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집착을 버릴 때 더 커지는 것

 

가지려는 것보다 놓아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이다. <비밀>의 엔딩은 그 사랑의 진정한 비밀을 알려주면서 마무리 되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강유정(황정음)은 행복을 위해 아들을 놓아주었고, 그토록 조민혁(지성)을 갖기 위해 심지어 자신을 망가뜨리기까지 한 신세연(이다희)은 그를 놓아주었다. 조민혁은 사장직을 버렸고 안도훈(배수빈)도 신세연과 성공에 대한 비뚤어진 욕망을 내려놓고 자신의 과오를 모두 인정했다.

 

'비밀(사진출처:KBS)'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민혁에 대한 신세연의 집착이 그렇고, 안도훈의 성공에 대한 집착이 그러했으며, 박계옥(양희경)의 아들에 대한 집착 또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결국 강유정이라는 캐릭터는 이 집착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은 인물이면서, 동시에 이 집착의 고리들을 끊어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조민혁에게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했고, 안도훈에게 정의를 알게 했으며, 박계옥에게는 진정한 모성애를 보여주었다.

 

“세상에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다만 어떻게 갚으며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는 이 드라마가 갖고 있는 주제의식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준다. 누구나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거기에 대해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것. 강유정이 왜 그토록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는가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죄 없는, 아니 그 죄를 비밀로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 비밀을 드러내고 용서를 구했을 때만이 구원이 있다는 것.

 

드라마는 강유정이 법정에 선 장면으로 시작해서 안도훈이 법정에 서는 장면으로 끝난다. 억울한 강유정이 차츰 현실을 깨달아가고 그래서 결국에는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을 구조적으로도 염두에 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애초에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시작했다는 얘기다. 첫 회에 벌어진 사건에 깔린 숨겨진 이야기들이 마지막 회에 드러날 수 있는 건 이 완결된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비밀>은 드라마가 참신해질 수 있는 비밀을 알려준 드라마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통속극에 가까운 평범한 멜로와 복수극이 될 수도 있었던 소재였지만, 그 안에 시청자가 궁금해 할 수 있는 비밀 코드를 담아냄으로써 이야기를 팽팽하게 만들었고, 그 비밀 속에 사회와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집어넣음으로써 이야기가 통속 치정극으로 흘러가게 하지 않았다. 결국 참신한 드라마란 전혀 새로운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치밀하게 다루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야기로 변주하느냐가 관건이라는 걸 <비밀>은 보여주었다.

 

또한 <비밀>은 드라마의 성패가 단순히 작가의 시청률로 만들어진 지명도나 원고료 액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시청률에 올인하면서 자기복제나 심지어 막장도 서슴지 않는 중견작가들의 세상 속에서, 신인작가의 과감한 발굴이 얼마나 드라마를 참신하게 만들어주는가를 <비밀>의 작가들을 통쾌하게도 알려주었다. 이로써 입증된 단막극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비밀>은 그래서 주제의식이 그러하듯이 가지려 애쓰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도를 가져갈 수 있었다. 이 드라마는 시청률만을 가지려 하지도 않았고, 그 시청률만을 위해 이름 있는 작가들을 가지려 하지도 않았으며, 연기가 아닌 스타성만을 앞세운 연기자를 세우려 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비밀>이 가지려 했던 것은 작품의 완결성이고 그걸 통해 추구하는 대중들과의 공감대였다. 그것은 결국 <비밀>이 시청률에서도, 무명작가의 이름을 알리는 데도, 또 그동안 평가절하 되었던 연기자를 재발견하는데도 성공한 이유가 되었다.

 

이제 <비밀>은 종영했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가 우리네 드라마들에게 던진 질문은 끝난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스타작가와 스타배우에 힘입어 그저 시청률만 나오면 다라는 식의 드라마 제작 패턴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시청률을 위해서 자극적인 코드를 계속 복제해 사용하는 퇴행적인 드라마를 반복할 것인가. 몇몇 스타작가와 스타배우들에게 과도하게 집착함으로써 생겨나는 드라마 제작의 양극화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비밀>은 이 많은 질문들에 이미 스스로 답을 보여주었다. 집착이 오히려 비뚤어진 결과만을 가져오듯 놓아야 산다. 이 반복되는 드라마 패턴에 대한 집착을.

분노, 연민, 죄의식까지 <비밀> 지성 연기 놀라워

 

역시 좋은 드라마는 좋은 캐릭터를 통해 좋은 연기자를 재발견하게 한다. <비밀>에서 유독 주목받는 연기자는 황정음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불행 속에서 미칠 듯이 오열하는 황정음의 눈물 연기는 분명 <비밀>이 재발견한 그녀의 가능성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황정음만큼 놀라운 연기는 지성에게서도 발견된다.

 

'비밀(사진출처:KBS)'

이것은 지성이 연기하는 조민혁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놀라운 복합심리 때문이다. 이 캐릭터는 지금껏 드라마에서 좀체 보기 힘들었던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내면을 보여준다. 처음에 그 감정은 분노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뺑소니 사고로 죽게 한 이가 강유정(황정음)이라고 알게 된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로 하여금 그녀를 심판하게 해 감옥에 보낸다.

 

하지만 감옥에 보낸 것으로 조민혁의 분노는 멈추지 않는다. 가석방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강유정은 아이를 잃게 된다. 출소한 후에도 조민혁은 스토커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며 사사건건 괴롭히는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처절한 복수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그것이 그녀에 대한 자신의 연민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잘 알아채지 못한다.

 

분노가 조금씩 연민이 되는 이유는 강유정이 하는 일련의 행동들, 이를테면 피해자 어머니를 매번 찾아가 끝까지 사죄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파렴치한이 아니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지는 모습에서 길바닥에 사고자를 버리고 도망가는 뺑소니범과는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되는 것. 대신 그는 강유정의 옛 남자친구인 안도훈(배수빈)을 점점 의심하게 된다. 그녀가 진범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복수심과 얽혀 묘한 연민이란 감정의 형태로 생겨난다.

 

그러나 결국 뺑소니 사건의 진범이 안도훈이라는 것을 알게 된 조민혁은 그에게 분노하면서 동시에 강유정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그녀가 저지른 일도 아닌 일로 자신이 그녀를 비극의 끝단으로 밀어부친 것에 대한 죄책감. 조민혁의 죄책감은 그래서 그녀에 대한 극단의 사랑으로 바뀌어나간다.

 

“네가 신경 쓰여서 미치겠어! 그러니까 내 옆에 붙어있어!” 이 대사 한 줄은 실로 조민혁이 갖고 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거기에는 어디로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가 깔려 있고 그녀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동정심 그리고 무고한 그녀를 망가뜨렸다는 자신의 죄책감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가 결국 그녀에게 배우는 마지막 감정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지키고 싶은 게 뭐지?”하고 그가 그녀에게 물었던 것. 그녀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든 걸 끌어안는 진정한 사랑을 그는 알고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복잡한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연기로 표현해냈을까. 지성이 연기한 조민혁의 초반 모습과 지금 현재의 모습은 거의 180도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을 죽인 살인자에 대해 분노했던 그가 아닌가. 그런 그가 지금은 그 살인자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극단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마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는 점이다. 지성이 얼마나 다채로운 감정의 결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연기자인가를 새삼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비밀>에는 유독 웃으면서 우는 연기가 자주 보인다. 배수빈이 미친 듯이 웃으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장면에서 실로 악마적인 느낌마저 주었다면, 차도에까지 뛰어들며 비밀을 지키려하는 강유정을 보며 웃으며 눈물 흘리는 지성에게서는 답답함과 연민, 분노, 사랑 같은 다양한 감정들이 묻어난다. 이것은 아마도 이 작품의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작가는 인간이 한없이 흔들리는 갈대처럼 갸녀린 존재라 여기는 게 아닐까.

 

하지만 제 아무리 좋은 캐릭터가 있다고 해도 그걸 소화해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황정음은 물론이고 지성, 그리고 배수빈과 이다희까지 이 작품에서 열연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이 작품의 성공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작품에 좋은 캐릭터 그리고 좋은 연기다.

<비밀>, 왜 이토록 폭발력 있나 봤더니...

 

무고한 자의 고통을 바라본다는 건 얼마나 아픈 일인가. KBS2 수목드라마 <비밀>의 여주인공 강유정(황정음)이 그렇다. 사랑하는 남자가 성공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고, 심지어 검사가 된 그를 위해 뺑소니 사고를 온전히 뒤집어쓰고 감옥에 대신 가는 강유정이라는 캐릭터는 물론 트렌디한 인물은 아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희생적인 인물이 얼마나 되겠는가.

 

'비밀(사진출처:KBS)'

즉 <비밀>은 겉모습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트렌디한 멜로나 치정을 다루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강유정이라는 무고한 인물이 처하게 되는 고통을 통해 그 불행의 원인을 사회 시스템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는 드라마다. <비밀>의 전반부는 그래서 강유정이 하게 되는 일련의 선택들이 그녀를 얼마나 불행 속으로 밀어 넣는가를 바닥 끝까지 보여준다.

 

그녀는 뺑소니 사고의 진짜 범인인 남자친구 안도훈(배수빈)에게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5년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들어간다. 힘겨운 감옥 생활 속에서 안도훈의 아이까지 낳아 기르지만 결국 아이를 학대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아이까지 빼앗기며 그 과정에서 그녀는 화상을 입고 몸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기게 된다.

 

세월이 지나 출소하지만 비극은 계속된다. 아이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고 빚 때문에 건물에서 쫓겨나게 된 데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는 결국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하게 된다. 그녀의 삶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된다. 그녀의 손에 달랑 남은 것이라고는 이제 죽은 아이를 뿌린 강변의 모래 한 줌이 전부다. 도대체 그녀가 그렇게 절망의 진창으로 굴러 떨어진 것은 왜일까.

 

여기에는 두 인물이 관여되어 있다. 그녀의 애인인 안도훈과 그의 뺑소니 사고에 연인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재벌2세 조민혁(지성)이 그들이다. 흥미로운 건 가해자와 피해자인 이 두 인물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점점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점이다. 조민혁은 그녀를 철저히 망가뜨리기 위해 안도훈과 강유정의 사랑마저 시험에 들게 만든다. 안도훈은 생존 혹은 야망 때문에 조민혁의 ‘유혹’에 흔들리게 된다.

 

<비밀>의 스토리가 괜찮다는 것은, 안도훈 같은 과거 신파극에 전형적으로 등장할만한 악역 캐릭터가 나름 설득력 있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신파극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남자의 변심을 이 드라마는 (남자는 다 그래 하는 식으로) 단순하고 막연하게 처리하지 않는다.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검사가 되려던 그 초심을 지키려 해도(이것은 강유정과의 순정도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쥐고 있는 시스템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검사가 되어도 제대로 수사를 해보지도 못하고, 수사를 하다가도 윗선의 지시로 중도에 멈출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며, 그 일을 빌미로 검찰 내부에서 감찰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쥐고 흔든 후에 권력은 협박에 가까운 손을 내민다. 같이 일해보자고. 안도훈이 제 아무리 강유정과의 순정(초심)을 지켜나가려 해도 생존해야 하는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변심은 안도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 시스템의 총체적인 문제로 보인다.

 

안도훈처럼 야망을 가진 인물이 그저 악역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처럼, 재벌2세인 조민혁 역시 단순한 악역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애인을 잃게 된 조민혁은 마치 피해자처럼 그려지는데 그는 자신이 가진 재력을 통해 강유정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복수를 한다. 복수를 위해 부자인 그가 못할 일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복수를 해도 분이 풀리지 않고 연인이 자신의 아이를 가진 채 죽었다는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강유정이 끝없이 처한 불행을 바라보면서, 그녀에게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된다. 조민혁이라는 캐릭터는 모든 걸 가진 자의 사랑 역시 얼마나 불행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결혼을 M&A 정도로 치부하는 재벌가에서 사랑이란 동정이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줄도 모르고 대신 죄책감을 갖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불행한 인물이다.

 

안도훈처럼 신분상승을 꿈꾸는 인물이나, 조민혁처럼 이미 경제적인 부를 세습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모습을 보고나면, 강유정처럼 시스템 바깥에 내던져진 인물이 처하게 되는 불행의 근원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강유정의 비극은 안도훈과 조민혁이 의도치 않게 공조함으로써 빚어낸 사건들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시스템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민혁은 부자로 살아가기 위해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들여야 하고, 안도훈은 부자들의 잘못된 시스템과 싸우다가 그 거대한 벽을 느끼고는 그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라는 유혹에 조금씩 무너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시스템의 피해자를 대변하는 강유정이라는 인물의 변화다.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시스템이 교육시킨 대로 타인의 잘못조차 자신의 잘못으로 내면화하며 살아온 인물. 이것은 어찌 보면 선량하고 착한 서민들의 모습 그대로다.

 

강유정은 입만 열면 “미안하다”고 말한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안도훈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빠가 왜 미안해. 내가 잘못한 건데.” 그리고 이런 말도 한다. “빚이 있는 건 사실이잖아.” 그녀는 왜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 스스로 미안하다며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비밀>의 폭발력은 강유정의 불행을 작금의 서민들이 처한 불행으로 바라보게 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강유정이 그랬듯이 우리가 언제 가난해지고 싶었던가. 또 불행한 삶을 살고 싶었던가. 대학을 가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 같은 공포에 대학을 가지만 막상 나오고 나면 취직은커녕 등록금 빚더미에 않게 되는 그런 삶. 회사에 들어갔다고 해도 언제 잘릴 지 알 수 없는 삶. 뼈 빠지게 일해 낸 세금이 말도 안 되는 사업에 흥청망청 쓰여지고 부자들의 배만 불리게 해주는 그런 삶. 누가 이런 삶을 원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자꾸만 스스로 잘못한 것처럼 문제를 개인화하려는 우리들의 모습. 강유정이라는 캐릭터에서는 바로 그 서민들의 선량하지만 안타까운 얼굴이 엿보인다. 그래서 이 강유정의 끝단에 놓인 비극을 바라본 연후에는 그녀가 진짜 비극의 이유를 바라보고 거기에 대항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니 이 드라마를 어찌 그저 단순한 멜로나 치정복수극으로 읽을 수 있겠는가. 무고한 자의 고통을 바라봄으로써 비로소 그 진짜 고통을 준 자들은 따로 있다는 ‘비밀’과 대면하게 하는 드라마. 이것이 <비밀>의 실로 비밀스런 폭발력의 원천이 아닐 수 없다.

자아분열적인 이중 캐릭터들의 격전장, '천사의 유혹'

'출생의 비밀'은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등장하는 드라마의 성공코드. 그 핵심은 숨겨진 비밀을 알고 있는 시청자들이 그 비밀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 대한 파장과 긴장을 기대하는 지점에서 드라마의 힘이 생긴다는데 있다. 하나의 비밀만으로도 드라마는 극적인 힘을 갖게 마련이지만, '천사의 유혹'은 거의 모든 주요 캐릭터들이 비밀로 점철되어 있다.

부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신현우(한상진)와 결혼하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주아란(이소연)은 어린 시절의 비밀을 가진 인물이면서 끊임없이 비밀을 만들어내는 캐릭터다. 그녀는 신우섭(한진희)의 집을 파탄에 이르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댄다. 그 과정에서 비밀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주아란과 함께 복수에 동참하고 있는 남주승(김태현) 역시 자신이 조경희(차화연)의 아들이라는 비밀을 숨기며 살아온다. 그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 때문에 조경희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중이다. 조경희는 남주승의 부모로서 왜 그녀가 그를 버리게 되었는지 하는 내용이 비밀에 부쳐져 있다. 또한 주아란의 동생을 왜 그녀가 거두어 보살피게 되었는지, 주아란의 부모의 죽음을 왜 그토록 숨기려 하는지 역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주아란에게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안재성(배수빈)은 자신이 신현우라는 사실을 비밀 속에 두고 복수를 시작한다. 그는 주아란이 자신에게 접근하고 파멸에 이르게 한 방식(즉 결혼하고 파괴한) 그대로 그녀에게 하나하나 돌려준다. 그는 주아란의 연인의 얼굴을 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있는 중이다.

신현우를 키다리 아저씨로 생각하며 자라온 윤재희(홍수현)는, 죽음을 넘어서 안재성으로 돌아온 그의 숨겨진 연인이 된다. 그런데 이 윤재희는 바로 주아란이 어린 시절 잃어버린 동생, 주경란이다. 역시 클리쉐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이 드라마는 바로 이 주아란과 신현우 사이에 서 있는 윤재희라는 인물을 통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되는 복수의 끝을 메시지로 던지고 있다.

이처럼 비밀로 점철되어 있는 이 드라마의 캐릭터들은 거의 모든 주요인물들이 분열적인 삶을 살고 있다. 주아란은 겉으로는 신현우의 아내이자, 남주승의 연인이자, 신우섭의 며느리지만, 실제로는 신현우를 죽음으로 내모는 악녀이자, 남주승을 이용하는 정부이자, 신우섭을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인물이다. 신현우는 안재성이라는 인물로 자아분열되어 있고, 남주승 역시 조경희의 아들이면서 그녀를 파멸로 이끄는 인물로 분열되어 있다.

가장 극적인 인물은 윤재희다. 그녀는 자신이 본래 주경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데, 사랑하는 신현우는 알고 보면 자신의 부모의 죽음을 가져온 집안의 아들이고, 신현우와 함께 파괴시키려 하는 주아란은 알고 보면 자신의 언니다. 그러니 결국 이 인물은 이 자아분열의 끝에서 스스로 파괴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이 드라마가 허술한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이 숨겨진 비밀들이 거의 모든 캐릭터에 들어 있는데다가 그 비밀의 파장이 치명적일 정도로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드라마는 아내가 남편을 파괴하고 남편이 다시 돌아와 아내를 파괴하는 이야기고(주아란과 신현우), 며느리로 들어와 그 집안을 끝장내는 이야기이며(주아란과 신우섭), 아들이 부모를 궁지에 모는 이야기고(남주승과 조경희), 동생이 언니를 파괴하는 이야기(주아란과 윤재희)다.

'천사의 유혹'의 자아분열적인 캐릭터들이 그 복잡하게 얽힌 비밀들을 풀어내는 주아란과 안재성의 결혼식 시퀀스가 마치 연극을 보듯 끊임없이 설명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마치 무대에 오르듯 순차적으로 한 명씩 단상에 올라 인물들은 자신들의 비밀을 드러낸다. 비밀이 드러나는 그 순간은 결국 모든 것이 파탄에 이르는 과정이다. 비밀 때문에 가족과 연인이 서로를 파괴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고전적인 스토리이지만 그 극적 강도가 가장 강하다는 면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 비밀의 가면을 벗겨내고 나면 이 드라마의 실체는 실로 앙상하고 지나치게 인위적이다. 관계들이 너무나 작가의 손에 의해 억지로 엮어진 느낌을 받게 되고, 그를 통해 보여주려는 메시지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위적이다 못해 설명적이다. 이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자신의 내적 감정을 디테일한 표정이나 행동으로 보여주는 대신, 독백으로 처리하는 장면들은 모두 작가에 빙의된 캐릭터들의 단면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이 작품이 이 치명적인 소재들(가족 파괴의 이야기들)을 얼마나 표피적으로 다루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자아분열적인 비밀을 가진 캐릭터란 단 한 명 속에서도 어마어마한 인간적 고뇌를 수반하기 마련이지만, 이 드라마 속의 캐릭터들에게서는 그런 고민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 대해 '도대체 비밀 없는 캐릭터는 없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은 이러한 고민 없는 캐릭터들에게서 인간을 느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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