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패밀리', 그 인간과 괴물의 증명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까. '인간의 증명'이라는 원작을 갖고 있는 '로열패밀리'의 질문이다. 이 드

'로열패밀리'(사진출처:MBC)

라마는 '로열패밀리'라는 자본의 기계가 되어있는 정가원 속에 스스로를 괴물로 치부하는 이질적인 존재를 통한 화학실험을 선보인다. 이 화학실험의 목적은 그 안에서 진정으로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가를 추출해내는 일이다.

구박받는 며느리에서 18년 간을 절치부심 반전을 준비해온 김인숙(염정아)의 행보는 숨겨져 있던 정가원 사람들의 실체를 드러낸다. 가족관계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업을 연상시키는 정가원의 자본으로 말끔한 표면 아래 숨겨져 있던 더러운 비밀들이 김인숙이라는 촉매제에 의해 마구 밖으로 끄집어내진다. 가족이 아닌 그저 관계로서 아무런 감정조차 없이 살아가는 자본 기계로 전락한 정가원 사람들은 때론 목적을 위해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사이코패스의 면모까지 드러낸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인간 냄새를 풍긴 김인숙의 남편 조동호(김영필)가 의사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우연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그나마 남아있던 정가원의 온기를 빼앗아버린 셈. 남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금치산자로 몰아 아들까지 빼앗으려하는 공순옥 회장 앞에서 김인숙의 변신은 시작된다. 무표정하게 감정을 숨기며 살아오다 어느 날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는 김인숙을 정가원 사람들은 '괴물'이라 부르지만, 이것은 어쩌면 반어법인 지도 모른다.

즉 감정 없이 사이코패스처럼 살아가는 정가원 사람들은 김인숙에게서 인간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을 지도.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결국 그 괴물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괴물로 보게 만드는 위험한 존재가 아닌가. 결국 조니의 죽음을 김인숙의 살해로 몰아 그녀를 끌어내리려던 공순옥 회장이 백기를 들게 된 것은, 그녀가 들고 온 자술서가 사실은 정가원이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스스로 괴물이라 하지 않지만, 자술서까지 들이대며 스스로 괴물임을 밝힌 김인숙은 그래서 인간임을 증명하는 마지막 한 자락을 손에 쥐게 된 셈이다. 드라마는 김인숙이 불행한 과거를 지우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조니마저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해 몰아가고, 스스로도 자신이 조니를 죽였다고 밝히게 만들지만, 바로 그것이 그녀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대목이 된다. 사실은 자해한 조니를 살리려 노력했지만 살리지 못했다는 그 자책감이 스스로를 살인자로까지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그 사실. 그것이 김인숙이 괴물이 아니라는 증명이다.

결국 마지막 헬기에 한지훈(지성)과 함께 올라 그에게 자신을 구원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김인숙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승리자가 된다. 그것이 죽음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인지 모를 열린 결말로 드라마는 끝나고 있지만, 그 끝을 받아들임으로써 김인숙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셈이고, 반대로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혼자 갈 수 없다"며 김인숙을 헬기에 태워 죽음으로 내몰려는 공순옥은 괴물임이 증명된 셈이니까. '로열패밀리'의 희비극은 바로 이 죽음 앞에서 어떤 선택이 인간임을 증명하고, 또 어떤 선택이 궁극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공포물이 사회물이 될 때

공포물. 무조건 놀라게 하고 잔인하면 된다? 만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이야기의 맥락이 없는 단순한 자극으로서의 공포란 물리적인 반응으로서의 소름을 돋게 할 지는 모르지만, 마음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진짜 무서운 것은 단순 자극이 아니라, 이야기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금기와 죄의식을 건드릴 때 저절로 피어나오는 두려움이다. 공포가 어떤 공감까지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그 이야기가 주는 무서움을 오래도록 느끼게 된다. 그런 면에서 MBC 수목드라마 ‘혼’은 공포와 공감을 둘 다 가져가는 공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두 가지 장르가 혼재한다. 그 하나는 혼령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공포물이고 다른 하나는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범죄물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서로 다른 장르가 어떻게 한 가지로 엮어지는가 하는 점이다. ‘혼’은 법을 이용해 오히려 범죄자들을 보호하는 빗나간 법 정의의 문제를 건드리면서, 그 해결되지 않는 사회 정의를 혼령이 처결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전설의 고향’ 같은 민간 설화에서 우리는 억울한 혼령들의 복수극을 늘 목도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의 원형을 현대적인 공포물로 다시 만드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작업이다. 따라서 혼령과 사이코패스가 연결된 공포범죄물이란 사실상 실험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혼령의 이야기와 사이코패스의 이야기 중간에 혼령이 빙의되는 윤하나(임주은)라는 인물이 서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억울한 죽음을 목격하는 인물이고 심지어는 동생 두나(지연)마저 눈앞에서 죽는 장면을 보게 되는 인물이다. 그 충격으로 그녀의 눈에는 혼령들이 나타나고 심지어 혼령들이 그녀의 몸을 통해 복수를 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은 이 드라마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윤하나의 시선, 즉 혼령들을 보고 그 혼령들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 누군가를 죽이게 하는 그 과정으로 본다면 드라마는 혼령이 등장하는 공포물이 되지만, 윤하나의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그녀의 행동을 보면 이것은 그녀가 또 하나의 사이코 패스가 되어가는 공포범죄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던져진다. 사회정의가 지켜지지 않는 법이 존재하는 한, 사이코패스는 복수를 안고 피어나는 악의 꽃처럼 반복되어 악순환된다는 점이다. 두나는 사이코패스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 복수를 하는 언니 하나는 그 과정에서 사이코패스처럼 되어간다.

만일 ‘혼’이 그저 기괴한 혼령과 접신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었거나, 아니면 사이코 패스를 잡으려는 범죄 심리학자와, 법을 이용해 사이코패스의 죄를 덮어주는 변호사와의 대결구도로 갔다면 이처럼 박진감 넘치는 장면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는 공포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혼’은 이 두 지점을 엮어서 공포에 사회적 공감을 덧붙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먼저 잘 짜여진 대본의 힘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포물의 특성상 이 드라마가 갖는 연출의 힘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초반부 사거리에서부터 아파트 옥상까지 쫓고 쫓기는 장면은 이 드라마에 확실한 추동력을 만들어준 것이 사실이다. 공포물이 갖는 디테일적인 영상들 역시 왠만한 공포영화보다 뛰어난 것은 모두가 다 이 연출이 힘을 발한 탓이다.

다만 이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공포물이라는 점이, 대중적으로 어떻게 어필할 것인지 점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본래 공포물은 대중성과는 그다지 가깝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포의 측면만이 아닌 이 드라마가 가진 사회적인 함의나 주제의식을 들여다본다면 어쩌면 이 드라마는 공포물로서 성공할 수 있는 드라마가 될 지도 모른다. 공포와 공감이 공존한다는 점은 ‘혼’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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