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공주>가 던진 비난 떡밥들, 입질은 있었나

 

아예 작정을 한 걸까. 임성한 작가의 새 드라마 <오로라공주> 첫 회는 욕 먹기를 작정하기라도 한 듯한 장면과 대사와 상황이 쏟아졌다. 시작부터가 불륜이다. 오금성(손창민)이 내연녀에게 “한 달만 기다려. 정리하고 올께. 약속해.”라고 천연덕스럽게 던지는 말은 자못 도발적이다. 저녁 7시 대 일일드라마로서 첫 장면에 불륜 장면을, 그것도 너무나 버젓이 던지는 건 이 드라마가 가진 색깔을 명확히 해준다.

 

'오로라공주(사진출처:MBC)'

다음 시퀀스는 임성한 월드의 특징을 정확히 보여준다. 여주인공 오로라(전소민)가 검사인 남자친구의 어머니와 대면하는 장면. 위 아래로 훑어보며 “다 해봐야 십만 원 밖에 안되겠네”라고 대놓고 말하는 속물근성 덩어리 어머니의 안하무인격 태도에 발끈하게 될 즈음, 갑자기 극 흐름과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남자친구 어머니의 코털이 인서트된다. 임성한 작가의 전작들이 가끔씩 상상 신을 활용해 인물들의 꿈틀대는 속내를 꺼내보였던 것처럼, 이 장면에서 오로라는 남자친구 어머니의 턱을 잡고 코털을 자르는 상상을 한다.

 

아마도 드라마에서 이런 코털 장면은 흔한 일이 아닐 것이다. 뾰족한 가위를 코 속에 넣어 자른다는 점에서 그 장면은 특이하면서 자극적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이 시퀀스는 이 드라마의 이야기 흐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저 시청자의 이목을 끌거나 화제가 될 만한 장면을 집어넣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임성한 월드가 늘 추구해오던 것이기도 하다. 언제 주제의식이나 스토리의 일관성을 따졌던가. 그저 자극적이거나 눈요기 거리거나 화제(아니 나아가 논란)가 될 만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끼워 넣는 것이 임성한 월드의 특징이다.

 

품격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막가파식의 설정과 대사 역시 빠질 수 없다. 오금성과 아내 이강숙(이아현)이 함께 안마를 받는 자리에서 오금성이 이혼을 선언하자 이강숙이 알몸을 가린 가운을 열어 보여주며 하는 대사는 리얼하다기보다는 자극을 위한 자극처럼 보인다. “뭐가 부족해 내가! 호강에 겨워서 뭐에 빠진다고... 마흔 셋에 이 정도 유지하는 여자 봤어? 누구는 주물러 터트려서 귀찮아 죽겠대. 뭐가 그리 잘났는데? 나니까 살아줬어. 토끼 주제에...” 그러자 남편 오금성도 못지않은 막말을 쏟아낸다. “식어 빠진 사발면을 그럼 1,2분이면 해치우지 2,30분에 먹냐.” 실로 19금딱지 붙은 드라마에서도 듣기 힘든 대사들이 아닌가.

 

비상식적인 가족의 대화는 오왕성(박영규), 오금성, 오수성(오대규)이 저녁을 먹으며 불륜에 빠진 오금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동생 오수성은 바람난 형에게 연실 장난치듯 비아냥대고, 형인 오왕성은 책망을 하지는 못할망정 내연녀의 나이를 궁금해 하고 부러워한다. 오금성이 내연녀가 서른다섯 처녀라고 말하자 이 두 형제는 심지어 “대박!”이라고 감격하기까지 한다. 형제들이 바람피는 것을 부러워하고 은근히 자랑질 하는 이 장면을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런 장면이 야기하는 짜증은 임성한 월드가 굴러가는 연료이기도 하다. 분노하고 욕하기 위해 본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아마도 임성한 월드는 이 잘나가는 가족들의 속물근성을 끄집어내 보여주고 싶은 것일 게다. 이 가족 속에 등장하는 계급들의 모습, 이를테면 오로라를 시중드는 하녀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거나, 평범한 옷을 입고 명품백을 사러 온 오로라를 불친절하게 대하는 종업원의 모습 역시 속물 자본주의가 가진 여전히 봉건적인 요소들을 보여주고는 있다. 또 임성한 월드에 꼭 등장하는 무속이나 종교적인 행태들(이번 드라마에도 잠자는 황마마(오창석) 옆에서 불경을 외우는 누나들이 등장한다) 역시 21세기에도 존재하는 전근대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속물 자본주의나 전근대적인 행동들을 끄집어내 보여주는 목적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풍자나 비판의식을 담재하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그 비상식적인 장면들이 만들어내는 짜증을 증폭시키기 위함으로 보인다. 즉 임성한 월드가 움직이는 동력은 바로 이러한 시청자의 감정을 낚는 이른바 ‘비난 떡밥들’이 도처에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첫 회만 봐도 이런 논란이 될 만한 떡밥들은 거의 매 시퀀스마다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에 그토록 욕을 하면서도 챙겨봤던 것처럼(어쩌면 욕하기 위해) 지금의 시청자들도 이 떡밥들을 덥석 물것인가. 첫 회에 시청률 11%를 기록할 정도로 임성한 월드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끝없이 던져지는 짜증나는 시퀀스들에 이제 진력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 <오로라 공주>의 성패는 시청자들의 성향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난을 먹고 자라는 이상한 임성한 월드는 여전히 그 기능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제 지나가버린 퇴행적인 세계로 기록될 것인가. 그 결과가 자못 궁금하다.

반인반수 영웅으로 재탄생된 이승기의 구미호

 

왜 <구가의 서>가 다루는 우리네 민초들의 영웅은 반인반수로 태어났을까. 이승기에 의해 재탄생된 구미호는 우리가 <전설의 고향>에서 보던 “서방님 하루만 더 참았어도...”하며 원망의 눈길을 보내던 그 구미호가 아니다. 우리네 전설에서 구미호라는 존재가 한이 내면화된 민초들의 억압에서 탄생한 존재라면, <구가의 서>의 반인반수 최강치(이승기)는 안으로 꼭꼭 숨겨두는 한보다는 겉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에서 탄생한 존재다.

 

'구가의 서'(사진출처:MBC)

확실히 지금은 조선시대의 수동적인 구미호의 신파가 감흥을 잃은 시대다. 아마도 70년대 가부장적인 가족체계 내에서라면 이른바 고부갈등과 시집살이에 꾹꾹 눌려진 억압이 구미호의 신파적인 변신만으로도 눈물로 풀어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라진 시대는 달라진 구미호를 요구한다. 최강치가 그려내는 구미호 이야기는 그래서 신파가 아니라 활극에 가깝고, 내면화된 욕망을 풀어내는 공포가 아니라 좀 더 겉으로 드러내는 판타지에 가깝다.

 

“다 죽여버릴거야!”라고 외치는 분노의 최강치는 그래서 그 최대의 적이 바로 자신이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무지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지만, 바로 그런 엄청난 반수의 힘은 어느 쪽으로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마치 핵을 가지고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최강치는 지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려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유동근)과 백년객관을 빼앗고 왜구들과도 결탁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희대의 간웅 조관웅(이성재)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되고 있는 존재다.

 

조선시대의 구미호 전설을 재해석하고 있지만 <구가의 서>는 그래서 무수한 현대의 영웅담과 판타지물의 흔적들이 들어있다. 분노하면 반수로 변신해 자신도 모르게 모든 적을 살상하는 그 모습은 헐크를 닮았고, 다른 존재로서의 외로운 영웅의 모습은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을 닮았으며, 영웅의 인간적인 고뇌는 배트맨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전라도는 배트맨의 고담시처럼 고립된 인상이 짙고, 그걸 장악하는 조관웅은 고담시나 뉴욕을 꿀꺽 삼키기 위해 테러를 일삼는 악당을 닮았다.

 

물론 여기에는 영웅담 이외에 판타지물의 흔적도 담겨 있다. 지리산을 지키는 신수 구월령(최진혁)과 소정법사(김희원)는 <반지의 제왕>의 요정과 마법사를 떠올리게 하고, 담여울(수지)과 최강치의 관계 설정은 일본 만화 <이누야사>를 닮았다. <구가의 서>는 이처럼 그간 <전설의 고향>이 다루던 전통적인 구미호와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다. 우리만의 특수성을 가진 구미호라는 캐릭터를 전 세계 보편적인 변신 캐릭터들(이를테면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에서 현대적인 슈퍼히어로에 이르는)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달라진 구미호 최강치는 민초들에게 어떤 영웅일까. 과거의 구미호 텍스트들은 구미호보다 더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당대의 신분구조가 주는 억압을 해체시켰다. 양반과 상놈의 신분구조는 인간과 구미호로 치환되었고, 구미호는 공포의 존재가 되어 인간을 깨우치는 이야기로 그려진다. 2000년대가 넘어 재탄생된 구미호 이야기들은(이를 테면 <여우누이뎐>같은) 구미호보다 심지어 더 공포스런 인간들을 비판한다. <구가의 서>가 그리는 구미호도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인간이지만 반인반수보다 못한 조관웅이 등장한다.

 

하지만 최강치라는 새로운 영웅이 하려는 것은 조관웅을 죽이는 사적인 복수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굳이 등장한 이유다. 이 반인반수의 영웅은 임진왜란과 무적의 이순신이라는 존재 옆에 생겨난 판타지다. 그런 점에서 <구가의 서>의 구미호는 사회적 억압이 만들어낸 공포의 캐릭터가 아니라, 사회적 분노가 만들어낸 영웅에 가깝다. 권세에 기대 뭐든 갖고 싶은 것을 취하려는 조관웅은 그래서 사회적 분노를 일으키는 공공의 적이 된다.

 

최강치라는 새로운 구미호는 현대인들의 분노가 응축되어 만들어진 캐릭터다. 분노에 의해 만들어진 그의 강력한 힘은 이미 신분체계의 벽을 넘어선다. 하지만 괴물과 싸우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는 일이다. 최강치에게 남겨진 문제는 그래서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된다. 현대인들이 갖고 살아가는 분노가 그러한 것처럼.

<개콘>, 노예, 거지 캐릭터 전성시대 왜?

 

“지가 마님 옷을 떨어뜨렸슈.” “우리 목도 떨어지겄구만.” “옷이 찢어졌슈.” “내 사지도 찢어지겄어.” <개그콘서트(이하 개콘)>의 새 코너 ‘노애’는 드라마 <추노>의 상황을 패러디한다. ‘분수도 모르고 종놈들끼리 눈 맞으면’ 개죽음을 당하는 그 상황에 송영길과 허안나는 격렬한 사랑의 감정을 액션(?)으로 표현한다.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빨려던 마님의 옷을 떨어뜨린 별 것도 아닌 일에 자신들의 목도 떨어질 거라고 말하는 송영길의 모습은 그 과장된 처절함 때문에 웃음을 준다. 하지만 고작 웃전의 옷 하나 때문에 사지가 찢어질 것을 걱정하는 이 노비들의 죄를 들은 마님의 반응은 이들의 상황을 더 처참하게 만든다. “나 이 옷 안 그래도 질려서 버리려던 참인데. 이거 개집에나 깔아줘라.”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물건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개집에 버리는 그런 물건. 하지만 그렇게 버리려는 물건을 허안나는 굳이 자신이 챙겨 입겠다고 한다. 그러자 송영길은 만류하며 이렇게 말한다. “글쎄 입지 말라면 입지 말란 말여. 그거 입으면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릴 거잖여. 너는 선녀니께.”

 

분노의 빗자루질로 사랑을 표현하는 송영길과 먹다 버린 고기를 챙겨먹으려는 허안나의 처절과 분노가 과장되게 뒤섞인 이 개그는 그러나 어느 한 사극 속의 한 대목을 패러디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 웃음 속에는 양극화로 시름하는 현실의 처절함이 공감대로 깔려 있다. 우리는 이 웃전들의 옷 한 벌에 또 고기 한 점에 온 몸을 떠는 노비들의 삶에 빵 터지지만, 그 뒤에 남겨진 씁쓸함을 공감하게 된다.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원.” 이 대사 하나로 대중들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된 ‘거지의 품격’이 거지가 되어버린(어쩌면 과거에는 어떤 품격을 갖추었던 평범한 사람이었을) 삶을 유쾌하게 뒤집어 웃음을 주었다면, ‘노애’는 그 노예가 되어버린 처절하며 분노에 찬 삶을 과장되게 드러냄으로써 웃음을 준다. 그래도 ‘거지의 품격’이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면 ‘노애’는 그런 여유가 보이지 않는 절절한 사랑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제 첫 코너로 등장한 ‘노애’가 주목받는 것은 그 캐릭터가 공감가기 때문이다. 웃전이 씹다 질겨서 뱉어버린 고기를 서로 먹으려 아옹대는 모습에서는 날선 풍자가 느껴진다. 한 편에서는 ‘정여사’ 같은 이들이 질려서 버리며 흥청망청 살아가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바꿔줘”를 연발하는 천민자본주의가 횡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돈 한 푼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현실이 아닌가.

 

“아들 아들 아빠 회사에서 잘렸어. 너도 곧 유치원에서 잘릴 거야.” “저는 아들 갈비도 못 사주는 쓰레기니까요.” ‘갑을컴퍼니’의 홍대리(홍인규)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던지는 이 말은 그래서 그 공감 때문에 웃음이 터지지만 한참을 곱씹어보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진다. 도대체 그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극과 극의 삶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이건 해도 너-무한 삶이다. 그러니 ‘정여사’의 말을 빌어 한 마디 던져볼밖에. “바꿔줘.”

왜 그들은 희생양을 찾았을까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스캔들. 이것은 마치 사이비 종교를 닮았다. 20세기 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때의 사건 말이다. 당시 그들은 모두 자신의 믿음이 잘못됐다고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다. 뇌리에 각인되어버린 믿음이란 그렇게 쉽사리 지울 수 없는 일(고통이 따른다)이기에 그들은 또 다른 믿음을 스스로 만들기 마련이었다. 타진요 공판에서 법정이 증거와 사실정황을 들어 그들에게 유죄선고를 내릴 때조차 몇몇은 끝까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타블로'(사진출처:MBC)

물론 사법적 판결은 이들의 유죄선고로 일단락됐지만, 그렇다고 이 사건의 불씨가 모두 꺼진 것으로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 타진요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인, 이른바 왓비컴즈(whatbecomes)로 알려진 김모(58)씨가 여전히 아무런 제재 없이 활동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왓비컴즈가 일으킨 사건에 애꿎은 동조자들만 처벌되었다고 말한다. 사이비 종교로 치면 믿음에 속은 이들만 처벌되고 교주는 여전히 활동 중인 셈이다. 당사자인 왓비컴즈가 소재파악이 되지 않아 기소 중지되었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누가 처벌되고 사법적 판결이 어떻게 나왔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사건이 터졌는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점이다. 타진요 스캔들의 핵심은 단지 몇몇 스토커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면에 나선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사법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휘둘린 사회도 일정 부분 의도치 않은 가해자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왜 그들이 한 사람의 학력사실에 그토록 의혹을 제기했는가와 대다수 대중들이 그 의혹에 흔들렸던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타진요 스캔들은 몇 가지 심리학적인 실험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첫 번째는 솔로몬 애쉬가 했던 이른바 ‘동조현상’에 대한 실험이다. A와 같은 길이의 선을 찾는 문제에서 그 답이 명백히 B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C를 선택하자 따라서 C를 선택하는 행위. 이 실험 결과 무려 37%의 학생이 B가 답임을 알면서도 C를 선택했다고 한다. 집단의 압력에 의해 설사 답이 확실하다고 해도 다수 의견을 따라가는 심리. 집단과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면 소외되고 평판이 나빠질 것으로 두려워하는 심리가 동조현상이다.

 

타진요 카페를 통해 김모씨가 미국 명문 스탠퍼드대를 졸업했다는 타블로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의혹이 제기된 이후, 언론에 공개되면서 많은 대중들이 그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는 사건 이면에 숨겨진 대중정서가 작용했다. 우리 사회에 깊이 드리워져 있던 뿌리 깊은 학력과 스펙사회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가 그것이다. 이미 교육조차도 돈과 태생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에서 학력이란 이른바 고위층들이 시스템을 저들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기반인 셈이다. 여기에 병역과 국적문제가 겹쳐지면 대중정서는 폭발하고 만다.

 

어찌 보면 이 사회적인 분노가 타블로라는 개인을 엉뚱한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단 사회정의 차원의 ‘믿음’이 되어버린 타블로의 학력문제는 사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부인되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전형적인 ‘인지부조화’의 사례다. ‘인지부조화’는 위에서 말한 사이비 종교의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 감정, 행동이 불일치하게 될 때 일종의 스트레스를 갖게 되는 상태로, 사람들은 그것을 없애기 위해 사고와 신념을 바꾸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고 한다. 물론 ‘인지부조화’는 때론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보호막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험한 폭력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타진요 스캔들에서 발견하게 되는 동조현상이나 인지부조화는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동조현상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강박적으로 갖고 있는 개인의 자존감 부재나 혹은 집단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해 갖게 되는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지부조화는 이렇게 강박적으로 소속된 집단이 공격성을 띄게 되었을 때 사실과 상관없이 신념을 합리화해버리는 위험에 도달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크게는 황우석 사건에서부터 작게는 심형래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 기저에는 이러한 집단적인 심리가 깔려 있다.

 

무엇보다 타진요 스캔들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광신의 차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그 광신이 한 개인에 대한 공격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사적인 이야기들이 공개적으로 끄집어내지고 때로는 날조되기도 하는 이 폭력은 동조현상과 인지부조화와 맞물리면서 더 큰 사회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심지어 가해자들조차 스스로 무엇을 가해했는지 알지 못하게 만든다.

 

실제로 재판 선고 마지막 변론에서 타진요 측 일부 피고인들이 한 이야기는 이 스캔들 밑에 깔려진 심리를 드러낸다. "학벌주의 사회에서 타블로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그가 제시한 학위를 믿을 수 없었기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대한민국에서 언제부터인가 학력세탁이 성행하고 있다. 학력을 갖고 장난치는 무수한 사람들이 단죄 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국익이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기에 우리가 대신하게 됐다." 전형적인 자기합리화의 발언들이다. 자신들은 무죄이고 나아가 애국자라는 얘기다.

 

물론 분노는 이해되는 부분이다. 아마도 직접적으로 이 스캔들에 가담하지 않은 일반 대중들 역시 학력사회가 주는 분노에는 모두 동조할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가 적절하지 않은 방향으로 한 희생양을 강요하게 된 것은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지점이다. 앞으로 제2의 타진요 스캔들이 터지지 않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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