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일주일 전 나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 모스크바 사무소의 주최로 열린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에 특강을 요청 받아서였다. 알다시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인데, 그 곳을 굳이 가야할까 싶었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하필이면 한국의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며 살아가는 나를 불렀다는 건, 그 곳에도 한류 열풍이 있다는 걸 예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 곳에서 환대해준 러시아 한국어 교수들(행사에 심사를 맡은 러시아안들이다)은 유창한 한국어로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빗대 한국과 러시아의 상황을 농담했다. “한국과 러시아는 지금 ‘전쟁과 평화’ 중입니다. 전쟁 중이라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지만 우리는 이렇게 평화로우니 말입니다.”

 

그들의 한국어 실력은 그저 소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 문학과 역사를 이야기할 정도로 깊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푸쉬킨 같은 대문호를 가진 자부심이 대단한 그들은 한국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도 드러냈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거론하며 한국의 젠더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김호연 작가의 베스트셀러 ‘불편한 편의점’을 통해 한국 소설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또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통해 당시 조선의 역사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학생들 중에는 사도세자 이야기나 정조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한국영화와 드라마 같은 콘텐츠들이 최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82년생 김지영’도 영화를 통해 먼저 접하고 소설을 보게 됐다고 했고, 정조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그를 다룬 ‘이산’이나 ‘옷소매 붉은 끝동’ 같은 사극을 통해서 시작됐다고 했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과연 그만큼 우리 역사와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어서였다. 

 

물론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 소설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는 그들은 한국어가 통번역이 특히 어려운 언어라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영어 같은 경우는 앞부분에 하려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놓고 뒤에는 수식어를 붙이는 방식이라 동시통역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한국어는 마지막 한 마디로 앞부분의 이야기를 모두 뒤집을 수 있어서 끝까지 들어야 겨우 통역이 가능하죠. 그런 말도 있잖아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

 

한국의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그래서 이제는 그 관심이 먹거리부터 패션, 여행 등등 한국문화로까지 옮겨가고 있는 추세인데 거기에는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한국어 간판들이 지저분하게만 보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것이 그토록 멋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한국을 로케이션으로 작품을 찍는 외국감독들은 카메라를 드리우면 골목 하나도 다 그림이 된다는데, 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한글의 아름다움이다. 한국말도 마찬가지다. 한국말 가사 그대로 BTS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물론 작품 자체의 뛰어난 성취가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는 한류로 인한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도 어느 정도는 일조한 면이 있다. 그리고 그 한류의 흐름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국전쟁 이후 비교적 짧은 시기에 놀라울 정도로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온 그 과정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 또한 들어있다. 최근의 한국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건, 약 40년 간 한 국가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그의 저서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과정(인류 문명사의 과정)을 정확하게 압축 재현했다’며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데서 출발해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 높은 욕망 충족을 향해’ 나아갔다고 말했다. 이 말은 전쟁 후 반공국가, 경제발전, 민주화, 사회정의와 인권을 차례로 요구해온 대한민국의 변화과정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 각각의 욕망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공존하면서 사회의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만들어내는데, 콘텐츠들이 이걸 다양하게 담아냄으로써 보다 폭넓은 글로벌 공감대가 가능해졌다.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여전히 성장서사의 로망을 담은 콘텐츠들이 인기를 끌지만, 동시에 양극화 문제가 고도화된 서구권 국가들은 이 문제들을 담은 사회비판적인 콘텐츠들이 인기를 끈다. 한국은 실로 성장과 분배, 경쟁사회에 대한 애증, 속도와 느림, 디지털과 아날로그 같은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는 나라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건 이러한 한국이 역사적으로 겪어온 아픔과 상처들을 온전히 자신 속으로 끌어안아 문학으로서 품어냈기 때문이다. 그건 그래서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담은 이야기지만, 저마다의 욕망의 단계에 따른 문제에 봉착해 있는 전 세계인들 또한 공감하게 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으로 한강 작품들은 국내 출판가에 신드롬을 만들고 있다. 수상 이후 닷새간 종이책만 97만2천부가 팔렸고, 베스트셀러 10위권을 모두 한강의 작품이 채웠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국내 출판가에도 기대감을 만드는 모양새다. 최근 ‘텍스트 힙’이니 ‘독파민’이니 하는 새로운 독서 트렌드에 대한 관심 또한 커졌다. 지금이 다시금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러한 쏠림현상이 인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저변을 넓힐 것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책과 독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는 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개발시대의 압축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면, 최근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 중의적인 표현이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한 또 한 번의 ‘한강의 기적’을 기대한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 문화의 깊이가 피어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생겨나기를. (글:이데일리, 사진:Nobel Prize)

K푸드는 어떻게 예능과 함께 진화해왔나

이제 김치는 더 이상 외국인들에게 낯선 한식이 아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김치에 열광하는 외국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방송과 K푸드가 그간 해온 공생은 어떤 시너지를 만들었을까. 

서진이네2

‘서진이네2’가 보여준 비비고 컵떡볶이 PPL

“아 떡볶이 먹고 싶다-” tvN 예능 ‘서진이네2’에서 점심 한 타임을 보내고 숨을 돌리는 시간, 직원들이 모여 앉아 간식을 먹을 준비를 한다. 그런데 간식은 이들이 직접 해먹는 게 아니라 간편식으로 나온 컵떡볶이다. PPL로 들어간 이 장면에서 박서준은 친절하게 물을 붓고 전자렌지에 3분만 돌리면 완성되는 컵떡볶이를 시연해 보여주며 그 간편함을 설득한다. 컵떡볶이를 받아든 직원들 모두가 그 간편함과 맛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진짜 신기하다. 그냥 소스넣고 물넣고 렌즈 돌리면 이렇게 음식이 완성되는거야?” PPL이지만 최우식의 이 한 마디에는 이 음식이 갖고 있는 장점이 다 들어있다. 한국인들도 한번쯤 편의점 같은 곳에서 사서 즉석으로 만들어 먹어보고픈 욕구가 생기는데, 외국인들은 어떨까. 한식이 전 세계에서 핫한 음식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만들어 먹기에는 어딘가 낯설었다면 이 간편함에 매료되지 않을까. 외국인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커다란 문구로 비비고가 새겨져 있고 ‘Tteokbokki’라고 영문으로도 적혀져 있는 건 이제 이 상품이 겨냥하는 건 국내만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런데 이 컵떡볶이 PPL은 의외의 효과 또한 제공한다. 그것은 이 ‘서진이네’라는 프로그램이 어찌 보면 하나의 거대한 한식 홍보 프로그램일 수 있다는 걸 가리는 효과다. 장 보드리야르가 디즈니랜드는 실제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이 껍떡볶이 PPL은 이 프로그램 전체가 한식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는 효과를 낸다. 물론 그렇다고 ‘서진이네’가 한식 홍보 이상의 예능적 재미요소를 갖추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서진이네’는 이서진의 성장사가 주는 묘미와 그가 동료 연예인들인 직원들(?)과 함께 낯선 타국에서 한식으로 장사를 하는 과정을 리얼리티로 보여주는 재미를 가진 예능 프로그램이다. 그렇지만 그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전혀 홍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한식 홍보를 효과적으로 해내는 성과들을 내고 있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은 지난 ‘서진이네’ 첫 번째 시즌에서 멕시코 바칼라르로 갔을 때 시도했던 메뉴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당시 ‘서진이네’ 음식점의 콘셉트는 분식이었고 그래서 등장한 음식들은 김밥, 떡볶이, 핫도그, 라면(일반 라면, 붉닭볶음면), 치킨이었다. 이 메뉴들은 어찌 보면 이미 전 세계의 K푸드 붐을 이끄는 음식들이라서 프로그램이 이를 수용한 면이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비비고가 컵떡볶이를 출시하듯이 간편식으로 상품화가 용이한 메뉴들이기도 하다. ‘서진이네’를 봐온 외국인 팬들이라면 첫 시즌에서 메뉴로 나왔던 떡볶이가 ‘컵떡볶이’로 나왔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만큼 자연스러운 한식 홍보가 있을까. 

 

K예능과 함께 하는 K푸드

‘서진이네’ 첫 시즌이 분식이라는 훨씬 진입장벽이 낮은 한식을 메뉴로 내세웠다면, 아이슬란드에서 펼쳐진 ‘서진이네2’는 이보다는 진입장벽이 좀 있는 한식들을 가져왔다. 추운 나라에서 뜨끈한 음식을 선보이겠다는 취지로 ‘서진뚝배기’라는 음식점을 열고, 꼬리곰탕, 뚝배기불고기, 소갈비찜, 돌솥비빔밥, 닭갈비, 순두부찌개, 육전비빔국수 등을 메뉴로 내놨다. 시즌1에 비해 보다 한식에 가깝게 접근한 것이고, 그래서 이 음식들을 주문에 맞춰 만들어야 하는 출연자들의 미션도 난이도가 높아졌다. 그런데 이렇게 보다 외국인들에게는 낯설 수 있는 한식을 꺼내온 건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그 하나는 이제 그만큼 외국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한식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방송적으로도 익숙한 맛이 아닌 새로운 맛에 반응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담겠다는 것이다. 

 

이 자신감은 ‘서진이네2’에서는 확실한 성과로 돌아왔다. 즉 보통은 입소문이 나지 않아 한산했던 첫날부터 오픈런이 이어졌고, 음식들에 대한 만족도는 거의 모두가 최상급이었다. 그래서 ‘서진이네2’의 관전 포인트는 장사가 잘 될까 안될까 하는 불안감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아니라, 문만 열면 오픈런하는 손님들의 주문들을 과연 잘 소화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맞춰졌다. 일 잘하는 고민시가 단번에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었고, 이제 주방일에 익숙해진 출연자들의 부지런함에 사장인 이서진이 “쉬면서 해”라고 얘기하는 반전의 스토리텔링이 생겨났다. 즉 한식에 대한 좋은 반응은 거의 기정사실이 됐다는 것. 대신 이 인기를 감당할 수 있는가가 새로운 한식의 스토리로 떠올랐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 복잡해 보이는 음식들도 대부분 간편식으로 상품화되는 추세다. 곰탕도 불고기도 비빔밥도 또 찌개도 이제는 저 ‘컵떡볶이’치럼 상품화가 가능해진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니 K예능이 담아내는 음식 관련 콘텐츠들은 K푸드와 동반성장하는 시너지를 더욱 낼 수 있게 됐다. 그 간편식으로 한식에 익숙해진다면 그 다음은 직접 해먹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뉴욕에 뜬 한국식 기사식당의 위용

K푸드 열풍은 물론 드라마, 영화, K팝 같은 K콘텐츠가 촉발시켰다. 드라마, 영화 속에 등장하는 라면이나 김밥은 외국인들이 먹고 싶어하는 한식이 됐고, 좋아하는 K팝 아이돌이 먹은 음식들 역시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외국인들을 입맛 다시게 했다. 여기에 음식을 소재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의 지분 역시 적지 않다. 특히 나영석 사단이 ‘삼시세끼’에 이어 ‘윤식당’ 그리고 ‘서진이네’로까지 이어온 일련의 음식 관련 여행 예능프로그램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서진이네’ 시즌1은 아마존 프라임에 소개되면서 화제가 됐는데 여기에 방탄소년단 뷔는 물론이고 ‘기생충’의 최우식 그리고 ‘이태원클라쓰’의 박서준 같은 글로벌 스타들이 포진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또 백종원을 중심으로 내세운 ‘장사천재 백사장’ 같은 프로그램도 외국 현지에서 한식을 선보임으로써 보다 친숙하게 외국인들에게 다가간 면이 있다. 이 일련의 흐름을 CJ가 전면에서 끌어간 건 콘텐츠는 물론이고 푸드 산업 또한 유기적으로 연결된 그 시스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K콘텐츠를 통해 낮춰진 한식 열풍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건 뉴욕 맨해튼에 지난 봄 등장한 한국식 기사식당이다. 어찌 보면 국내의 기사식당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돼지불백이나 계란찜 같은 한국식 백반을 메뉴로 하는 이 기사식당은 개점부터 길게 늘어선 대기줄이 화제가 됐다. 그저 김밥이나 떡볶이 같은 이제는 일상화된 한식이 아니라 좀더 깊게 경험해보고 싶은 한식에 대한 외국인들의 욕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뉴욕에는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2024년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 100곳에 한식당만 7곳이 들어 있다고 한다. 

 

‘서진이네2’에서 한식에 대한 외국인들이 갖는 호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은 김치에 열광하는 모습이다. 한 때는 냄새 난다며 외국인들이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던 음식이 아닌가. 그만큼 한식에 친숙해진 이들은 김치 맛에 깊게 빠져들고 있는데 김치 맛을 안다는 건 한식을 그만큼 이들 역시 이해하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 직접 집에서 김치를 담근다는 외국인들의 이야기나, 한식을 맛보기 위해 한국에 너무 가고 싶다는 이들의 이야기까지 K푸드는 어느새 세계인들의 음식으로 자리하게 됐다. 물론 여기에는 ‘서진이네’ 같은 전혀 한식 홍보 같지 않지만 그 효과는 200%인 방송과의 시너지도 빼놓을 수 없다. (글:시사저널, 사진:tvN)

마음껏 사랑하세요... 로운과 조이현이 선사한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엔딩

혼례대첩

‘마음껏 사랑하세요.’ KBS 월화드라마 <혼례대첩>은 엔딩과 함께 그런 자막을 덧붙였다. 멋드러진 성곽 위에서 서로의 생사와 사랑을 확인한 정우(로운)와 순덕(조이현)이 서로를 꿀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볼 때 카메라가 뒤로 쭉 빠지며 해지는 그 아름다운 전경을 담는다. 슬슬 날아다니는 눈발. 엔딩크레딧이 오르며 그간 16회를 달려오며 시청자들을 눈호강시켰던 달달하고 코믹하기도 한 명장면들이 스틸컷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거기에 흐르는 엔딩음악이 어딘가 크리스마스에 어울릴 법한 곡이다. 종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고 창밖으로는 눈발이 날릴 것 같은 느낌의 노래. 마치 현대물의 로맨틱 코미디 엔딩에서 종종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퓨전사극인데 크리스마스 분위기라니. 마침 종영일이 크리스마스라 그렇게 선물처럼 맞춘 엔딩일 테지만, 어딘가 이 독특한 퓨전사극에 이 음악이 잘 어울리게 느껴진다. 조선판 로맨틱 코미디의 가능성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 작품이 아닌가. 

 

결국 엇갈렸던 인연의 실타래가 풀리고 저마다 연모했던 이들과 이뤄져 달달한 신혼의 단꿈을 꾸는 모습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찾아오곤 했던 <러브 액추얼리> 풍의 로맨틱 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 좌상집 딸 조예진(오예주)은 어머니 박씨부인(박지영)이 가문을 위해 결혼시키려던 병판집 자제 이시열(손상연) 대신 자신이 연모하는 윤부겸(최경훈)과 이뤄져 순덕의 아들 근석(김시우)에게 글공부를 해주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정순구(허남준)와 혼례를 치른 맹삼순(정보민)은 그가 너무 잘 해줘 글이 안써진다며 귀여운 투정을 부린다. 

 

입만 열면 막말이 튀어나오던 맹두리(박지원)는 마음이 갔던 병판댁 자제 이시열과 혼인해 여전히 걸쭉한 입에도 달달해진 신혼의 한가로운 나날을 보여주고, 목숨을 건 가슴 절절한 사랑을 해왔던 여주댁(박환희) 역시 딸이 흐뭇하게 보는 가운데 안동건(김동호)과 조촐한 혼례를 치른다. 그리고 왕의 사약을 받고 죽은 줄 알았던 정우는 깨어나 역시 자진한 줄 알았던 순덕을 다시 만나 왕이 허락한 광부 원녀 소탕(?)을 위한 암행길에 나선다. 이보다 완벽한 로맨틱 코미디의 엔딩이 있을까.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혼례대첩>이 담은 로맨틱 코미디 서사는 현대물의 그것들을 조선판으로 그려낸 것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좌상집 딸 조예진(오예주)이 혼롓날 예복을 입은 채 도주하는 장면은 결혼식날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진짜 사랑하는 연인을 향해 달려가는 신부가 떠오른다. 연애소설을 쓰던 맹삼순과 아픈 상처 때문에 연애에는 담을 쌓고 살던 정순구가 서로의 연모하는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사실 잘 들여다보면 돌싱인 정우와 순덕이 남을 연결해주는 중매를 하다 저들끼리 연모하게 되는 것도 현대물 로맨틱 코미디에서 익숙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익숙함이 조선사회라는 시공간에서 펼쳐지고, 그 시공간이 갖는 풍속과 문화들을 극적인 서사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연출로 그려낸 것이 <혼례대첩>의 차별점이었다. 물론 꽤 많은 퓨전사극들이 이런 시도들을 해왔지만, <혼례대첩>이 달랐던 건 그 완성도였다. 따라서 이 작품이 보여준 건 완성도만 높다면 조선판 로맨틱 코미디가 갖는 남다른 묘미와 아름다움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등들이 곳곳에 빛을 드리우는 조선의 밤거리에서 아름다운 한복과 정취 가득한 갓을 쓴 청춘 남녀들이 만남을 갖는 광경이나, 마치 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은 담벼락을 배경으로 수줍게 만나는 조선의 청춘들을 담은 연출들, 또 마치 김홍도의 풍속화 속 한 장면처럼 단오 풍속의 정경 속조선 특유의 축제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흥에 조선 청춘들의 설레는 마음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그렇다. 이런 그림들은 조선이라는 배경이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껏 사랑하세요’라는 자막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엔딩으로 마무리된 <혼례대첩>은 조선판 로맨틱 코미디의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준 면이 있다. 물론 그 그림의 완성은 로운과 조이현 같은 아름답고 귀여운 배우들의 호연이 가능하게 한 것이지만, 이런 과감하면서도 정성이 느껴지는 섬세한 연출 또한 칭찬 받아 마땅하다. 역사의 무게감을 훌훌 털고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낸 조선판 로맨틱 코미디 <혼례대첩>은, 마지막 자막처럼 시청자들 역시 마음껏 사랑하게 만든 작품으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KBS)

도올과 유아인,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어 흥미로운

도올 김용옥과 유아인의 조합. 누가 봐도 이질적이고, 과연 이 조합이 어떤 그림을 그려낼 것인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철학가이자 사상가로서 고전을 현재적 의미로 들여다보는 작업에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는 도올 김용옥. 가끔 엉뚱한 진지함을 보여 대중들을 깜짝 놀라게도 만들지만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모습에 박수를 받기도 하는 유아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섰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위해 이런 만남을 기획했던 걸까.

KBS <도올아인 오방간다>는 도올과 유아인의 만남이 그러한 것처럼, 너무나 달라 잘 어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을 한 자리에 올려놓고 그것이 어떤 어우러짐을 보이는가를 들여다보는 신개념 ‘하이브리드 버라이어티쇼’라고 지칭된다. 그 거창해 보이는 지칭이 그저 요란한 수식어만이 아니라는 걸 이 프로그램은 첫 회부터 보여준다.

올해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걸로 이야기의 문을 연 이 프로그램은 “그런데 왜 그게 지금 중요한가”라는 유아인의 도발적인 질문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게 바로 그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시작됐다는 도올의 답변으로 이어진다. 지금의 우리의 체제가 그 때를 뿌리로 두고 있다는 것.

하지만 유아인은 여기서 또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트럼프가 남북관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 정세에서 “우리는 과연 자주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당혹스런 유아인의 질문에 도올은 우리가 군사 강국은 아니지만 “문화 강국”이라는 걸 강조하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찬란한 문화를 만들어왔다”는 말로 답변을 가름했다.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특히 큰 역할을 해내는 건 유아인이다. 평상 시에도 SNS를 종종 뜨겁게 만드는 그는 여기서도 의외의 도발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가 도올의 강의들을 방송을 통해 볼 때 늘 ‘경청’하는 자세로만 봤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포인트를 유아인이 만들어낸다.

통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통일은 손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는 얘기를 던진 것도 유아인이었다. 경제적 관점으로 보는 통일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유아인은 다른 걸 다 떠나서 “내 가족과 떨어지게 된다면 내 가족 다시 만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라며 통일은 “회복”이라고 말해 보는 이들을 공감하게 만들었다.

‘편 가르기’에 대한 솔직한 심경은 아마도 유아인이 직접 SNS를 통해 겪은 경험이 묻어난 것처럼 보였다. 어떤 의견을 내면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편 가르기’를 하는 것에 대해 그는 “우리는 사실 한편”이라며 “대한민국 국민이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편 가르기에 대한 이야기는 ‘빨갱이’라는 말이 탄생한 과정을 통해 도올에 의해 설명됐다. 그것이 가져온 비극적인 현대사의 결과들까지.

유아인의 역할이 돋보인 건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연관관계를 끊임없이 들여다보려는 질문들 때문이었다. 지금 이 프로그램이 다시 역사를 들여다보려 하는 건, 그것이 현재에 어떤 의미를 던지기 때문이라는 것. 지금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헬조선’으로까지 불리게 됐는가에 대한 질문에 한 관객이 그 연원으로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 사라진 정의와 공정성이 만든 결과라는 지적은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지금의 현실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일파 청산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다소 당혹스런 질문에 대해 도올은 재치 있고 의미 있는 답변을 던졌다. 가만 놔둬도 그들의 죽음은 임박했다는 것. 다만 중요한 건 지금의 세대가 그 역사를 잊지 않고 깨인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 속에는 이 프로그램이 지금 왜 역사를 들여다보려 하는가를 잘 말해주는 그 기획의도가 들어 있었다.

<도올아인 오방간다>는 그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의 하이브리드가 사실은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 수 있다.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도올과 유아인 같은 전혀 다른 개성과 세대와 생각이 만난다. 여기에 오방신으로 자리한 소리군 이희문의 말 그대로 하이브리드한 민요가락이 더해진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의 의미를 가진 ‘오방간다’가 유아인이 말하는 “뿅간다”는 의미와 합쳐지는 지점. 전혀 새로운 어떤 생각과 색깔들의 소통을 우리는 여기서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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