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 서예지와 김수현이 나누는 온기가 이토록 먹먹한 건

 

"그래서 마음이 아파? 아니면 슬퍼? 지금 정확히 어떤 감정이야? 넌 몰라. 네가 무슨 감정으로 이렇게 날 뛰는 건지 너도 모른다고. 속은 텅 비었고 그냥 소리만 많아. 깡통처럼. 그러니까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에 대해 다 안다고 다 이해한다고 착각하지 마. 너 죽을 때까지 나 몰라."

tvN 토일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문강태(김수현)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걸 알고는 화를 내는 고문영(서예지)에게 그렇게 쏘아붙인다. 반사회적 인격성향을 가진 고문영은 감정이라는 걸 갖지 못한 채 태어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강태가 왜 자신을 이렇게 따라 다니냐고 물었을 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갖고 싶다고 말한다. 예뻐서.

 

고문영은 어린 시절 자신의 목을 졸라 죽이려 했던 아버지에 대해서 문강태에게 "치매환자"라며 "영혼은 죽고 가족만 남은 빈껍데기"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람도 물건처럼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진다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고문영에게 화가 난 문강태가 차에서 내려 혼자 걸어가자 고문영은 그 뒤에 대고 "사랑해 강태씨"라고 바락바락 소리친다. 하지만 그 말에는 영혼이 없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니까!"

 

그런데 과연 그런 어쩌다 감정이 없는 빈 깡통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잘못일까. 그런 자는 누군가의 온기조차 느낄 자격이 없는 걸까. 문강태는 겉으로는 그렇게 잔인하게 말했어도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다. 그것은 자폐를 가진 형 때문에 자신도 어려서부터 심지어 엄마에게까지 자신의 존재가 빈 깡통처럼 지워지는 깊은 상처를 겪은 바 있다.

 

엄마는 어린 강태에게 말했다. "강태야. 너는 죽을 때까지 형 옆에 있어야해. 키우는 건 엄마가 할 테니까 너는 지켜주고 챙겨주고 그러면 돼. 알았지? 엄마가 너 그러라고 낳았어." 상태를 향해 누워 자는 엄마를 애써 등 뒤에서 껴안으며 강태는 얼마나 속으로 외쳤을까. 나도 온기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강태가 문영에게 한 그 날선 이야기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자신 또한 빈 깡통 같은 삶이고 그건 누구도 몰라주는 일이었다고.

 

문영은 병원에서 아버지를 다시 대면하지만, 아버지는 "왜 살아있냐"며 그의 목을 조른다. 냉정하게 '빈껍데기'라고 말했지만 아마도 실오라기만큼 남았을 문영의 기대는 그 순간 무너졌을 게다. 그는 비 내리는 그 먼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텅 빈 깡통이 애써 제 몸을 혹사시킨다. 그렇게라도 해야 제 존재의 아픔을 드러낼 수 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렇게 좀비처럼 절망적으로 걸어가는 문영을 봤지만 외면했던 강태는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문영이 쓴 어른들을 위한 동화 '좀비아이'를 읽는다. '어느 작은 마을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어. 피부는 창백하고 눈동자가 아주 큰 아이였지. 아이가 크면서 엄마는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 이 아이는 감정이 전혀 없고 그저 식욕만 있는 좀비였다는 걸. 그래서 엄마는 마을 사람들 눈을 피해 아이를 지하실에 가두고는 밤마다 남의 집 가축을 훔쳐서 먹이를 주며 몰래 키웠어. 하루는 닭을.. 하루는 돼지를..'

 

강태는 그 동화의 이야기가 점점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낀다. 마치 좀비아이처럼 가려지고 버려졌던 자신의 그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마을에 역병이 돌아서 남은 가축들이 다 죽고 사람들도 많이 죽어. 그나마 산 사람들은 마을 모두 떠나버렸지. 아들만 두고 떠날 수 없던 엄마는 결국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자신의 다리 한 쪽을 잘라주고 다음엔 팔 한쪽을 잘라주고 그렇게 다 주고 결국엔 몸통만 남아서는 마지막으로 아이의 품속에 스스로 들어가 자기의 남은 몸을 맡기지.' 강태는 잠잘 때조차 항상 형 상태를 향해 있었던 엄마의 등을 애써 끌어안았던 자신을 떠올린다.

 

'몸통만 남은 엄마를 아이가 양팔로 꽉 끌어안으며 처음으로 한마디를 해. 엄마는... 참... 따뜻하구나.." 그리고 그 마지막 한 줄에 결국 강태는 오열하며 알게 된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빈 깡통이었고 그럼에도 엄마의 온기가 필요했었다는 것을. 문영 역시 그러하리라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그래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 밤길을 재수(강기둥)의 오토바이를 빌려 달리고 달린 강태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벌이라도 내리듯 그 빗길을 걷고 걷는 문영을 찾아내고, 그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 안아준다. 그건 강태가 문영을 안아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안아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그렇게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삶의 존재가치가 부정된 문영과, 지체를 가진 형 때문에 존재를 부정당해왔던 강태가 서로를 끌어안으며 온기를 나누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떻게 태어났든 우리는 저마다의 빈 구석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 빈자리의 차가움을 채우기 위해 서로의 온기가 필요하다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사진:tvN)

‘지만갑’, 소지섭·손예진의 아련한 동화 같은 판타지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어린 아이에게 읽어주는 ‘구름나라’ 동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죽은 엄마가 장마가 시작되자 돌아와 아이를 만난다는 동화. 우진(소지섭)의 어린 아들 지호(김지환)는 세상을 떠난 엄마 수아(손예진) 역시 장마가 시작되면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 그런 아들이 못내 안타깝지만 어느 장마가 막 시작하던 날 우진과 지호 앞에 진짜 수아가 나타난다. 

설정부터가 동화 같은 판타지지만, 관객들은 의외로 이 이야기에 몰입한다. 돌아온 수아는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렸고, 우진으로부터 그들이 어떻게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게 되었는가를 하나하나 듣게 된다. 판타지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지만, 관객들은 그런 판타지는 어느 순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건 우진과 지호가 얼마나 절절하게 수아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었는가가 충분히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어느새 이들의 바람에 몰입하게 된 관객은 죽은 이가 돌아온다는 설정을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담으려는 건 단지 죽은 인물이 돌아와서 다시 이어지는 사랑이야기 정도가 아니다. 기억을 잃은 수아가 우진으로부터 다시 듣게 되는 그들의 첫 만남부터 이별과 재회 그리고 결혼까지 해 아이를 갖게 되는 그 과정의 이야기들은 새삼 우리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이미 결혼해 가정을 꾸린 이들이라면 그렇게 살다보니 마치 기억을 잃은 것처럼 지워버린 젊은 날의 설렘과 절절했던 사랑이 이 영화를 통해 새록새록 떠오를 수 있다. 

과거와는 기억이 단절되어 살아가던 수아는 우진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그 사랑을 다시금 느끼기 시작한다. 잊고 있던 사랑을 재확인하고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 그건 이제는 무뎌진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남다른 감회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단지 추억을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옆에 그 사람이 있었다는 걸 수아와 우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첫 사랑의 이야기는 아련한 동화 같은 판타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바로 그 이야기가 가진 동화 같은 마력적인 힘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시작과 함께 읽어주는 ‘구름나라’ 동화가 가진 힘이 그렇고, 후반부에 이르러 수아가 써내려간 일기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 이야기들은 현실이 맞나 싶은 아련함으로 다가와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힘겨운 삶을 지금껏 지탱해주고 있는 숨은 힘들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 이야기를 마치 진짜인 것처럼 시침 뚝 떼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판타지로 그려내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상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며 서로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주었던 그것들이 있어 결국은 누구나 이별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굳건히 살아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Be with you’다. 지금 옆에 없어도 항상 당신 옆에 있다는 것. 그건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기억이자 이야기가 가진 마력 같은 힘을 말하는 것일 게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한 겨울 같은 차가운 현실 앞에서 몸도 마음도 식어버린 삶이라면, 그들에게도 찬란했던 한 여름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고 때론 촉촉하게 쏟아져 내리던 장마 같은 감정들이 폭발했던 때가 있었다는 걸 끄집어내주는 영화다.(사진:영화'지금 만나러 갑니다')

‘흑기사’, 장미희와 서지혜가 바로 숨은 흑기사

사실 판타지 장르에서 그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의 ‘도깨비’나 ‘저승사자’ 캐릭터는 실제적이지 않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다. 결국 두 역할을 소화해낸 공유와 이동욱이 그 캐릭터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면 그 작품은 애초 성립 자체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런 점에서 보면 KBS 수목드라마 <흑기사>라는 판타지 드라마를 성립시키는 건, 다름 아닌 샤론과 백희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서지혜와 장미희가 아닐 수 없다. 이 드라마가 가진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 200년 넘게 불멸하는 존재가 갖는 남다른 시간관념, 그래서 전생과 후생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관점 등이 모두 가능해진 건 다름 아닌 샤론과 백희라는 두 신비한 존재가 납득되고 있어서다.

장미희는 사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변함없는 미모와 스타일을 보여줌으로써 <흑기사>가 갖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을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이해시키는 면이 있다. 시대가 지나도 변함없는 외모는 이 작품이 가진 ‘불멸의 존재’라는 캐릭터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게다가 장미희라는 배우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 역시 현실감을 뛰어넘어 이야기에 신비한 느낌을 부여한다. 

그가 연기하는 백희는 사실상 문수호(김래원)와 정해라(신세경)의 흑기사 같은 인물이다. 어린 시절 수호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에게 다가와 앞으로 모든 일들이 다 잘될 것이고 행운이 따를 것이라고 말해줌으로써 실제로 수호가 큰 성공을 갖게 된다는 설정은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과도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만큼의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한 누군가의 성공이나 실패가 어쩌면 “운이 좋거나 나빠서 생긴 일”일 뿐이니 거기에 교만하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백희는 문수호와 정해라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덕담과 기도를 반복함으로써 진짜로 그들이 행복해지는 삶의 신비함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러면서 그런 덕담과 기도가 늙지 않는 천형으로부터 자신을 변화시켜 나이 먹기 시작한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훨씬 원숙해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장미희가 아니라면 이만큼 잘 소화해내기가 어려운 캐릭터다. 

하지만 <흑기사>에서 진짜로 더 칭찬을 해주고 싶은 배우는 바로 서지혜다. 물론 과거 자신의 잘못 때문에 불멸의 존재로 살아가는 벌을 받고 있는 인물이지만, 샤론은 이 드라마가 가진 독특한 판타지적 느낌을 가장 잘 만들어내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서지혜는 이 캐릭터가 가진 차가움과 쓸쓸함 그러면서도 어딘지 아이 같은 천진함 같은 것들을 실제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신비롭게 소화해내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샤론양장점은 그래서 이 캐릭터 자체처럼 느껴진다. 전생의 악업을 끊어내기 위해 옷을 만드는 샤론이란 인물은 마치 동화 속에서 나온 듯한 느낌을 주고, 마치 그의 시종처럼 일하는 양승구 역할을 소화해내는 김설진은 현대무용의 대가답게 일상과 춤동작들을 엮어 비현실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하지만 이 모든 판타지적 느낌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건 역시 서지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해야 할 것을 대신 해주는 인물로서 ‘흑기사’를 지칭하곤 한다. 그런 뜻에서 보면 장미희와 서지혜는 이 드라마의 확실한 흑기사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보인다. 주인공들은 아니지만 주인공이 겪는 판타지적인 사랑과 운명의 이야기에 신비로운 분위기의 밑그림을 그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이 드라마의 숨은 흑기사들이라고 느껴질 만큼.(사진:KBS)

'옥자', 감동적인 서사를 위해 봉준호가 심어놓은 상징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옥자>는 단순명쾌한 영화다. 도축될 위기에 처한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슈퍼돼지 옥자를 미자(안서현)가 구하는 이야기. 하지만 이 단순한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에 봉준호 감독은 무수히 많은 상징들을 넣어 그 울림을 극대화했다. 영화는 단순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슈퍼돼지 옥자를 포함해)이 처하는 상황과 그 상황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선택과 행동은 그래서 곱씹어보면 꽤 많은 의미들로 읽혀진다. 

사진출처:영화<옥자>

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옥자와 미자가 초반 보여주는 벼랑 끝에서의 생존 장면은 그저 대상이 아닌 가족으로서의 둘의 관계를 곧바로 드러내고 후에 이어질 옥자 구출작전에 아무런 고민도 없이 뛰어드는 미자의 행동을 너무나 쉽게 이해시킨다. 영화 속에서 미자는 마치 자연 그대로를 캐릭터화한 것처럼 고민하고 생각하기보다는 행동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영화가 끝나고 나도 미자가 달리고 또 달리는 그 장면이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건 그래서다. 

옥자를 끌고 간 미란도 서울사무소를 찾아간 미자가, 투명해 저 앞에 안내원이 보이지만 단단해 결코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창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도 대단히 인상적이면서 상징적이다. 그건 앞뒤 재지 않고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미자의 직진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본으로 구축된 그 회사의 말끔한 세계가 결코 이 작은 소녀에 의해 부서질 것 같지 않지만 그녀가 만든 충돌의 울림으로 인해 의외로 깨져버린다는 걸 그 장면은 드러낸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자본의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저들과 싸워나갈 것인가에 대한 단초를 담아낸 것일 게다. 

결국 미자는 옥자를 구출하려는 그 행위를 바로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언론에 노출되게 함으로써 ‘울림’을 만들어낸다. 옥자 같은 슈퍼돼지가 유전자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것에 대한 불편함을 미자 같은 농민들에 의해 친환경적으로 길러졌다는 것을 통해 상쇄시키려던 글로벌 기업 미란도의 CEO 루시(틸다 스윈튼)는 미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울림’을 다시 덮기 위해 그녀와 옥자의 감동적인 상봉식을 계획한다. 

하지만 그런 포장 역시 동물해방전선(ALF)에 의해 끔찍한 고기공장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실패로 돌아가자 루시가 이끌던 미란도는 그녀의 쌍둥이 언니인 낸시 손으로 넘어간다. 루시가 그나마 친환경적 이미지 같은 거짓 홍보를 통해서나마 이 고기산업을 이해시키려 했다면, 낸시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자본주의적 판단만을 내린다. 가격을 낮추면 결국 소비하게 될 것이라고. 이것은 아마도 노골화된 자본주의의 민낯을 고발하는 대목일 것이다.

공장은 마치 수용소의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끔찍하고 슬프다. 공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슈퍼돼지들의 물결 속에서 돼지들은 생명을 잃은 채 고기로 분해되어 포장된다. 그런데 똑같은 위기에 처한 옥자를 미자가 구해내는 방식이 의미심장하다. 보다 액션을 통해 구출작전이 벌어질 것처럼 여겨졌지만, 의외로 간단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옥자를 사기 위해 모았지만 살 수 없게 된 걸 알고 대신 산 금돼지를 옥자의 가격으로 지불하는 것. 아마도 루시는 거부했을 이 제안을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해 결정하는 낸시는 받아들인다. 금돼지를 쥔 그녀에게 미자는 고객이다. 돈과 생명은 그렇게 교환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마지막 엔딩에 들어가 있다. 옥자를 구해나오는 미자의 발걸음이 철조망 저 편으로 가득 채워져 공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슈퍼돼지들을 바라보며 한없이 무거워질 때, 가족으로 보이는 슈퍼돼지 부부가 새끼를 철조망 바깥으로 밀어내는 장면이다. 마치 아이를 부탁한다는 듯 얼굴로 마음을 전하는 그 슈퍼돼지 부부를 뒤로 두고 새끼는 옥자의 입 속에 숨겨져 그 홀로코스트를 빠져나온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될 이미지는 ‘입’이다. 고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유전자조작으로 탄생한 슈퍼돼지가 스테이크로 나와 그것을 시식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고기를 먹고 “최고”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생명에 대한 불편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고기가 한 때는 말을 알아듣는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사람은 고기를 먹어치우지만, 옥자는 그 입에 새끼를 숨겨 생명을 구한다. 사람들은 공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렇게 생산된 고기를 듣지 않는 대가로 맛있는 식사를 한다. 그들에게 생명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대상일 뿐. 반면 미자는 집으로 돌아와 옥자와 할아버지와 함께 소박한 식사를 한다. 그것은 우리 식의 정서로 ‘식구’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옥자의 귀에 대고 미자는 무언가 귓속말을 한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옥자에게 했는지는 알 수 없고, 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렇게 이야기를 건네는 존재로서 생명을 대하는 모습이니까.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돼지의 이야기지만, 이토록 감동적인 서사가 가능한 건 그 단순명쾌한 이야기 안에 봉준호 감독이 곳곳에 심어놓은 상징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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