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기술’로 전설의 협상가가 되어 돌아온 이제훈

협상의 기술

배우의 자질 중 목소리가 가진 지분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 보여지는 게 직업인 배우인지라 비주얼이 가장 중요할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배우는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보는 이들을 그 역할에 몰입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설득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진짜 중요해지는 건 목소리다. 중저음의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은 똑같은 대사도 달리 들리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제훈은 바로 그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배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뭐든 설득될 것 같은 신뢰감이 느껴진다. 

 

최근 드라마 ‘협상의 기술’은 그래서 이제훈이라는 배우가 가진 이 신뢰감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M&A 전문가로서 전설의 협상가로 불리는 윤주노라는 인물이 그가 맡은 역할이다. 그는 위기에 처한 산인그룹을 회생시키기 위해 돌아온 M&A 팀장으로 ‘백사’라 불린다. 하얀 머리 때문에 붙은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행동하기 전에 ‘백 번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과거 함께 일했던 오순영(김대명) 변호사와 탁월한 암산 능력을 가진 곽민정(안현호) 그리고 신입 인턴이지만 학창시절 주식 투자 동아리 회장까지 했을 정도로 나름의 능력을 갖춘 최진수(차강윤)로 팀을 꾸려 본격적인 M&A에 들어간다.

 

협상가의 첫 번째 덕목은 어떤 상황에서도 속내를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윤주노는 거의 표정이 없고 말하는 톤도 거의 변화가 없다. 협상이 마무리되어 계약을 하는 당일에 갑자기 틀어진 계약 취소 상황에서도 그는 감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그 문제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곰곰이 그 해결책부터 차근차근 찾아나가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일견 망한 것 같은 협상에서도 그는 막판에 상황을 뒤집는 놀라운 결과들을 만들어낸다. 협상가의 두 번째 덕목은 냉철하면서도 담대한 대응이다. 제 아무리 아픈 제 살이라고 해도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도려내는 차분하고도 대담한 선택이 요구된다. 그는 산인그룹의 중심이 건설업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로 그 건설을 먼저 M&A 하겠다고 선언한다. 파는 물건은 사는 이들도 그 가치를 인정해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다. 그리고 이 윤주노가 보여주는 협상가의 세 번째 덕목은 비즈니스 그 이면에 사람을 본다는 점이다. 윤주노는 이커머스에 진출하기 위해 택배왕을 만든 차차게임즈라는 게임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이 자질을 발휘한다. 모두가 비즈니스에 집중할 때 그는 그 게임 개발자가 왜 그런 게임을 만들게 되었는가 하는 그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끝끝내 그 회사를 인수하는 결과를 도출해낸다. 

 

이제훈은 이 윤주노라는 협상가의 캐릭터를 구축해내기 위해 이 세 가지 덕목을 드러내는 연기요소들을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모습과,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 속에서도 과감하게 나서서 그들을 하나하나 설득해가는 모습 그리고 차가운 모습 이면에 슬쩍 슬쩍 드러나는 따뜻한 인간미가 그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이제훈이 지금껏 해왔던 연기 필모를 들여다 보면 그 다양한 얼굴들 속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영화 ‘건축학 개론’의 그 순하고 순수한 청년의 미소나, 드라마 ‘시그널’에서의 절박한 모습, 영화 ‘박열’의 무정부주의자가 보여주는 자유로움, ‘아이캔스피크’의 공무원 역할로 보여준 반듯함, 그리고 드라마 ‘모범택시’의 장르화된 액션 히어로의 모습과 ‘무브 투 헤븐’의 따뜻한 인간애, 게다가 ‘수사반장 1958’에서의 활극 히어로 같은 다채로운 역할들 속의 얼굴들이 그것이다. 앳된 얼굴이지만 벌써 마흔의 나이에 연기경력만 20년에 육박하는 이 배우는 그간 참 다양한 역할들을 통해 성장해오면서 이제는 여러 면들을 자유자재로 꺼내 쓸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면모들을 하나로 꿰어주는 데는 앞서 말했던 이제훈의 차분하고도 진중한 목소리가 중요한 몫을 했다. 물론 거기에는 매 역할을 분석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연습과 노력이 전제된 것이지만, 이제훈의 목소리는 그 노력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드는 힘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시그널’처럼 무전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판타지 설정이 들어있는데, 이제훈의 진실된 느낌의 목소리는 어찌 보면 믿기 힘들어지는 이 판타지조차 믿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했다. 또 ‘모범택시’처럼 판타지적 인물을 장르적으로 해석한 캐릭터에 특유의 현실감이 부여된 것 역시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이 큰 역할을 했다. 

 

‘협상의 기술’은 냉정함과 따뜻함의 양면을 담은 드라마다. 즉 냉정함이란 협상으로 대변되는 비즈니스의 세계를 말한다. 실로 ‘협상의 기술’에서는 같은 회사의 동료들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신을 저지르는 정치싸움 같은 것들이 펼쳐지는 냉정 그 이상의 비정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진짜 협상에 이르는 힘은 그 속내를 먼저 들키면 안되는 냉정한 세계 속에서도 상대의 마음을 애써 읽어내려는 따뜻함에서 나온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무표정한 얼굴 사이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마음들은 그의 협상력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말해준다. 

 

연기도 일종의 협상이지 않을까 싶다. 믿고 싶어하지 않는 관객과 시청자들을 앞에 두고 믿고 싶게 만드는 협상의 과정이 그것이다. 무표정할 때는 일견 차갑게 보이는 이제훈의 얼굴은 그 무표정을 거두고 살짝 미소 지을 때 보는 이들을 설레게 만들고, 숨겼던 감정을 드러낼 때 더 강력한 폭발력을 갖는다. 특히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그 역할이 무엇이든 우리는 이 배우에게 설득된다. 이것이 이제 20년에 다다른 연기 경력을 통해 이제훈이 갖게 된 연기 협상력이다. (글:국방일보, 사진:JTBC)

‘트리거’의 열혈 탐사보도 팀장, 사이다 캐릭터의 귀환

트리거

“야 임마! 넌 사내새끼가 기집X 밑에서 일하냐, 쪽팔리게!” 다짜고짜 총부터 들이대는 사이비 종교 교주가 탐사보도 프로그램 ‘트리거’의 팀장 오소룡(김혜수)이 여자인 걸 알고는 남자 팀원에게 영 감수성 떨어지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던진다. 그러자 오소룡이 여유있게 웃으며 말한다. “제가 또 보통 기집X은 아니거든요.” 디즈니+ 드라마 ‘트리거’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이 장면은 오소룡이라는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물에 대한 기대감을 세워 놓는다. 그건 바로 이 진실을 알리는 탐사보도를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캐릭터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역할을 연기하는 김혜수에 대한 기대감도 빼놓을 수 없다. 똑같은 역할을 해도 김혜수가 하면 어딘가 다르다. 대체불가의 호방함이 캐릭터에 묻어난다. 그 인물이 시원시원한 사이다 캐릭터라면 그 청량감과 폭발력은 그래서 더 강력해진다. 

 

실제로 ‘트리거’의 첫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와의 일전이 그렇다. 보도를 위해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높은 사이비 종교 집단의 벽을 넘어들어가는 장면은 현실성이 없지만, 김혜수가 연기하니 어딘가 그럴 듯해 보인다. 장전된 총구 앞에서도 “쏴봐”라고 외치며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 모습에서부터 시청자들은 이미 설득 당했다. 그러니 사실상 진실 보도에 대한 판타지적 욕망을 담은 ‘트리거’에서 시청자들의 마음은 오소룡이라는 인물을 입은 김혜수를 보자마자 마음을 정하게 된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김혜수 특유의 이 호방한 느낌은 처음부터 생겨난 게 아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태권도 유단자로 사범님 앞에 “태권!”하고 거수경례를 했던 시절부터 그 호방함은 내면에 장전되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광고모델로 주목받아 영화 ‘깜보’로 연기자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 어린 나이에 성인연기까지 맡는 대범함이 그냥 생겼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혜수가 처음 대중적인 배우로서 자리매김한 건 이런 호방함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청순 가련한 역할을 통해서였다. 바로 이명세 감독의 영화 ‘첫사랑’에서의 박영신이라는 인물이다. 이 역할로 김혜수는 최연소 청룡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물론 그런 이미지가 김혜수는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서 젊은 미시족 연기로 변신을 시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김혜수는 ‘섹시 이미지’로 주로 소비되는 성장통을 겪었다. 백상연기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얼굴 없는 미녀(2004)’가 대표적인 그 사례다.

 

하지만 김혜수 본연의 호방함의 본색은 ‘타짜(2006)’를 통해 드디어 대중들을 매료시키기 시작한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유행어까지 만든 김혜수는 이 때부터 맡는 역할마다 자신만이 가진 스타일을 더함으로써 대체불가의 배우로 서게 된다. 드라마 ‘직장의 신(2013)’은 김혜수가 가진 시원시원한 여걸의 면모와 더불어, 코믹함과 카리스마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모습들을 미스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줬다. 영화 ‘차이나타운(2015)’에서는 사채업자 대모로서 조직 보스 역할을 김혜수만의 느와르적 카리스마를 더해 꺼내 놓았고, 드라마 ‘시그널’에서는 차수현이라는 인물의 과거 젊은 시절의 신출내기 형사와 현재의 베테랑 형사팀장을 오가는 연기를 선보여 백상예술대상 여자 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김혜수는 청순함에서부터 코믹함과 더불어 관능미, 카리스마까지 소화해내면서도 어느 하나의 이미지에 고착되지 않는 연기자가 됐다. 무엇보다 김혜수에게서 주목되는 건 10대 시절부터 현재의 50대까지 하이틴부터 시작해 청년과 중년을 넘어오는 그 모든 과정들 속에서 대중들과 그 성장사를 함께 했고 그 속에서 자신만이 가진 색깔을 분명히 찾아냈다는 점이다. 똑같은 역할을 해도 그만의 매력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건 그래서다.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변호사(하이에나)나 근엄하고 냉철하면서도 속으로는 따뜻한 진심이 숨겨진 소년부 엘리트 판사(소년심판)도, 또 심지어 조선시대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 자식들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중전(슈룹)이나, 돈되는 거라면 뭐든 하는 팜므파탈의 밀수꾼(밀수)까지 김혜수여서 보다 매력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트리거’ 역시 이 흐름 그대로 김혜수표 열혈 탐사보도 팀장이 보여주는 매력이 강력한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본래 드라마나 영화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당대의 갈증을 판타지로 채워주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작품 속 인물들은 시대의 다양한 갈증들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김혜수가 시대의 아이콘처럼 보이는 건, 바로 그 갈증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자기만의 색깔로 일관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직장의 신’의 미스 김이라는 인물을 통해 비정규직 여성들의 억눌린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줬고, ‘차이나타운’ 같은 작품에서는 남성 전유물로 여겨져온 느와르가 여성을 통해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시그널’이 포기하지 않는 베테랑 형사를 통해 미제사건의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면, ‘하이에나’ 같은 작품에서는 성공을 향해 질주하며 사랑도 쟁취하고픈 현대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러면서 이 역할 하나하나에 본인이 갖고 있는 호방한 면모들을 더함으로써 더 톡 쏘고 시원한 사이다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많은 역할들 속에서 김혜수가 해온 연기의 면면을 보면 작은 것들에 연연하기보다는 보다 굵직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눈에 띤다. 물론 그렇다고 세세한 디테일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 세심함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시원하게 뻗어 나간다는 뜻이다. 흔히들 ‘호방함’이란 작은 것들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곤 하는데 김혜수를 보면 그것이 오해라는 걸 알게 된다. 디테일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목표를 향해 주저하지 않는 마음. 김혜수라는 대체불가 호방본색의 페르소나가 새해에 우리에게도 제안하는 매력이 아닐까.(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수사반장 1958’, 순수한 청년 형사라는 서민 영웅의 탄생

수사반장 1958

“파하-” 이제훈이 그렇게 웃는 모습에 최불암의 모습이 겹쳐진다. MBC ‘수사반장 1958’의 한 장면이다. 1971년부터 89년까지 방영됐던 레전드 드라마 ‘수사반장’. ‘수사반장 1958’은 그 리메이크작으로 극중 최불암이 연기했던 박영한 반장 역할을 이제훈이 맡았다. 당시 ‘수사반장’에 첫 출연했던 최불암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지만, 박반장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극중 연령은 좀더 많은 40세로 설정되어 있었다. 원작을 그대로 배경으로 가져왔다고 하면 이제훈이 맡아서 연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배역의 연령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시간을 과거로 더 되돌렸다. 1958년. 박영한 반장의 이십대 시절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인물이 반장이 되었는가 하는 걸 다루는 프리퀄이다. 

 

그런데 1958년으로 굳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건, 이제훈에 걸맞는 이미지의 연령대를 찾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 시대상과 그것 때문에 도드라지는 이제훈의 돈키호테 같은 순수한 아웃사이더의 이미지가 그 자체로 주는 메시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불의에 굴복하거나 방관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시대라면, 순수함이란 그 자체로 ‘반항’의 의미가 되기도 하지 않던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되지도 않은 1958년은 대혼돈의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범죄와 불의가 일상이던 치안 부재의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상권을 폭력으로 접수해 돈을 뜯어가는 깡패들이 심지어 공권력과도 결탁해 돈과 권력을 구가하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전국에서 소도둑을 가장 많이 때려잡은 형사로 알려진 황천시의 촌놈 형사 박영한이 서장마저 깡패의 눈치를 보는 서울 종남경찰서의 꼴통 형사로 떠오르게 되는 건 그저 형사로서의 본분을 지키려하는 것 때문이다.

 

최불암의 젊은 모습이 좀체 연상되지는 않지만 이제훈에게서 훗날 인간적인 수사반장의 씨앗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 있다. 그건 이 배우가 가진 순수한 청년 같은 이미지다. 이제훈은 ‘파수꾼’이라는 영화로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등장함으로써 ‘충무로의 신데렐라’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특유의 표현이 서투르고 그래서 반항기 가득한 아웃사이더 같은 청년 역할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제훈의 순수한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확고해진 건 영화 ‘건축학 개론’이다. 이 작품으로 상대역할이었던 수지가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것처럼 이제훈 역시 순수한 청춘의 아이콘이 되었다. 특유의 동안에 무해함이 느껴지는 눈빛과 미소는 수지와 10살이나 많았지만 이제훈을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동갑내기 대학생으로 믿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훈은 그 후에도 ‘파파로티’ 같은 영화나 ‘비밀의 문’ 같은 드라마로 새로운 영역의 역할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과정을 거쳐 김은희 작가의 ‘시그널’로 또다시 주목받았다. 미제전담팀의 프로파일러 역할로서, 과거와 미래를 잇는 무전기라는 판타지 설정 자체를 믿게 만들어주는 진지하고 묵직한 연기를 선보였다. 여기서도 이제훈 특유의 순수한 이미지는 미제사건을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형사라는 배역과 맞물려 효과를 발휘했다. 이 캐릭터가 가진 간절함을 보다 절절하게 시청자들이 느끼게 해준 것이다. 

 

이러한 간절함은 영화 ‘박열’이나 ‘아이 캔 스피크’에서는 불의의 시대에 목소리를 내는 모습으로 펼쳐졌다. 이제훈의 순수한 청년 이미지는 이제 불의한 시대에 저항하는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내 육체는 자네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은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며 일제 앞에서 일갈하는 박열이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옥분 할머니에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던 민재를 통해 이제훈은 시대에 저항하고 싸워나가는 청년의 이미지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이 이미지의 확장은 ‘모범택시’의 김도기라는 인물과 만남으로써 부정한 정의가 심판하지 않는 이들을 처단하는 서민영웅의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모범택시’가 특히 이제훈에게 새겨넣은 정의의 페르소나가 강렬할 수 있었던 건, 그 판타지적 캐릭터의 밑그림으로 제공된 실제 현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사건들이 있어서였다. 신안염전노예사건, 위디스크에서 벌어진 갖가지 엽기적인 사건들, 김명철 실종사건, 유영철 연쇄살인사건 등등 실제 신문 사회면에 나왔던 사건들이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했다. 현실에서 공분을 일으켰던 사건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이를 사적 보복이라는 판타지로 처리하는 김도기라는 인물에 대한 열광이 생겨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제훈은 저 ‘건축학개론’의 그 풋풋하기만 했던 청년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에 분노하는 서민 영웅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가 연기해온 역할들을 이처럼 하나씩 꿰어 들여다 보면, ‘수사반장 1958’의 박영한 형사 같은 레전드 캐릭터에 왜 그가 캐스팅되었는가가 이해된다. 당대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박영한 형사는 마치 의적 홍길동 같은 서민 영웅에, 돈키호테 같은 타협없는 이상주의자, 게다가 형사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고 지켜나가는 우직한 순수함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이미지가 이제훈이 그간 해왔던 필모 안에서 발견된다. ‘모범택시’의 김도기가 가진 서민 영웅적 면모에, ‘박열’의 주인공 같은 이상주의자가 더해지고 ‘시그널’의 순수한 열정을 가진 어떤 이미지의 결합체랄까. 

 

이 모든 이제훈이 가진 페르소나의 가장 밑그림으로 놓여진 것은 결국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다. 조금 서툴러도 올바르다 믿는 것을 순수하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청년의 모습. 어쩌면 이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다 자칫 잊어버리기 쉬운 우리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누구나 첫 걸음은 다 그 청년의 모습이었을게다. 세파에 흘러가다 보니 조금씩 변하게 되었을 뿐. 어느 날 문득 너무 멀리 왔다 느껴질 때 순간 얼굴을 보여주는 저마다의 청년들이 있을 게다. 때론 그 순수한 청년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것도 복잡한 세상을 뚫고 나가는 길이라고 이제훈의 페르소나는 말해주는 듯하다. (글:국방일보, 사진:MBC)

'나영석 PD 천재설'에 대해 본인은 이렇게 답했다

“능력 있는 친구들을 빨리 알아보고 내 것처럼 빼 쓰는 능력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지난 23일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콘텐츠 인사이트’ 세미나에 강연자로 나온 나영석 PD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 지금이 “천재를 요구하지 않는 시대”라고도 했다. 그보다는 “좋은 동료들”을 더 많이 옆에 두는 게 좋다는 것. 

나영석 PD의 이 이야기는 최근 콘텐츠 제작에 있어서 화두가 되고 있는 ‘협업’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꺼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KBS 시절부터 협업이 얼마나 콘텐츠 제작에 있어서의 시너지를 올리는가를 경험해왔던 PD다. 혼자서는 힘겨웠던 신출내기 연출자 시절 그에게 손을 내밀어줬던 이명한 PD와 이우정 작가가 있어 그는 비로소 날개를 펼 수 있었다. 

그가 CJ로 이직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이명한 PD와 이우정 작가가 거기 이미 포진해 있었고 그들과 함께 하는 작업에 대한 신뢰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CJ로 와 tvN 예능의 대기록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기반이 ‘협업’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지난 한 해 동안의 성과가 남다르게 다가올 법 했다. 지난 한 해 그는 내내 후배들과의 협업을 통해 <윤식당>, <강식당>, <알쓸신잡> 같은 빛나는 성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냐는 필자의 질문에 나영석 PD는 “후배들과의 협업을 계속 할 것”이라고 답했다. 사실 나영석 PD가 홀로 자신의 프로그램을 새롭게 런칭하기를 기대했던 필자에게는 다소 실망스런 답변이었지만, 이제 그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이제 혼자 작업하는 것보다 함께 작업하는 협업이야말로 그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런 협업의 중요성은 이미 신원호 PD가 저 <응답하라> 시리즈의 성공을 두고 밝힌 바 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들을 보고 그가 천재가 아니냐고 말하곤 한다. 그토록 많은 취향들을 담아내고, 그 많은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들을 꼼꼼히 펼쳐내는 것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들이다. 하지만 신원호 PD는 일찍이 그것이 여럿이 함께 하는 작업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착시현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예능 방식으로 작가와 PD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기획부터 캐릭터, 대사까지 하나하나 회의를 통해 만들어나가는 그의 방식은 협업이 어째서 지금의 제작 방식에 중요한 화두가 되는가를 보여준다. 많은 이들의 아이디어와 생각과 취향이 녹아들기 때문에 작품은 훨씬 다채로워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폭넓은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힘이 바로 그 협업에서 나온다. 

<미생>, <시그널>을 연달아 성공시킨 김원석 PD는 지금의 성공하는 작가들의 대부분이 ‘협업’을 얼마나 잘 해나가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고 말한 바 있다. 놀랍게도 그 역시 나영석 PD가 얘기한 것처럼, 성공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같이 협업하는 작가들의 가능성을 내 것처럼 빼쓰는 능력을 갖춘 이들이라고 했다. 

한때 ‘사단’이라고 하면 그저 관계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단’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졌다. 나영석 개인이 아닌 나영석 사단이라고 부르고, 신원호 개인이 아닌 신원호 사단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 밑바탕에 그 성취가 혼자 이룬 것이 아닌 여럿이 함께 한 협업을 통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다. 이제 성공하는 콘텐츠의 기본 조건으로 ‘협업’은 중요한 화두로 자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사단의 탄생’은 이제 보다 강력한 콘텐츠를 위한 기본전제가 되어가고 있다.(사진 :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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