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유혹'을 보는 기대와 우려

'천사의 유혹'은 아예 '아내의 유혹2'를 표방하고 있는 드라마다. 워낙 막장드라마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아내의 유혹' 때문인지 '천사의 유혹'을 선뜻 막장드라마라고 판단하기는 쉽다. 하지만 언뜻 막장드라마라고 치부하면서도 한번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마력 같은 힘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김순옥표 드라마라는 요리에는 도대체 어떤 레시피가 들어있길래 타 드라마가 흉내낼 수 없는 이런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김순옥표 드라마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은 복수극과 가족극이 교차한다는 점이다. '아내의 유혹'에 이어서 '천사의 유혹'에서도 결혼은 복수의 도구로 활용된다. 즉 우여곡절 끝의 사랑의 결실로서 결혼이 존재하는 멜로드라마나 가족드라마의 틀을 복수극을 가져와 뒤집어 놓는 것. 이렇게 되면 멜로드라마나 가족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흥미로운 결과물들이 생겨난다.

이 과정에서 마치 지상과제인 것처럼 떠받들어지는 여타의 드라마에서의 결혼은 부정된다. 즉 결혼은 가족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가족을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좀체 가능하지 않은 금기의 욕망을 판타지로 그려낼 수 있게 해준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받는 여성들이 그 결혼 그리고 가족이라는 금기를 파괴하는 판타지는 그것이 복수극의 장르와 결합될 때 가능해진다.

이 과정은 물론 막장드라마가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즉 복수의 근거를 제대로 제시해내지 못한다면 그저 판타지의 자극적인 쾌감을 위해 가족을 파괴시키는 드라마로만 그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유혹'이 막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복수극의 근간이 되는 근거들을 촘촘하게 세워두지 못했고, 그 복수의 과정 또한 인과관계에 있어 허술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일일드라마라는 특징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김순옥표 드라마의 특징은 한 마디로 쉴 새 없이 질주하는 속도감에 있다. 이 속도감은 빠른 전개에서도 나오지만, 이야기 갖는 욕망의 질주에서 먼저 비롯된다. 즉 성공과 실패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감정적인 속도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복수극이 가속도를 붙이면 마치 게임처럼 굴러가게 되는데, 이것은 보는 이들을 더욱 몰입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여기에 논리적인 전개까지 갖춘다면 그 몰입도는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아내의 유혹'은 그런 논리적인 접근보다는 마치 멜로드라마가 갖는 감정적인 접근을 함으로써 얼개가 느슨한 막장드라마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 김순옥표 드라마가 갖는 또 하나의 힘은 주인공들이 저마다 숨기고 있는 '비밀의 코드'를 마치 비장의 카드처럼 사용한다는 점이다. 비밀은 미리 시청자들에게 드러나기도 하고, 아예 숨겨지기도 하는데, 드러나게 되면 그것이 후에 벌어질 엄청난 파장을 기대하게 만들고, 숨겨진 것은 훗날 새로운 국면의 전환으로서 제시된다. 출생의 비밀이 드라마의 성공코드로 인식되는 것만큼, 인물의 숨겨진 과거의 비밀 역시 마찬가지의 위력을 발휘한다. 이 비밀코드는 본래 복수극의 단골소재이기도 하다. 과거의 비밀을 숨긴 채 은밀히 진행되는 복수를 바라보는 시청자의 눈은 그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을 좇게 마련이다.

'천사의 유혹'은 '아내의 유혹'이 가진 그 김순옥표 복수극의 묘미를 그대로 다 갖고 있는 드라마다. 여전히 막장의 경계에 불안하게 서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수위를 지킨다면 꽤 흥미로운 드라마로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기대하게 하는 것은 이 드라마가 '아내의 유혹'처럼 일일드라마가 아니라 월화드라마라는 점이다. 일일드라마가 갖는 시간적인 한계 상황 속에서 빠른 전개의 독특한 복수극을 논리적인 결함없이 그려나가기는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진 이 드라마의 상황 속에서 막장을 넘어서는 독특한 드라마를 기대하는 것은 섣부른 일일까. 흥미로운 만큼 우려와 기대가 많은 작품이다.

방송3사 복수극, 엇갈린 운명의 늪에 빠지다

지금 드라마들은 엇갈린 운명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MBC 월화드라마 ‘에덴의 동쪽’은 운명의 장난 종합 선물세트(?) 같은 드라마. 전형적인 출생의 비밀의 코드가 들어가 있는 이 드라마는 어린 시절 서로 원수지간인 집안의 아들들, 즉 이동욱(연정훈)과 신명훈(박해진)의 운명을 바꾸어버린다. 이렇게 되자 본래 핏줄로 따진다면 자식과 부모가 맞서고, 같은 형제가 맞서는 형국이 되어버린다. 여기에 이 둘 사이에 끼워 넣은 지현(한지혜)마저 사랑하던 이동욱과 헤어져 신명훈과 결혼하게 되고 이 운명의 늪에 동참하게 된다.

꼬여도 너무 꼬였다
이 드라마가 가진 관계의 복잡함은 우리네 드라마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목되던 삼각 사각관계와 출생의 비밀 같은 자극적인 설정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비판받는 것이지만 이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과 특유의 극성은 바로 이 요소들로부터 만들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엇갈린 운명 속에 빠져 누구 하나 행복을 누리는 자가 없다. 이동철(송승헌)은 카지노 대부 국회장(유동근)의 딸인 영란(이연희)과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국회장의 충복으로서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동생 이동욱은 더 관계가 복잡하다. 동욱은 지현을 사랑하지만 이미 지현은 원수의 자식인 신명훈과 결혼했고, 그래도 일편단심 지현만을 생각하는 동욱을 혜린(이다해)은 사랑한다. 그런데 그 혜린은 또 자신의 언니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것조차 파기해버린 백성현(박성웅)의 구애를 받는 입장이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여기에 이동욱이 사실은 신명훈과 운명이 바뀐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 일련의 운명의 장난들은 단순한 삼각 사각관계 그 이상의 복잡함을 띄게 된다.

SBS 월화 드라마 ‘타짜’에서는 고교시절 둘도 없던 친구였던 고니(장혁)와 영민(김민준)이 각각 타짜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서로 대결하는 위치에 서게된다. 영민이 아귀(김갑수)의 수하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고니의 여자친구인 난숙(한예슬)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교도소에 들어간 오빠의 형기를 줄이기 위해 아귀 밑, 정확히 얘기하면 정마담(강성연)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녀는 고니와 둘도 없는 연인관계이지만, 또 하나의 이름 지나로 불릴 때는 고니와 대결해야 하는 운명이다.

복수극의 엇갈린 운명, 그다지 신선한 것이 아니다
KBS 수목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는 아버지인 유리왕(정진영)과 아들인 무휼(송일국)이 엇갈린 운명에 서 있다. 고구려를 망하게 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어린 무휼을 아버지는 차마 죽이지 못하고 버리게 되고, 그 버려진 아들은 먼 길을 돌아 아버지에게 칼끝을 겨누게 된다. 이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바람의 나라’에서 서로 맞서게 되는 부자는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며 드라마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 세 드라마가 모두 복수극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왜 이러한 운명의 장난이 모두 활용되고 있는가를 설명해준다. 아버지와 아들이 맞서고, 형제가 맞서고, 친구가 맞서고, 연인이 맞서는 이런 구조는 사실상 드라마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꼬아놓은 것이지만, 또한 그 복수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에덴의 동쪽’의 복수는 그것이 결국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날아온다는 걸 말해주고, ‘타짜’는 평경장이 말하듯 도박판에서 복수란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며, ‘바람의 나라’에서의 복수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적 한계를 드러내주기 위해 사용된다.

복수극이 가진 이러한 엇갈린 운명 코드는 그러나 지나치게 드라마를 꼬아 시청자의 시선을 묶어두겠다는 의도가 짙다. 어떤 경우에는 이 꼬여진 운명 때문에 드라마가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빙빙 도는 경우까지 생기게 된다. 물론 주제의식을 위해 활용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코드가 그다지 신선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최양일 감독의 신작, ‘수’는 대사는 적고 액션이 대부분인 영화. 말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는 행동으로 상황을 얘기한다. 영화는 난데없는 자동차 액션(사실 액션이라기보다는 있는 대로 부순다는 의미가 크다)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 생각하기보다는 그 끝간데 없이 부서지고 부딪치는 자동차와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피를 보며 진저리를 치게 된다.

이 영화를 보통의 액션영화로 본다면 정말 지독히도 재미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액션영화의 틀을 벗어나 있기 때문. 액션의 통쾌함을 목적으로 연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가 튀기는 장면들은 끔찍하다는 느낌을 줄뿐이다. 주인공에 대한 정서적인 공감대도 극도로 얇게 구성되어 있다. ‘동생을 찾는 청부살인자→찾은 동생이 암살된다→복수를 한다’는 단순한 설정에는 몰입을 위한 어떠한 장치도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말 그대로 설정일 뿐이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최양일 감독은 영화 제목 ‘수’에 극중 주인공 태수의 수, 복수할 수, 목숨 수의 뜻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 한 가지를 포함시킨다면 바로 수컷의 수이다. ‘하드보일드 클래식’이란 기치를 걸고 나선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동물적인 복수를 향해 달리는 수컷, 수를 이해해야 한다. 영화가 2시간 동안 보여주려는 것은 바로 ‘상처 입은 짐승의 처절한 복수극’이다.

그를 키워낸 송인(조경환)의 말대로 ‘수’는 ‘누군가를 상처 주고 물어뜯고 죽음을 주는 존재’. 자신 때문에 대신 붙잡힌 쌍둥이 동생과 헤어져 19년 간을 살아온 태수는 짐승의 삶을 살아온다. 그 삶의 흔적은 그의 아지트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허름한 외부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외부와는 전혀 다른 내부공간. 차갑고 음울하며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공간 한 편에 놓여진 동생과의 사진 한 장이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죽은 동생의 애인 미나(강성연)가 끓여준 커피보다는 자학하듯 무미건조한 생수만을 고집하는 상처 입은 짐승이 태수이다.

그의 복수는 인간적인 판단이 배제되고 오로지 본능만 꿈틀거린다.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무모함. 그러니 액션 역시 물리고 물어뜯는 질척함이 묻어난다. 칼과 도끼로 찍히고 몽둥이로 맞아가면서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태수의 복수에서 깔끔하고 통쾌한 해결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건 속시원한 복수극이 아니다. 그것은 피 튀기는 대결과 죽이지 않으면 죽는 비정한 현실 혹은 우리네 삶에 대한 이야기다.

핏물이 빗물처럼 쏟아져 나중에는 스크린에 묻어날 것 같고 죽을 듯 죽을 듯 살아 꿈틀대는 태수를 보면서 그게 마치 내 자신인 양 관객이 피곤을 느끼게 될 즈음, 태수의 복수극은 끝난다. 그리고 피칠갑을 한 몸이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 누여지고 씻겨진다. 이 카타르시스의 장면조차 최양일 감독은 무미건조하게 처리해낸다. 커다란 대야에 가득 찬 물을 그저 화면에 담는 것이다.

‘수’는 대중적으로 지지받을 만한 영화는 아니다. 그것은 영화가 관객들을 동화시키기보다는 이화시켜 자꾸만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액션을 보러갔던 관객들은 태수에 동화되기 위한 어떤 장치(설정)를 기대했겠지만, 이 영화는 철저히 그 요구를 외면한다. 대신 영화는 이성을 배제하고 동물적 본능처럼 움직이는 태수의 몸짓으로만 흘러간다. 그 굵직한 고집은 그래서 기존 틀에 박힌 액션 복수극의 뒤통수를 때리는 구석이 있다. 이 어려운 영화를 정말 실감나게 해준 것은 지진희는 물론이고 문성근, 이기영 등의 몸서리쳐지는 연기를 보여준 연기자들의 몫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 태수와 태진이 쌍둥이라는 설정 정도는 좀더 영화의 뼈대로 만들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똑같이 생겼다’는 그 영화적 장치는 ‘자신(태진)이 죽는 장면을 자신(태수)이 목격하고’, ‘그 죽은 자신(태진)을 대신하며’, ‘그 죽은 자신(태진)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의미로 활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재일교포로 살아온 최양일이란 감독이 가진 두 개의 정체성, 즉 한국인으로서의 최양일과 일본에서 살아온 최양일을 보여주는 독특한 그만의 영화 스타일로 귀결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컷의 향기가 가득한 영화, ‘수’가 남긴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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