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살벌한 대치동 학원가에서 교육이 낭만을 이야기할 때

졸업

“나 기분이 너무 이상한데 그, 무료 강의 하기 전 서혜진이랑, 하고 난 다음의 서혜진이 다른 사람 같아. 나 네 말대로 그 두 장짜리 약정서에 내가 원하는 조건 넣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게 맞거든? 지금 학원에 침 뱉고 가는 게 맞아. 근데 왜 이렇게 발이 안 떨어지지? 나 그 전까지 아무 문제 없었거든? 열심히 가르치고 그만큼 벌고 그걸로 애들 불어나면 또 통장 잔고도 불어나고 아 나 그 보람 하나로 살았는데 다시 그 전으로 못 돌아갈 것 같아.”

 

tvN 토일드라마 ‘졸업’에서 서혜진(정려원)은 경쟁학원인 최선국어 최형선(서정연) 원장의 파격적인 스카웃 제의에도 불구하고 갈등하는 자신에 대해 친구인 차소영(황은후) 변호사에게 그렇게 토로한다. 그 말처럼 일타강사로서 잘 나가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던 그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건 자신의 첫 제자이자 이제 같은 학원에 청운의 꿈을 품고 들어온 후배 강사 이준호(위하준) 때문이다. 갑자기 좋은 회사도 때려치고 강사의 길을 걷겠다며 나타난 이준호가 굳이 그런 선택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서혜진이다. 학창시절 서혜진으로 인해 받았던 좋은 영향이 그 역시 그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픈 이유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챙겨주면서 진짜 공부를 좋아하게 만들었던 이가 바로 서혜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서혜진의 모습은 대치동 학원가에서 일타강사로 성장하면서 점점 사라져갔다. 그의 말대로 열심히 가르치고 수강생들이 불어나고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것을 ‘유일한’ 보람으로 살게 됐다. 당연히 이준호를 가르치며 가졌던 ‘첫 제자’ 같은 다분히 낭만적인 교육은 저만치 멀어졌다. 그런데 잊고 있다 생각했던 그 교육의 낭만을 떠올리게 하는 첫 제자가 등장한 것이다. 

 

그와 함께 ‘사제출격’이라는 새로운 강의를 준비하면서 서혜진은 아주 조금씩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간다. 그건 마치 사제지간이었지만 이제 똑같이 ‘선생님’이라 불리게 되어 ‘동료’가 된 이준호에 대해 갖게 되는 감정 같은 것들이 겹쳐져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준호가 과거 자신을 가르쳤던 서혜진을 생각하며 하려 준비해온 강의들은, 서혜진에게는 너무 ‘낭만적’으로 느껴져 고쳐지고 바뀌어지지만, 무료특강을 하던 날 최형선 원장에 의해 청강생들이 단 한 명밖에 나타나지 않은 당혹스런 상황을 맞이하면서 서혜진은 마음을 바꾼다. 어떻게 하면 문제 하나를 더 맞춰 등급을 올리는가에만 골몰해 준비했던 강의가 아니라, 그의 첫 제자였던 이준호에게 했던 다소 낭만적이지만 진짜 공부가 되는 강의를 꺼내놓는다. 

 

그 단 한 명의 수강생인 이시우(차강윤)는 다름 아닌 최형선이 이들의 강의가 궁금해 심어 놓은 일종의 ‘스파이 학생’이었지만, 그 진심어린 강의는 이 학생의 마음을 돌려 놓는다. 그 강의가 어땠는가를 묻는 최형선에게 이시우는 솔직하게 자신이 국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를 털어 놓는다. “문법 같은 건 공식이 있으니까 크게 어렵지 않은데 문학은 사실 잘 모르겠어서 그냥 열심히 외웁니다. 그런데 언제나 불안했어요. 국어를 좋아하기 때문에 잘하는 애들이 있으니까.”

 

그러면서 다소 낭만적인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교과서 첫 장에 보면 국어 공부의 목적은 인간답게 사는데 있다고 쓰여 있거든요. 이거 읽는다고 내가 더 인간다워지거나 그런 것 같지 않고, 아니 인간다운게 뭔지 모르겠고 아무튼 국어는 좀 뜬구름 잡는 과목 같아서 싫었거든요. 근데 어제 수업을 듣고 나선 제가 왜 국어를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어요. 학년 바뀌고 처음 교실에 들어가서 오늘 점심은 누구랑 먹을지 막 눈치 볼 때랑 비슷한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이건 실상 지금의 수험생들이 국어를 어려워하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문학의 경우, 그 작가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천천히 숙고하고 음미하며 감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입시에 맞춰진 국어 수업은 당장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만 맞춰져 있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작품을 쓴 작가도 초면이고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도 나랑 초면인데 걔들이랑 밥도 먹어야 되고 그 사람들의 생각이나 입장을 엄청 빨리 막 맞혀야 되고 하는 게 힘들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 보는 지문에 당황하고 감에 의존하고 그랬는데 근데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다가가니까 처음으로 조금 재미있었어요.”

 

이시우의 이야기는 확실히 낭만적이다. 또한 단 한 명의 청강생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수업을 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것으로 완패했다 싶었던 서혜진과 이준호의 ‘사제출격’이 반전의 서사를 그려내는 이야기도 대치동의 현실을 들이대면 낭만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서혜진이 첫 제자의 등장과 함께 초심으로 돌아가고 그래서 다시는 전으로 못돌아갈 것 같다 말하는 것 역시 낭만적이다. 

 

하지만 어째서 교육이 낭만적이면 안될까. 아니 오히려 교육이란 꿈이나 희망 같은 낭만을 가져야 의미있는 것이 아닐까. ‘졸업’은 서혜진과 이준호의 로맨스를 밑그림으로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교육이 잃어가고 있는 낭만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놓고 있다. 살벌한 경쟁이 벌어지는 대치동 학원가에서 꺼내놓은 교육의 낭만이라니. 그래서일까. ‘졸업’이라는 드라마가 건네는 설렘 속에는 세태에 대한 날선 일침 같은 통쾌함도 묻어난다. 이러니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사진:tvN)

'런 온', 임시완의 달리기와 신세경의 통역에 담긴 뜻은

 

"통역하는 건 뭐 예쁜 말만 잘 골라서 해야 하는 건 기본이니까 잘 알거고, 내 아들의 일거수일투족 보고해주는 정도? 통역사야 계속 붙어 다닐 수 있잖아. 그렇다고 허튼 마음먹으면 안 되겠죠? 수작을 건다거나." JTBC 수목드라마 <런 온>에서 기선겸(임시완)의 아버지 기정도(박영규) 의원은 통역일을 맡게 된 오미주(신세경)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한다. 그에게 통역이란 '예쁜 말만 잘 골라서' 하는 어떤 것이고, 심지어 그건 늘 붙어서 감시하는 일에 최적인 일 정도다.

 

하지만 오미주에게 통역은 그런 게 아니다. 첫 사랑이었지만 그리 좋은 감정으로 헤어지지도 않은 감독이라도 그 작품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고, 그래서 그렇게 통역을 한 작품이 끝난 후 모든 관객이 다 나가도 끝까지 자기 이름이 크레딧에 올라오는 걸 보고 일어설 정도로 그는 통역을 사랑한다. 뮤지컬 영화의 통역이 입을 맞추는 게 어려워 개고생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작품 자체가 좋으면 어쩔 수 없이(?) 통역을 맡는 그다. 그에게 통역은 그저 언어를 바꿔 전달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걸 말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것이 진정한 소통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기선겸은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모든 걸 다 가진 남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다. 단거리 육상 국가대표이고 그것도 본래는 창던지기 선수였었지만 달리기로 종목을 바꿔 차근차근 올라와 국가대표의 자리까지 오른 선수다. 아버지는 국회의원이고 어머니는 국민 첫사랑으로 불리는 배우. 게다가 잘 생긴 외모 때문에 모델로도 활동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기선겸 자신은 그런 외부의 시선들과는 달리, 모든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인물이다. 동료들 사이에서는 금수저 취급받지만 아버지는 한 끼 밥을 먹으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으려 하는 기선겸을 '못난 놈'으로 몰아세운다. 어머니 육지우(차화연)는 물론 국민 첫사랑이지만 기선겸에 대한 남다른 애정보다는 자신을 빛나게 해주는 역할 정도로 아들을 생각한다. 쇼윈도 부부가 아니라 쇼윈도 모자 관계랄까.

 

기선겸은 모든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후배 김우식(이정하)이 선배들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을 폭행하고 그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려 한다. 자신의 폭행이 단죄된다면, 후배를 폭행한 그들도 단죄될 거라 믿고 한 행동이지만, 이번에도 아버지가 나서 그 모든 걸 덮어버린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진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소통이 단절된 기선겸은 그래서 달린다. 그의 달리기는 그래서 그가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단절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여기게 된 기선겸은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달리는 것을 포기하고는 자신이 후배를 폭행한 사실을 밝힌다.

 

아마도 기자들은 그 폭행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게다. 그 뒤에 담겨진 다양한 의미들과 저간의 사정들을. 하지만 그 기자들 뒤에 서서 그 이야기를 듣는 오미주는 다르다. 그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오미주는 그가 왜 달리는 걸 포기하고 기자들 앞에서 폭행 사실까지 드러내는지 그 마음을 이해한다.

 

달리기를 하는 기선겸과 통역을 하는 오미주. <런 온>은 이들의 멜로를 그리고 있지만, 그 사랑이야기에는 '소통 단절'에 대한 이야기들을 깔려 있다. 가진 것의 차이로, 생각의 차이로, 또는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아예 이해하려 들지 않아서 사람들은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해주지 못한다. 기선겸의 진심을 통역해주는 오미주라는 인물은 그래서 이러한 소통 단절의 깨고 들어오는 사회적 의미까지 담고 있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그저 남녀가 만나 툭탁대다 사랑을 하는 평이한 멜로 정도로 여겨졌지만, 보면 볼수록 기선겸과 오미주의 관계에서 남다른 설렘이 느껴지는 건, 이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진정한 소통에 이르러 가는 과정이 담겨 있어서다. 그것은 어쩌면 남녀 간의 사랑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의미로까지 확장되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사진:JTBC)

돈보다는 설레는 일, '스타트업' 배수지와 남주혁의 선택

 

샌드박스의 한쪽 벽을 가득 채워놓은 포스트잇에는 저마다의 소망들이 적혀 있다. 누군가는 고층엘리베이터를 타는 삶을 살고 싶다 적고, 누군가는 씹다버린 껌이 되지 않겠다고 적는다. 또 누군가는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몰라도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적어 두기도 한다. 샌드박스의 대표 윤선학(서이숙)은 자신이 멘토를 맡은 원인재(강한나)가 알아서 척척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자신이 할 일이 없다며 한지평(김선호)에게 "근데 왜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는 거 같아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결국 돈이 아니겠냐는 한지평의 말에 윤선학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쵸. 돈도 좋은 이유고 솔직한 이유죠. 근데 이 꼬마는 좀 다를 줄 알았어요. 돈 말고 다른 이유를 찾을까 했는데." 윤석학이 말하는 꼬마는 샌드박스의 기업이념을 담은 로고에 들어간 그네를 타는 꼬마를 지칭한다. 윤석학이 원인재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서달미(배수지)인 그 꼬마. 그의 아버지 서청명(김주헌)이 마음껏 그네를 탈 수 있게 모래를 깔아줬던 꼬마다.

 

tvN 토일드라마 <스타트업>은 이제 샌드박스에 입주하게 된 삼산텍 서달미와 남도산(남주혁)이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초기 투자금으로 받은 1억을 경비 계산해보니 버틸 수 있는 시간은 6개월. 그 안에 무언가 돈이 되는 사업을 펼치지 않으면 삼산텍을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서달미는 원두정(엄효섭) 회장의 모닝그룹에 제안서를 넣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제안서를 들고 찾아간 서달미와 남도산은 모닝그룹이 원한 것이 솔루션이 아니라 일종의 하청이자 알바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혹스러워한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꾹꾹 참아내려던 서달미와 남도산을 분노하게 만든 건, 서달미의 엄마와 재혼한 원두정이 서달미 역시 자신의 딸이 될 수 있었다며 엄마를 선택하지 않고 아빠를 선택해 힘겨웠을 거라는 말이었다. 결국 듣다못해 판을 깬 건 남도산이었다.

 

남도산을 뒤쫓아간 서달미는 자신을 지켜주려 했던 남도산에게 키스를 함으로써 마음을 전하고 사업에 대한 마음 역시 남도산의 아이템을 하자고 고쳐먹는다. 그런데 그 사업 아이템은 다름 아닌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서달미의 할머니 최원덕(김해숙)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사물을 인식해주는 자신의 솔루션에 음성인식 기술을 더하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스타트업>에서 서달미와 남도산이 함께 해가는 창업 이야기와 사랑 이야기는 '설렘'이라는 하나의 귀결을 보여준다. 서달미는 15년 전 남도산(사실은 한지평)과 현재의 남도산 사이에서 여전히 15년전의 남도산 쪽이 더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도산에게 새로운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또 사업에 있어서도 돈이 될 것 같진 않지만 남다른 설렘을 주는 남도산의 사업 아이템을 선택한다.

 

물론 <스타트업>이 보여주는 이런 선택들이 다소 낭만적인 면은 있지만 그래도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창업에 있어서 돈보다는 그 일이 갖는 남다른 의미나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어떤 가치가 부여되어 그것이 주는 설렘이 없다면 돈만 추구하는 원두정의 길을 가게 될 것이었다. 대신 <스타트업>은 사업에 있어서도 사회의 누군가에게 샌드박스가 되어줄 수 있었던 서청명이나 최원덕 그리고 윤석학 대표 같은 이들의 길을 제안하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도 사업에 있어서도 설렘이 있는.(사진:tvN)

‘화양연화’, 청춘은 유지태와 이보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찾았다. 윤지수. 내가 더 일찍 찾았어야 됐는데 너무 늦었다.”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기차역. 막차가 끊겨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해하는 윤지수(이보영)에게 한재현(유지태)은 그렇게 말했다. 윤지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항상 가슴 한 편에 두고 있던 그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너무나 긴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그 시간 동안 너무나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윤지수는 도망치듯 역사를 빠져나오지만, 역시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재현이 다가와 말한다. “기억 나는 거 별로 없는 선배라도 길잡이로는 쓸 만 할 거야.” 소리도 없이 쏟아지는 눈 길 위를 한재현이 앞서 걸아가고 윤지수는 그 시간의 거리만큼 떨어져 그를 따라 걷는다. 발자국을 따라서 잘 쫓아오라는 한재현의 말에 윤지수는 대학시절 앞서 걸어간 재현의 발자국을 밟고 따라 걷던 때를 떠올린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치열한 삶이 자신을 마모시키기 전 풋풋하고 설렜으며 순수했던 시절.

 

tvN 토일드라마 <화양연화>가 보여주는 이 눈 내리는 날 재회한 윤지수와 한재현의 만남은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를 시적이고 은유적인 장면으로 보여준다. 대학 시절 눈처럼 벚꽃이 날리던 봄날 윤지수를 찾아냈던 한재현과 달리, 그들은 쏟아지는 눈 속에서 차도 끊겨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는 길 위에서 재회한다. 과거의 만남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던 밝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면, 현재의 만남은 막막한 길 위에서 어디도 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순간이다.

 

그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윤지수와 한재현은 모두 감옥에 갔다 왔다. 하지만 그들이 감옥에 간 이유는 너무나 다르다. 윤지수는 유족들을 모욕한 이들에게 어떤 소신있는 행동을 보인 일로 감옥에 갔고, 한재현은 그의 장인이자 회장인 장산(문성근) 대신 감옥에 갔다 왔다. 윤지수는 노동자들의 편에서 여전히 길거리 투쟁을 하고 있지만, 한재현은 장산의 지시대로 사측이 되어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등 손에 피를 대신 묻히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현실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겪는 심경의 고통은 비슷해 보인다. 두 사람은 모두 결혼해 또래 아이를 둔 부모지만, 윤지수는 이혼해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고, 한재현은 마치 자신을 사냥개처럼 부리려는 장인과 그런 위세 그대로 마음대로 하려는 아내 장서경(박시연)과 불화를 겪고 있다. 윤지수가 현실에 치여 힘겨워하는 반면, 한재현은 자신의 부유한 삶에 별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삶이 꽃이 되는 순간’. 즉 ‘화양연화’는 이미 지나간 청춘의 시절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화양연화>는 힘겨운 현재와 꽃처럼 피어났던 청춘 시절을 교차 편집해 보여준다. 책방에서 그리워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그러다 만나기만 해도 행복했던 그 시절. 그런 시절은 너무나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꽤 오래도록 우리네 삶에는 차디 찬 눈들이 쌓였고 그래서 그 때의 이야기들을 덮어버렸다.

 

윤지수와 한재현은 이제 다시 만나 그 눈 위를 걸어간다. 그 장면은 아마도 시청자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화양연화를 추억하게 했을 게다. 너무나 멀리 와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으로만 남겨 뒀던 저마다의 화양연화를. <화양연화>는 바로 이 지점에 슬며시 발자국을 찍어 놓는다. “발자국 따라서 잘 쫓아와.” 한재현이 던지는 그 말이 윤지수의 가슴에 발자국을 찍어 놓은 것처럼.

 

과연 이들의 청춘은 그들이 현재 처한 현실을 구원해낼 수 있을까. <화양연화>는 이제 좀 먼 길을 걸어와 다시는 그 때로 갈 수 없다 절망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그 때의 기억들이 현실의 구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를 묻는 드라마다. 과연 윤지수는 한재현을 통해 현재의 그 불면의 삶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한재현은 윤지수를 통해 현재의 그 사냥개의 삶을 벗어날 수 있을까. 두 사람이 현재에 복원해내는 청춘의 화양연화는 어쩌면 이들을 구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보는 정통 멜로의 설렘이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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