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이>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 소통의 문제

 

<내 딸 서영이>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악역이 없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흔하디흔한 막장드라마의 악마 같은 캐릭터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캐릭터가 될 뻔한 인물들은 있다. 서영이(이보영)의 아버지인 이삼재(천호진)는 집안에 민폐만 끼치며 서영이의 앞길까지 막았던 인물이다. 물론 그런 이삼재는 달라진다. 서영이가 자신까지 부정하고 결혼을 한 것을 그는 진심으로 이해한다. 멀리서 딸의 행복만을 바라는 진짜 아버지의 마음이 되는 것.

 

'내딸 서영이'(사진출처:KBS)

서영이도 초반 악역 캐릭터가 될 뻔한 인물이다.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찌 됐든 패륜에 해당하는 일이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 가족을 부정했다는 행위는 이기적인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결혼한 서영이 사실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은 그녀를 악역 캐릭터에서 구원한다. 그녀는 자신이 부정했던 그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늘 가슴 아파한다. 또 그 아버지를 부양하며 살아가는 동생 상우(박해진)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한다.

 

반면 처음에는 천사표였다가 점점 악역이 되어가는 인물이 있어 주목을 끈다. 바로 서영이의 남편 강우재(이상윤)다. 가족이 없다고 속이고 결혼한 서영이(이보영)의 과거를 알게 된 후, 천사표였던 그는 돌변한다. 그 이유는 분명 이해가 간다. 그것은 속이고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사실을 털어놓고 서영이를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실의 언저리에서 빈정대기만 하고 있는 강우재는 너무 답답한 캐릭터가 되어간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흐름상 강우재가 악역으로 고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역시 어느 순간에는 서영이가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듣게 될 것이고, 또 진심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강우재의 답답함은 그 진심을 알게 되는 상황의 극적 효과를 위해서도 필요한 부분일 수 있다. 또 이런 강우재의 처신은 서영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비슷한 상황을 너무 질질 끄는 건 시청자들을 짜증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 딸 서영이>가 그리고 싶은 것은 ‘소통’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딸이 소통하지 못하고, 남매가 소통하지 못하고, 남편과 아내가 소통하지 못하는 이 일련의 불통의 과정들은 이 드라마가 악역 없이도 극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힘이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진실이 있지만, 진실이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해주는 건 아니다. 진실과 진심. 과연 진심은 진실을 이겨낼 수 있을까. 소통은 가능할 것인가.

 

진심과 소통에 대한 주제의식을 잘 드러내는 캐릭터는 최호정(최윤영)이다. 그녀는 상우를 사랑하면서도(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강미경(박정아)과 상우의 사랑이 이뤄지게 하기 위해 도와주기도 한다. 그것이 상우의 행복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우와 최호정이 결혼까지 하게 되는 상황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만, 최호정이란 캐릭터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그 마음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통이라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바라보면 <내 딸 서영이>의 이야기가 새삼 의미심장해진다. 이 드라마에는 가족에 대한 진보적인 입장과 보수적인 입장이 모두 들어가 있다. 즉 서영이가 취한 진보적인 입장은 가족이 개인에게 늘 행복을 주는 것만은 아니며 때로는 개인의 앞길을 막는 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반면 아버지가 취한 보수적인 입장은 심지어 자식이 자신을 부정하고 결혼을 했다고 해도 가족이라는 천륜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 두 입장 중 어느 것을 선택해서 보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리 읽힐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 딸 서영이>가 논쟁적이라는 얘기이면서, 동시에 양자의 입장에 대한 균형 감각이 뛰어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세대적인 생각의 차이일 수도 있는 이 두 관점을 한 드라마 속에 넣어서 양자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주고 있는 <내 딸 서영이>는 그래서 요즘처럼 세대 갈등이 첨예해진 시대에 그 의미가 남다른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강우재가 그토록 답답하게 변죽만 올리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왜 소통하지 않을까”하고 질문할 것이다. 그는 다만 진실 그 자체가 두려워 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시청자들의 마음처럼 결국 강우재는 서영이와 아버지 양자의 진심에 도달하지 않을까. 너무 오랫동안 답답한 상황을 반복하면서 본래 취지가 흐려지지 않도록 어서 <내 딸 서영이>의 진심이 강우재, 아니 시청자의 마음에도 닿기를 기대한다. 때론 넘을 수 없는 진실을 이겨내는 건 그 속에 담겨진 진심일 때가 있다. 소통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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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의 소통방식, 거창할 것 없이, 즐기듯

 

NBC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의 한 장면. 한 모자가게 직원들이 누군 승진하고 누군 못했다는 얘길 하며 풀이 죽어 있을 때 그걸 한 방에 날려 보낼 방법이 있다며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뒤에서 싸이와 똑같은 분장을 한 남자가 나와 어색한 한국말로 "오빤 강남스타일"을 외치며 말춤을 춘다.

 

'강남스타일'(사진출처:YG엔터테인먼트)

어딘지 루저들 같은 찌질함이 느껴지는 그들의 상황과 하소연이 반복되고 그 때마다 기분을 업(up)시켜주는 <강남스타일>을 듣기 위해 그들은 연실 버튼을 누른다. 유재석과 노홍철과 똑같은 분장을 한 남자들의 춤(뮤직비디오에서 봤던)이 덧붙여지면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그러다 터보 버튼을 누르자 진짜 싸이가 유유히 걸어 나온다.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소리 속에서 그는 “오빤 강남스타일”을 외친 후 말춤을 춘다.

 

이것은 그들의 표현대로 ‘한국의 랩 센세이션’, 싸이가 미국인들에게 비춰지는 이미지다. 뭔가 다운된 분위기를 업시켜주는 즐거운 음악과 춤이 거기에 있다. 콩트 속에서 한 직원은 이 노래와 춤을 이렇게 표현했다.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멋진 것 같아." 이것은 미국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토크쇼 중 하나인 NBC '더 엘런 드제너러스 쇼'에서 그가 보여준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하다. 객석까지 뛰어든 싸이는 모든 관객들과 함께 신나게 말춤을 추었다. 스튜디오는 말 그대로 들썩들썩 했다.

 

싸이의 성공을 분석하는 수많은 글들이 있지만(물론 그 글들도 대부분 일리가 있지만) 진짜 성공요인은 그 솔직하고 명쾌한 즐거움에 있다. 굳이 거창하게 ‘한류’ 운운하거나, 국가 경쟁력, 경제적 효과 같은 걸로 포장될 수 없는, 있는 그대로를 툭 털어놓고 열정을 다하는 그 쿨한 즐거움, 그리고 한바탕 놀자는 솔직함에 미국인들까지 열광하고 있는 것.

 

이런 점은 기획되고 연출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전부터 싸이를 통해 익히 봐왔던 것들이다. 싸이는 노래 ‘챔피언’을 통해 이미 ‘진정 즐길 줄 아는 여러분이 이 나라의 챔피언’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싸이가 자신의 개성을 <강남스타일>이라는 전 세계 보편적인 리듬에 실어 최대치로 끄집어냈기 때문에 그의 지금의 성공이 있는 것이다.

 

싸이에 열광하게 되는 것은 그 특유의 ‘흥’에 있다. 젠 체하지 않고 기꺼이 온 몸을 던져 보는 이를 열광케 만드는 우리네 광대들이 보여줬던 그 서민적이면서도 어깨춤이 절로 나게 만드는 ‘흥’.

 

싸이는 주저리주저리 자신을 소개하거나 멋지게 포장하기보다는 대중들에게 ‘놀자’고 손을 내민다. 미국의 유명한 쇼에 나와서도 그가 줄곧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거다. 그가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말춤을 가르치면서 했던 말, '옷은 고급스럽게, 춤은 싸구려처럼(Dress Classy, Dance Cheesy)!'이란 말은 그래서 싸이의 소통 방식을 핵심적으로 보여준다. 잘 차려입고 싶은 욕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고 싶은 욕구. 싸이 자신이면서 어쩌면 국가나 인종을 넘어서 누구나 갖고 있을 감성.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한류 한류 하며 무언가 포장하려 하고 거창하게 우리 입으로 떠들어댈 때 진정한 문화적 소통은 어쩌면 더 멀어진다. 소통을 상품분석의 마케팅처럼 생각할 때 그것은 진솔함과 소박함(혹은 진정성) 같은 인간적인 매력을 잃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소통에 실패한다. 싸이가 전 세계적으로 소통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먼저 한류라는 껍질로 포장하고 떠들어대기보다는 그 격식을 파하고 ‘놀아보자’고 손 내민 솔직함과 독창성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문화적 소통은 국가가 주관하거나 어느 한두 대형 기획사가 기획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솔직함과 독창성이 자유롭게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문화적 풍토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래야 더 다양한 문화가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 많은 진정성이 느껴지는 다양성 속이야말로 더 많은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싸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세계인들이 한국문화를 즐기고 싶어 하고 진정으로 소통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어딘지 다운(down)된 분위기를 업시켜주는 지극히 한국적인 멋과 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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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사극에서 당대의 현실과 정치가 투영되는 건, 대중들의 요구다. 대중들은 사극을 통해 현실에 부재한 정치적 비전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사극이 가진 역사의 재해석은 그래서 마치 '온고지신'처럼 현재의 정치를 일갈하기도 한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요원)이 삼한통일에 앞서 그토록 찾으려 했던 '시대정신', '추노'가 보여줬던 역사의 한 줄 아래 수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의미했던 것, '공주의 남자'가 그려낸 혁명을 위해 역사와 대적하는 상상력의 힘 등은 그것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마음 한 구석을 자극한다. '추노'의 천성일 작가가 밝힌, "어떤 시대를 쓰는지 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은 사극이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올해 최고의 사극이라 지칭되는 '뿌리 깊은 나무'가 그려내는 현재의 모습은 뭘까.

‘뿌리 깊은 나무’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한글’과 ‘세종’의 이야기를 다뤘다. 교과서 속에서 시험문제에나 나올 법한 박제화된 세종의 한글창제에 관한 일화들이 21세기인 현재의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몇 백 년의 간극을 이어주는 키워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뿌리 깊은 나무'의 전제로서 소통하지 않는 왕, 태종 이방원(백윤식)이 먼저 등장한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방원은 어린 세종 이도(송중기)가 마방진 앞에서 모든 숫자들(백성을 의미하는)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꿀 때, 중앙에 왕을 상징하는 숫자 하나(왕을 의미)를 남겨두고 주변을 모조리 치워버리는 '칼의 통치'를 말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이방원의 무력 앞에 부들부들 떠는 이도는 그 칼날에 죽어나간 사람들을 마음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간직한 채, 자신이 꿈꾸는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칼의 힘이 아니라 글의 힘이다. 그래서 '한글'은 지식의 독점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바로잡고, 막혀진 소통체계를 열어주는 강력한 세종(한석규)의 무기가 된다.

여기서 전제되는 건 '소통의 정치'를 꿈꾸는 자로서의 세종이라는 특별한 왕이다. 소통은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니라 왕의 고통과 희생을 요구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완벽한 왕으로서의 세종이 아니라, 외로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때로는 자신의 울분과 분노를 표출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왕을 그린다. 모두가 왕의 책임을 묻는 상황의 힘겨움을 세종은 이렇게 토로한다. "이 조선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다." 이 아픈 고백은 물론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외로운 심사를 담은 것이지만 현재의 정치에 시사하는 바도 클 것이다.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현재의 정치 행태를 접하고 있는 대중들로서는 세종의 이런 인간적인 토로는 차라리 감동으로 다가온다.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 세력은 그래서 고스란히 현재의 정치가 그려내는 소통에 대한 태도를 함의한다. 소통하려는 자와 불통하려는 자.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는 자와 그것을 막는 자. 적들(?)에게 열린 사회를 지향하려는 세종의 일갈이 울림으로 다가오는 건 그 때문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식견이 얄팍하다는 이유로,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하극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로, 나라 기강이 문란해진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이유로 백성들의 입을 막는다면 과인은 대체 백성의 소리를 어디서 들을 수 있단 말이오."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재상정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상은 자신들의 기득권(글자를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는)을 지키려는 밀본이란 세력이다. 밀본의 본원인 정기준(윤제문)은 한글이 가진 그 ‘역병’ 같은 힘을 직감하고 겁을 먹는다. 그것은 소통의 체계가 왕과 백성 사이에 놓여진 자신들 같은 신하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세상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이제 백성들끼리 소통할 수 있고, 또 백성과 왕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니 이 ‘역병 같은 글자’의 파급력에 정기준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의 대결은 마치 지금 우리 시대가 처해있는 소통에 대한 두 가지 풍경을 그려낸다.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SNS 같은 새로운 소통체계는 기성 소통체계를 장악하고 있는 권력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이 대결구도를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것처럼 세종과 정기준의 논리 대결로 풀어낸다. 정기준은 한글을 백성에게 주는 것이 일종의 왕이 해야 될 책임의 방기라고 몰아 부친다. 즉 한글 하나 주고 이제는 백성들끼리 모든 걸 책임지며 살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백성의 저마다의 욕망은 앞으로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 위협한다. 하지만 세종은 그것이 왜 지옥이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소통에 대한 책임에 관한 담론이다. 소통체계에는 책임 또한 따른다는 것. 우리가 흔히 인터넷 소통체계의 명과 암을 말할 때 늘 나오는 그 담론들을 몇 백 년 전 세종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마침 있었던 서울 시장 선거에서 드러난 SNS의 힘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갑자기 들고 나온 'SNS 심의' 발언은, '뿌리 깊은 나무'가 그린 한글 반포와 유포 과정에 대중들을 더욱 열광케 만들었다. 심지어 '밀본이 MB'라는 말까지 회자되는 상황에 이른 것. 정기준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역병 같은 글자’의 유포 과정은 그래서 마치 SNS가 가진 힘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이 바로 소이(신세경)다. 세종이 준비하는, 국가가 기관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파시키는 '반포'보다 더 강력한 것이 직접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입에서 입으로 전파시키는 '유포'가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얘기는 그대로 현재의 SNS시대가 갖고 온 새로운 소통체계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모든 걸 한 번 보고 들으면 기억하는 소이는 사극판 컴퓨터인 셈이고, 그녀가 유포에 사용하는 부적과 노래는 SNS 같은 네트워크인 셈이다.

도대체 이 '역병 같은' 소통의 욕망을 어찌 막을 것인가. 최근 정치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세종을 배우라"는 요구는 그래서 '뿌리 깊은 나무'를 통해 새롭게 의미화된 '소통의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을 말해준다. 그러니 정치여! 만일 지금의 대중들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밀본이라는 적조차 붕당으로 인정하고 토론하려 하는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을 되새겨볼 일이다. 이제 막는다고 막아지는 세상은 지났다.
(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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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에 더 갈급한 세상, '뿌리'의 선택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지랄하고 자빠졌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지랄'이라는 대사는 극 전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화두다. 어린 세종 이도(송중기)가 죽은 아버지 앞에 오열하며 "지랄하지 말라고 그래!"하고 소리칠 때, 그 '지랄'은 이도의 뒤통수를 때렸다. 복잡한 말 장난 같은 이념과 철학의 대결구도 속에서 고뇌하고 힘들어할 때, 이 어린 백성의 한 마디 '지랄'은 오히려 이도에게 속 시원함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뭐가 그리 복잡한가. 저리 힘들어하는 백성이 있는데.

'지랄'. '마구 어수선하게 떠들거나 함부로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뜻한다. 하지만 이 사극의 대사 속에서 사용되는 '지랄'은 이런 사전적 의미보다는 그럴 듯한 논리가 아닌 직관적으로 사태를 사정없이 드러내는 장치다. '지랄' 앞에 논리란 필요 없다. 그저 그런 속된 말이 나오는 현실만이 던져질 뿐이다. 논리가 가진 자들의 무기라면, 욕은 없는 자들의 무기다.

성장한 세종(한석규)이 등장해 처음 던지는 대사가 '지랄'에서 시작되어 진화된(?) '염병', '우라질'이라는 사실은 이 캐릭터에 대해 많은 걸 얘기해준다. 탁상공론처럼 양반행세하며 입바른 소리하는 권력자들과 집현전에서 토론하는 장면에서 세종은 하나하나 논리로서 대응하지만, 그런 그의 입매에는 묘한 조소가 달려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꼈던 그 한 백성의 소회를 입바른 소리하는 신하들에게서 똑같이 느끼기 때문일 게다. 세종은 '지랄'을 통해 처음 백성과 소통했고, 그것을 잊지 않음으로써 백성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위한 글자 창제에 투신하게 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지금껏 세종을 다룬 사극들이 한글의 창제 과정과 그 위대함에 대해 상찬하던 것과는 달리, 창제된 한글을 배포하고 유포하는 과정에 더 방점을 찍었다. 이미 백성들과 소통할 글자를 만들었는데 그 소통체계를 반대하는 무리들과의 한 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밀본의 본원 정기준(윤제문)은 세종과의 독대를 통해 그가 하려 했던 한글 반포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그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종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 한글 하나 던져주고 알아서 살라는 것은 임금으로서의 직무유기라는 것. 이 뱀의 혀를 가진 정기준의 말은 세종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자신 때문에 죽어나가는 백성이 더 이상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래서 '백성을 위한다는 것'이 오로지 임금의 고단함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었던 세종에게 정기준은 그것이 '백성이 아닌 너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요사스런 말의 논리를 깨부수는 건 역시 '지랄'이었다. 그 말에 내상을 입은 세종이 고뇌하고 있을 때, 처음 '지랄'을 알려준 채윤(장혁)이 또다시 일갈한다. "지랄을 하고 계십니다." '백성을 사랑한 적이 없고 대신 미워했다'는 정기준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채윤은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글을 알게 됨으로써 백성들의 욕망이 생겨나고 그 욕망으로 인해 지옥이 생길 거라고 비관한 정기준의 논리에 채윤은 "소이가 꿈이 생겼다"는 말로 반박한다. 사상과 이념의 논리 앞에 채윤이 던지는 '지랄'은 이처럼 백성들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세종에게 전해준다. 한글 반포와 유포를 막는 자들 앞에 목숨을 던져 넣으면서 죽어가는 세종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멈추지 마십시오." 무엇을? 소통에 대한 노력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창제보다는 반포와 유포 과정에 천착하고, 그 유포 과정에서 현대적 의미를 떠올릴 수 있는 SNS나 '사랑의 편지' 같은 방법들이 제시되는 것은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소통에 대한 갈급을 말해주는 것이다. 백성들의 언어, '지랄'을 화두로 시작된 '뿌리 깊은 나무'는 그래서 왕과 백성 간의 한글을 매개로 하는 소통을 그려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 '지랄'로 표현되는 직설적이지만 정직한 대중들의 정서와 그 소통이 아닌가. '지랄'이라는 속된 말이 이토록 가슴을 울렸던 것은 그 속에 담겨진 절절한 소통의 욕구가 드라마에 묻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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