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이 현재와 맞닿았던 지점들

 

KBS <징비록>이 종영 한 회를 남기고 있다. <정도전>을 이을 화제작으로 떠올랐지만 <징비록>은 생각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거기에는 <징비록>만의 난점들이 있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벌어지는 그 과정들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기대감을 만들지만, 그것이 이순신이나 곽재우 같은 전장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기록을 남긴 류성룡(김상중)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징비록(사진출처:KBS)'

즉 시청자들로서는 좀 더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한 임진왜란의 이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지만 이 사극은 그것보다는 류성룡이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기록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쟁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고 왕과 신하들의 무능함에 대한 질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장쾌한 전쟁의 장면들을 기대하던 시청자라면 이 답답하고 심지어 분노를 일으키는 무능한 조정의 이야기에 가슴을 치게 됐을 것이다.

 

결국 <징비록>은 바로 그 답답함과 무능함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바를 되새기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스펙터클을 보며 통쾌해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의 해전들을 저 뒤편으로 보내고 대신 전면에 무능한 왕 선조(김태우)의 이야기를 아프게도 바라보게 만든 건 시청률에는 불리할지 몰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징비록>의 힘은 류성룡이나 이순신(김석훈)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조는 한 마디로 드라마의 핵심적인 힘을 만들어내는 암 유발자로서의 면면을 보여주었다. 물론 실제 역사는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도주에 도주를 계속한 이유가 왕이 붙잡히면 끝나게 되어버리는 전쟁의 결과를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기록하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비춰지는 선조는 무능한 권력자가 만들어내는 국가의 비극으로 다가온다.

 

세월호 참사에서부터 메르스 공포로까지 이어지며 드러난 콘트롤 타워의 부재는 신 징비록을 백서로 남겨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만들었다. 그러니 선조가 하는 일련의 선택들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라고 읽힐 수밖에 없었다. 류성룡은 그런 선조 앞에서 그 답답함에 무릎을 꿇고 통탄하기도 하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고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바뀌지 않는 선조 앞에서 류성룡의 마음은 시청자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징비록>9할은 결국 선조가 이끈 셈이 되었다. 그의 무능과 답답함은 시청자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그 감정을 고스란히 재현해냈다. 드라마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상황을 빚어낸 선조의 실정을 통해 지금의 현실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토록 힘겨운 현실을 살게 된 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선조를 연기한 김태우는 그 역할을 200% 소화해냄으로써 드라마가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흘러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측은하고 한편으로는 복장 터지게 만드는 소심함을 보여주면서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자가 왕의 자리에 있게 됨으로써 벌어지는 국가적 비극을 제대로 그려냈다



<징비록>, 선조에 실망할수록 광해를 희망하게 되는 까닭

 

세상에 이런 통치자가 있을까. KBS <징비록>의 선조(김태우)는 임진왜란의 전란 통에 도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또 개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심지어는 평양마저 버리고 의주로 도주했다. 그것도 모자라 명나라로의 망명을 시도하려는 선조는 명나라 황제가 관전보(여진족과의 국경지대)의 빈 관아를 빌려주겠다는 굴욕적인 이야기까지 들어야 했다.

 

'징비록(사진출처:KBS)'

자기 안위만을 위해 도망치며 절치부심운운 변명만 늘어놓는 선조에게 가까운 신하들조차 등을 돌렸다. 명나라 망명에 극렬하게 신하들이 반대하자 선조는 급기야 광해군(노영학)에게 조정을 맡기고 떠나는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를 단행한다. 이런 선조에게 류성룡(김상중)필부처럼 행동 한다며 강한 어조로 비판을 하기도 했다.

 

선조의 행동은 백성들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명나라 황제가 위로조로 보내온 은자를 신하들에게 포상으로 내리자 오히려 신하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 포상은 왕과 함께 도주하고 있는 자신들이 아니라 왜군과 싸우고 있는 병사들에게 가야 하는 것이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구휼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걸 선조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 전쟁과 기아로 고통 받는 백성들이 관아를 털어 군량미를 탈취하자 그들을 회유해 그 죄를 사해주는 대신 군량미를 회수한 류성룡의 처사에 선조는 발끈하는 모습이었다. 관아를 턴 백성들이 왜 그랬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의 죄를 처벌하지 않은 류성룡의 처사와 이를 허한 광해군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

 

자신이 해야 할 소임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왕으로서의 존중을 받으려는 통치자. 도대체 그 누가 이런 통치자에게 지지를 표할 것이며, 존경을 표할 것인가. 게다가 선조는 백성들의 마음이 점점 광해군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불안해하며 분조를 거두고 자신이 국사를 맡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이런 행동은 이미 광해군을 중심으로 민심이 모여 국난 극복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터에 찬물을 뿌리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선조를 보면 왜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게 됐는가 하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제 안위만을 살피는 통치자가 위에서 군림하는 한 그 국가가 온전할 리가 만무다. 심지어 평시에 그를 따르던 신하들조차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은 전시에 그 통치자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선조의 무능을 넘어선 무개념은 새롭게 등장한 광해군의 행보를 하나의 희망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는 도망치기 보다는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진을 혼란시키고 관군을 독려하는 길을 선택하려 한다. 그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류성룡의 마음은 아마도 당대의 백성들의 마음이자 지금 현재 이 사극을 바라보고 있는 시청자들의 마음 그대로였을 것이다.

 

MBC 사극 <화정>은 바로 그 선조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죽어가는 선조 앞에서 광해는 절규한다.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선조에 대한 깊은 원망을 광해는 드러낸다. 역사는 광해를 이라는 호칭을 붙여 폭군으로 기록하지만 <징비록>을 통해 선조의 행위를 보다 보면 광해의 깊은 고통이 이해가 된다.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선조는 도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 위기에 맞섰던 광해를 내치려 한다는 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징비록><화정>이 기묘하게도 선조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그 이야기에 지금의 대중들이 호응하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들이 이 두 사극을 통해 많은 것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선조에 대해 실망할수록 광해에 대한 지지의 마음이 커져가는 건 그래서 당대의 백성이나 지금의 시청자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정>의 새로움, MBC 사극 되살릴까

 

어느 입장 하나 공감가지 않는 게 없다. MBC 월화 사극 <화정>이 그리는 캐릭터들의 특징이다. 먼저 이 사극의 중심에 서 있는 광해군(차승원)을 떠올려보라. 역사가 기록한 폭군의 시각을 벗어나 이 사극은 왜 광해군이 그렇게 냉혹한 결정들(친족들을 제거한 일)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화정(사진출처:MBC)'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임진왜란 당시 선조(박영규)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세워졌으나 끝내 인정을 받지 못한 왕. 그로 인해 그를 따르는 대신들도 없는 상황에 지지 없는 왕좌 위에서 어린 영창대군을 앞세워 시시각각 용상을 넘보는 이들을 보며 서운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왕. 영창대군과 정명공주가 잠시 궁을 빠져나간 일로 그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누명까지 쓰는 왕. 광해군이 왜 냉혹해졌는가 하는 그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광해군과 맞서 있는 영창대군의 모친 인목대비(신은정)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선택들 역시 공감할 수밖에 없다. 광해군 스스로도 잘 알고 있듯이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창대군의 안위다. 그래서 선조가 독살 당하던 날 영창대군을 제거하려 한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로 하여금 광해군을 믿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결국 이 시도를 한 주범인 임해(최종환)를 내침으로써 광해군은 비로소 인목대비로부터 왕위의 재가받을 수 있게 된 것.

 

그렇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인목대비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끝없이 그 불안감을 부추기며 영창대군을 왕위에 세우려는 외척들은 그녀가 왕좌에 대한 욕심을 갖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모성애만큼 잔인한 게 없다고 하던가. 인목대비의 선택은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욕망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어린 시절 광해군을 세자라 부르기 보다는 줄곧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자라났던 정명공주(정찬비)는 광해군과 인목대비 사이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광해군이 임해를 살해하고 자신과 영창대군까지 죽이려 할 것이라는 백성들의 이야기에 그녀는 불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진다.

 

그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정명공주가 광해군을 오라버니가 아닌 전하라고 부르자 광해군은 그녀의 변화를 직감하고는 쓸쓸해진다. 하지만 돌아서는 길, 정명공주가 오라버니라 부르며 대보름날 더위를 사가라고 하자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렇게 오래오래 매년 더위를 사가라는 정명공주의 이야기에 두 사람이 모두 눈물을 글썽이게 된 건 그들의 애틋한 오빠 동생 관계를 확인하는 동시에 그들이 처한 외적인 상황들이 겹쳐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찔한 성벽 위에서 발을 헛디딜 뻔한 영창대군의 손을 잡아주며 광해군은 너무 위험한 곳에 올라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괜스레 두려운 영창대군이 뒷걸음질을 치자 광해군은 내가 두려우냐?”고 물으며 자신도 네가 두렵다고 고백한다.

 

고립무원 광해군의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이 이해되는 반면, 인목대비의 모성애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또한 정명공주의 갈등 역시 공감이 간다.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캐릭터들이 이렇게 저마다의 입장을 설득하고 있다는 건 <화정>이라는 사극의 새로운 면모다.

 

사극이라고 하면 역사를 다룰 수밖에 없고, 그 역사는 어떤 식으로든 한 사람의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구시대적 관점이다. 지금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들이 공유되는 시대다. 그러니 <화정>이 제시하는 이 다각적인 입장들의 충돌은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도로서 다가온다.

 

MBC 사극은 지금껏 1인칭 시점의 이야기들을 풀어온 바 있다. <대장금>이나 <상도>, <허준>, <선덕여왕>, <이산> 등등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 사극은 그들의 관점으로 일대기를 다루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극의 관점은 이제는 조금 패턴화된 면이 있다. 따라서 이 문법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화정>의 시도는 참신하게 다가온다. 그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MBC 사극. <화정>은 그 MBC 사극을 되살릴 수 있을까.

 

풍자 세진 <개콘>, 현실을 떠올리는 <징비록>

 

지금 대중들의 마음이 꼭 저렇지 않을까. KBS <징비록>이 공교롭게도 보여준 선조(김태우)의 파천 장면은 대중들로 하여금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을 떠올리게 했다.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음에도 제 한 목숨 살기 위해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선조. 그를 막아 세운 백성들은 이럴 거면 나라는 무슨 소용이고 임금이 왜 있어야 되느냐고 토로했다.

 

'징비록(사진출처:KBS)'

사극의 힘은 과거의 박제된 역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명백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것은 그저 임진왜란 당시 벌어졌던 기록이지만, 재현된 기록은 지금 현재를 상기시킨다. 세월호 1주년에 성완종 리스트로 시끌시끌한 현 시국이 아닌가. 대중들에게 <징비록>의 이 한 장면이 새롭게 읽히게 된 데는 그만한 민심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개그콘서트>민상토론이라는 코너 역시 마찬가지다. <징비록>이 역사를 가져와 현실을 상기시킨다면, 이 개그 코너는 현 시국의 문제를 개그의 무대 위로 올려놓았다. “지금 이 시기에 외국에 나가셔야겠습니까?” 물론 이 질문은 유민상이 해외라도 나가야겠다고 한 발언에 대해 이 토크쇼의 진행자 역할인 박영진이 추궁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집권 3년차 박근혜 정부 중간평가라는 말과 어우러지면 현 시국에 대한 뉘앙스를 갖게 된다. 외압이 들어올까봐 현실과 무관하게 몸으로 웃기거나 바보 행세로 웃기는 개그맨들을 앉혀놓고 시국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 민상토론은 그래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 시국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특정한 단어들의 조합이 에둘러 현실을 풍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첫 방송에서부터 무상급식 중단 논란’, 수지와 이민호 열애설 기사에 묻힌 이명박 전 대통령의 2800억 기업특혜 의혹같은 뜨거운 사안들을 개그의 무대 위로 끄집어냄으로써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 코너는, 그간 동혁이형이나 용감한 녀석들’, ‘사마귀유치원등에서 현실 문제를 직설적으로 거론했던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직접 비판하지 않아도 청년실업이라는 단어가 중동을 만나는 것이나, ‘리스트라는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현실적 의미를 확보하는 풍자.

 

<징비록><개그콘서트>에 최근 다시 집중된 이런 관심은 대중문화의 힘이 어디서 생겨나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드라마나 코미디라는 틀 안에 매몰되지 않고 결국은 대중정서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현실 공감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생겨나는 힘이다. 항간에는 이러한 변화를 보면서 그간 대중들과 함께 걸어가지 못하던 KBS가 이제 대중들 곁으로 돌아오고 있는 건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물론 그것은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현재 대중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또 어떤 것들을 원하고 있는가가 이런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서도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지금의 민심을 보여주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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