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에 더 갈급한 세상, '뿌리'의 선택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지랄하고 자빠졌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지랄'이라는 대사는 극 전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화두다. 어린 세종 이도(송중기)가 죽은 아버지 앞에 오열하며 "지랄하지 말라고 그래!"하고 소리칠 때, 그 '지랄'은 이도의 뒤통수를 때렸다. 복잡한 말 장난 같은 이념과 철학의 대결구도 속에서 고뇌하고 힘들어할 때, 이 어린 백성의 한 마디 '지랄'은 오히려 이도에게 속 시원함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뭐가 그리 복잡한가. 저리 힘들어하는 백성이 있는데.

'지랄'. '마구 어수선하게 떠들거나 함부로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뜻한다. 하지만 이 사극의 대사 속에서 사용되는 '지랄'은 이런 사전적 의미보다는 그럴 듯한 논리가 아닌 직관적으로 사태를 사정없이 드러내는 장치다. '지랄' 앞에 논리란 필요 없다. 그저 그런 속된 말이 나오는 현실만이 던져질 뿐이다. 논리가 가진 자들의 무기라면, 욕은 없는 자들의 무기다.

성장한 세종(한석규)이 등장해 처음 던지는 대사가 '지랄'에서 시작되어 진화된(?) '염병', '우라질'이라는 사실은 이 캐릭터에 대해 많은 걸 얘기해준다. 탁상공론처럼 양반행세하며 입바른 소리하는 권력자들과 집현전에서 토론하는 장면에서 세종은 하나하나 논리로서 대응하지만, 그런 그의 입매에는 묘한 조소가 달려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꼈던 그 한 백성의 소회를 입바른 소리하는 신하들에게서 똑같이 느끼기 때문일 게다. 세종은 '지랄'을 통해 처음 백성과 소통했고, 그것을 잊지 않음으로써 백성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위한 글자 창제에 투신하게 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지금껏 세종을 다룬 사극들이 한글의 창제 과정과 그 위대함에 대해 상찬하던 것과는 달리, 창제된 한글을 배포하고 유포하는 과정에 더 방점을 찍었다. 이미 백성들과 소통할 글자를 만들었는데 그 소통체계를 반대하는 무리들과의 한 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밀본의 본원 정기준(윤제문)은 세종과의 독대를 통해 그가 하려 했던 한글 반포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그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종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 한글 하나 던져주고 알아서 살라는 것은 임금으로서의 직무유기라는 것. 이 뱀의 혀를 가진 정기준의 말은 세종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자신 때문에 죽어나가는 백성이 더 이상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래서 '백성을 위한다는 것'이 오로지 임금의 고단함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었던 세종에게 정기준은 그것이 '백성이 아닌 너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요사스런 말의 논리를 깨부수는 건 역시 '지랄'이었다. 그 말에 내상을 입은 세종이 고뇌하고 있을 때, 처음 '지랄'을 알려준 채윤(장혁)이 또다시 일갈한다. "지랄을 하고 계십니다." '백성을 사랑한 적이 없고 대신 미워했다'는 정기준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채윤은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글을 알게 됨으로써 백성들의 욕망이 생겨나고 그 욕망으로 인해 지옥이 생길 거라고 비관한 정기준의 논리에 채윤은 "소이가 꿈이 생겼다"는 말로 반박한다. 사상과 이념의 논리 앞에 채윤이 던지는 '지랄'은 이처럼 백성들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세종에게 전해준다. 한글 반포와 유포를 막는 자들 앞에 목숨을 던져 넣으면서 죽어가는 세종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멈추지 마십시오." 무엇을? 소통에 대한 노력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창제보다는 반포와 유포 과정에 천착하고, 그 유포 과정에서 현대적 의미를 떠올릴 수 있는 SNS나 '사랑의 편지' 같은 방법들이 제시되는 것은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소통에 대한 갈급을 말해주는 것이다. 백성들의 언어, '지랄'을 화두로 시작된 '뿌리 깊은 나무'는 그래서 왕과 백성 간의 한글을 매개로 하는 소통을 그려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 '지랄'로 표현되는 직설적이지만 정직한 대중들의 정서와 그 소통이 아닌가. '지랄'이라는 속된 말이 이토록 가슴을 울렸던 것은 그 속에 담겨진 절절한 소통의 욕구가 드라마에 묻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뿌리’, 세종은 현재와 어떻게 소통했나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한글’과 ‘세종’의 이야기를 다룬다. 교과서 속에서 시험문제에나 나올 박제화된 세종의 한글창제에 관한 일화들이 21세기인 현재의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실제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세종과 한글창제가 갖는 의미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 몇 백년의 간극을 이어주는 한 단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통’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첫 도입에서 글자를 몰라 죽게 되는 한 선량한 백성의 이야기에서 화두를 던지고, 그 일을 계기로 달라지는 세 인물을 끄집어낸다. 강채윤(장혁)과 소이(신세경)와 세종(한석규)이다. 강채윤은 그 글자를 몰라 죽은 백성의 아들로서 세종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소이는 그 죽음에 관여된 인물로서 한글 창제에 투신하게 되며, 세종은 그 두 백성(으로 표상되는 채윤과 소이)의 고통을 바라본 인물로서 역시 한글 창제를 하게 된다.

먼 길을 돌아온 강채윤이 세종의 진심을 알게 되고, 옆에서 임금이란 자리에서 겪는 고독과 또 한글 창제에 깃든 세종의 진심을 소이가 읽어내는 그 과정이 모두 소통이다. 즉 채윤과 소이가 백성을 표상하는 인물이라면 이것은 왕과 백성이 갈망하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한글은 그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재상정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상은 자신들의 기득권(글자를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는)을 지키려는 밀본이란 세력이다. 정기준(윤제문)은 한글이 가진 그 ‘역병’ 같은 힘을 직감하고 겁을 먹는다. 그것은 소통의 체계가 왕과 백성 사이에 놓여진 자신들 같은 신하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세상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이제 백성들끼리 소통할 수 있고, 또 백성과 왕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니 이 ‘역병 같은 글자’의 파급력에 정기준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즉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의 대결은 마치 소통과 불통의 대결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가 처해있는 환경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SNS 같은 새로운 소통체계는 기성 소통체계를 장악하고 있는 권력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이 대결구도를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것처럼 세종과 정기준의 논리 대결로 풀어낸다.

정기준은 한글을 백성에게 주는 것이 일종의 왕이 해야 될 책임의 방기라고 몰아 부친다. 즉 한글 하나 주고 이제는 백성들끼리 모든 걸 책임지며 살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백성의 저마다의 욕망은 앞으로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 위협한다. 하지만 세종은 그것이 왜 지옥이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소통에 대한 책임에 관한 담론이다. 소통체계에는 책임 또한 따른다는 것. 우리가 흔히 인터넷 소통체계의 명과 암을 말할 때 늘 나오는 그 담론들을 몇 백 년 전 세종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된다는 건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건 이 ‘역병 같은 글자’의 유포 과정이다. 물론 국가가 기관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파시키는 ‘반포’를 세종이 준비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소이가 직접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입에서 입으로 전파시키는 유포가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소이는 백성들에게 친숙한 부적을 통해, 또 아이들의 노래를 통해 한글을 전파시킨다. 이것은 확실히 지금 현재 SNS시대가 갖고 온 새로운 소통체계에 대한 알레고리다.

어렸을 적 한 번쯤은 읽어봤을 위인전 속의 세종 이야기가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건 바로 이 사극을 통해 과거가 아닌 현재가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세종과 소이, 강채윤이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한글 전파를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그 모습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보여주는 소통에 대한 염원을 현대인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뿌리 깊은 나무’는 그렇게 세종의 한글창제와 반포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넘어 조선조의 백성과 현재의 대중들을 소통시키고 있다.

와이파이 시대, 우리는 진정 소통하고 있나

휴대폰, 인터넷, 와이파이...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누구든 얘기하고픈 사람에게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얘기를 건넬 수 있는 세상이다. 심지어 화상으로 뜬 얼굴을 마주보면서. 하지만 미디어가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촘촘하게 이어주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과연 잘 소통하고 있을까. ‘무한도전’ 텔레파시 특집은 무한연결되어 있는 와이파이 시대에 물음표를 하나 던진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무한도전’ 텔레파시 특집은 지금껏 단체로 미션을 수행해온 것과는 달리, 각각 사방 팔방으로 떼어놓고 미션을 시작한다. 김태호 PD는 1시간 내에 각자 지정된 방향으로 가장 멀리 간 사람을 포상할 것처럼 해 멤버들을 떼어놓은 후, 그들이 ‘무한도전’을 그동안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로 모일 것을 진짜 미션으로 내놓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실제 ‘무한도전’의 많은 미션에서 도구로도 활용되었던 휴대폰을 모두 반납시켰다는 점이다.

‘텔레파시’라는 아이템에는 ‘무한도전’이 교육실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붙여진 과장이 있다. 각자 공간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장소로 오라고 다른 멤버들에게 마치 진짜 텔레파시를 보내듯 과장하는 모습은 예능으로서의 웃음을 주기 위한 과장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간 ‘무한도전’이 해왔던 미션들에 대한 추억과 향수또한 담겨져 있다. 그 아련한 기억을 좇고 그 기억 속을 함께 했던 멤버들에 대한 소중함을 담아내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었다면 ‘무한도전’ 텔레파시 특집은 프로그램 전체를 감싸는 아련한 느낌까지 연출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텔레파시’라는 과장 이면에 담겨진 ‘소통’이라는 메시지는, ‘소통’되지 않는 현대인의 외로움을 담아내면서 의미를 확장시킨다. 여기에 ‘무한도전’ 텔레파시 특집이 보여준 역설이 있다. 휴대폰 같은 보다 손쉬운 통신기기를 단절시켜놓자 더 절절해지는 진짜 소통의 욕구.

만일 각자 떼어놓고 휴대폰을 지참하게 한 채로 만나고 싶은 곳에서 만나라고 했다면 이들은 상대방에 대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저 전화 통화하고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한 뒤 만나면 끝났을 테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과 마음이 전하는 소통은 찾기가 어려워진다.

멤버들이 허공을 향해 과장된 몸짓으로 텔레파시를 보내는 그 모습이 처음에는 우습다가 차츰 어떤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똑같이 생각한 장소에서 간절히 원했던 멤버가 서로 만났을 때 어떤 작은 울림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프로그램 중간에 자막으로 등장한 왓비컴즈를 비판한 패러디 노진요(노홍철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는 그래서 그 의미가 더 깊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속도나 전달력은 엄청나게 빨라지고 손쉬워졌지만 그것이 거기에 맞는 소통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는 ‘무한도전’ 특유의 풍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둘레길을 걸으며 '1박2일'은 무엇을 얻었을까

장수하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에는 높은 인기만큼 위기설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주말 버라이어티의 최강자로 군림해왔던 '1박2일'도 예외는 아니다. 본래 취지는 사라지고 복불복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이 조금씩 고개를 들면서 위기설은 솔솔 피어났다. 프로그램에 어떤 멋과 다큐적인 베이스를 깔아줬던 김C의 하차와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투입된 김종민의 부진, 이수근의 빵빵 터지는 상황극에 대한 지나친 몰입이 가져오는 '1박2일' 특유의 자연스러운 웃음의 실종, 제기된 병역기피 혐의로 잔뜩 위축된 MC몽... 이즈음에 터진 이수근이 차 밑으로 들어가 라면을 먹는 장면이 제기한 안전불감증 논란 같은 것들은 '1박2일'의 위기를 실제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이 그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1박2일'이 꺼내든 방식은 문제를 덮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 드러내는 것이었다. 모든 걸 인정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지리산 둘레길을 가다' 편에서 강호동은 오프닝에서 이례적으로 '1박2일'의 이 위기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승기는 모든 영혼이 드라마에 가있고, 은지원은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으며, MC몽은 차마 방송에서 얘기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고, 김종민은 묵언수행중이라는 이야기. 그러니 말을 할 때마다 빵빵 터뜨려야 한다는 이수근 역시 위기상황일 수밖에 없다는 것.

'1박2일'의 자기반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해외연수 프로그램으로 영국에 간 이명한 PD를 대신해 들어온 이동희 PD는 그 첫 마디에서 "많이 고여 있고 젖어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그리고 "많은 개혁'이 있을 거라고 예고했다. 지금껏 제기된 수많은 위기설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이 같은 자세는 '1박2일'이 그토록 많은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다. '1박2일'은 지금껏 그것이 설사 오해에서 비롯된 억울한 논란이라고 하더라도 부정한다거나 외면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시청자들의 관심의 하나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왔던 것. 이 소통의 노력은 '1박2일'이 가진 가장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1박2일'이 '지리산 둘레길' 특집을 통해 보여준 것은 본래 '1박2일'이 가졌던 초심의 복원이다. 다섯 개의 코스로 나뉘어 그 아름다운 풍광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이른바 '다큐' 형식의 차용은 '1박2일' 본연의 여행 버라이어티를 다시 살려냈다. '1박2일'이 처한 가장 큰 위기는 바로 본래 취지인 '여행'에 집중하지 못하고 부수적인 자극들, 예를 들면 복불복 같은 게임에 자꾸 몰입하는 것이었다. 초창기 '1박2일'이 보여준 여행은 대중들에게는 하나의 판타지처럼 다가왔다. '저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하룻밤의 여행을 훌쩍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감성이 거기에는 담겨져 있었다.

물론 복불복 같은 게임은 프로그램의 감초로서 없으면 안되는 자극이지만, 거기에 몰입하다보면 더 큰 것을 잃게 되기 십상이다. 둘레길을 걸으며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는 그 체험의 신산함, 헬기에서 찍어 보여주는 스펙터클한 영상에서부터, 스틸 사진으로 잡혀지는 순간의 아름다운 풍광, 게다가 오랜만에 듣게된 김C의 정감어린 내레이션까지. 각각 나뉘어진 컨셉트는 복불복을 지우고 대신 각자 지금껏 '1박2일'을 해왔던 자신들을 회고하고 반추하는 시간을 줌으로써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는 계기가 되게 해주었다.

이것은 제기된 문제들을 소통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1박2일' 특유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주는 위기감은 분명하지만, '1박2일'을 진짜 위기에 몰아넣는 것은 본래 취지인 '여행'이라는 아이템을 잃는 것이라고 볼 때, 그 해법은 너무나 간단하지만 역시 '여행'을 복원시키는 것일 것이다. '1박2일'을 보면서 다시 그 여행이 주는 설렘과 기대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위기는 더 이상 위기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 '1박2일'은 다시 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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