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 정치 바깥에서 정치를 할 수는 없다

'대물'이 다루는 세계는 정치다. 물론 실제 정치와 정치드라마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현실에서 신물이 나게 봐서 이제는 혐오증까지 생겨버린 그 놈의 현실정치를 그대로 반복해서 보여준다면 그 누가 드라마를 볼 것인가. 따라서 드라마에는 현실정치가 결여한 부분들을 채워줄 필요가 생긴다.

'대물'의 서혜림(고현정)과 하도야(권상우)가 마치 국민들의 대변인인 것처럼, 그간 침묵하고 있던 바람들을 대사를 통해 언급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서혜림이 유세장에서 "내 아이에게 이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하고 외치고 잘못하는 국회의원들을 향해 "회초리를 들어 달라"거나, 하도야가 검찰청 로비에서 검사윤리강령을 소리 높여 외치는 장면은 그래서 속절없게도 보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실제 현실에서는 그런 돈키호테 같은 대변인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서혜림과 하도야를 정의의 편에 세우고 그 반대편에 조배호(박근형)를 위시한 정치꾼들을 마치 협잡꾼처럼 세워놓자 실제 정치는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기왕에 정치판에 뛰어든 마당에 서혜림이 하는 행동은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자체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서혜림은 정치판에 들어서지도 않았다. 그저 "제가 잘은 모르지만"하면서 여전히 정치 바깥에서 그 너머를 그저 끔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정치가 권력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이 드라마의 순진한 선악구도는 지나치게 판타지로만 보인다. 드라마가 현실일 필요는 없지만 또 너무 현실성을 결여하게 되면 시청자들은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이 서혜림과 하도야라는 얼룩 하나 존재하지 않는 순수 무결점 캐릭터들이다. 정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정의로운 행동이 단지 뜻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고 그 안에 다양한 욕망들이 장치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의 진짜 모습은 이 욕망과 정의와의 팽팽한 긴장감에서 생겨난다. '대물'이 진정 대중들에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존재할 법한 어떤 것을 다뤄 진정성을 보여주려면 이런 개인적 욕망 자체가 거세된 캐릭터로는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물'은 지금 현실 어디에선가 봤던 것 같은 민감한 사안들을 끌어들여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그 상황 속에서 서혜림과 하도야는 말 그대로 '공자님 말씀'만 하고 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마치 모든 일이 해결된 듯한 인상을 지우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문제 자체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대물'의 주인공은 어차피 진창인 정치권 싸움에서 진흙 한 점 묻히지 않고 싸우려는 서혜림이나 하도야 보다는, 그래도 그 진창 속에 발을 딛고 있는 강태산(차인표)이 리얼하게 보일 때가 있다.

어떤 좌절된 희망 앞에서 폭발하는 강태산의 분노는 그래서 서혜림과 하도야의 눈물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그 속에는 정치인으로서의 야망과 개인적인 욕망이 현실적으로 얽혀 있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여전히 이상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강태산은 마치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처럼 그 끝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 끝까지 달려보려 한다. 드라마가 굳이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착한 주인공을 내세워 주제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잘못된 길이라도 달리는 주인공을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메시지는 더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대물'의 판타지, 현실 정치의 부재를 채우다

'대물'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은 서민들의 고충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표를 얻는 것, 그래서 권력을 계속 쥐고 있고 차츰 그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물론 이건 드라마 속 얘기다. 현실에는 그래도 서민들의 삶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대통령. 온 김에 우리 동네나 한 번 들려주지. 당췌 모기 땜에 살 수가 있어야지. 지옥이 따로 없어." 매립지에 생긴 웅덩이 때문에 모기떼들이 마을을 덮쳐 사람이건 동물이건 살기 힘들어하지만, 정치인들의 관심은 보궐선거에 가 있다. 검사들은 현장에는 나가보지도 않고 모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주민들의 집단 폭력으로 몰아 부친다.

"그럼. 이 사람들 대신 나 구속해. 야.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냐? 이분들 데모한 거 김태복 때문이 아니라 모기떼 때문에 데모했다잖아. 검사란 게 현장 한 번 안가보고 사무실에 앉아서 뭐? 구속? 구속이 그렇게 쉬워?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죽어나가는 판에 무조건 법 지키라고? 지키다가 죽으라고? 세상에 그딴 법이 어딨어?"

서혜림(고현정)의 이 말에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이것이 판타지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작금의 대중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물'이라는 드라마가 그토록 파괴력 있게 쭉쭉 뻗어나가는 이유가 된다.

'대물'은 바로 이 현실에서 우리가 종종 발견하는 사건들을 드라마라는 공간으로 가져와 한바탕 속 시원히 풀어내는 드라마다. 따라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드라마의 이야기는 당연한 것이다. 이 드라마는 현실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그리기 때문이다.

정치인 혹은 검사 같은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이들이, 차 안에서, 공연장에서, 헬기 위에서, 정당 사무실에서, 갤러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서혜림이 모기떼로 고통 받는 서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충을 듣는 장면은 사뭇 대조적이다.

서혜림이 하도야(권상우) 검사에게 주민들의 입장에서 한 마디 쏘아부칠 때, 정치권에 새 인물을 찾는 강태산(차인표)의 눈빛이 반짝거리고, 그녀에게 "정치할 생각 없냐"고 묻는 장면이 전혀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미 이 대조적인 장면들을 통해 '저런 정치인 하나 있었으면'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네 현실에서 정치라고 하면 으레 그러려니 포기하며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그래서 '대물'이 보여주는 정치의 세계는 하나의 판타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판타지라고 해서 그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치부할 것은 아니다. 바로 이 판타지는 다름 아닌 선거철만 되면 등장했다가 선거가 끝나면 사라지던 것이지만, 때론 정치인들의 최대관심사인 선거의 당락을 좌우하기도 하는 것이 때문이다. 물론 구체적인 현실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드라마가 판타지를 통해 어떤 비전을 제시한다면, 그것으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대물'의 인기가 수직상승하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팍팍하다는 반증이다. 서민들이 바라는 세상과 실제 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물'의 판타지는 액면 그대로 현실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적어도 서민들이 뭘 바라고 있는 지는 분명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무적자', 영웅은 있지만 본색은 없다

'무적자'라는 제목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당할 적이 없는 자’란 뜻이고 다른 하나는 ‘국적이 없는 자’란 뜻이다. 80년대 홍콩 느와르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본색’은, 2010년 우리나라로 오는 과정에서 그 시대적 간극과 국가적인 정서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이런 변화를 모색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국적이 없는 자’란 의미의 ‘무적자’는 탈북자로서 국내에 들어와 무기밀매를 하며 살아가는 김혁(주진모)과 영춘(송승헌) 그리고 김혁의 동생 김철(김강우)을 일컫는 말이다. 이로써 ‘영웅본색’이라는 느와르는 남북문제 같은 우리식의 의미가 덧씌워지게 된다.

혹자들은 이것이 흥미롭게 여겨질 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이 탈북자가 갖는 의미가 ‘영웅본색’이라는 스토리 속에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이다. 이 영화가 다루어야 할 것은 형제애나 우정이 뒤섞인 액션 느와르이지 탈북자들의 애환이 아니다. 따라서 탈북자 설정은 다분히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김혁과 영춘이 부산에서 무기물매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거가 탈북자들이 갖는 무국적자 같은 위치라면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존재해야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부연 설명이 없다. 그저 탈북자라면 어딘지 절망적이고 호전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바탕에 깔아놓고 있을 뿐이다.

김혁의 동생, 김철이 경찰이 돼서 한 조직폭력배를 심문하는 장면은 그래서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너 사람 죽여본 적 있어? 너 사람 고기 먹어본 적 있어?”하고 물으며 물론 과장이 섞인 것이겠지만 북한에서 사람 고기를 먹게 된 사연을 얘기할 때, 그 얘기에 부들부들 떠는 폭력배는 어딘지 비현실적이다.

이렇게 된 것은 ‘영웅본색’이라는 느와르 장르가 사실은 실제 현실이라기보다는 과장된 이야기나 판타지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무적자’는 여기에 갑자기 현실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것은 ‘영웅본색’에서 쌍권총이나 기관총을 마구 쏘아대고 아무리 적이 많아도 죽지 않는 소마(주윤발) 같은 인물이 하나의 장르적 재미로서 용인됐던 것과는 상반된 결과다.

‘무적자’에 등장하는 총과 유탄 발사기, 기관총이 생뚱맞아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는 홍콩이라는 떨어진 공간만큼, 또 느와르 장르라는 과장이 용인되는 공간만큼 ‘영웅본색’의 비현실적인 장면들을 받아들였지만, ‘무적자’는 그렇지 못하다. ‘무적자’에는 탈북자라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거기에 들어가 있고, 또 그것도 부산이라는 우리에게 가깝고도 친숙한 현실공간이 들어있다.

우리네 액션에 대해 세계가 주목한 것은 그것이 장르적 재미를 주면서도 꽤 현실적인 연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주먹을 주고받거나 폼 잡고 총을 쏴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막싸움 같은 액션들은 그 장면에 실감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무적자’가 가진 액션은 그렇지 못하다. 홍콩 느와르의 향수를 자극하기는 하지만 그 총기 액션과 우리네 정서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적자’가 홍콩 느와르의 향수를 자극할만한 통쾌한 액션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또 그렇다고 우리식의 정서들(예를 들면 탈북자 문제 같은)에 천착하지도 못하는 이유는 느와르를 복원할 것인지 아니면 드라마로 그릴 것인지, 어정쩡한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느와르를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어서는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기 쉽다. ‘무적자’가 결과적으로 국적 없는 작품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이 시대와 국가를 넘어선 혼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시트콤, 왜 연예대상에서 상을 받아야 할까

시트콤은 과연 예능인가 드라마인가. 코미디라는 용어가 들어가기 때문일까. MBC는 시트콤을 예능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연말 시상식에서는 껄끄러운 장면들이 연출된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2007년 무한도전 팀과 공동으로 연예대상을 수상한 이순재. 그는 '남의 잔치에서 상 받는 기분'이라며 어색한 수상소감을 남겼다. 그것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올 한 해 '무한도전'과 '세바퀴', '우리 결혼했어요', '황금어장', '놀러와'를 빼고는 그다지 선전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일밤'의 침몰과 '개그야'의 폐지의 여파가 컸기 때문일까.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지붕 뚫고 하이킥'과 '태희혜고지현이' 같은 시트콤이었다. 개그맨 김경진과 최다니엘이 남자신인상을 공동수상했고, 최우수상은 아예 '지붕 뚫고 하이킥'의 정보석과 '태희혜교지현이'의 박미선이 수상했다.

그런데 시트콤 출연자들의 수상은 어딘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물론 시트콤의 성격상 많은 웃음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의 연장선이다. 따라서 연기대상이 아닌 연예대상에서의 수상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수상에 있어서 감회나 긴장감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예대상의 수상은 웃음이나 재미를 많이 선사했다는 측면에서 예능인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지만, 연기로서 수상을 원하는 연기자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 옷처럼 오히려 껄끄러울 수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걸까. 애초에 시트콤이 예능으로 분류되게 된 데는 시트콤에 대한 평가절하가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시트콤은 드라마보다 한 단계 떨어지는 어떤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이것은 시트콤이 발전하는데도 족쇄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유능한 시트콤 출신 작가들이 지금도 드라마쪽으로 전향하고 있는 데 그 이유는 바로 이런 시트콤에 대한 낮은 편견 때문이라는 것이다.

잘 만든 시트콤 한 편이 드라마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을까. 또 시트콤에서의 연기가 정극에서의 연기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이순재나 김자옥이 보여주는 로맨스 그레이나 정보석의 망가짐이 웃음을 목적으로 한다고 그 명품연기가 사라질까. 왜 이들의 당당한 연기에 대해 제대로 시상해주고 제대로 축하해주지 못할까.

시상식의 목적은 한 해 동안 얻은 결과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목적이 더 강하다. 시트콤에서 연기한 것을 연기대상이 아닌 연예대상에서 상을 주는 것은 마치 남의 밥상에서 밥을 얻어먹는 것처럼 결과에 대한 보상도 앞으로의 일에 대한 격려도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시급한 건 시트콤에 대한 정체성의 재고이다. 시트콤은 그 장르적 특성과 인력구성으로 볼 때 드라마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이것은 좋은 배우들과 능력 있는 작가들이 시트콤에 진출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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