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과 김병만, 우리 시대의 리더십

 

대선이 가까워 오면서 대선주자들의 공약은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언제 공약이 없어서 나라가 이 지경이 됐나. 아마도 대선을 대하는 대중들의 마음은 천만 번의 공약보다는 단 한 번의 실천에 더 진정성을 느낄 게다. 이러한 대중들의 정서를 가장 잘 말해주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유재석과 김병만이다. 이 두 대중들의 영웅은 이 시대가 원하는 리더십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예능 프로그램이 리더십을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성을 갖게 된 것은 프로그램들이 집단 MC체제로 운영되고, 그 안에 매번 도전적인 미션을 부여하게 되면서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시대를 연 <무한도전>이나 <1박2일>이 대표적이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대중들이 몰입할 수 있는 서민을 대변하는 캐릭터들을 팀으로 모았다. 그러니 그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에 때론 대중정서가 작동하는 방식은 정치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유재석은 우리에게 겸손과 성실과 배려의 아이콘이다.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어떤 이들에게도 소홀함이 없다. <무한도전>이나 <런닝맨> 속에서 단 몇 초로 지나가 버리는 유재석의 ‘착한 손’은 어김없이 대중들의 눈에 발견되어 칭찬받는다. 그것은 억지로 흉내 내거나 의도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저 습관처럼 배어있는 품성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방송이 스쳐 보낸 것도 대중들은 굳이 찾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무한도전> 300회 특집에서 유재석이 후배들에게 자신이 사라질 때를 대비해 ‘준비를 하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그의 겸손과 성실과 배려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재석의 리더십이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그의 리더십이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공존의 의미를 드러낼 때다.

 

과거 스키 점프대를 오르는 <무한도전>의 미션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가는 길을 밑에서부터 받쳐주며 “포기하겠다는 말만 하지 마라”고 했던 장면은 그의 함께 하는 리더십이 가장 잘 드러났던 사례다. 또 <런닝맨>에서 <슈퍼7> 콘서트 논란으로 하차선언을 하기도 했던 개리에게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마”라고 소리쳤던 장면에서도 그 리더십은 빛을 발했다.

 

이런 유재석의 면모를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이가 바로 김병만이다. 유재석이 <무한도전>과 <런닝맨>의 팀을 꾸려가고 있다면, 김병만은 병만족의 족장이다. 정글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는 리더십을 발휘해 모두를 생존하게 해야 한다. 이 <정글의 법칙>의 환경은 고스란히 작금의 대중들이 매일 겪고 있는 혹독한(심지어 진짜 정글에 로망을 느낄 정도로) 도시 정글의 삶을 대변한다. 김병만이 이 시대 대중들이 원하는 리더십과 만나는 지점이다.

 

그가 정글에서 부족(?)을 이끄는 방식은 묵묵히 성실하게 일을 하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솔선수범해 나서고, 환경에 생존 적합한 주거공간을 뚝딱 뚝딱 만들어내고 그 안에 부족들이 살을 부비고 살아갈 따뜻한 온기를 부여한다. 그러면서도 그 힘든 환경에서조차 그 힘겨움을 소재로 부족원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정글을 빠져나오며 정작 자신도 힘들어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하지만 그런 모습이 부족들을 힘겹게 할 거라는 걸 알기에 그는 늘 담담한 얼굴에 광대 같은 웃음을 짓는다.

 

<정글의 법칙>을 자세히 보면 놀랍게도 김병만의 멘트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제작진들이 “이제 일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정글에 들어가면 묵묵히 누가 시키지 않아도 구석에서 일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의 과묵할 정도로 일에 빠져 있는 모습은 편집 과정에서 자막이 김병만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장면으로 자주 쓰이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만족들은 김병만에게 의지하고 그의 말을 따른다. 그의 경험을 믿는 것이고, 그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준 것에 대해 부족들이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유재석과 김병만이 이 시대의 정치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저 말이 아니라 실천력 있는 행동이며, 땀이 주는 신뢰다. 말로는 함께 가겠다 하고는 혼자만 배를 채우는 그런 사리사욕이 아니라 심지어 자신이 떠난 후의 시간을 배려할 정도로 함께 가는 리더십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개미 같이 작아 보이는 서민들을 진짜 개미 취급하는 게 아니라, 항상 낮은 자리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낮추는 겸손과 배려의 리더십이다. 지금 대선주자들은 과연 이러한 리더십을 갖추고 있는가.

왜 지금 <무신>이어야 했을까

 

이제 종영이 임박한 MBC 주말사극 <무신>은 애초 ‘대장경 천년 특별기획’이라는 기치로 제작되었다. 실제로 이 사극의 초반부에는 대장경을 염두에 둔 에피소드들이 매회 등장했다. 조금은 뜬금없어 보였지만, 대장경의 의미를 하나 하나 설명하는 장면들이 사족처럼 들어 있었다. 물론 이 사극의 주인공인 김준(김주혁)이 자라난 곳이 다름 아닌 절이고, 그 역시 최씨 가문의 노예로 끌려오기 전에는 스님이었다.

 

'무신'(사진출처:MBC)

하지만 <무신>은 김준이 노예 신분을 벗고 점점 고려 무신정권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대장경 에피소드하고는 멀어졌다. 드라마의 전체 흐름으로 보면 대장경 에피소드는 마치 명분을 위해 들어간 장면처럼 보인다. 실제 <무신>이 다루려고 하는 것은 고려말 무인들이 정권을 휘둘렀던 이른바 ‘무신정권’ 약 100년 간의 통치기간이다. 왕이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권은 군부에 있었던 시기. 그 시기에 김준이라는 노예에서 시작해 최고 권력자가 되는 인물을 조명한 것이 <무신>의 실체다.

 

그런데 왜 지금 군사통치를 했던 그 시기의 이야기를 다뤄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것은 그간 사극이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가져왔다는 점 때문이다. 96년부터 98년까지 방영되었던 KBS 사극 <용의 눈물>은 97년 대선에 영향을 줄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며 형제들마저 내쳤던 태종 이방원의 이야기는 당시 IMF 시절 대권후보들이 차용하고 싶은 이미지 그대로였다. 실제로 이방원(유동근)이 탄 말 앞다리에 'DJ'라는 글자가 새겨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0년 총선 때 KBS 사극 <태조 왕건>, 2007년 대선 때 MBC 사극 <주몽>과 <이산>인 인기를 끈 것도 사극에서 정치적인 리더십을 찾으려는 대중들의 욕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거철에 방영된 것은 아니지만 <선덕여왕>이나 <뿌리 깊은 나무> 같은 사극들은 모두 현실 정치의 염원이 묻어나는 작품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무신>은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아냈을까.

 

<무신>은 대몽항쟁을 다루면서 무신들과 문신들을 극명한 대비로 그려 넣었다. 현재 몽고의 쿠빌라이칸에게 무릎을 꿇은 문신들을 대표하는 원종과 이를 극렬히 반대하는 김준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당시 외교에 있어서 누가 옳았는가 하는 점은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다. 또 외세에 자주를 내세운 당대 무신들의 기상은 물론 높이 살만한 일이다. 하지만 왜 이 이야기가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 사극에서 다뤄지고 있는가 하는 점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군사정권이니 군사통치니 하는 용어에서 먼저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박정희 정권이다. 박정희는 실제로 <무신>이 다루고 있는 군사통치처럼,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출범하고 5월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꾼 뒤 1963년 12월16일까지 이를 통한 실질적인 통치를 했던 적이 있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실권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신>의 역사적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물론 <무신>이 박정희를 그대로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작품이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사극이 그려내는 정치적 뉘앙스는 분명 존재한다. 외세에 대적하는 자주 국방이니, 강력한 중앙집권 같은 이 사극이 모토로 보여주는 정치의 세계는 자칫 대선의 특정 정당에 편향된 느낌을 줄 수 있다. 왜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 <무신>같은 소재를 다뤄야 했을까. 그것은 진정 대장경 천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정말?

<힐링캠프>는 대선캠프가 아니다

 

안철수 원장의 <힐링캠프> 출연을 두고 여야 대선주자들이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거다. 하긴 긴장할만하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이 <힐링캠프>에 출연한 후 8%대였던 지지율이 두 배 가까이 올랐던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조동원 홍보기획본부장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힐링캠프 출연은 국민적 지지도에 있어서 우월적 지위를 갖고 있는 안 원장에게 차별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안 원장의 방송은 형평성 측면에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힐링캠프'(사진출처:SBS)

새누리당 대선 경선후보인 김문수 경기지사와 민주통합당 손학규 후보가 <힐링캠프> 출연을 타진했다가 거절당했던 사실은 형평성 논란에 불을 지폈다. 조 본부장은 "안 원장이 범야권에 속해 있으니 야권에서 2명이 나왔다면 여권에서도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을 포함해 2명이 나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쯤 되면 <힐링캠프>는 마치 대선캠프가 된 모양새다. 도대체 이 10% 시청률을 내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의 그 무엇이 이토록 정치권을 들썩이게 만드는 걸까. <힐링캠프>가 그런 정치적인 상징성이라도 갖고 있는 프로그램일까. 언제부터 <힐링캠프>의 영향력이 이토록 커진 걸까.

 

<힐링캠프>가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과 민주통합당 문재인 의원을 섭외했을 때 그 목적은 정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새로운 게스트 풀을 발굴하는 차원이 더 큰 목적이었다. 예능이 웃음만을 주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예능은 재미와 함께 의미와 감동도 찾는 시대가 아닌가. 토크쇼라고 늘 연예인만 나오라는 법은 없어졌다. 그래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두 사람 중 만일 한 사람이 출연하지 않는다면 둘 다 출연시키지 않겠다는 게 방침이었다고 하니, 정치인 게스트를 출연시키는 문제가 얼마나 쉽지 않은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방송이 나온 후, 두 사람에 대한 반응이 너무 좋았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간 정치인하면 으레 생각했던 모습을 탈피해, 그저 평범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주자 국민적 지지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예능 출연에 대한 문의가 방송가에 점점 많아졌다. 실제로 <SNL코리아>에는 이재오 의원과 정세균 의원이 출연해 콩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런 사정이니 안철수 원장의 <힐링캠프> 출연은 대선주자들에게는 공평하지 않다고 여겨졌을 만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대선출마를 발표하지 않은 안철수 원장을 같은 선상에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게다가 안철수 원장은 이전에도 자주 방송 출연을 해왔던 터다. 그런 그가 방송에 나온다는 것이 왜 새삼스러울까. 안철수 원장은 이미 <무릎팍 도사>에도 출연한 경력이 있다.

 

이것은 <힐링캠프>라는 예능 프로그램 때문이라기보다는 지금 시기가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그만큼 민감해진 문제다. 게다가 안철수 원장의 행보가 기존 정치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애매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힐링캠프>는 예능이지 대선 방송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치인들이 모두 <힐링캠프> 같은 예능에 출연한다고 해서 지지도가 올라갈 거라는 것은 착각이라는 점이다. 물론 유리한 지점은 있겠지만, 아마도 박근혜 의원이나 문재인 의원이 효과를 본 것은 그들이 방송 출연 이전부터 갖고 있던 대중 친화적 이미지(이것은 물론 이미지일 뿐이지만)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방송에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연예인들도 미끄러지기도 하는 곳이 예능이라는 정글 아닌가.

 

다만 씁쓸한 것은 그간 대중친화적인 삶을 잘 보이지 않던 정치인들이 대선이 가까이 오면서 너도 나도 예능에 줄을 대는 모습이다. 예능은 서민들의 여가라는 점에서 그들에게는 표밭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그렇게 예능에 나와 친 서민적인 모습을 연출한다고 해도 거기에 진심이 묻어나지 않으면(이것은 평상시의 생활에서 묻어나기 마련이다) 대중들은 외면할 것이다. 대중들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생각하지 말자.

천근같은 입, 백성을 자식처럼 보는 마음

MBC 월화 사극 ‘이산’에서 앞으로 정조가 될 세손 이산(이서진)은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준 전권을 갖고 개혁을 시도한다. 그간 호시탐탐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들과 싸워왔던 이산으로서는 그 갑작스런 전권이 부담스러울 수 있었겠지만 절치부심 칼날을 집어든다. 제일 먼저 칼을 대는 곳은 시전상인들이 틀어쥐고 있는 경제다. 

정치란 사실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말만 무성하고 실제 백성은 곤궁함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만큼 방향은 제대로 잡은 셈이다. 그들과 부패한 신하들의 정경유착은 난전상인들과 같은 백성들의 상업을 뿌리째 흔들어왔다. 게다가 백성들에게 가야할 경제적 혜택이 부패한 신하들에게 가면서 그렇게 얻어진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상황이니 이산으로서는 이것이 일거양득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명분도 확실하고 백성들의 마음도 이산에게 기울어진 상황, 그러나 그 속에서 영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영조는 이미 이산이 시도하는 개혁이 어려울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이산은 시전상인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태워버리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을 매점매석 해버리자 난항에 빠진다. 경제가 돌지 않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다고 했던 일은 백성을 더욱 곤궁에 빠뜨리고 결국 이산은 모든 전권을 영조에게 다시 돌려주게 된다.

그 때 영조가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 이야기의 요지는 ‘자신도 시전상인들이 깡패 같은 자들이라는 걸 잘 알지만, 정치란 무릇 백성을 자식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러니 그 깡패 같은 자들도 또한 자식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나쁜 자식도 저마다의 능력은 갖고 있는데 그 나쁜 짓을 나무란다고 능력까지 빼앗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조의 시전상인들이 가진 금난전권 혁파 시도와 실패 그리고 거기에 대한 영조의 대사는 작금의 정치가 보여준 개혁이라는 명분과 현실과의 괴리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무수히 많은 개혁에 대한 이야기들과 염원이 있었지만 실상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있으며, 설사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들의 곤궁함을 풀어주었던가. 혹 못 가진 자들을 위한 개혁의 대의명분이 앞서 가진 자들의 숨통만 조였던 것은 아닌가. 대선을 치르는 현재, 가지고 못 가지고를 떠나 모든 이들의 입에서 경제를 제일 우선으로 내세우게 된 것은 그 여파가 국민 모두에게 미쳤음을 방증한다.

물론 이런 상황이 연출된 데는 개혁을 하려는 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거기에 만만찮은 반대가 있었고, 그것은 ‘이산’에서 보이듯이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산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이 어려운 상황을 만든 것은 이 끝을 알 수 없는 대결구도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정작 있어야할 국민의 자리는 사라지고 당의 이익만을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 ‘찬성을 위한 찬성’으로만 점철된 ‘저들만의 리그’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영조는 늘 백성들을 그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정치를 펴나간다. 신하들의 감언이설에 잘 넘어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백성이 상전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적과 아군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백성을 위하는 것이면 어느 쪽이든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는 말 그대로 ‘깡패 같은 아들까지 보듬는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섣불리 가볍게 입을 열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명령하기보다는 신하들이 스스로 얘기하게 만드는 화법을 구사한다. 영조가 보여주는 일련의 정치적 행보가 하려는 말은 이런 것이다. ‘임금이란 참으로 무서운 자리이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수많은 백성들이 사지로 몰릴 수 있으니.’ 이 말은 지금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누가 당선되든 국민들을 진정 자식처럼 여길 수 있는 영조 같은 정치인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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