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전도연의 눈물, 류준열의 허함에 공감했다면

인간실격

“안녕하세요. 선생님.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만나고온 그 날부터 인간의 자격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가족, 친구 동료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자격. 자기 이름 당당히 걸고 세상의 룰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런 온전한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세상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분노하고 절망할 자격.”

 

JTBC 토일드라마 <인간실격>은 대필작가였지만 무슨 일인지 지금은 가사 도우미가 되어 일하고 있는 부정(전도연)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첫 화의 부제는 ‘인간의 자격’이다. 어쩌다 대필작가가 됐는지 그러다 왜 지금은 가사 도우미 일을 하는지 이유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부정이 처한 상황은 그 내레이션과 더해져 이 인물이 왜 절망감을 느끼는가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이 내레이션과 더불어 보여지는 영상은 한 여성과 모텔에 들어온 강재(류준열)의 모습이다. 본인은 역할 대행 서비스를 한다고 하고 있지만, 그 첫 장면이 말해주듯 그가 하는 일은 호스트와 그리 다르지 않다. 정해진 시간 동안 역할을 대행해주고 그 시급을 받는 일을 한다. 부정의 내레이션이 깔리며 강재의 일상이 겹쳐지지만, 이 서로 다른 두 삶의 겹침은 그다지 이물감이 없다. 

 

대필작가였다 그것마저 박탈된 부정의 삶이나, 진짜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는 강재의 삶이나 비슷하다. 저 부정의 내레이션처럼 그들은 ‘자기 이름 당당히 걸고 세상의 룰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런 온전한 인간은 아니다. 그래서 ‘세상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분노하고 절망할 자격’도 없다 치부된다. 

 

부정은 지나(이세나)의 집을 청소하고 정리해주는 가사도우미 일을 하러 그 아파트에 갔다가 주민들이 쓰는 사우나에 들어간 일로 다른 주민으로부터 봉변을 당한다. 직접적으로 갑질을 당한 건 아니지만, 관리인에게 ‘아무나’ 사우나 출입하는 이들을 막아달라며 은근히 ‘저질’이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그런데 부정이 말하는 ‘인간의 자격’, 즉 사우나도 주민들은 들어가지만 가사도우미는 들어갈 수 없고, 글을 써도 대필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없게 만드는 그 자격은 무엇에 의해 주어지는 걸까. 그건 다름 아닌 자본화된 세계에서 돈의 논리로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대필작가를 고용한 작가는 돈을 지불했기에 그 자격을 갖고, 역할대행을 요구한 이들도 시간 당 돈을 지불해서 그 자격을 갖는다. 나아가 사우나를 쓰는 일도 그 집을 소유해서 가능한 자격이다. 

 

자본화된 세상에서 인간의 자격은 심지어 죽은 후에도 이어진다. 강재가 빌려준 돈을 갖고 두 달 전 사라졌다 자살한 사체로 돌아온 정우(나현우)의 죽음은, 돈이 없고 또 돈을 내줄 가족이나 친구조차 없어 떠나는 마지막 길을 쓸쓸하지 않게 갈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같이 동반자살한 여자는 최소한 엄마가 있어 울어주고 장례를 치러주지만, 정우는 그런 가족도 없다. 다만 그 쓸쓸한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딱이(유수빈)와 강재가 있을 뿐이다. 

 

모든 게 자본화된 세상에서 가진 자들만이 자격이 주어지는 세상. 하지만 부정도 강재도 이것이 어딘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다. 모든 역할 대행을 다해도 장례 역할 대행은 못할 짓이라며 갖가지 장례비용을 얘기하는 강재도 차마 죽은 정우의 사체를 그냥 방관하지 못한다. 정우의 죽음이 너무 ‘허하다’고 말하는 딱이 이야기를 듣다 강재는 “비용이 얼만데?” 하고 묻는다. 돈이 없어도 최소한 저렇게 쓸쓸하게 보내는 건 아니라 생각하는 것. 강재는 결국 제 돈을 털어 장례식을 해주기로 한다. 

 

대필작가로서 아마도 선생님이라 불리는 그가 대리해준 이에게 악플을 달았다는 이유로 법원으로부터 출석요구서를 받은 부정은 절망감에 빠진다. 대필작가여서 ‘세상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분노하고 절망할 자격’을 갖지 못했기에 누군가에 대한 항변이 ‘악플’로 치부되는 현실을 마주하게 돼서다. 하지만 절망감에 아버지 창숙(박인환)을 찾아간 부정은, 박스를 주우러 다니며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식 앞에서는 “괜찮다”고 말하는 전혀 괜찮지 않은 삶을 확인한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돈’의 논리로 겨우 주어지는 ‘인간의 자격’을 실감하며 부정은 절망감을 느낀다. 부정은 애써 절망감을 숨겨왔지만, 자식은 부모보다 잘 살아야 맞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무너져 내린다. “아부지. 나는 실패한 거 같아. 나 실패한 거 같아요... 그냥 그냥 내가 너무 못났어.” 그래도 “너는 내 자랑”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부정은 애써 부인한다. “나 자랑 아냐 아버지. 자랑이라고 하지 마. 나 그냥 너무 나빠진 거 같아...” 

 

그는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자신이 아무 것도 되지 못했다는 것에 절망한다. “아버지 나는 아무 것도 못됐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 것도 못됐어. 결국 아무 것도 못될 거 같아요. 그래서 너무 외로워 아버지. 아버지도 있고 정수도 있는데 그냥 너무 외로워. 그냥 사는 게 너무 창피해.” 

 

부정의 눈물이 가슴을 후벼 파는 건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오고 있어서다. 적어도 우리 모두는 부모 앞에서 ‘자랑’이었지 않던가. 무언가가 될 거라 믿었던 자랑. 하지만 자본화된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때론 많은 걸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간의 자격’조차 없는 그런 삶을 마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지만, 세상은 그렇게 우리에게 무례하게 군다. 

 

그런 부정이 버스 안에서 우연히 손수건을 내준 강재의 옷소매를 잡는 장면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가진 어떤 위로의 예감을 갖게 만든다. 저마다의 돈의 가치로 ‘자격’을 부여하고, 심지어 ‘인간실격’ 판정을 내리는 현실이지만, 그 안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인간적인 그 진짜 자격을 확인해주는 이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져서다. 그것은 또한 스스로 ‘실격’이라 대우받는, 사실은 결코 실격이 아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자격 있는 진짜 삶의 가치를 드러내주는 것일 수 있을 테니.(사진:JTBC)

'나빌레라', 칠순의 알츠하이머 박인환도 꿈을 꾸는데

 

"날이 이렇게 좋은데, 이렇게나 화창한데, 내가 왜, 도대체 왜, 엄마 아버지 나 어떡해요." 칠순의 어르신의 입에서 나오는 '엄마, 아버지'라는 말은 그 자체로 짠하다. 그건 순간 이 어르신의 70년 인생이 가진 무게가, 저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목소리를 통해 느껴지기 때문이다. 버티지 못할 정도로 힘겨울 때 우리는 모두 저도 모르게 어린아이가 되어 부모님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tvN 월화드라마 <나빌레라>의 덕출(박인환)처럼.

 

칠순의 나이에 발레복을 입고 춤을 추는 덕출을 보는 주변의 시선은 '주책'이다. 나이 들어 '춤바람' 났다는 소문까지 들려온다. 발레연습실에서 채록(송강)이 그 아름다운 동작으로 새처럼 가볍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덕출은 순간 자신을 초라하게 느낀다. 늙고 볼품없는 자신이 꿈이라며 하고 있는 발레가 실로 '주책'은 아닐까 싶어진다. 덕출이 발레라는 꿈을 꾸는 일은 그래서 청춘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일이다.

 

게다가 덕출은 자신이 알츠하이머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됐다. 그건 주책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꿈을 향해 나가는 그에게는 더욱 더 큰 좌절감을 주는 판결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꿈을 지워내고 살았던 삶이 그의 한 평생이었고, 이제야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알츠하이머라니. 그건 꿈이 아닌 자신이 지워지는 병이 아닌가. 이보다 큰 절망이 있을까.

 

하지만 덕출은 기승주(김태훈)가 데리고 간 김흥식 발레단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휠체어를 탄 무용수의 아름다운 발레를 보면서, 발레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서툰 동작이지만 정성껏 배운 대로 자기 느낌을 담아 발레를 선보인 덕출은 무용수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건강한 몸이 아니어도 발레를 좋아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발레가 될 수 있게 해준다는 것.

 

기승주가 덕출에게 말하는 '자기만의 발레'라는 표현은, 이 드라마가 단지 발레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걸 드러낸다. 젊건 나이 들었건, 건강하건 병이 들었건, 누구나 어떤 꿈을 꾸는데 있어서 '자기만의 발레'를 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덕출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칠순의 알츠하이머 어르신도 '자기만의 발레'를 할 수 있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나빌레라>에서 덕출이 하는 말 한 마디, 동작 하나가 감동적인 건, 툭 던져져 나온 말 한 마디와 눈앞에서 보이는 어설픈 동작 하나에도 이 어르신의 칠순의 삶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은, 이 '자기만의 발레'는 덕출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연기자 박인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칠순의 이 연기자가 발레복을 입고 발레를 배우는 역할에 도전한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나. 이제는 가족드라마의 평범한 아버지 역할로 자리하고 있는 노배우의 발레 연기라는 새로운 도전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다.

 

그래서 무용수들 앞에서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발레 동작들을 하나하나 선보이는 이 노배우의 연기는 덕출이라는 인물의 도전을 그 누구보다 절절하게 전해준다. 굉장히 고난도의 점핑이나 회전 같은 게 전혀 없는, 작은 손 동작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아름다운 발레를 표현할 수 있다니. 박인환의 연기에서는 그의 인생의 무게가 느껴진다. 덕출이 발레 동작 하나에 자신의 삶을 담아내듯.(사진:tvN)

윤여정과 박인환, 우리 시대의 새로운 어르신상

 

미국배우조합상(SAG),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다음은 아카데미일까. 영화 <미나리>의 윤여정에 쏠린 국내외의 관심이 뜨겁다. 물론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그간 쌓아온 연기공력과 필모들이 모여 지금의 결과에 이른 것이지만, <미나리>가 순자라는 인물을 통해 끄집어낸 외신에서도 이른바 K할머니(halmoni)라 불리는 그 캐릭터의 힘을 빼고 이 놀라운 결과를 말하긴 어려울 게다.

 

순자는 <미나리>에서 어린 손주인 데이빗(앨런 킴)이 영화 속에서 말하듯,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다. 물론 이 할머니는 자식을 위해 그 먼 이역만리를 찾아가며 멸치에 고춧가루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긴 한다. 하지만 언어도 환경도 낯선 데다 트레일러에서 살아가는 딸 가족의 모습에 눈물을 보이거나 한탄을 쏟아놓는 그런 할머니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삶이 "재밌다"고 말해주며 호호 웃는다.

 

굉장히 희생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할머니도 아니다. 순자는 자식들을 위해 요리를 하는 모습보다 데이빗에게 화투를 가르치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고, 한국의 전통적인 맛을 고집하기보다 데이빗과 함께 그들의 탄산음료의 맛에 빠져드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이 작품의 리 아이작 정 감독이 순자라는 인물의 해석을 윤여정에게 맡기면서 나오게 된 독특한 할머니상이 아닐 수 없다.

 

이 K할머니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식만큼 자신을 챙기는 인물이다. 미나리가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까지 정화시키는 효능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순자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 이역만리에서 고군분투하는 가족들에게 끝까지 버텨낼 수 있는 지혜를 알려주는 존재다. 이처럼 <미나리>의 순자라는 K할머니에 대한 찬사는 최근 들어 시대가 바라는 어르신상의 새로운 모습들이 투영된 결과다.

 

그런데 최근 K할머니에 비견되는 K할아버지의 등장이 눈에 띈다. 바로 tvN 월화드라마 <나빌레라>의 덕출(박인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매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명대사인 이 할아버지 역시 기존 어르신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칠순의 나이에도 어려서 꿈꿨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포기했던 발레에 다시 도전하고, 무엇보다 채록(송강)이라는 날개가 꺾인 청춘 발레리노의 꿈을 응원하고 지지해준다.

 

특히 덕출이 젊은 꼰대에게 던지는 일침은 시청자들을 먹먹하게 만든다.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나 어른 아냐. 그깟 나이가 뭐 대수라고. 전요. 요즘 애들한테 해줄 말이 없어요. 미안해서요. 열심히 살면 된다고 가르쳤는데 이 세상이 안 그래. 당신 같은 사람이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으니까. 응원은 못해줄망정 밟지는 말아야지. 부끄러운 줄 알아요." 그는 사과할 줄 아는 어르신이다. 신문 사회면에 단골로 등장하는 '불통'의 대명사처럼 이미지화되어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어르신상을 덕출은 보여준다.

 

<미나리>의 순자와 <나빌레라>의 덕출은 우리 시대가 바라는 새로운 어르신상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살아온 삶의 지혜가 가득하지만, 그걸 후대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려하며 한 발 물러서 응원하고 지지하는 어르신상. 이런 어르신들이야말로 우리 사회 아니 나아가 우리 시대 젊은 세대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어떤 위기들을 슬기롭게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존재들이 아닐까.(사진:영화'미나리')

'나빌레라' 나이든 청춘 박인환이 젊은 꼰대에 던진 일침, 그 먹먹함

 

"한심하긴 요즘 애들은 걸핏하면 남 탓이지. 그러니까 떨어지는 거야." 어떻게든 좋은 점수를 받아 채용되고 싶어 논문을 도와주고도 낮은 점수를 받은 것에 항의하는 은호(홍승희)에 대해 점장은 혀를 차며 그렇게 말한다. tvN 월화드라마 <나빌레라>의 이 한 장면은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현실의 시스템에서 좌절한 청춘들이 그 시스템을 비판하면 나오곤 하던 기성세대들의 얘기처럼 들린다. 정당한 비판이 '남 탓'이 되는 현실, 아프지만 그건 다름 아닌 우리네 청춘들이 매일 같이 부딪치는 현실이다.

 

그 한 마디가 끌어낸 씁쓸한 현실 때문일까. 그 '젊은 꼰대'에게 덕출(박인환)이란 '나이든 청춘'이 던지는 일갈이 속 시원함을 넘어 먹먹하게 다가온다. "큰 회사에서 책상 두고 살면 다 당신처럼 그렇게 됩니까? 자기 책상 하나 갖겠다고 막 사회에 나온 젊은이들 이용해먹고, 요즘 애들 운운하면서 꼰대짓 하냐 이 말이에요!"

 

덕출은 그 젊은 꼰대가 "어르신"이라 부르자, 그 지칭 자체가 부끄럽다 말한다.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나 어른 아냐. 그깟 나이가 뭐 대수라고. 전요. 요즘 애들한테 해줄 말이 없어요. 미안해서요. 열심히 살면 된다고 가르쳤는데 이 세상이 안 그래. 당신 같은 사람이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으니까. 응원은 못해줄망정 밟지는 말아야지. 부끄러운 줄 알아요."

 

<나빌레라>의 이 장면은 이 드라마가 말하려는 메시지와 더불어, 어째서 이 덕출이라는 인물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이토록 마음을 사로잡는가를 잘 보여준다. 어려서 꿈꿨지만 생계 때문에 고이 접어 뒀던 발레의 꿈을 칠순의 나이에 도전하는 덕출. 그는 나이 들었지만 청춘이다. 반면 제 책상 하나 차지하겠다고 절실한 인턴들을 이리저리 이용해먹다 버리는 점주는 젊지만 꼰대다.

 

은호는 그를 따라온 채록(송강)에게 자신의 삶이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것만 같다고 말한다. 죽어라 달리고 또 달려도 결국 제 자리라는 것. 숨이 턱 끝까지 차는 데 앞으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중3, 고3 그리고 대졸 인턴으로 단지 상황만 달라졌을 뿐, 그는 늘 러닝머신 위를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은호에게 채록은 뭘 할 때 가장 행복하냐고 묻지만, 은호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한다. 달리고 또 달리곤 있었지만 어디로 달려야 행복해질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출은 자신이 타다 은호에게 선물로 줬던 차를 깨끗이 닦고 또 닦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라고 말한다. 이 할아버지는 아마도 이 청춘에게 미안한 것일 테다. 그러면서 은호를 위로한다. "다 지나가 은호야. 할애비가 지금껏 살아보니까 그래. 별별 일이 다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나. 다 지나가버렸어. 물론 살면서 안 넘어지면 좋지. 탄탄대로면 얼마나 좋아. 근데 넘어져도 괜찮아. 무릎 좀 까지면 어때. 내 잘못 아냐. 알지?"

 

덕출의 위로에도 기성세대의 사과와 응원이 묻어난다. 청춘들의 고군분투를 보며 그것이 다름 아닌 기성세대가 만든 현실 때문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어서다. 채록이 콩쿨에 나가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걸 옆에서 보는 덕출의 얼굴에도 그 사과와 응원 그리고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다. 넘어지고 부딪쳐 생긴 채록의 발의 상처에 밴드를 붙여주고 손으로 그 고생한 발을 보듬어준다. "이렇게 고생하며 열심히 하는데 잘 될 거야." 덕담을 해준다.

 

사과하는 마음만큼 귀한 게 있을까. 거기에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자신을 낮추는 예의가 담겨 있다. <나빌레라>는 사과하는 드라마다. 부조리한 현실에 내던져져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에 대한 사과이며, 한 평생을 하고픈 일은 뒷전으로 한 채 가족의 생계만을 위해 희생했던 진짜 어르신들에 대한 사과다. 덕출과 채록이 함께 비상을 꿈꿀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서로에 대한 사과와 응원, 위로가 꺾어진 그들의 날개를 다시 솟아나게 해주고 있어서가 아닐까.(사진:tvN)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