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청률 추산을 왜 하나

 

불과 2,3년 전과 비교해도 작금의 시청률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이런 변화는 특히 드라마에서 두드러진다. 과거 같으면 기본이 20%에서 시작해 잘된 작품은 4,50%를 넘기기 일쑤였던 사극의 시청률이 대표적이다. <마의> 같은 이병훈 사단의 웰메이드 사극도 겨우 17%의 시청률에 머물러 있다. 종영한 <신의>도 10%대 시청률에 머물렀고 <대풍수> 역시 한 자릿수 시청률이다. 물론 이 작품들은 완성도에 그만한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낮은 시청률의 원인이 온전히 작품의 문제만이었을까.

 

'추적자'(사진출처:SBS)

흔히들 사극이 죽었다는 얘기들을 하지만 사실상 죽은 건 드라마 전체의 시청률이다.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를 빼놓고 20%를 넘기는 드라마가 귀하게 되었다. <착한남자>처럼 극성 강하고 완성도도 높은 드라마도 18% 시청률로 종영하는 상황이다. 사극이 죽었다고까지 표현된 데는 과거 높은 시청률을 올렸던 잔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낙폭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란 얘기다.

 

이런 사정은 예능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만 해도 20%를 넘어 30%에 육박하는 예능 프로그램들(<1박2일>이 그랬고 <무한도전>도 그랬다)이 있었지만 지금은 주말 예능에서조차 20%를 넘기는 프로그램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개그콘서트>가 그나마 20%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니 주중 예능 시청률은 더 상황이 안 좋다. 토크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월요일 밤 예능들은 언젠가부터 10% 시청률 기록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다. 도대체 왜 이런 시청률 대폭락이 일어난 걸까.

 

시청률이 이렇게 뚝 떨어진 것은 콘텐츠가 질적으로 하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시청률 산정 방식이 점점 현실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 시청 패턴이 TV 중심에서 인터넷, IPTV, 모바일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는 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이런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AGB닐슨미디어리서치를 예로 들면 현재 시청률 산정은 매일 전국 13개 지역, 3천여 가구를 대상으로 시청률을 산출해낸다고 한다. 각 가구에 설치된 피플미터기(시청률 산출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수치가 집계되는데 이 해당 시간 콘텐츠 자료를 통합하는 방식으로 시청률이 산출되는 것. 물론 과거에는 이런 산정방식이 어느 정도 유효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는 TV 방송을 본다는 것이 브라운관 앞에 앉아있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였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미 인터넷을 통한 다운로드로 방송을 보는 시청층들도 상당히 많아졌고, 시간에 맞춰보기보다는 IPTV를 통해 자유롭게 자기가 보고 싶은 시간에 보는 이들도 많아졌다. 또 최근에는 모바일이 확산되면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보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이렇게 방송을 보는 방법이 다양화되었는데 여전히 오로지 TV에만 맞춰져 있는 시청률 산정은 달라진 시청자의 기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편향적인 시청률은 광고의 잣대가 되기가 어렵다. 실제로 시청률과 광고가 비례적으로 올라가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즉 시청률이 제아무리 40%를 넘긴다고 해서 광고가 더 많이 붙지 않는다는 것. 또 반대로 시청률이 10%에 머물고 있어도 광고를 완판하는 드라마들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서 상반기에 방영되었던 <추적자> 같은 경우는 시청률이 10%대에 머물러 있었는데, 종영까지 광고가 완판된 사례다. 이 드라마는 국민드라마라는 칭호까지 받았는데 그것은 시청률은 조금 낮았지만 화제성이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이다. 이제 ‘국민’이라는 수식어의 기준도 시청률에서 화제성으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다.

 

문제는 이러한 시청률 산정 기준이 가져오는 폐해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의 시청률 산정 기준으로는 TV 방송 프로그램을 급격히 노화시킬 수밖에 없다. TV를 통해 보는 시청층이 중장년층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1일 AGB닐슨미디어리서치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10년 사이에 10-30대의 시청률은 절반 이상이 줄었다고 한다. 2002년 13%였던 이들 세대의 평균 시청률이 올해는 5%대에 머물고 있다는 것. 이제 현재의 시청률 산정 기준은 고작 중장년층들의 기호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막장드라마라고 불리는(여기에는 젊은 층들의 비아냥이 섞여 있다) 전형적인 과거의 자극적인 코드들을 답습하는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이러한 시청률 산정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 소위 막장드라마들의 주 시청세대는 중장년층이기 때문이다. 출생의 비밀이나 불치병, 기억상실, 신파 같은 코드들은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이템들이다. 결국 젊은 세대의 기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현재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방송 콘텐츠가 질적으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정체되는 현상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류 콘텐츠의 퇴보로도 이어질 수 있다. 지금 같은 중장년층에 편향된 시청률에 좌지우지되는 방송 환경 속에서 젊은 세대들의 눈에 걸맞는 새로운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시청률 산정에는 포착되지 않는 화제성 높은 젊은 드라마들을 마니아 드라마로 치부하는 것은 방송 콘텐츠에서 젊은 세대를 소외시키는 행위다. 세상에 마니아 드라마가 어디 있는가. 단지 작금의 시청률 산정이 그 기호를 반영하지 못할 뿐이다.

 

중요한 건 이제 중장년층들조차 이렇게 다양화된 시청패턴에 적응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은 여전히 방송을 TV로 보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지만, 이미 90년대 인터넷을 경험한 3,40대의 경우 인터넷 시청이나 모바일 시청이 낯선 일이 아니게 되었다. 또 이른바 본방사수라는 실시간 시청보다 자신이 편안한 시간에 보는 ‘다시보기’ 시청 패턴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결국 지금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중장년층의 기호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시청률 산정 기준이 나이든 세대의 기호만을 반영하고, 따라서 그런 방송 프로그램들만 높은 시청률이란 왕관을 쓰고 더 많아지는 것은 자칫 TV콘텐츠의 보수화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이렇게 되면 볼 것 없는 젊은 세대들은 TV가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한 콘텐츠를 찾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TV의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지금의 미디어 발달 속도로 볼 때 이런 이탈의 속도 또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커다란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전 세대의 기호를 반영하지 못하고, 광고 산정 기준도 되지 못하며 그저 고정적인 TV 시청층의 취향만을 보여주는 이런 시청률 추산을 왜 하는 걸까. 설마 여기에도 매체를 하나의 정치적인 도구로 바라보는 구태적인 시선이 들어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의 유명무실한 시청률 산정 기준은 빠른 시일 내에 달라져야 한다. IT 강국, 한류를 전면에 내세우는 우리에게 이 두 분야가 합쳐질 수 있는 인프라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인프라 위에 제대로 거기에 맞는 콘텐츠를 세울 수 있는 새로운 평가방식이 등장해야 한다.

<응답> 이우정 작가, 예능 드라마 못하는 게 뭐야

 

이쯤 되면 연타석 홈런이다. <1박2일>로 한 방을 날리고, 그 여력을 모아 <남자의 자격>까지 세워놓음으로써 명실공히 <해피선데이>를 주말예능의 최강자로 만들었던 그녀였다. 당시 예능가에서는 <1박2일>과 <남자의 자격>, 이 남자들의 예능(?) 두 개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여장부로 이우정 작가라는 존재가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여러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 두 예능 프로그램이 최근 들어 난항을 겪었던 것에는 아마도 그녀가 <해피선데이>를 빠져나온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응답하라 1997'(사진출처:tvN)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예능이 아닌 드라마로 홈런을 쳤다. tvN에서 방영된 <응답하라 1997>로 케이블로서는 어마어마한 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거둔 것이다.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이 드라마는 첫 드라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디테일과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90년대의 대중문화사적인 풍경들을 청춘들의 성장담과 엮어서 깊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대중문화가 가진 대중의식을 담은 드라마의 메시지는 재미를 넘어 의미까지 거두기에 충분했다 여겨진다. 도대체 그녀는 어떻게 이런 연전연승의 성과물을 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가진 예능작가라는 위치에서 비롯된다. 사실 예능작가라고 하면 몇 년 전만해도 방송작가들 사이에서는 가장 밑으로 치부되던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예능작가들은 프로그램 속에서 거의 모든 일들에 관여하는 소모인력처럼 치부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라고 하면 무언가 어깨와 목에 힘이 들어가는 그런 자의식을 가질 만한 역할이 예능작가에게는 거의 없었다. 순간 순간 상황에 따라 대처해야 하는 예능작가로서 자의식보다 중요한 건 같이 손발을 척척 맞춰주는 그 공동작업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녀가 첫 드라마인 <응답하라 1997>을 성공으로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다. 이 드라마는 그녀를 필두로 <해피선데이>의 작가들(모두 예능작가들이다)이 대거 참여한 작품이다. 그 작업과정을 들어보면 그것이 일반적인 드라마 제작방식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즉 일반적인 드라마라면 작가가 (일방적으로) 쓰고 연출자가 그것을 연출하며 연기자는 연기하는 식으로 역할이 분담되는데, 이 작품은 거의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협업을 하는 이른바 ‘예능식’으로 작업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수많은 아이디어들과 실제사례들을 모아서 그것을 캐릭터와 작품에 녹여내는 과정에서부터 작가들과 연출자가 머리를 맞대는 이 예능식 작업은 신원호 PD의 말대로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영상’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다. 매번 웃음을 주거나 짠한 느낌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 땀 한 땀 성실하게 채워 넣는 방식. 물론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흐름과 조망을 놓치지 않는 그런 작업방식이 있었기에 <응답하라 1997>의 성과가 있을 수 있었다.

 

또한 예능작가 특유의 캐릭터를 끄집어내는 방식은 이 작품의 연기자들이 돋보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보통의 드라마 작가들이 캐릭터를 쓰고 그 연기를 연기자의 몫으로 돌리는 반면, 예능작가들은 연기자에게서 캐릭터를 발굴하는데 능하다. 서인국이나 정은지가 여타의 다른 작품에서보다 더 캐릭터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예능작가가 가진 장점이 작품에 녹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최근 들어 예능작가 출신 드라마 작가들이 승승장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예능작가 출신인 박지은 작가의 <넝쿨째 굴러온 당신>을 보면 예능적인 감각(풍자와 콩트)과 캐릭터에 얼마나 발군인가를 느낄 수 있다.

 

이우정 작가는 이제 드라마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놓고는 이제 다시 tvN이 준비하는 주말예능에 도전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참여하는 인력들이 주목을 끈다. 초대 <해피선데이>를 이끌었던 이명한 PD와 <응답하라 1997>을 함께 했던 신원호 PD는 당연히 참여하고 거기에 은지원, 이수근 같은 이들의 패밀리라 할 수 있는 연기자들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모두 <해피선데이>의 패밀리지만 어찌 보면 이것은 이우정 작가가 가진 인맥이기도 하다. 작가 하나가 가진 방송 프로그램에서의 힘은 이처럼 강력하다.

 

또 그 포맷이 버라이어티와 드라마 형식, 두 코너로 진행된다는 점은 이제 이우정 작가가 이 두 형식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이미 결과물로 보여주었다) 대체불가의 작가라는 걸 입증해준다. 이우정 작가의 승승장구를 보면 그래서 그간 전면에 얼굴조차 나오지 않던 예능작가들이 가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우정 작가는 그 가능성의 길을 맨 앞에서 열어가는 작가다.

<슈퍼피쉬>, 오랜만에 느끼는 다큐의 맛

 

새롭게 <메이퀸>과 <다섯손가락>이 동시에 시작했던 지난 8월18일,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통상적으로 주말극의 동시출격으로 시선이 가기 마련이지만, 이 날 이 두 드라마는 <슈퍼피쉬>라는 다큐멘터리에 무릎을 꿇었다. 시청률 13.8%. 같은 시간대의 <메이퀸>과 <다섯손가락>은 11%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그 후에는 자극으로 무장한 주말극이 이 다큐멘터리의 시청률을 앞질렀지만, 그래도 12%대의 고른 시청률을 유지한 <슈퍼피쉬>의 저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슈퍼피쉬'(사진출처:KBS)

<슈퍼피쉬>의 그 놀라운 저력은 그림 같은 압도적인 영상과 그 속에 담겨진 흥미로운 내용이 잘 어우러진 결과다. 거친 목탄으로 그려진 그림에서 시작해 서서히 영상으로 바뀌는 오프닝은 <슈퍼피쉬>의 영상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준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긴 크기의 참치가 펄떡 펄떡 뛰고, 고대 로마시절부터 전해져온 참치 잡이 방식인 마탄차(학살이란 뜻이다)는 바다를 피와 희뿌연 정액으로 물들인다. 말리의 안토고 호수에서는 1년에 딱 한 번 허락된 고기잡이를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호수로 뛰어드는 장관을 연출한다.

 

라오스 곤파펭에서는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듯한 급류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 물고기 잡이가 벌어지고, 중국에서는 삼키지 못하게 목줄을 감은 가마우지를 이용한 물고기 잡이를 보여준다. 이 모든 장면들은 고속 카메라에 담겨 펄떡임 하나, 튀는 물방울 하나까지 세세하게 담겨진다. 육안으로라면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다큐 안에 그득 채워지는 것은 고속 카메라, 헬리 캠 같은 인간의 시각을 넘어서는 카메라 영상 기술 덕분이다.

 

하지만 <슈퍼피쉬>에 빠져들게 한 것은 이런 시각적인 스펙터클 때문만이 아니다. 물고기의 생태가 아닌 물고기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시간적으로는 태곳적부터 현재까지, 공간적으로는 전 지구 곳곳까지 파고 들어가 살펴보는 이 다큐의 지적인 호기심은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이 다큐는 사냥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물고기를 잡아 단백질을 지속적으로 섭취할 수 있었던 것이 어떻게 문명의 발달과 관계를 맺는지를 보여주고, 쉬 상하기 마련인 물고기를 오래도록 저장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보여주며, 물고기가 종교와 만나 어떻게 세계사를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실로 지구와 인간의 역사는 물고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이 이 다큐의 증언이다.

 

<슈퍼피쉬>가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 시선이다. 지중해에서 북유럽, 아프리카, 중국, 라오스, 호주 등등 거의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이 다큐는 지구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고기와 인간의 공존을 마치 옆 동네 일처럼 담담히 펼쳐 보여준다. 바로 이런 시선은 굳이 지구촌 운운하지 않아도 우리 인류가 국가와 민족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의 삶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동질성을 드러내준다. 물고기를 주제로 하지만 거기서 보편적인 인류사의 중요한 자산인 쌀, 소금, 종교 같은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얼마 만에 맛보는 다큐의 맛인가. KBS의 <차마고도>, <누들로드>나 MBC의 <남극의 눈물> 같은 눈물 시리즈 다큐 이후 오랜만에 느끼는 다큐의 전율이다. 주말 저녁 비슷비슷한 자극적인 설정으로 치닫는 주말극에 지친 이들에게 그래서 <슈퍼피쉬>는 편안하고도 놀라운 지적인 여행을 떠나게 해주었다. 일상화된 영상의 시대, 일상적인 다큐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럴수록 제대로 된 다큐에 대한 갈증도 커지고 있다. <슈퍼피쉬>는 오랜 만에 그 다큐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추적자>, <부러진 화살>에 <도가니>를 더한 듯

 

마치 <부러진 화살>과 <도가니>를 합쳐놓은 듯한 공분이다. 수차례 자동차로 깔아뭉개져 살해당한 수정(이해인)의 범인 PK준(이용우)의 재판에서 수정은 오히려 상습적으로 마약을 복용했다는 오명이 덧붙여졌고, PK준은 단지 사고였지만 그래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거짓 발언으로 양식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PK준을 추종하는 팬들은 그의 진술에 눈물까지 흘렸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수정은 악플로 두 번 죽음을 당했다.

 

 

'추적자'(사진출처:SBS)

수정을 위해 뭐든 돕겠다던 학교는 아마도 상부로부터의 압력을 받은 듯, 수정의 탄원서를 거부했다. 수정의 엄마 송미연(김도연) 앞에서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교사에게 뒤편에 선 교장이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은 저 <도가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법정에서 진실이 유린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이 기막힌 장면은 저 <부러진 화살>을 떠올리게 했다.

 

인권은 사라지고 권력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세상에서 힘없는 억울한 서민들을 바라보는 건 힘겨운 일이다. 자신이 대선에 나가기 위해 이 사건을 덮으려는 인면수심의 강동윤 의원(김상중)이 마치 세상을 구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노숙자들 앞에 나서는 모습이나, 복직 투쟁을 위한 촛불 시위를 하는 자리에 나서 "권력이 생기면 단 한 줄의 법 조항만 바뀌면 모두 복직할 수 있다"며 기부쇼를 통해 후원금을 모으는 모습은 보는 이를 답답하게 한다.

 

"저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라는 그 말에 속아 심지어 피해자의 아버지인 백홍석(손현주)마저 믿고 싶어지는 현실이라니. 인면수심의 가해자들에 의해 딸을 저세상으로 보낸 그들은 이제 그 가해자들을 보호하려는 권력자들로 인해 두 번째 가해를 당하는 중이다. 눈앞에서 자신의 딸을 죽인 PK준이 병보석으로 풀려나는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까.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만 눈앞에 죽은 딸이 보이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떻고.

 

자신의 출마가 서민들을 위함이라고 강변하는 자들은 사실 권력욕에만 미쳐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고, 서민들은 너무나 각박하고 힘겨운 현실에 그만 그들의 달콤한 거짓말을 믿고 싶어진다. "대한민국 정치는 국민들에게 거짓말만 해왔습니다. 저 강동윤이는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정치인의 모습이 어딘지 낯설지 않다. 진심을 알아달라고 딸의 일기장을 잔뜩 가져와 법관에게 읽어달라고 간청하는 엄마의 모습이나 죽은 딸의 억울함을 벗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아버지의 결연한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은 그 아버지가 무릎이 꿇고 도움을 청한 그 의원이 사실은 가해자라는 사실이다.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이 만든 신드롬은 한편으론 씁쓸한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추적자>는 그 현실을 낱낱이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거기에는 대선 때만 반짝 서민의 일꾼이 되는 정치인들이 있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눈앞의 진실을 호도하는 법조인들이 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우리들의 자화상도 들어 있다.

 

<추적자>는 결국 사회가 보호하지 못하는 인권을 지키기 위해 한 아버지의 부성애가 거대권력과 대결하는 드라마다. 사망신고서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라고 쓰며 애써 법을 믿었던 한 아버지가 진실이 유린되는 현실을 보고 분노하고 스스로 주먹을 들게 되는 것. 아마도 여기에 공감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학교가 외면한 탄원서를 아이들이 모아 법정에 보내지만 바로 기각되는 현실, 가해자가 본인도 괴로워하는 피해자로 둔갑하는 법정,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군가를 지지해보지만 그가 사실은 이 힘겨운 상황을 만든 주범이라는 안타까운 현실...

 

"내가 우리 수정이가 어떤 딸인지 어떤 아인지 이 세상 사람들 다 알도록 내가 할게." 딸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 때문에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쓰러져 있는 아내에게 이렇게 다짐하는 아버지 백홍석은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가난한 아버지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드라마의 내용이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드는 <추적자>. 그래서 이 드라마만의 강력한 힘이 만들어지는 곳은 드라마 속보다는 오히려 현실이다. 답답하고 억울한 현실이 <추적자>라는 드라마에 더 집중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이 드라마를 그저 드라마로 보기 어렵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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