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섭, 김윤진, 나나가 ‘자백’을 통해 보여준 것들

자백

시작과 함께 부감으로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산세가 마치 앞으로 이 영화가 펼쳐놓을 만만찮은 이야기를 예감케 한다. 서로 겹쳐져 있는 산들은 이야기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를 말해준다. 그 산세들이 그림으로 변하고 그려진 그림 위에 붓칠이 계속 채워지는 오프닝 신도 마찬가지다. <자백>은 그런 영화다. 진실인 것처럼 보이던 사건이 한 꺼풀을 벗겨내면 거짓으로 바뀌고 또 다른 진실을 드러내는 그런 영화. 그래서 이 시작점에 시선이 포획되면 끝점까지 시선을 돌리기가 어려운 극강의 몰입감을 주는 작품이다.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유민호(소지섭)는 불륜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에 돈 가방을 챙겨들고 호텔을 찾아가고, 거기서 엉뚱하게도 불륜 상대인 김세희(나나)를 마주한다. 세희 역시 협박을 받았다 생각한 민호는 함께 호텔에서 그 인물을 기다리다 경찰차들이 들어서는 걸 보고는 방을 빠져나오려 한다. 그 때 누군가 민호를 때려 정신을 잃게 만들었고 깨어나 보니 세희는 살해됐다. 문도 창문도 모두 잠겨 있는 호텔방. 그래서 밀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용의자는 바로 민호가 된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호는 자신이 간간히 찾던 별장에서 승률 100% 변호사 양신애(김윤진)와 함께 무죄를 입증할 방법을 고민한다. 

 

변호에 있어서 ‘창의력’과 ‘논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양신애는 민호에게 진실을 말해줄 것을 요구하고, 민호는 세희와 출장을 핑계로 별장에서 지냈던 날 겪었던 사건을 들려준다. 돌아오는 길에 고라니를 피하다 발생한 사고. 차끼리의 충돌도 없었지만 마주 오던 차량은 피하려다 사고가 나고 운전자는 사망한다. 불륜이 탄로 날까 두려운 나머지 그들은 이를 은폐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민호의 진술일 뿐,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양신애는 민호의 진술에 담긴 허점을 논리적으로 파고들고 또 다른 가능성의 시나리오를 이야기한다. 그 시나리오는 민호가 처한 밀실살인에서 그를 용의선상에서 빼내줄 수 있는 이야기다. 즉 <자백>은 이처럼 벌어진 두 개의 사건(밀실살인과 사고사체유기)을 두고 변호사와 용의자가 진실 공방과 더불어 변론을 위한 시나리오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영화는 어떤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시나리오에 의한 진술인가에 따라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고 새로운 가해자가 용의자로 세워지는 반전의 반전을 보여준다. 마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처럼 진술과 관점에 따라 사건이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전개되는 서사를 보여주는 것. 앞서 시작점에 보여준 산세와 덧칠되는 그림처럼 영화는 이렇게 중첩되고 바뀌어가는 서사의 변화 속으로 관객들을 밀어 넣는다. 그래서 어느 순간 관객은 이 논리와 이야기로 꾸며진 산 속 깊숙이 들어와 빠져나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건, 배우들이다. 어떤 논리의 진술을 하느냐에 따라 배우들은 그 캐릭터의 성격도 변화한다. 즉 피해자였던 인물이 어떤 진술 속에서는 가해자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계속 전개를 바꿔나가는 영화는 마치 배우들이 얼마나 다양한 결의 연기를 하고 있는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무대가 되어준다. 누명을 쓴 인물로 그려질 때의 소지섭은 그 억울함이 느껴지지만 다른 서사 속에서 가해자로 세워지는 소지섭에게서는 광기가 느껴진다. 유혹적이고 대담해 보였던 나나는 한없이 가녀린 존재로 변화하기도 하고, 김윤진은 의뢰인의 무죄를 변호하면서도 끝없이 의심하고 흔들리는 이중적인 면면을 소화한다. 

 

그래서 진술에 따라 변화하는 그 스토리의 미로 속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그 과정은, 다른 한 편에서 보면 소지섭이나 나나, 김윤진 같은 배우들이 가진 여러 연기의 결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지금껏 봐왔던 어떤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연기자의 면면을 볼 수 있다는 것. 물론 런닝타임 105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빨려 들어가는 작품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배우들의 매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사진:영화'자백')

‘작은 아씨들’, 김고은의 판타지, 남지현의 진실, 박지후의 탈출

작은아씨들

쉴 틈 없는 폭풍전개다.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스토리 전개는 머뭇거림이 없다. 곧바로 사건을 전개시키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이 이어지며 그것을 한꺼번에 뒤집는 반전도 벌어진다. 싱가폴에 오인주(김고은)의 명의로 있는 비자금 7백억을 둘러싼 진실이 밝혀지는 8회는 이러한 <작은 아씨들>의 폭풍전개가 짜릿할 정도로 긴박한 속도감을 낸 대표적인 사례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시청자들은 자신의 집에서 목매달린 채 죽은 진화영(추자현)이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바 있다. 워낙 미스테리한 행적을 보인 인물인지라 그가 성형을 하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자살을 위장하고 싱가폴로 도주해 그 곳에서 오인주의 이름으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 것이다. 

 

8회 초중반까지만 해도 실제로 진화영이 살아있는 것처럼 오인되었다. 최도일(위하준)과 함께 희귀 난초 경매를 빙자해 비자금을 빼돌리려 싱가폴로 가게 된 오인주를 본 현지 주민들이 아는 체를 하고, 그래서 그 곳에 자신의 얼굴로 성형한 진화영이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원상아(엄지원)가 꾸민 연극판이었다. 진화영이 살아있는 척 현지인들을 연기하게 만들고 오인주로 하여금 그 사실을 믿게 해 결국 최도일을 버리고 비자금 7백억을 빼돌려 자신에게 가져오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돈을 모두 빼돌리고 오인주에게 푸른 난초액을 먹인 후 고층 건물에서 떨어뜨려 자살인 척 꾸미려 했던 원상아의 계획은 그러나 최도일이 오인주에게 건넨 권총으로 인해 반전을 맞이하게 됐다. 그것이 모두 원상아의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인주가 마지막으로 트렁크에 든 7백억이 보고 싶다고 했고, 그걸 열어본 원상아는 돈 대신 벽돌이 들어있는 것에 경악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오인주를 마주하게 됐다. 

 

이 흐름은 7백억을 두고 벌이는 한 편의 스릴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뒤집고 뒤집히는 사건 전개가 시청자들을 빠져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오인주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부에 대한 욕망이 판타지로 담긴다. 싱가폴에 간 오인주는 호텔에서부터 극진하게 MIP(Most Important Person)으로 대접받고 화려한 드레스에 난초 경매계의 여왕처럼 대접받는 판타지 속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원상아가 꾸민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판타지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스릴러로 바뀌었다. 원상아는 자신이 만들었던 ‘닫힌 방’의 미니어처 그대로 진화영을 살해한 인물이다. 그러니 그가 꾸미는 다음 살인 연극의 주인공은 오인주가 되는 셈이었다. 물론 이러한 원상아의 계획은 오인주가 최도일에게 어쩌다 권총을 받게 되면서 반전을 맞게 된 것이지만.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가 눈 돌릴 틈 없이 펼쳐지는 폭풍 전개 양상을 보이는 이유는 오인주만이 아닌 오인경(남지현), 오인혜(박지후)의 각각의 서사가 교차되고 연결되면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오인주의 서사가 7백억을 두고 벌어지는 판타지와 스릴러의 묘미를 안긴다면, 오인경의 서사는 박재상(엄기준)의 비리를 캐기위해 푸른 난초로 연결된 피해자들을 추적하는 진실 추적의 묘미를 안긴다. 오인경은 푸른 난초가 원상아의 아버지 원기선 장군과 함께 했던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비밀작전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오인경의 진실 추적기가 흥미로운 건 그것이 베트남 참전과 연관된 당대의 현대사를 뒤집는 사건일 수 있어서다. 현재까지 이어져온 박재상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축적과 그 시스템이 과거 어떤 뿌리로 연결되어 있는가는 이 작품이 스릴러의 차원을 넘어서 현대사와 자본시스템에 대한 비판의식을 던지는 사회극으로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또한 사실상 박재상의 저택에 그의 딸인 박효린(전채은)과 함께 감금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오인혜가 그 집안에서 어떤 단서들을 찾아내고 괴물 같은 부모들 때문에 아파하는 친구를 돕는 이야기 역시 또 다른 이 드라마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서사의 묘미다. 박효린을 도와 오인혜가 그 저택의 비밀을 찾아내고 그 곳으로부터 탈출하는 그 과정을 시청자들은 숨죽이며 바라보게 된다. 

 

오인주의 판타지 스릴러와 오인경의 진실추적기 그리고 오인혜의 탈출기. 이렇게 <작은 아씨들>은 세 자매가 가진 각각의 서사들을 저마다의 묘미를 갖는 스토리로 엮어 교차 편집해낸다. 그것은 각각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세 자매가 그 관계로 묶여 있는 것처럼 사건들도 결국 하나로 뭉쳐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마치 세 개의 서로 다른 몰입감을 주는 스토리가 하나로 묶여 돌아가는 형국이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폭풍 전개는 바로 이런 이야기 구조에서 비롯된다. 

 

구조적으로 보면 오인주가 원상아의 연극판에 갇힌 존재였다면, 오인혜 역시 박재상의 저택에 갇힌 존재이고, 오인경은 이 사건들을 파고 들어가다 더 깊숙이 그 늪에 발을 딛게 된 인물이다. 결국 세 자매가 무언가에 갇히거나 빠져 있는 상황이고, 이들이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궁극적인 작품의 엔딩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곳은 다름 아닌 원상아와 박재상으로 대변되는 저 유혹적이면서 끔찍한 자본화된 세상의 아가리다. 

 

한편 생각해봐야할 또 하나는 이 폭풍전개의 드라마가 16부작도 아닌 12부작이라는 점이다. 그저 관성적으로 미니시리즈라고 하면 16부작으로 편성해놓고 그만한 서사의 분량도 아닌데 이런 저런 불필요한 요소들을 넣어 고무줄처럼 늘여 놓는 그런 드라마들과 너무나 다른 행보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질 끌기보다는 군더더기 없이 풀어나가는 <작은 아씨들>의 이런 선택을 이제 다른 드라마들도 무겁게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사진:tvN)

'써치', 멜로가 죄는 아니지만, 굳이 멜로 없어도 충분한

 

멜로가 죄는 아니지만, 굳이 멜로가 없어도 충분히 괜찮을 법한 드라마가 있다. 팽팽한 긴장감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 전개만으로도 이제 장르물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더 열광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OCN 드라마틱 시네마 <써치>가 딱 그렇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건 좀비 장르의 보편적인 재미를 주는 괴생명체라는 소재에 비무장지대라는 우리식의 차별적인 요소가 더해져 있어서다. 민간인들이 들어가지 않은 천혜의 자연 속에서 탄생한 괴생명체와 군인들의 피 튀기는 대결은 그래서 영화 <프레데터>의 공포감을 유발하고, 여기에 겹쳐진 남북한 대치국면은 상황을 더 쫄깃하게 만들어준다.

 

처음에는 비무장지대에서 출몰하던 괴생명체가 DMZ내 민간인이 거주하는 천공리 마을에 출몰하고, 야간수색에 군인들이 나가 빈틈을 타고 심지어 군부대까지 들어와 습격하는 괴생명체가 주는 공포감과 몰입감이 만만찮다. 말년 병장 용동진(장동윤)이 군견병으로서 항상 동고동락했던 군견을 잃게 되고 조금씩 괴생명체에 대한 감정을 얹어가고, 괴생명체를 제거하기 위해 꾸려진 특임대의 송민규(윤박) 팀장과 이준성(이현욱) 부팀장의 속내도 갈수록 궁금해진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서로를 주시하고 각각 누군가의 지휘라인을 따르고 있다. 그들 뒤에 존재하는 이혁(유성주) 국방위원장과 한 대식(최덕문) 국군사령관이 과거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남북 간의 총격전 속에서 벌인 비밀스런 사건은 이 괴생명체의 탄생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그것은 남북 간 대치상황이라는 특수한 한반도에서 부당한 권력이 탄생되기도 했던 우리네 불행했던 과거사를 떠올리게 한다.

 

군대 소재를 다루고 있어 상대적으로 역할이 적게 나올 수도 있는 여성 캐릭터들의 활용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손예림(정수정) 중위는 특임대의 브레인으로 괴생명체와의 대결에 있어서 과학적인 접근을 한다. 공수병의 징후를 갖고 있을 거라는 판단 하에 괴생명체를 물로 유인하는 작전을 시도하게 한다거나, 세포 검사를 통해 괴생명체의 정체를 파악해 그 약점을 노리려는 접근방식이 그것이다. 게다가 현재는 기념관에서 해설을 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어딘가 만만찮은 전투력(?)을 숨기고 있는 듯한 김다정(문정희)의 활약도 기대된다.

 

이처럼 <써치>는 다양하게 건드릴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좀비도 아니고 군인도 아닌 존재로서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는 괴력을 가진 괴생명체가 어떻게 탄생했는가 하는 궁금증이 있고, 그런 괴생명체 때문에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지는 남북 간의 관계 변화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또 이 실체를 숨기려는 자들과 진실을 밝히려는 자들 간의 치열한 대결도 기대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군대 소재의 드라마라는 점 때문에 그랬을까. 굳이 용동진과 손예림을 예전에 사귀었다 소원해진 연인으로 세워 놓은 건 드라마의 흐름을 조금 느슨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본격 장르물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박감으로 가득 채워 넣어도 충분했을 이야기에 갑자기 멜로가 들어가서 생겨나는 느슨함은 <써치>의 아쉬운 지점이다.

 

좋은 소재와 장르적 퓨전을 잘 엮어낸 데다 비무장지대라는 우리네 특수한 상황이 주는 차별점까지 가진 <써치>다. 이 정도면 괜한 우려에 멜로를 기웃거릴 필요 없이 본격 장르물의 팽팽한 스토리를 정주행 해줘도 충분하지 않을까. 괜한 멜로보다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의 전우애가 <써치>에는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사진:OCN)

'악의 꽃', 악조건 속 이준기를 피워낸 문채원의 사랑

 

사랑은 얼마나 위대할 수 있을까. 아마도 tvN 수목드라마 <악의 꽃>은 그런 질문을 던져보려 했던 것 같다. 사랑해 결혼했고 아이까지 낳아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던 차지원(문채원)은 남편 백희성(이준기)이 사실은 연쇄살인범 도민석(최병모)의 아들 도현수라는 걸 알게 된다. 혼수상태로 15년간을 지내온 진짜 백희성(김지훈)으로 신분세탁을 한 후 그 집 아들 행세를 해온 것.

 

보통 이런 설정이라면 드라마는 멜로에서 스릴러로 바뀌기 마련이다. 믿었던 남편의 모든 것이 거짓으로 다가오고 심지어 연쇄살인범과의 공범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도 드리워져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그의 누나 도해수(장희진)가 저지른 살인 누명까지 스스로 뒤집어쓴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도대체 이런 사람을 끝까지 믿어주고 사랑해준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하지만 그 기적 같은 일을 차지원(문채원)이 한다. 형사로서 과거 연주시 연쇄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그는 남편의 정체를 알게 되지만, 점점 그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한다. 그간 자신에게 해왔던 일련의 배려와 살뜰한 행동들이 그걸 말해주기 때문이었다. 차지원은 남편이 그간 자신을 속이고 살아왔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이것은 도현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그런 악조건 속에서의 삶을 자신이 원했던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연쇄살인범이었고, 그래서 자신 또한 같은 부류로 의심받아왔으며 그런 자신을 위해 나섰다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누나의 죄를 자신이 뒤집어쓴 채 살아왔던 것이었다. 신분세탁도 진짜 백희성이 낸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백희성의 아버지는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아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혼수상태가 된 백희성 대신 도현수를 아들행세를 하게 한 것이었다.

 

도현수가 차지원에게 모든 걸 숨기고 거짓 행세를 한 건, 다시는 그 과거의 악조건 속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백희성이어야 했고, 그래야 차지원과 가정을 꾸린 채 단란하게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과거의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자 그는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결국 도현수는 차지원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멍해지다가 오열하기 시작한다. 그걸 알면서도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차지원이 해왔던 그 행동들을 그는 믿지 못한다. 그래서 차지원에게 말한다. "도대체 왜 다 알면서 다 알면서 왜 날 버리지 않아? 난 이해가 안가." 그는 사랑을 모른다. 사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 그에게 차지원은 되묻는다. "정말 몰라? 니 정체 다 알면서 너 하나 지키겠다고 내가 왜 그랬는지 너 정말 몰라?" 그제서야 도현수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걸. 그래서 "미안하다"며 오열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그를 아프게 했고 상처를 준 것을 미안하다며.

도망치라고 했던 차지원의 말과는 달리, 도현수는 집으로 가고 싶다 한다. 그것은 이제 이 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드디어 자신이 가야할 곳을 알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 차지원의 사랑으로 그의 황무지 같은 마음 속에서 도저히 피어나지 못할 것 같던 꽃이 피어난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재차 차지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드디어 알았고, 자신이 해왔던 그 일련의 말과 행동들이 사실은 차지원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악의 꽃>은 멜로와 스릴러가 절묘하게 균형을 맞춘 드라마다. 처음에는 훈훈한 멜로로 시작하지만 도현수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살벌한 스릴러로 바뀌었다가, 그 모든 정체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 꽃을 피워내는 그 과정을 통해 다시금 멜로가 그려진다. 그런데 뒤에 등장하는 멜로는 처음에 봤던 그 멜로와는 밀도와 무게감 자체가 다르다. 앞의 멜로가 사랑이 뭔지도 모른 채 사랑한다 말하는 표피적인 느낌을 담고 있다면, 뒤의 멜로는 무엇이 진짜 위대한 사랑인가를 알게 된 후의 무게감을 갖게 된 사랑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악의 꽃>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저 달달한 것이 사랑인가. 도무지 겹쳐질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을 우리는 과연 하고 있는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며 그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라고 '방문객'이라는 시를 통해 정현종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과연 진짜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하고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이 드라마는 멜로와 스릴러를 겹쳐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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