흔들리는 <사랑의 온도>의 인물들은 너무 뻔한 구도 앞에서 그 연기조차 퇴색된 모양새다. 좋은 연기는 좋은 캐릭터에서 나오고, 좋은 캐릭터는 좋은 이야기에서 나오기 마련인데, <사랑의 온도>는 그 이야기가 너무 뻔하다. 물론 섬세한 심리묘사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도 먼저 다채롭고 신선한 이야기가 담보됐을 때 이야기다. 

결국 <마녀의 법정>이 <사랑의 온도>를 압도한 건 그 다양한 사건들이 현실적인 사회적 의제를 건드리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반면 <사랑의 온도>가 가진 그 사적인 멜로는 갈수록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멜로라고 해도 그것이 함의하는 사회적 관계의 문제들을 ‘온도’라는 시점으로 풀어냈다면 조금 낫지 않았을까. 시청자들은 이제 지극히 사적인 사랑이야기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싶은 것이다.

하늘의 별이 된 김영애, 마지막까지 보여준 연기투혼

“묵은 빚은 돈으로 갚는 거 아이다. 눈으로 발로 갚는 기다.” 아마도 영화 <변호인>을 봤던 분들이라면 고 김영애가 연기한 국밥집 아줌마의 이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국밥 한 그릇 먹을 돈이 없어 도망쳤던 송 변호사(송강호)가 성공해 돌아와 그 때의 빚을 갚겠다며 돈을 내밀자 아줌마가 했던 그 대사. 

사진출처:영화<변호인>

이제 그렇게 찰진 대사를 더 이상은 들을 수 없게 됐다. 김영애는 지난 9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고인이 된 그녀의 소식이 특히 놀랍게 다가왔던 건, 최근까지도 우리의 기억 속에 선연히 남은 작품들 때문이다. 유작이 된 KBS <월계수 양복점>에서 우리는 전혀 그녀가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뒤늦게 알려진 것이지만 끝까지 진통제 투혼을 보이며 펼친 연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김영애가 얼마나 치열한 배우였는가를 각인시켰다. 

김영애만큼 극과 극의 이미지를 연기한 배우가 있을까. <로얄패밀리>나 <황진이> 같은 작품에서 그토록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줬지만, <변호인>은 물론이고 <닥터스>나 <판도라>, <카트> 같은 작품에서는 서민들의 정이 느껴지는 따뜻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제는 고인이 되었다는 소회 때문일까. 그래도 특히 기억이 남는 건 한 그릇의 국밥 같은 따뜻함이 묻어나는 서민적인 모습이다. 

<변호인>이나 <닥터스> 그리고 <판도라> 같은 작품을 보면 김영애라는 배우가 그 작품 전체에 어떤 정서를 만들어냈는지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물론 주인공의 역할은 아니지만 작품의 어떤 색깔을 부여하는 역할. 이를 테면 대사 한 마디로도 느껴지는 <변호인>에서 국밥집 아줌마의 그 따뜻함이 주는 서민적 정서는 속물이었던 송 변호사가 인권변호사가 되는 계기가 된다. 

<닥터스>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유혜정(박신혜)이 엇나가지 않고 잘 자라 당당한 의사가 되는 그 배경에는 역시 강말순 할머니(김영애)라는 존재가 자리했다. “밥 먹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해? 숨 달려 있으면 먹으면 되는 거지.” 거기서도 이 할머니는 유혜정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준다. <판도라>에서 사지로 아들을 보내며 오열하는 모습이나, <카트>에서 차츰 노동자들과 연대해가는 모습 역시 서민으로서의 아픔과 따뜻함 같은 걸로 기억된다. 

즉 원로배우로서 작품의 뒤편에 늘 서 있었지만 그 존재가 만들어내는 온기나 때로는 차가움마저 작품 전체의 중요한 정서를 담는 역할을 해줬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아마도 같이 작업을 해온 배우들로서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함께 작업했던 제작진들이나 배우들이 진심어린 애도의 뜻을 표하는 건 그래서다. 

김영애가 췌장암을 발견한 건 이미 2012년 <해를 품은 달>을 촬영하던 도중이었다고 한다. 힘겨운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책임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9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유작이 된 <월계수 양복점>을 촬영하면서도 고인은 아픈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고 대사 하나하나를 잊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작품 속에서 그 작품의 정서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고인은 아마도 배우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는 모습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 모습은 대중들에게 어떤 열정과 따뜻함으로 기억될 것이다. <변호인>에서 보여줬던 영원히 식지 않을 국밥집의 온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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