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님부터 초능력자까지, 남자주인공들의 진화사

 

미소년의 얼굴에 어린 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카리스마. 독특한 아우라를 갖고 있는 김수현에게 <드림하이>의 송삼동은 잘 맞지 않는 옷이었다. 하지만 <해를 품은 달>의 군왕이나,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능력을 숨긴 채 살아가는 남파간첩(거의 아이돌에 가깝다)을 거쳐 <별에서 온 그대>의 초능력 외계인 캐릭터는 그의 아우라를 완성시켰다.

 

'별에서 온 그대(사진출처:SBS)'

지금 현재 김수현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성공을 보장받는 남자주인공의 끝판왕이다.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이라는 캐릭터가 사실상 지금껏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들이 여성들에게 주던 판타지를 거의 모두 가진 인물이며, 그 복합적이고 비현실적인 인물을 아무런 이물감 없이 그가 연기해내고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외계에서 와 조선시대부터 4백년을 산 인물 도민준. 그는 일찍이 사둔 잠실벌과 압구정의 땅으로 어마어마한 재벌급의 재산을 갖고 있는 인물인데다, 4백년 동안 의사에서부터 변호사까지 안 해본 직업이 없는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의 집 한 켠에 마련된 도서관을 방불케하는 서재는 그의 지적이고 감성적인 능력을 표상하고, 시간을 멈추고 사물을 움직이는 초능력은 실현 불가능한 일들까지 가능하게 만든다.

 

물론 여기서 핵심은 이런 재산, 능력, 지성, 감성 게다가 초능력까지 가진 인물이 오로지 천송이(전지현) 한 사람만을 마음에 두고 보호하려 한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초능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해도 인류를 위해 한 목숨 바치는 영웅을 여성들은 원하지 않는다. 지극히 사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판타지를 제공해줄 수 있는 인물. 게다가 4백년의 공력으로 이 모든 걸 갖추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늙지 않는 미소년 외모의 소유자. 그가 바로 도민준이라는 남자 주인공의 정체다.

 

초능력을 가진 남자주인공 캐릭터는 작년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박수하(이종석)라는 인물을 통해서도 그 매력이 입증된 바 있다. 타인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인 박수하는 그 놀라운 소통능력으로 억울한 이들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기도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장혜성(이보영)이라는 한 여성을 위한 일이다. 천송이와 도민준, 장혜성과 박수하라는 커플의 공통점은 남자주인공이 미소년에 초능력자라는 점이다. 여성들은 젊고 아름다운 육체와 함께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남자주인공은 <파리의 연인>의 박신양에서부터 <시크릿 가든>의 현빈, <상속자들>의 이민호로 이어지는 김은숙표 멜로의 재벌이거나, 주상욱이나 이동욱 같은 성공적인 실장님 캐릭터, 혹은 전문분야에 능력을 갖췄으나 성격은 모난 <베토벤 바이러스>의 김명민이나 <외과의사 봉달희>의 이범수 같은 인물들이 얼굴을 달리 하며 반복해서 등장해왔다. 하지만 이종석과 김수현에 이르면 이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판타지로까지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남자주인공이 이처럼 점점 초능력을 갖춘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현실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점점 커져간다는 걸 말해준다. 슈퍼히어로들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이 만들어낸 상징들이 아닌가. 하지만 서구의 슈퍼히어로들이 전 지구적인 위기와 맞서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적인 존재로 그려지는 반면, 우리네 슈퍼히어로들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적인 삶에 오히려 집중한다는 것이 완전히 다른 특징이다. 이것은 무얼 말해주는 걸까.

 

일단 국가나 인류 같은 거창한 꿈에 대한 허무주의가 그 안에는 들어 있다. 정치인들이나 국가 지도자들이 말해온 거대 담론들이 정작 서민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단 말인가. 그러니 퇴행적이라고 비판받을지언정 바로 직접적으로 나를 돕는 슈퍼히어로를 꿈꾸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장혜성 변호사를 돕는 박수하는 신드롬을 만들고 있는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변호인>이 서민들을 신뢰하게 한 점은 국가와 국민을 얘기해도 그것이 거대담론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친조카 같은 한 국밥집 아들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에서 온 그대>의 남자주인공 도민준이라는 슈퍼히어로는 국가나 인류 같은 거대담론에 대한 극도의 허무주의를 보여준다. 그가 천송이라는 한 여성을 위해서만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다 사용하는 것은 오로지 거기서 운명적인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다. 4백년을 살다보면 그도 그럴 것이다. 조선이 대한민국으로 바뀌고 일제와 남북분단을 경험한 인물이라면 세상의 변화에 초탈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인물 속에 담겨진 사적인 욕망과 사회적 현실에 대한 허무는 씁쓸함을 남긴다.

 

김수현이라는 배우는 그래서 지금 현재 우리네 사회가 갖고 있는 욕망과 좌절을 모두 함께 캐릭터를 통해 껴안고 있는 셈이다.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미소년의 여전한 장난기와 때로는 어른스럽게 여성을 보호해주는 카리스마, 그리고 한 편에 느껴지는 어두운 허무의 그림자는 그래서 그가 도민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드러내는 이 시대의 징후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얼굴 속에는 그간 남자 주인공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던 수많은 캐릭터들의 면면들이 혼재되어 있다.

새롭게 주목받는 그들의 까칠 훈훈 리더십

'하얀거탑'에서 장준혁 역할의 김명민은 성공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며 욕망을 불태우는 인물이었고, 최도영 역할의 이선균은 착하기는 하지만 어딘지 칼바람 나는 세상에서 버텨내기에는 연약한 인물이었다. 그 후 김명민은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로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를 이끌어내는 까칠하지만 그 속에 훈훈함을 숨긴 인물로 돌아왔다. 이선균은 '커피 프린스 1호점'과 '트리플'에서 특유의 훈훈함을 강화하더니, '파스타'에서는 까칠함까지 더한 최현욱 셰프로 돌아왔다.

강마에와 최현욱은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강마에가 마이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물들에게 "똥덩어리"라고 말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들을 지원하고 챙겨주는 것처럼, 최현욱도 주방에만 들어오면 요리사들을 잡아먹을 듯이 요리(?)하면서도 그들을 스스로 생존하게 해준다. 주방에서의 최현욱이 손님의 주문 폭풍 앞에서 요리사들에게 일사분란하게 주문을 하는 장면은 마치 강마에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이끌어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연상시키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두 캐릭터가 비슷한 것은 그 리더십이다. 그들은 좀체 자신들의 팀원들을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욕을 해대고 모욕을 주면서 그들을 강하게 담금질한다. '파스타'의 최현욱은 부주방장이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회유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 그는 "부주방장에서 쉐프가 되는 그 시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레스토랑 사장과 쉐프라는 자리는 건설적인 긴장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그를 직접 도와주기 보다는 그 스스로 자신을 넘어서라고 말한다. 결국 부주방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그 줄다리기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주방 보조인 막내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겉으로는 그러라고 하지만 그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주방 보조란 자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쓰는 자리라는 걸 그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셰프로 온 오세영(이하늬)이 개발해낸 육수가 훨씬 괜찮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조건 반대만 해온 이태리파 요리사들을 그는 옥상으로 데려다가 벌을 준다. 자신이 스카우트한 요리사들이지만, 요리 앞에서는 정직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이들의 까칠 훈훈한 리더십은 멜로를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그 멜로의 양상 또한 두 드라마가 비슷하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는 단원으로서의 두루미(이지아)를 혹독하게 이끌지만, 멜로의 대상으로서 그녀를 알게 모르게 돕는다. '파스타'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주방에서는 쉐프와 요리사의 관계로 있다가 주방 밖으로 나오면 연인관계로 돌아간다. 최현욱은 일을 할 때는 아무리 연인이라도 모질게 대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그것을 서유경(공효진)은 웃으며 받아들인다. 일과 사랑에 있어서 이들은 그만큼 쿨하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들어 까칠 훈훈한 리더십이 드라마 속에 자리하면서 어떤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외과의사 봉달희'의 안중근(이범수)이 이른바 버럭 범수로 주목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진화를 거듭해오고 있다. 무엇이 이처럼 까칠하면서도 훈훈한 캐릭터의 리더십에 주목하게 만드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그만큼 사회생활이 혹독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병원이나, '베토벤 바이러스'의 공연장, 그리고 '파스타'의 라스페라라는 공간은 모두 현실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그려진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진 그 현실에서 팀원들이 살아나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소극적인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 팀원들이 더욱 강하게 만들어 자신이 없어도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 자생력을 키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일과 사랑을 동시에 그려내는 우리식의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의 새로운 선택이기도 하다. 일에 있어서는 까칠함을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는 훈훈함을 전하는 것이 드라마가 현실의 빈자리를 채워 넣는 방법인 이상, 그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캐릭터로서 까칠 훈훈한 인물이 창조되고 있는 것.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파스타'의 최셰프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혹독해진 현실이 새롭게 요구하는 리더십의 한 단면일 수 있다.

현실을 잊고픈 판타지 vs 현실 속에서도 꿈꾸게 하는 판타지

지금 캐릭터로 가장 화제를 누리고 있는 것은 단연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다. 이 캐릭터를 통해 이민호는 ‘벼락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여성들은 자기 여자친구를 위해 백화점을 통째로 빌려 옷을 사주고, 전용비행기를 태워 뉴칼레도니아까지 날아가 주말을 보내며, 그러면서도 여자친구의 서민적 삶(?)까지 끌어 안아주는 이 만화 속에서 막 나온 듯한 꽃미남 캐릭터에 빠져들고 있다. 

구준표에 대한 반응, 왜 여성과 남성이 다를까
이상한 것은 이 구준표라는 캐릭터에 대한 남녀 간의 반응이 상반된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열광하는 반면, 남성들은 그다지 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여기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들을 꿈꾸게 만드는 그 만화 속의 캐릭터와,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이 지금 현실 앞에 잔뜩 주눅 들어가는 남성들에게는 여러 모로 억울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구준표는 집이나 학교에서나 일상 생활 자체가 귀족들의 그것이다. 무도회를 즐기고 휴양지의 별장으로 여행을 떠나고 하녀들이 시중드는 식사를 하는 그 모습은 만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중세 귀족의 모습이다. 무엇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귀족생활을 즐기는 구준표는 그다지 착한 캐릭터도 아니다. 돈이면 뭐든 다 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서민들의 힘겨운 일상을 찌질함으로 바라보기까지 하는 전형적인 무개념 캐릭터다.

중요한 것은 이 전형적인 귀족주의에 빠진 나쁜 남자가 평범한 서민 금잔디(구혜선)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도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나쁜 캐릭터를 오히려 매력적으로 만든다. 능력 있는(뭐든 다해줄 수 있는) 나쁜 남자(다른 사람에겐 나쁘지만 나에게만은 잘해주는)가 한 사람만을(시청자 입장에서는 나만을!) 사랑하는 모습은 늘 드라마 속 버럭 캐릭터의 형태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버럭범수,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처럼 구준표도 그 버럭 캐릭터의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구준표가 다른 버럭 캐릭터들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능력이 어떤 노력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바로 이 주어진 능력이 그의 유년시절을 불행하게 했다는 식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정일 뿐이다. 만일 그가 똑같은 서민에서 시작해 귀족의 반열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면 아마도 남성들 또한 이 캐릭터에 열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능력은 일반 서민으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도달지점이다. 구준표라는 만화적 캐릭터에 여성들이 열광하는 그 모습을 보는 보통의 남성들이 씁쓸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실을 잊게 하는 판타지, 현실에서도 꿈꾸게 하는 판타지
하지만 똑같이 까탈스럽고 늘 귀족주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능력 있는 남성이었던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는 구준표와는 다릅니다. 강마에라는 캐릭터는 극심한 가난을 겪고 그 속에서 음악의 꿈을 이뤄온 입지전적인 인물이기에, 남성들은 그를 통해 꿈을 꿀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것은 비단 남성들뿐이 아니다. 강마에가 ‘베바’를 통해 우리에게 던져준 것은 서민들이라도, 따라서 꿈을 이루기에는 버거운 현실이라도 꿈이라도 꿔보라는 그 희망이었다. 똑같이 판타지를 그리고 있지만 ‘베바’의 판타지는 ‘꽃남’의 판타지와는 이렇게 다르다. ‘베바’의 판타지는 드라마 밖으로 나와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을 여전히 꿈꾸게 하는 반면, ‘꽃남’의 판타지는 현실 자체를 잊고싶게 만든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따라서 그 잠깐 동안의 일탈적인 판타지가 뭐가 나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드라마를 보는 기본적인 욕망 속에 잠시 현실을 잊고픈 욕구가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똑같은 판타지 속에서라도 구준표보다는 강마에를 더 꿈꾸게 되는 건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꿈 속에서 꿈꾸는 것보다는 현실 속에서도 꿈을 꾸고 싶은 욕구가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2008년도 드라마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용두사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청률에서 성공하면 완성도에서 떨어졌고, 완성도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면 시청률이 난항을 겪었다. 또 시청률도 괜찮고 완성도도 괜찮다 싶은 드라마는 초반의 모양새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중반 이후부터 어그러지기 일쑤였다. 물론 최근 들어 시청률과 완성도가 반비례로 가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이처럼 극과 극으로 치닫는 것은 올해 드라마들의 한 특징이 될 것이다.

먼저 완성도에서 성공적이었지만 시청률이 그만큼 따라주지 못한 드라마로 최근 종영한 ‘베토벤 바이러스’와 ‘바람의 화원’을 들 수 있다. 그나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김명민 파워를 통해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거두었지만 ‘바람의 화원’은 그 훌륭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시청률을 얻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이 두 드라마는 애초부터 마니아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클래식이나 고미술이라는 소재 자체가 그러했다. 하지만 이 비대중적인 소재를 대중적인 틀 안으로 끌어온 그 시도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소재에 있어서 대중적일 것이라 생각되었던 ‘그들이 사는 세상’ 역시 이 범주를 향해 가고 있다. 방송가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완성도를 높였지만 그만큼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들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것은 역시 드라마는 소재 자체가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 요리하느냐는 것이 관건이 된다는 점이다.

다음은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시청률은 높았던 드라마들이다. 대표적인 예로 ‘조강지처클럽’이나 현재 방영중인 ‘에덴의 동쪽’을 들 수 있다. 완성도로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설정에 과장된 캐릭터들, 흐름의 비일관성, 앙상한 주제 등등, ‘조강지처클럽’은 전형적인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계보를 이으면서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에덴의 동쪽’은 상대적으로 세련된 외피를 입고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조강지처클럽’의 다른 줄기라고 보여진다. 역시 과장된 캐릭터들과 인물설정 등이 시대극을 표방하면서(전혀 그러나 시대극은 아니다)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 드라마들의 특징은 주로 과거 드라마들이 했던 문법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파를 그 바닥에 깔고 간다는 점이다. 이것이 현 어려운 현실과 맞아떨어지면서 향수마케팅과 함께 TV의 실 시청자로 자리하고 있는 비교적 나이든 시청층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점이다. 이들 드라마들이 말해주는 것은 드라마의시청률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공감지수는 아니라는 점이다. 어찌 보면 드라마 시청률은 단지 상업적인 의미로서 존재하며, 따라서 업계가 불황이 되면 될수록 완성도로의 접근은 더 요원하다는 점이다.

마지막은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드라마들이다. ‘스포트라이트’, ‘이산’, ‘왕과 나’, ‘타짜’같은 드라마들을 비롯해 현재 방영되고 있는 ‘종합병원2’나 ‘바람의 나라’같은 드라마들도 이 경향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방영 이전부터 화제가 되었다가 방영과 함께 고꾸라진 경우도 있고, 또 방영 초기에는 화제를 일으켰지만 차츰 그 불씨가 가라앉은 경우도 있다. 올해 특히 이런 드라마들이 많이 양산된 것은 드라마가 거꾸로 마케팅이나 기획쪽에 더 많이 힘이 실렸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소재로 치면 누가 봐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을 끄집어오고, 또 출연진들도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타들을 배치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요소들을 작품으로 끌어안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포장은 요란했지만 그 내용물은 볼품이 없었다는 말이다. 올해 유난히 이런 작품들이 많았던 것은 그만큼 우리네 드라마 제작에 거품의 요소들이 실체로 드러났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렇게 보면 최근 박신양 사건을 계기로 드라마 제작에 대한 거품을 걷어내자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여진다. 완성도는 높지만 시청률이 떨어지는 마니아 드라마 경향과, 시청률은 높지만 완성도는 떨어지는 퇴행적인 드라마 경향, 그리고 초기에는 창대했지만 결과물은 앙상해지는 용두사미 드라마 경향. 이것은 올해 우리네 드라마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자, 내년 드라마들의 숙제가 될 것이다.
(이 원고는 스포츠칸에 게재되었던 칼럼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