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자칫 막장 같은 상황에 깊이감을 주는 배우들의 힘

보물섬

사랑과 욕망, 그리고 배신과 복수. 극강의 권력을 가진 비선실세와 그가 짜놓은 덫에 걸려 죽을 위기에 몰리는 주인공. 하지만 죽지 않고 돌아와 복수하는 몬테 크리스토 같은 익숙한 서사에, 2조원이라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액수의 돈이 불러 일으키는 욕망들... SBS 새 금토드라마 <보물섬>은 흔히 말하는 ‘막장드라마’가 가질 수 있는 소재들은 다 가졌다. 

 

제작발표회에서 밝힌 것처럼 이 드라마는 아예 ‘매운맛’을 전면에 내걸었다. 일단 서동주(박형식)라는 인물 자체가 순하지가 않다. 목적을 위해서는 대산그룹 차강천 회장(우현)이 시키는 불법적인 일들도 맡아서 하는 인물이고, 한때는 야망을 위해 대산가의 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최강 빌런인 염장선(허준호)은 비선실세로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하려 하는 인물이고, 그와 비즈니스적으로 얽혀 있는 차강천도 만만찮으며, 차강천의 사위인 허일도(이해영)는 회장이 아끼는 서동주를 경계하는 야심 가득한 인물이다. 

 

저마다 욕망이 드글드들한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 그 판 위에 던져진 비자금 2조원이라는 돈은 이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염장선은 서동주를 이용해 비자금을 만든 후 그를 죽이려 하고, 차강천은 자신의 혼외자 아들 지선우(차우민)를 서동주의 도움을 받아 후계구도에 끼워 넣으려 한다. 대산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 하는 차강천의 맏사위 허일도는 이 사실을 알고는 서동주를 제거하라는 염장선의 사주를 받게 된다. 

 

돈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대결구도 속에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도 그저 달달한 순한 맛이 아니라, 쟁취하느냐 마느냐 하는 매운 맛이다. 사랑을 위해 야망까지 접었던 서동주는 뒤늦게 자신이 사랑한 여은남(홍화연)이 차강천 회장의 외손녀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염장선의 조카인 염희철(권수현)과 정략결혼을 한다는 걸 뒤늦게 알게된다. 

 

이제 서동주는 돈과 권력 쟁탈의 투쟁 속에서도 밀려날 위기에 처했고, 또 사랑에 있어서도 배신당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남은 일말의 자산이 있는데, 그건 한 번 보면 사진처럼 잊지 않는 기억력과 은근한 신임을 얻고 있는 차강천 회장 정도다. 2회까지 그려진 밑그림은 그래서 앞으로 뻗어나갈 치열한 욕망의 매운 대결을 기대하게 만든다. 

 

중요한 건 이러한 욕망들의 부딪침을 다루는 작품들이 허무맹랑한 수준까지 치고 나가는 막장 같은 느낌을 줘서는 오히려 매운 맛이 실소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 김순옥 작가가 쓴 <펜트하우스>가 그 매운 맛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7인의 탈출>이라는 괴작을 만들어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매운 맛에만 집착해 현실감까지 날려버리는 전개가 드라마를 너무 가볍게 만들어 오히려 매운 맛을 싱겁게 만들어버리는 결과가 생겨났던 거였다. 

 

<보물섬>은 그런 점에서 보면 과잉된 전개조차 적절히 눌러주는 균형감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소재적으로만 보면 막장 전개의 갖가지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개연성을 넘어섬으로써 가벼워질 수 있는 작품을 눌러주고 있는 건 배우들이다. 주인공 박형식은 그래서 이 작품이 막장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고, 그와 대결구도를 이루는 허준호는 극악한 모습을 세움으로써 그와 맞서게 되는 박형식을 더 현실감 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래서 <보물섬>의 대결구도는 박형식과 허준호의 연기 대결을 통해 더욱 극대화되고 있다고 느껴진다. 물론 박형식은 이 작품을 통해 보다 선굵은 이미지를 앞으로 가져갈 것이지만, 드라마 초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과정은 이 배우가 이전부터 쌓아오고 있었던 밝은 이미지들이 있어 더 극적으로 보인다. 등장부터 흰색 런닝 차림에 마른 멸치를 먹는 모습만으로도 날카로운 인상을 드러내는 허준호는 말이 필요없는 극적 긴장감으로 박형식의 추락을 더욱 몰입하게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런 대결구도는 복수극이 가져올 반격의 기대감 또한 높여놓는다. <보물섬>이라는 작품의 보물은 그래서 이 두 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사진:SBS)

‘더 글로리’, 통쾌하고 먹먹하고... 이토록 완벽한 인과응보가 있을까

더 글로리

“아우 얘 맨발로 괜찮니? 왜 하필 니트를 입었어? 젖으면 무거울 텐데. 물이 너무 차다. 그치. 춥다. 우리 봄에 죽자 응? 봄에.” 절망 끝에 어린 문동은(정지소)이 죽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저 편에 또 다른 사람이 죽으려 한다. 그걸 보고는 문동은 그 사람을 구한다. 그런데 그렇게 구해진 사람이 자신을 구한 이가 어린 소녀라는 걸 알고는 그렇게 맨발에 니트를 입고 물에 들어온 걸 걱정하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면서 너무 추우니 봄에 죽자고 한다. 지금 말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는 웃프다. 절망의 끝을 보여주지만 그 곳에서 희망을 전한다. 결국 그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이 이 고통을 해결해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의 마음은 못내 아리고 아프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을 구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고, 그래서 그 누군가를 구하고픈 마음이라는 걸 이 시퀀스는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웃게 만든다. 유머가 들어 있는 이야기지만, 그건 우리 삶의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은가. 혼자서는 버텨내기 어려운 삶이지만 그걸 공감함으로써 웃음으로 넘어서고 기대며 살아갈 수 있는 것. 

 

<더 글로리> 파트2가 드디어 공개됐다. 파트1이 끝나고 너무나 기다리던 시청자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나머지 내용들이 전개됐다. 과연 문동은은 이 지난한 복수극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그 끝은 제목처럼 ‘영광스러운’ 빛으로 가득할까. 시청자들은 기대감과 더불어 어떤 마무리가 될 것인가에 대해 파트2를 그 어느 때보다도 목 놓아 기다렸다. 그리고 공개된 파트2는 이러한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통쾌한 인과응보에 먹먹한 생존자들의 온기가 더해지며 더할 나위 없는 엔딩을 통해 진짜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있어서다. 

 

“왜 없는 것들은 세상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 이렇게 말했던 박연진(임지연)이고, 그건 안타깝게도 가진 자들이 죄를 지어도 벌 받지 않는 우리네 현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지만, 문동은은 그런 말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그들을 지옥 끝까지 몰아붙인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자세한 그 과정을 말하긴 어렵지만, 놀랍게도 문동은이 짠 계획은 공고하게만 보였던 저들의 벽에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 그들끼리 치고받는 파멸로 그들을 이끌어간다. 

 

그 복수의 과정은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그 뜻 그대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가진 자들의 개가 되어 저들이 시키는 대로 폭력을 일삼다가 이제는 주인을 물려했던 손명오(김건우)가 결국 저들에 의해 자신이 했던 것 같은 폭력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식이다. 약에 취한 이는 약으로 끝을 마주하고, 입을 잘못 놀린 이는 말을 못하는 형벌에 취하며, 부모 잘 만나면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 여겼던 이는 바로 그 부모로부터 배신당해 벌을 받는다. 

 

그 복수는 단순하지 않고 결코 쉽게 전개되지도 않는다. 문동은의 평생에 걸친 치밀한 계획이 있고 그를 돕는 주여정(이도현)과 강현남(염혜란) 같은 이들이 있는데다, 죄를 지은 자들이 가진 저마다의 엇나간 욕망들이 결합되어 파멸의 불꽃이 타오른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어째서 저들의 엇나간 욕망이 자신들을 나락으로 이끄는가 하는 그 사필귀정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게다가 복수만이 이러한 끔찍한 폭력 앞에 무너졌던 피해자들에게 끝이 아니라는 것 역시 드라마는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복수로 저들의 파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되찾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걸 주여정의 목소리를 통해 전한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것뿐이죠. 누군가는 그걸 용서로 되찾고 누군가는 복수로 되찾는 거죠. 그걸 찾아야만 비로소 원점이고 그제야 동은 후배의 열아홉살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더 글로리>는 그래서 복수극의 끝장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피해자들이 어떻게 서로를 의지하고 그래서 “봄에 죽자”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내는가를 그 단단한 연대를 통해 그려낸다. 실로 김은숙 작가는 기꺼이 이 땅의 폭력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위해 칼춤을 추는 망나니가 되기를 자처한 듯 대사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였다. 멜로에서 그토록 달달했던 김은숙 작가의 대사들이 이토록 살풍경한 저주로도 바뀔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김은숙 작가가 피해자들의 망나니를 자처했다면 배우들은 그 대본 위에서 기꺼이 김은숙 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 극의 중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잡아낸 송혜교의 연기 변신은 그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향후의 작품들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여기에 이도현, 임지연, 염혜란, 박성훈, 정성일, 김히어라, 차주영, 김건우, 정지소, 신예은 등등 모든 연기자들이 마치 작두를 탄 듯 신들린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임지연과 김히어라의 미친 악역 연기와 이 복수극에 따뜻함과 간절함을 더해준 염혜란 그리고 배우로서의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낸 정성일, 박성훈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더 글로리>의 훌륭한 망나니들이었다.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신 또한 구하는 일이 아닐까. <더 글로리>는 피해자 문동은이 어떻게 생존해내는가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전한다.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가 됐든 뭐가 됐든 날 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열여덟 번의 봄이 지났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 그리고 봄에 죽자던 말은 봄에 피자는 말이었다는 걸요.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크진 못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어느 봄에는 활짝 피어날게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그렇게 김은숙 작가와 송혜교는 문동은의 목소리를 통해 피해자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와 희망을 건네고 있다. (사진:넷플릭스)

왕자보다 망나니, 이토록 다크한 김은숙과 송혜교라니

더 글로리

“난 왕자님은 필요 없어요. 난 왕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하거든요.” 문동은(송혜교)이 주여정(이도현)에게 선을 긋는 이 대사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건 그간 판타지와 멜로를 오가는 작품을 줄곧 써왔던 김은숙 작가와 멜로 퀸으로 자리매김해온 송혜교가 이 작품을 통해 건네는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이다. 달달한 멜로를 기대했다면 그건 섣부른 기대일 뿐이라고. 이 작품은 피가 철철 흐르고 살점이 문드러져 그 상처의 고통이 화면 바깥으로 전이되어 올 정도의 살풍경한 폭력과 복수가 그려질 것이라고. 

 

박연진(신예은)과 그 패거리들로부터 심각할 정도의 학교폭력을 당했지만, 그 누구도 고교시절의 문동은(정지소)을 그 지옥에서 구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방관했고, 심지어 선생님은 친구들끼리 그럴 수도 있는 일을 왜 키우냐며 피해자인 문동은의 뺨을 때렸다. 엄마조차 돈 앞에서 딸이 당한 폭력을 방치했다. 온 몸이 박연진 패거리들 때문에 맞고 찢어지고 심지어 지져져 흉터 아닌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지만 그 누구도 금수저 부모를 둔 박연진과 그 패거리들이 문동은에게 저지르는 폭력을 막아주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던 문동은은 한겨울 차가운 강물 앞에도 서보고, 한 발만 나서면 이 모든 고통이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은 건물 옥상에도 서보지만 그 순간 ‘꿈’을 가져보려 한다. 그 꿈은 바로 ‘박연진’이다. 어차피 죽을 거면, 또 사는 게 지옥이라면 혼자 죽지 않고 혼자만 지옥에 사는 게 아니라 저들과 함께 죽어 함께 지옥불에 떨어지겠다는 꿈. 문동은은 이제 복수의 일념 하나로 버텨내며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가고 과외 선생을 하며 돈을 벌면서 저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계속 주시한다. 그러면서 아주 오래도록 철저한 복수를 계획하고 하나씩 실천해 나간다. 

 

<더 글로리>는 전형적인 복수극이지만, 그렇다고 속 시원한 사이다 판타지만을 보여주는 그런 드라마는 아니다. 대신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문동은 이라는 인물과 그의 복수의 시선을 통해 하나하나 촘촘히 그려나간다.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망가뜨렸던 가해자들이고, 또 현재도 여전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저들은 부자라는 이유로 명품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호화로운 삶 속에서 살아간다. 꿈은 없는 자들이 꾸는 거라며 자신의 꿈은 그저 ‘현모양처’라고 말했던 박연진은 잘 나가는 건설사 대표 하도영(정성일)과 가정을 꾸려 어린 딸과 단란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동은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이던 저들의 삶의 추악한 실체들이 까발려지기 시작한다. 직접적으로 가해자를 처단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이 서로를 파탄으로 만들고 또 그 과정에서 실체가 공개됨으로써 ‘사회적 죽음’을 만들어내려는 문동은의 복수극은 어딘가 다르다. 그건 이 사회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갑과 을로 나뉘어 돌아가는 두 세계의 폭력을 드러내는 일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때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 위에 군림해 갖은 폭력을 일삼지만, 못 가진 자가 복수를 계획할 때는 상황이 정반대가 된다. 가진 게 없어 잃을 것도 없는 문동은이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박연진을 압도할 수 있는 이유다. 게다가 문동은은 살려고 복수하는 것이 아니다. 같이 죽고 싶은 것이다. “우리 천천히 말라죽어 보자. 연진아. 나 지금 너무 신나.”

 

<더 글로리>라는 복수극은 처절하고 자극적이지만 김은숙 작가의 은유적 설정들이나 대사들은 그 복수극에 울림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건축가가 꿈이었던 문동은이 복수를 시작하면서 이를 바둑에 비유하는 장면이 그렇다. 바둑은 “자기 집을 잘 지으면서 남의 집을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와야 한다”고 주여정이 설명하자 마치 그것이 자신의 복수방식이라는 듯 “마음에 든다”고 문동은이 말하는 것. 

 

게다가 압권은 그 대사를 거의 웃지 않는 얼굴로 무심하면서도 섬뜩하고 그러면서도 슬픔을 머금은 낮고 처연한 목소리로 연기해내는 송혜교의 연기다. 그 연기가 더해져 자극적인 복수극에 어떤 품격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잊지 않기 위해서 웃지 않는다는 이 인물이 그래서 가끔 그를 돕는 강현남(염혜란) 앞에서 웃는 모습을 슬쩍 드러낼 때 그 웃음은 그간 송혜교가 출연했던 그 어떤 멜로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최근 들어 학교폭력은 드라마의 주요 소재로 자리했다. 그만큼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다는 이야기다. <더 글로리>는 물론 문동은이 하나하나 저 가해자들을 향해 압박해가는 복수극의 묘미가 담겨 있지만, 그 밑바닥 깊숙이 이 인물로 대변되는 피해자와 약자들의 상처를 들여다보려는 작가의 시선도 느껴진다. 김은숙 작가도 송혜교 배우도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움을 담고 있지만, 그 새로움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사진:넷플릭스)

부진했던 JTBC 드라마들과 ‘재벌집 막내아들’은 뭐가 달랐을까

재벌집 막내아들

올 한 해 JTBC 드라마는 “부진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게다. 물론 작품성이 뛰어난 드라마가 없었던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도드라지는 작품이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다. 이 작품은 올해 기억될 드라마라고 해도 될 법한 깊이를 보여줬지만, 그렇다고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입소문으로 6%대(닐슨 코리아)에 이르는 시청률을 거뒀지만 두 자릿 수 시청률은 요원했다. 

 

이런 사정은 작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괴물>, <구경이>, <인간실격> 같은 완성도 높은 작품이 있었지만 세 드라마 모두 최고 시청률은 각각 5.9%, 2.7%, 4.1%에 머물렀다. 그간 <밀회>나 <부부의 세계>, <SKY캐슬> 같은 완성도도 높고 대중성도 확보했던 드라마들을 내놨던 JTBC로서는 너무나 타율이 떨어지는 성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새로 시작한 JTBC 금토일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그 편성부터가 공격적이었다. 주 2회 편성인 보통의 경향과 달리, 금토일 3회 편성을 시도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러한 공격적인 편성은 첫 주에 이미 효과를 거두었다. 첫 회 시청률 6%에서 2회 8.8% 그리고 3회에 10%를 돌파하며 드라마를 궤도에 올려놓은 것. 

 

<재벌집 막내아들>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작품을 보다보면 금세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작품은 최근 웹툰이나 웹소설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하고 있는 ‘회귀물’이다. 죽은 이가 과거로 되돌려져 다시 살아가게 되는 판타지 장르. 이른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 정서를 자극하는 이 장르는 인생 자체를 리셋해서 다시 살아보고픈 이 시대 민초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이른바 ‘수저계급’이 이야기 될 정도로 태생적으로 삶이 결정되는 현실이 아닌가. 

 

윤현우(송중기)는 순양그룹 미래자산관리팀장이라는 그럴 듯한 직책을 갖고 있지만, 실상은 오너가의 갖가지 리스크들을 관리하고 해결해주는 머슴에 가깝다. 그런 그가 회사의 숨겨진 자산을 회수하기 위해 해외에 나갔다가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한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여기서 비극적인 엔딩이어야 하지만 회귀물은 여기부터가 시작이다. 죽었던 그가 1987년으로 회귀해 순양그룹 오너가 진양철(이성민) 회장의 막내 손자 진도준(김강훈)으로 깨어난 것. 

 

이미 한 번 살아봤기 때문에 당대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다 알고 있고, 순양그룹의 속사정 또한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 꼬마는 놀라운 감으로 진양철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1987년 6.29 선언 이후에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될 걸 알고 진양철 회장에게 직접 비자금을 전달하라 조언하고, 대한항공 폭파 사건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진양철 회장을 메모 하나를 남김으로써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해준다. 진양철 회장에게 그 보상으로 대신 분당에 땅을 받은 그는 몇 년 만에 그 부동산으로 240억을 벌어들인다. 회귀물이 갖고 있는 다시 사는 삶이어서 뭐든 해낼 수 있는 그 판타지가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에는 8,90년대에 대한 복고가 끌어내는 정서적인 매력 또한 담겨 있다. 아날로그적인 영상과 당대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 스타일 등이 지금의 ‘뉴트로’ 트렌드를 자극한다. 이를 세련되게 보여주는 배우 송중기나 신현빈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이성민부터 김현, 윤제문, 김정난, 김남희, 조한철, 서재희, 김신록, 김도현, 정희태, 허정도 등등 만만찮은 중견 배우들이 포진해 극에 긴장감을 높이고, 이들 속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어린 주인공(김강훈에서 송중기까지)들의 대결구도는 흥미진진해진다. 

 

무엇보다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이성민의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단단한 카리스마와 그 단단함을 순식간에 풀어내 껄껄 웃게 만드는 송중기의 천진함이 묘한 긴장감과 훈훈함을 오간다. 이러니 드라마가 확신을 가질만하다. 판타지가 있고 시대극적 요소와 복고가 더해진데다 삶을 재설계하는 스토리가 주는 묘미가 있다. 여기에 윤현우와 다시 태어난 진도준 모두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주인공이 향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 또한 불러일으킨다. 일종의 복수 서사도 더해져 있는 것. 

 

3회 연속 편성에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고 보면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다소 평이한(어찌 보면 일일드라마 제목 같은) 제목도 그런 자신감의 표현처럼 보인다. 어쨌든 약 2년간에 걸쳐 부진의 늪에 빠져 있던 JTBC 드라마가 단 3회 만에 부활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JTBC측에서 ‘대중성’을 중심에 놓고 라인업을 세우겠다고 했던 그 말들이 진심이었다는 게 실감나는 결과다. 과연 <재벌집 막내아들>은 어디까지 나갈 수 있을까.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벌써 어떤 성과를 거둔 작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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