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한 작가 왜 해명조차 논란거리가 될까

 

주인공의 전 남편이 사망 후 개로 환생하고, 돌연사한 주인공의 애완견이 주인공의 아이로 환생한다?’ ‘주인공이 죽는다.’, ‘마지막 회에서 돌연사한 인물들이 다 부활한다.’ <오로라공주>의 종영에 즈음해 쏟아져 나오는 황당한 결말 추측들이다. 다른 드라마라면 코웃음을 쳤을 황당 추측이겠지만 이 드라마라면 실제로 일어날 법한 결말들이다. 그간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들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오로라공주(사진출처:MBC)'

무려 12명의 배우가 죽거나 해외 이주 등으로 하차했고, 죽는 장면에서 뜬금없는 유체이탈 설정까지 나왔다. “암세포도 생명이라는 황당한 대사는, 108배를 했더니 동성애자가 이성애를 느낀다는 개념 없는 대목에 비하면 양반이다. 심지어 하반신 마비가 된 강원래를 연상시키는 장면에서는 장애인까지 비하한다는 논란까지 생겼다. 일일드라마라서 그런지 논란은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방송이라는 공공재가 공해에 가까운 콘텐츠를 대중들이 싫어해도 끊임없이 매일 내보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비판받을 일이다.

 

실로 시청률이면 모든 게 정당화된다 생각하는 걸까. 임성한 작가가 이른바 사과문이라고 내놓은 글을 읽어보면 사과의 내용은 별로 없고 심지어 실패를 면한’ <오로라공주>의 성공을 자축하는 뉘앙스가 더 많다. 무엇이 실패를 면했다는 것인가. 논란으로 싸움 구경 온 시청자들을 통해 얻어낸 시청률이면 모든 게 성공이라는 얘기인가. 본인은 실패를 면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거기에 공감할 수 있는 대중들이 몇이나 될까.

 

해명 글 속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배우들에 대한 상찬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유도 모른 채 끊임없이 하차하게 된 배우들을 염두에 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상찬 속에는 이들의 하차가 자신의 개인적인 의도와는 상관없는 작품 내적인 흐름에 의한 선택이라는 뉘앙스가 들어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신뢰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실제로 하차한 배우들은 자신이 왜 갑자기 하차했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끊임없는 하차와 죽음에 대해 논란이 벌어지자 나중에는 아예 시청자 게시판을 통해 제작진이 하차하는 인물을 예고하는 해프닝은 이 드라마가 가진 막장적 속성을 드러내준다. 즉 드라마는 그 내적 흐름을 통해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주인공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작품의 흐름을 통해 그 과정을 납득시켜야 하고, 누군가 죽는다면 그 이유도 개연성을 통해 설명해줘야 한다. 하지만 이 개연성이 망가져 있기 때문에 <오로라공주>는 작품 바깥에서 이걸 일일이 고지하는 황당한 해프닝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결국 작가는 작품을 통해 모든 걸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로라공주>는 그 속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그 인물들조차 납득시키고 공감시키지 못했다. 지금껏 논란이 나와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임성한 작가가 굳이 이런 일종의 해명 글을 공개적으로 올린 것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스스로 자평하고 해명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작품이 얼마나 완성도가 없었던가를 자인하는 일이다.

 

임성한 작가는 해명 글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연출부 의견도 듣고, 심의실 의견도 수용하고 특히 예민할 수 있는 사안에선 기획자인 김사현 본부장의 조언을 들어가며 최대한 단점을 줄이려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놓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얘기는 <오로라공주>에 대해 논란이 나올 때마다 방송사 측이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만이 안다고 발뺌을 했던 부분하고는 상반된 이야기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그것이 누구든 양자 모두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게다. 심지어 작가 퇴출 서명운동까지 벌어졌던 상황이 아닌가.

 

막장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는 과정이 보여준 해악을 마지막 한 회분의 결말이나 심지어 해명으로 모두 덮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렇게 마지막의 제스처 하나로 모든 걸 무마하게 되면 막장드라마는 또 다른 이름으로 창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시는 사과가 필요하지 않는 작품을 내는 게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보라. 임성한 작가에 대한 그동안의 무수한 질타들이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점이 있는지.

 

그래서 해명 글 마지막에 달린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신 네티즌 여러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나 기자 여러분도 수고 많으셨다는 인사, 게다가 실수가 있으면 또 짚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는 말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진정 네티즌들의 지적과 기자 여러분의 수고를 생각한다면 누군가 짚기 전에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게 옳다. 그것이 진정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밀>, 집착을 버릴 때 더 커지는 것

 

가지려는 것보다 놓아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이다. <비밀>의 엔딩은 그 사랑의 진정한 비밀을 알려주면서 마무리 되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강유정(황정음)은 행복을 위해 아들을 놓아주었고, 그토록 조민혁(지성)을 갖기 위해 심지어 자신을 망가뜨리기까지 한 신세연(이다희)은 그를 놓아주었다. 조민혁은 사장직을 버렸고 안도훈(배수빈)도 신세연과 성공에 대한 비뚤어진 욕망을 내려놓고 자신의 과오를 모두 인정했다.

 

'비밀(사진출처:KBS)'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민혁에 대한 신세연의 집착이 그렇고, 안도훈의 성공에 대한 집착이 그러했으며, 박계옥(양희경)의 아들에 대한 집착 또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결국 강유정이라는 캐릭터는 이 집착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은 인물이면서, 동시에 이 집착의 고리들을 끊어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조민혁에게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했고, 안도훈에게 정의를 알게 했으며, 박계옥에게는 진정한 모성애를 보여주었다.

 

“세상에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다만 어떻게 갚으며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는 이 드라마가 갖고 있는 주제의식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준다. 누구나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거기에 대해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것. 강유정이 왜 그토록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는가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죄 없는, 아니 그 죄를 비밀로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 비밀을 드러내고 용서를 구했을 때만이 구원이 있다는 것.

 

드라마는 강유정이 법정에 선 장면으로 시작해서 안도훈이 법정에 서는 장면으로 끝난다. 억울한 강유정이 차츰 현실을 깨달아가고 그래서 결국에는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을 구조적으로도 염두에 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애초에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시작했다는 얘기다. 첫 회에 벌어진 사건에 깔린 숨겨진 이야기들이 마지막 회에 드러날 수 있는 건 이 완결된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비밀>은 드라마가 참신해질 수 있는 비밀을 알려준 드라마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통속극에 가까운 평범한 멜로와 복수극이 될 수도 있었던 소재였지만, 그 안에 시청자가 궁금해 할 수 있는 비밀 코드를 담아냄으로써 이야기를 팽팽하게 만들었고, 그 비밀 속에 사회와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집어넣음으로써 이야기가 통속 치정극으로 흘러가게 하지 않았다. 결국 참신한 드라마란 전혀 새로운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치밀하게 다루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야기로 변주하느냐가 관건이라는 걸 <비밀>은 보여주었다.

 

또한 <비밀>은 드라마의 성패가 단순히 작가의 시청률로 만들어진 지명도나 원고료 액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시청률에 올인하면서 자기복제나 심지어 막장도 서슴지 않는 중견작가들의 세상 속에서, 신인작가의 과감한 발굴이 얼마나 드라마를 참신하게 만들어주는가를 <비밀>의 작가들을 통쾌하게도 알려주었다. 이로써 입증된 단막극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비밀>은 그래서 주제의식이 그러하듯이 가지려 애쓰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도를 가져갈 수 있었다. 이 드라마는 시청률만을 가지려 하지도 않았고, 그 시청률만을 위해 이름 있는 작가들을 가지려 하지도 않았으며, 연기가 아닌 스타성만을 앞세운 연기자를 세우려 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비밀>이 가지려 했던 것은 작품의 완결성이고 그걸 통해 추구하는 대중들과의 공감대였다. 그것은 결국 <비밀>이 시청률에서도, 무명작가의 이름을 알리는 데도, 또 그동안 평가절하 되었던 연기자를 재발견하는데도 성공한 이유가 되었다.

 

이제 <비밀>은 종영했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가 우리네 드라마들에게 던진 질문은 끝난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스타작가와 스타배우에 힘입어 그저 시청률만 나오면 다라는 식의 드라마 제작 패턴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시청률을 위해서 자극적인 코드를 계속 복제해 사용하는 퇴행적인 드라마를 반복할 것인가. 몇몇 스타작가와 스타배우들에게 과도하게 집착함으로써 생겨나는 드라마 제작의 양극화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비밀>은 이 많은 질문들에 이미 스스로 답을 보여주었다. 집착이 오히려 비뚤어진 결과만을 가져오듯 놓아야 산다. 이 반복되는 드라마 패턴에 대한 집착을.

<야왕>, 수애는 왜 그저 악녀로 전락했을까

 

<야왕>의 주다해(수애)는 왜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이나 <하얀거탑>의 장준혁이 되지 못했을까. 이들 캐릭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떻게든 성공하려는 강력한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 욕망은 비뚤어진 것이어서 이들은 모두 악역을 자처하지만 그렇다고 그 악역이 모두 비난받는 건 아니다. 미실은 악역이면서도 자신만의 현실적인 통치 철학을 보여줌으로써, 또 장준혁은 잘못된 선택을 하지만 그 역시 사회라는 경쟁 시스템 속에서의 희생자라는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그 죽음에 이르러 시청자들을 고개 끄덕이게 한 인물들이다.

 

'야왕'(사진출처:SBS)

하지만 <야왕>의 주다해는 다르다. 그녀에게는 일말의 동정적인 시선이 사라져버린 전형적인 악녀에 머물러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다. 첫 등장에서 죽은 어머니 사체 옆에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던 모습은 이 가정폭력과 가난에 시달리는 여인이 앞으로 달려갈 욕망의 질주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 후 주다해의 모습은 줄곧 시청자들의 이해를 받기보다는 안쓰러울 정도로 성공에 집착하는 악녀로 일관되었다.

 

의붓아버지를 죽이고는 하류(권상우)를 공범으로 만들어버리고, 그렇게 그녀에게 헌신하는 사실상의 남편이었던 그를 배신하고 심지어 감방에 들어가게 한데다 딸까지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재벌그룹 아들 백도훈(정윤호)의 약점(사실은 그가 누나 백도경(김성령)의 딸이라는 사실)을 이용해 그와 결혼하고, 하류(대신 쌍둥이형인 차재웅이 죽게 되지만)의 살인을 사주한다. 이것도 모자라 백도훈마저 사경을 헤매게 만드는 전형적인 악녀, 그녀가 바로 주다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스토리에 세계관이나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이 악녀가 되어가는 과정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바라보지 않고 그저 개인적인 차원으로 되돌리는 간편한 선택을 하기 때문에 주다해는 아무런 이해도 받지 못하는 인물로 전락했다. 결국 이것은 사회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잘못은 주다해가 나쁘기 때문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어린아이 같은 순진하고도 단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남녀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 때문이다. 즉 <야왕>이라는 작품에는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시각이 들어가 있다. 물론 선악구도로 나누어 놓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여성의 성공에 대한 욕망을 그 자체로 무언가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시각이 존재한다. 남성은 당연히 성공을 꿈꾸어야 하지만 여성은 그러면 안 되는 듯한 관점. 이것은 주다해의 성공 욕구에 대한 근거를 제대로 제시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편한 시선이다.

 

이렇게 주다해라는 악녀가 시스템이 탄생시킨 괴물이 아니라 그 나쁜 심성 때문에 생긴 인물이 됨으로써 <야왕>은 그저 온전한 복수의 게임으로 전락된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때로는 마치 성공하기 위해 발악하는 여성과 그것이 무조건 잘못 됐다는 성차별적인 전제 하에 그녀를 막으려는 남성의 대결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만일 주다해를 좀 더 이해될 수 있는 악녀로 그렸다면 이 드라마는 훨씬 풍부한 관점을 가지면서 논쟁적인 이야기를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

 

그나마 주다해를 수애라는 어딘지 도도하고 믿음이 가며 그 자체로 동정심마저 유발하는 배우가 연기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일 수애가 아닌 다른 연기자가 주다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생각해보라. 어쩌면 <야왕>은 그저 극악스럽기만 한 막장으로 굴러 떨어졌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미 엉성한 얼개의 스토리는 막장에 가깝지만 그래도 연기자들이 그것을 연기로서 커버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연기자들이 갖고 있는 힘은 세계관이 부재한 허술한 <야왕>의 대본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보게 만드는 힘이다. 권상우의 연기가 그렇고 김성령의 연기가 그렇다. 물론 정윤호는 연기력 부족에다가 그저 바보가 되어버린 백도훈이라는 캐릭터의 한계 때문에 최악의 상황이긴 하지만.

 

<야왕>은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는 게임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시각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회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발견하지 않고 그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태도가 그렇고,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여성 차별적 시선도 그렇다. <야왕>의 이 문제를 집약적으로 갖고 있는 인물이 바로 주다해다. 그 어떤 사회의 문제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온전히 태생적인 악녀가 되어버린 인물. 볼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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