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프린세스', 소현경표 멜로드라마의 사회성

"좀 전에 골라든 그 수백만 원 하는 가방, 그 동안 당신의 명품들, 인우 인생 짓밟은 대가라는 거 알아요? 인우 거 뺏은 거라는 거." '검사 프린세스'에서 인우(박시후)의 친구인 제니(박정아)가 마혜리(김소연)에게 던지는 이 말은 드라마의 시점을 살짝 돌려놓는다. 그동안 마혜리의 입장에서 진행되어오던 드라마는 제니의 이 역지사지를 제안하는 대사를 통해 인우의 입장을 풀어놓는다. 수백만 원 하는 가방에 명품들 속에서 공주로 검사로 살아오던 마혜리가, 자신의 삶이 사실은 한 가족의 인생을 파탄 낸 대가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이 드라마를 개인적인 차원을 다루는 멜로에서 사회극으로 옮겨놓는다.

마혜리는 사회화가 덜 된 무개념의 공주 검사로 드라마에 등장한다. 검사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게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고, "예쁘게 하고 다니는 게 뭐가 나빠"하고 말하며, 산적한 업무에도 6시면 무조건 칼퇴근을 주장하는 이 무개념 공주 검사는 사회를 모른다. 철저한 개인주의적인 삶 속에 머물며, 그 삶이 사회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 알지 못하며 또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마혜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녀는 부모가 만들어놓은 단단한 출세 코스의 길 안에서만 자라왔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삶(즉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생각하지 않고 개인적 삶에 몰두하는 마혜리의 모습은, 고속 경제 성장 끝에 부자의 반열에 오른 부모를 갖고 걱정 없이 자라온 이른바 상류층 자제의 모습을 표상한다. 그 부모인 마상태(최정우)는 대물림되는 그 가난이 싫어 독하게 한 시대를 살아내고 결국 성공의 길에 선 이전 세대의 치열한 삶을 담고 있는 인물이다.

"가난이 좋았다 이거야? 나는 아니야? 진짜 싫었어. 아주 끔찍하고 징그럽게 싫었어. 5대를 머슴살이에 날품팔이만 하는 집안, 그 대물림된 가난을 내 대에서 끊기 위해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당신 아냐? 내 자식부터는 이 마상태를 믿고 태어난 새끼, 토실토실한 살집에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보석보다 더 예쁜 눈에 해리부터 그 새끼도 그 새끼의 새끼들도 떵떵 거리고 대대손손 잘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뭔가 잘못됐어. 이럴려구 한 게 아닌데 내 딸을 망치게 생겼어."

마상태가 던지는 참회 섞인 이 말은 '검사 프린세스'를 그저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마상태가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만들어놓은 그 부 위에서 마혜리가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나 누구나 우러러보는 검사라는 직업에 선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로서의 직업조차 부에 의해 대물림되는 우리네 사회를 잘 보여준다. 그 타인에 대한 이해 없이 갖게 된 그네들의 검사라는 직업에서 진정한 사회정의를 행하는 일이 어찌 쉽게 바랄 수 있는 일일까.

하지만 '검사 프린세스'는 이 대물림되는 부와 지위의 세상에서 그래도 희망을 꿈꿔보는 드라마다. 마혜리는 차츰 검사로서 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성장하는 캐릭터. 그녀가 '무늬만 검사'에서 차츰 진짜 검사가 될 때, 그녀가 궁극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의 숨겨진 과거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자신이 서 있는 부가 사실은 개인적인 성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인식은 아프지만 이 단단한 대물림의 시스템에 균열을 낸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마혜리 곁에 생겨난 윤세준(한정수) 검사와 서인우 변호사라는 존재는 그래서 단순히 '검사 프린세스'라는 드라마의 삼각 멜로 구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윤세준 검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한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인물이고, 서인우 변호사는 이제 검사로서의 삶을 이해하게 된 마혜리가 가족과 사회정의 사이에서 갈등할 때, 복수나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그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검사 프린세스'는 어쩌면 소현경 작가의 일관된 사회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찬란한 유산'은 대물림 되는 유산으로 표징되는 우리 사회의 진한 핏줄의식을 가족드라마라는 틀 위에서 뒤집었다면, '검사 프린세스'는 부는 물론이고 지위까지 대물림되는 사회 속에서 세워지기 어려운 사회정의를 멜로드라마라는 틀 위에서 뒤집고 있다. 무개념으로 시작한 마혜리라는 캐릭터의 성장과정 속에서 우리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사회성을 띠는 소현경표 멜로드라마가 가진 진면목이다.

‘혼’을 담은 문제작, 왜 마침표를 못찍었나

“사람들은 작은 것에는 분노하지만 큰 것에는 분노하지 않아. 왜? 허락되어 있지 않으니까.” 백도식(김갑수)은 진정 분노해야할 대상에는 분노하지 않고 엉뚱한 것에 분노함으로써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을 비웃는다. 그러면서 불쑥 정치 이야기를 꺼내든다. “그래서 정치를 좀 해보려구 해.” ‘혼’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백도식이란 인물의 대사를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가 그저 공포극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의는 법을 이길 수 없거든.” 법과 정의에 대한 그의 대사는 아프게도 현실이다. 그러니 법을 이길 수 없는 피해자들은 법 외부의 힘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하려 한다. ‘혼’이라는 공포물의 탄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한다. 가해자들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같은 방법으로 잔인하게 가해자들에게 복수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방법으로 혼령의 힘을 비는 빙의와 처단자로서의 연쇄살인을 동원한다는 것이 이 드라마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다.

연쇄살인범을 연쇄살인 하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덱스터’라는 미드를 통해 보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혼이 복수를 하는 것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많은 ‘전설의 고향’ 귀신이야기의 단골메뉴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한 군데 얽혀있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프로파일링 기술을 가진 신류(이서진)가 혼령에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하나(임주은)를 이용해, 법으로 이길 수 없는 살인범들을 제거해나가는 이야기는 확실히 신선한 면이 있다.

게다가 공포 코드 이면에 사회적인 부조리를 넣어 그 공감의 울림을 키운 것도 이 작품을 명품으로 만든 요인이다. 우리는 사람(물론 살인범들이지만)이 혼령보다 더 무섭고, 그 사람을 혼령이 처참하게 죽이는 것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놀랍게도 우리가 그런 경험이 통용되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혼령에 감정이입하는 경험을 하게 되며, 여기서 공포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분노가 자리하게 된다. 무섭기보다는 화가 나고, 살인을 막아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저런 자는 죽어도 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공포물이 사회극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은 저 백도식이 경고한 부분이다. 엉뚱한 분노가 결국은 자신을 망치게 된다는 것. 이것은 예언처럼 들리고, 결국 그 예언에 따라 모두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결말에 있어서 신류와 건일(정시우)의 죽음은 공포극으로 본다면 지나치게 허무하게 보인다. 무언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죽은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도식은 그 누구에게도 응징을 당하지 않했다. 그는 스스로 건물에서 밖으로 뛰어내렸고, 거기에서도 살아나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공포극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드라마는 공포의 끝장, 즉 절대 악의 죽음, 문제의 해결 등이 보여지지 않은 채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극의 틀로 보면 말이 달라진다. 신류와 건일의 허무한 죽음은 흔한 말일 수 있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그 복수의 순환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처단한다는 것이 가진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그것에 분노하며 결국에는 이성을 잃어버리는 하나는 이 복수의 비극적인 순환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준다. 게다가 사라져버린 백도식은 “정의는 법을 이길 수 없다”고 그가 말한 바 있는 그 현실을 그대로 우리 앞에 들이민다.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된 것 없이 현재 상태로 돌려놓은 이 결말은 사회극으로서는 그 울림이 크다. 해결된 것은 없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목도했고, 결국 현실의 문제는 드라마 같은 판타지가 서둘러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혼’은 사회극을 꿈꾼 공포극이다. 겉으로 공포극의 외관을 하고는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드라마다. 그러니 공포극으로서는 여러 모로 그 장르가 갖는 재미를 빗겨간 면이 있다. 하지만 ‘혼’은 충분한 사회극으로서의 재미를 주었던 드라마다. 적어도 공포와 현실이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는지, 이 드라마는 충분히 보여주었다. ‘혼’은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미완에 남았지만, 그 시도만큼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는 드라마다.

당신이 만난 건 완벽한 이웃? 완벽한 사랑?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은 겉으로 보면 전형적인 멜로 드라마이다. 거기에는 백수찬(김승우), 정윤희(배두나), 유준석(박시후), 고혜미(민지혜)가 엮어 가는 전형적인 사각 멜로 라인이 주축을 이룬다. 유준석이란 재벌2세와 정윤희란 별 볼 일 없는 비서의 러브라인이 그렇고 욕망과 질투심에 눈이 멀어 그들의 사랑을 훼방하는 고혜미란 캐릭터가 그렇다. 드라마 속에는 심지어 멜로에서 익숙한 불륜 코드와 출생의 비밀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전형적인 틀을 갖고 있는 멜로 드라마가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같은 재료를 갖고서도 버무리기에 따라서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음식처럼, 정지우 작가의 손맛이 색다른 멜로의 맛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소재로만 보이는 겉과 달리 이 멜로 드라마는 그저 멜로에 그치지 않고 좀더 휴먼드라마에 가깝게 확장되어 나간다.

멜로드라마를 통해 그 한계 넘어서기
사각 멜로 라인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틀 속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백수찬이란 캐릭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전형적인 멜로 라인 속에서 백수찬은 우정이라는 색다른 이름의 멜로를 구축해낸다. 그가 사랑을 쿨하게 우정으로 덮어두자 멜로 라인의 경쟁구도는 사라진다. 백수찬이 진정으로 정윤희를 친구로서 아끼는 모습은 유준석마저 감동시킨다. 유준석은 “나 형이라고 부를 뻔했어요. 그런 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라고 말한다.

재벌2세인 유준석과 비서인 정윤희의 사랑이 전형적인 구석을 갖고 있지만 이 또한 드라마는 ‘세컨드 제안’이라는 파격적인 선택으로 벗어난다. 이 제안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돌발적인 것이 아니다. 살해당한 연수연(장혜숙)이 유회장의 세컨드였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세컨드 제안’은 세컨드에 의해 밀려날 뻔했던 본처의 아들, 유준석이 또다시 세컨드를 제안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드라마 구성 초기부터 이미 설정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불륜 코드는 전면에 자극적으로 드러나기 보다 단지 이런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다. 따라서 여타의 멜로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전개양상에서 벗어난다. 고니(신동우)가 사실은 유회장과 세컨드였던 연수연의 아들이었다는 출생의 비밀 역시 여타의 드라마와는 다른 전개이다. 출생의 비밀을 통해 고니가 무언가를 얻게되는(하다 못해 부나 지위라도) 상황은 고사하고 고니 당사자는 그 비밀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멜로에 미스테리가 필요했던 이유
이렇게 멜로 드라마의 익숙한 소재들을 활용하면서도 이 드라마가 그 식상함의 늪에 빠지지 않은 것은 같은 소재라도 사용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 모래알 같은 인간관계를 되묻는다. 드라마가 다채로운 이웃들의 사이드 스토리를 전개하면서 동시에 미스테리라는 새로운 요소를 집어넣은 건 그 때문이다.

드라마는 인간관계의 끝장으로 살인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드러내놓고, 그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들을 통해 관계들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즉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비밀들을 끄집어내면서 ‘당신은 진정으로 그 사람들을 알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 미스테리를 집어넣을 때부터 이 멜로 드라마로 포장된 드라마는 긴장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신이 알고 있던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거나 다른 반응을 보일 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그 배반에 놀라면서 드라마가 얘기하려는 관조적 시각을 얻게 된다. 문제는 멜로라인이 너무 공고하게 됐을 때이다. 유준석이 눈물을 쏟으면서 정윤희에게 세컨드 제안을 할 때 시청자들의 의견이 분분했던 것은, 멜로와 현실 사이에서 시청자들이 멜로에 더 강하게 끌렸기 때문이다.

당신은 완벽한 이웃을 만났나
유준석과 정윤희의 멜로라인이 좋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할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부분만을 본다면 이 드라마는 반쪽밖에 보지 못한다. 작가가 종방연에서 밝혔듯이 가장 중요한 캐릭터인 백수찬이 바로 ‘완벽한 이웃’이기 때문이다. 유준석과 정윤희의 멜로라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수찬이란 인물이 보여주는 ‘사람냄새’이다. 초반부에는 제비로 시작했지만 제비가 가진 장점(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만 취한 백수찬은 후반부로 오면서 이웃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이해하는 완벽한 이웃으로 돌변한다. 이웃들의 숨겨진 진면목까지 끌어안는 그는 겉모습만 보고 속을 이해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비교된다.

그것은 정윤희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얻게된 결과이다. 백수찬은 한 여자를 얻느냐 마느냐의 사랑을 쿨하게 포기하면서 좀더 인간적인 선택을 한다. 여자에게는 친구가 되고 옆집 사람들에게는 이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백수찬 같은 선택은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그걸 시청자들이 함께 공감하는 순간, 이 드라마는 멜로를 넘어서게 된다. 마지막회에서 각 캐릭터들이 보여준 소유가 아닌 존재로서의 사랑(백수찬은 물론이고 유준석까지)은 그 공감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당신은 이 드라마를 통해 완벽한 이웃을 만났는가. 이 드라마는‘완벽한 남자 혹은 여자를 만나는 법’이 아니라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이다. 사랑이 아닌 이웃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드라마는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 좀더 넓은 인간의 사랑을 담는다. 즉 멜로와 현실을 동시에 잡아냈다는 뜻이다. 이 멜로드라마가 사회극의 냄새를 풍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멜로의 실험이 성공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성패를 떠나 그 시도 자체가 의미 있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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