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문화 속에 담긴 현실을 모색하는 곳 더키앙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658)
블로거의 시선 (96)
네모난 세상 (4447)
SPECIEL (19)
문화 코드 (1)
생활의 발견 (23)
술술 풀리는 이야기 (4)
스토리로 떠나는 여행 (10)
책으로 세상보기 (8)
문화 깊게 읽기 (4)
스토리스토리 (24)
사진 한 장의 이야기 (4)
드라마틱한 삶을 꿈꾸다 (7)
대중문화와 마케팅 (9)
Total13,187,077
Today108
Yesterday256

타임리프 판타지가 오히려 현실을 더 껴안아야 하는 까닭

이제 타임리프가 없으면 어딘지 심심하다? 아니 너무 타임리프가 많이 등장해 식상할 지경이다. 드라마를 보는 취향에 따라 최근 쏟아져 나오는 타임리프 설정에 대한 호불호는 나눠질 것이다. 종영한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조선시대에서 이어진 인연이 현재로까지 이어졌고,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는 고려시대의 무장 김신(공유)이 도깨비로 부활해 무려 7백여 년을 산 이야기를 다뤘다. 그리고 현재 방영되고 있는 <사임당, 빛의 일기> 역시 조선시대와 현재를 넘나드는 타임리프 판타지 설정이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또 이러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타임리프 설정의 드라마들은 올해도 계속 나올 전망이다. 3일 첫 방송되는 <내일 그대와>는 지하철을 매개로 하는 타임리프 판타지 설정이 되어 있다. 오는 3월 방송 예정인 <터널>은 ‘3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에서 현재로 온 아재 형사의 新문물 표류 수사기’를 다룰 것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이미 훨씬 이전부터 타임리프라는 판타지는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에서 다뤄진 바 있고, <시그널> 같은 작품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무전기라는 설정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별에서 온 그대> 같은 경우에는 죽지 않는 외계인이라는 설정으로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가 가능해졌다. 타임리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래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폭넓은 시간대를 다루는 설정으로 인해 사극과 현대극은 이제 완전히 구별되는 장르가 아닌 게 되었다. 

이러한 타임리프 설정의 드라마가 많아지는 것은 시간의 혼재가 주는 흥미로움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이 설정이 모두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신의> 같은 고려시대의 최영 장군이 현재를 넘나들며 여의사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하는 드라마는 생각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또 조선시대와 현재의 전생과 이생을 뛰어넘는 <푸른 바다의 전설> 역시 스토리적으로 성공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이른바 순환우주의 세계관을 끌어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사임당> 역시 아직까지 그 성공을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무전기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 <시그널>이나 고려시대의 전생과 현재의 이생을 도깨비와 도깨비신부, 저승사자의 이야기로 풀어낸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는 대중적인 성공은 물론이고 작품성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똑같은 타임리프라고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이런 성패를 가르게 된 것일까. 

흔히들 타임리프라는 시간을 넘나드는 판타지 설정은 그 자체의 흥미로움에 시청자들이 빠져들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타임리프라는 판타지 설정은 그 허구를 이어주는 강력한 현실적인 동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저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전락할 위험을 지닌다. 현재에서 갑자기 과거로 소환됐다면 그런 판타지가 왜 필요한가를 그 작품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시그널>의 판타지가 성공했던 건 무전기 설정 그 자체 때문이 아니고 그런 판타지를 통해서라도 과거로 돌아가 미제사건을 해결하고픈 강렬한 현실적 열망이 그 동인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그널>의 김원석 감독은 무전기라는 판타지 설정에 대한 현실적 근거를 자세히 넣으려고 굳이 애쓰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중요한 건 판타지 설정 자체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하려는 현실적인 정서나 갈망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라는 것. 

<도깨비>가 성공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심지어 도깨비나 저승사자 같은 초월적 존재를 등장시키고 있지만 이들을 통해 실제 하려는 이야기는 삶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사랑과 기억이 있다면 죽음은 그저 불행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 마찬가지로 영생한다는 것이 행복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이 드라마는 판타지 설정을 통해 이야기해줬다. 물론 이 이야기는 지금의 힘겨운 현실상황에 처한 대중들에게 위로를 주기에 충분했다. 

타임리프라는 설정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설정이 건드리는 현실적인 정서가 더 중요하다. 타임리프는 그저 그림을 멋지게 만들기 위함이거나 과거와 현재를 뛰어넘는 상상력의 자유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그래서 항상 그것이 왜 필요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면 그 드라마의 타임리프가 성공적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

Posted by 더키앙

기황후? 차라리 노국공주를 다루는 편이...

 

국적만 고려인이면 무조건 사극의 주인공이 되도 문제가 없는 걸까. <기황후>에 쏟아지고 있는 논란을 들여다보면 역사왜곡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사극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달라진 지 오래다. 역사라기보다는 극이라는 데 더 방점이 찍히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 역사적 사실 혹은 아예 없는 사료에 상상력을 덧붙이는 일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게 되었다.

 

'기황후(사진출처:MBC)'

그런데 <기황후>는 시작도 전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휘말렸다. 고려에서 태어나 원나라에 공녀로 팔려간 후 원나라 황제 혜종의 눈에 들어 황후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사료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에 오르게 했고, 원나라에 고려의 풍습을 전파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황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 여성을 과연 고려인으로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생긴다.

 

황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은 그저 개인적인 성취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고려의 공물을 늘리고, 오빠인 기철이 권력을 쥐게 하면서 고려를 농단한 사례가 있으며, 결정적으로 공민왕이 반원 개혁정책으로 기철을 죽이자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했던 사실이 있다. 과연 이런 인물을 고려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저 태생이 고려라고 해서 전혀 고려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않은 그녀를 우리네 사극의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것은 실로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즉 <기황후>에 쏟아지고 있는 논란은 역사왜곡의 문제도 문제지만 왜 그녀 같은 인물을 지금 사극의 주인공으로 세우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더욱 비롯되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이완용 같은 친일에 앞장 선 인물을 조선을 개화한 인물처럼 묘사해 사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글로벌 어쩌고 하는 그럴 듯한 포장을 씌운다고 해서 이런 사극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왜곡 논란을 떠나서 현재의 사극에 더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현 시점에서 내세워지고 또 각색되어도 될 만한가 하는 정당성이다. 제작진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기황후가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글로벌 여성’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친 역사의식의 부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고려 땅에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황후의 행적은 거의 원나라 사람에 가깝다. 그런 인물을 왜 굳이 우리네 사극의 주인공으로 세워야할까. 중국 드라마라면 모를까.

 

기황후를 다루느니 차라리 비슷한 시기에 고려로 오게 되었던 노국공주를 다루는 편이 나을 듯싶다. 원나라의 공주이지만 공민왕과 혼인한 후 그의 영원한 연인이자 정치적인 동반자 역할을 하며 공민왕이 강력한 반원정책을 펼치는데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던 인물이다. 국적은 원나라지만 고려인의 입장에 서서 고려인들을 위해 살았다는 점 때문에 우리네 사극에서는 여러 차례 노국공주의 이야기를 다룬 바 있다. <신의>가 그렇고, <신돈>이 그렇다.

 

사극이 역사를 벗어버리고 상상력의 옷을 입었다고는 하나 적어도 지켜야할 선은 있는 법이다. 기왕에 <기황후>라고 역사적 인물을 제목으로 삼았을 때는 그녀가 우리네 역사에서 사극으로 다뤄질만한 인물인가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먼저 기황후를 그저 태생이 여기라고 우리네 역사적 인물로 바라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만일 기황후가 태생만 고려일 뿐 사실상 원나라 사람으로서의 행적을 보였다면 왜 그걸 우리나라에서 사극으로 만들어야 할까. 역사왜곡보다 더 큰 문제는 역사의식의 부재다.

Posted by 더키앙

사극과 의드의 만남, 그 진화의 계보학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는 <효경>에 실린 공자의 말은 동양의학에서 외과의 영역을 위축시켰다. 칼로 째고 바늘로 꿰매는 외과술은 이 효를 근간으로 하는 동양의 가치관과 부딪치면서 좀체 빛을 보지 못했던 것. 하지만 드라마는 사정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사극과 의학드라마라는 두 장르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극성 때문에, 최근 사극은 과거에는 좀체 존재하지 않았던 외과의에 주목하고 있다.

 

'마의'(사진출처:MBC)

<마의>에서 백광현(조승우)은 뼈가 썪어 가는 부골저를 치료하기 위해 스승인 고주만(이순재)의 뇌수술을 감행했다. 머리에 구멍을 뚫고 그 병변에 직접 약재를 투입했던 것. 하지만 파상풍 부작용에 의해 스승이 죽게 되자 도망자 신세가 되어 중국까지 흘러들어간 백광현은 다시 그 부골저라는 병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부골저를 앓는 청나라 황비를 고쳐 조선으로 돌아오려고 하지만 스승을 죽게 했다는 트라우마는 그를 괴롭힌다.

 

이처럼 <마의>는 뼈에 구멍을 내고 살갗을 갈라 병변을 제거해내는 외과술을 보여준다. 조선시대라는 배경에 외과술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제공한다. 즉 태반이 뒤틀어져 옆구리로 비어져 나온 아기를 수술로 받아내는 장면이나, 유방에 종양이 생긴 처자를 외과술로 치료하는 장면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외과술은 단지 볼거리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당대 신분사회 체계 속에서 외과를 천대하는 시선과의 싸움은 그 자체로 현 시대적 의미를 담아내기에 용이하기도 하다.

 

백광현이 인의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마의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말을 고치기 때문에 외과술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병을 바라보는 시선도 양반 상놈의 구분 없고 심지어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없는 바로 그 똑같은 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마의>에서 백광현이 대단한 것은 그 놀라운 손기술이 아니라 신분과 사회와 풍습의 제약 속에서도 인간의 몸을 똑같은 생명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일 것이다.

 

바로 이 생명에 대한 현대적인 가치는 과거의 신분제 같은 가치와 충돌을 일으키면서 의미 있는 갈등들을 만들어낸다. 한 촉망받는 인물의 성장이 태생적으로 차단되는 조선 사회의 경직성은 이 시대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끊겨진 성장의 사다리’를 환기시킨다. 바로 이 천한 태생 때문에 심지어 생명을 살려낸 외과술조차 천시하는 세상이다. 사람 몸에 칼질을 하는 것은 ‘백정’이나 하는 짓이라 치부하며 오히려 그 앞길을 막아서는 행위는, 작금의 실력이 아닌 태생으로 미래가 결정되는 우리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제중원>에서 그 주인공인 황정(박용우)이 백정이었다는 사실은 조선에서의 외과술을 소재로 하는 사극이 어떤 동일한 시각을 갖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구한말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제중원’ 같은 서양식 의료기관을 세우기 시작하던 그 혼돈의 시기에 황정은 소 잡는 칼을 사람 살리는 칼로 변모시킴으로서 근대적인 인간을 탄생시킨다. <제중원>에서 우두백신을 만들어 예방접종을 하는 장면은 그래서 근대적 사고방식, 즉 과학적 사고방식을 조선사회에 접종하는 장면처럼 그려진다. 어느 정도 생채기가 남겠지만 그것은 결국 합리적인 근대적 이성을 형성해내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제중원>은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하이브리드를 시도한 공적이 컸지만 초반의 신선한 발상과 시도가 드라마의 과정의 재미로는 이어지지 못한 점이 있다. 후반부로 와서는 본래 하려던 이야기에서 자꾸만 멜로로 주저앉는 안타까움을 보였던 것. 하지만 이 하이브리드의 가능성은 이후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접목을 하나의 트렌드로 만들었다. <닥터 진>과 <신의>는 이 하이브리드에 대한 욕망이 SF와 판타지까지 나간 경우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했던 <닥터 진>은 조선으로 갑자기 떨어지게 된 진혁(송승헌)이 생명을 구해내려는 의사 본연의 마음과 그로 인해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역사와의 대결구도를 흥미롭게 그려냈다. 반면 <신의>는 타임 터널을 통해 고려말로 들어가게 된 성형외과의 유은수(김희선)와 최영(이민호)의 만남을 다뤘지만 본격적인 의학드라마와 사극의 접목이라기보다는 멜로에 머무는 한계를 보였다. 어쨌든 두 작품은 SF나 판타지라는 장르적 장치를 등에 업고 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역사극이나 외과술에 대한 리얼한 접근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런 의학드라마와 사극의 하이브리드를 보여준 작품들의 계보를 통해 바라보면 <마의>가 가진 가치를 새삼 느낄 수 있다. <마의>는 이 하이브리드를 마의라는 당대의 직업적 성격에서부터 끄집어내 자연스럽게 조선사회와 외과술을 연결시켜내면서도 동시에 그 이병훈표 사극 특유의 미션 구조를 통해 대중성까지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광현의 흥미로운 성장과정을 자연스럽게 보다보면 우리는 거기서 조선사회와 비견되는 우리 현재의 사회를 바라볼 수 있고, 현대적 가치가 더 돋보이는 생명에 대한 존엄을 발견할 수 있다. 사극이 의학드라마와 만나 생겨난 진화는 그래서 대중성과 진지함을 모두 잃지 않는 <마의>에 의해 어쩌면 꽃을 피우고 있다고 여겨진다.

Posted by 더키앙

이병훈 사극이 인기 있는 이유

 

똑같은 사극과 의학의 만남인데 어째서 이렇게 다를까. <신의>는 타임리프라는 코드를 활용해 공민왕(류덕환) 시절로 들어온 현대의 유은수(김희선)와 최영(이민호) 장군의 이야기를 다룬다. 사극과 의학이라는 두 극성 강한 장르가 만났지만 그 화학반응은 약하게만 느껴진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마의'(사진출처:MBC)

가장 큰 이유는 대중들이 몰입할만한 요소들이 없기 때문이다.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극성이 강한 이유는 그것이 드라마에서 극적 대결의 결과로서 인간의 죽음을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거기 민초가 있기 때문이다. 사극이 늘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왕이건 평민이건 노비건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학드라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아픈 서민들의 힘겨운 일상들이 투영된다.

 

하지만 <신의>에는 그것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민초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공민왕과 기철(유오성)의 권력 대결만 첨예화되어 있다. 중심인물인 유은수와 최영 역시 민초들을 향한 소명의식을 보이기보다는 자신들의 사적인 이야기만 보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작금의 대중들이 이 사극을 볼 이유가 없어진다. 완성도의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신의>가 좀체 시청률이 오르지 않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이제 막 시작한 <마의>는 사극과 의학이라는 두 장르가 가진 힘이 어떻게 발휘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말을 고쳐주는 수의사가 사극의 제목으로 등장하는 건, 그것이 당대 한의학 속에서 외과의학의 한 부분을 접목시키기 위함이다. 마의에서 어의에까지 오르는 그 성장드라마도 극성을 높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술이다.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는 그 마음은 의학드라마에 대한 대중정서를 끌어안는다.

 

또한 사극으로서 신분 계급의 차가 분명한 이들이 첫 회부터 그 계급을 넘어선 우정을 보여주는 장면 역시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는 요인 중의 하나다. 양반이지만 의원의 길을 선택한 강도준(전노민), 마의에서 의원이 된 이명환(손창민), 그리고 의녀지만 천재적인 의술을 가진 장인주(유선)가 신분과 성별과 가문의 차별을 넘어 우정을 보여주는 모습은 작금의 청춘들의 판타지를 담아낸다. 태생과 상관없이 능력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풍경이 주는 감흥이란.

 

이명환이 자신이 살기 위해 강도준을 고변해 죽게 만드는 그 과정은 사극이 다루는 계급적 상황 속에서의 선택과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는 강도준의 아들은 멀리 비천한 세계 속으로 던져졌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성장 과정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극이 대중들을 사로잡고 그 정서를 어루만지는 방식이다. 여기에 의학드라마의 장르로서 인술이 덧붙여지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런 구도는 우리가 익숙히 이병훈 사극에서 봐왔던 구조다. 대표적인 작품이 <대장금>일 것이다. <대장금>이 수라간 상궁에서 시작해 최고의 의녀로까지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마의>는 그 남자 버전처럼 보인다. 물론 그 디테일한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그 정서가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이병훈 사극이 오래도록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의>에는 있고 <신의>에는 없는 것. 바로 왜 대중이 그 드라마를 봐야 하는가 하는 이유, 즉 대중정서가 아닐까.

Posted by 더키앙

'신의', 김종학, 송지나 작품 맞나

 

과연 이것이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의 합작품이 맞는 것일까. <신의>가 주는 실망감은 과도한 기대 때문이 아니다. 물론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손을 잡았다는 점, 이들이 지금껏 시도하지 않았던 타임슬립 소재로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퓨전을 다뤘다는 점, 김희선과 이민호 같은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는 것(연기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지명도에 대한 기대다), 게다가 100억 대의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라는 사실이 주는 기대감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신의'(사진출처:SBS)

하지만 <신의>의 실망감은 기대치가 너무 커서 거기에 못 미쳤기 때문에 생긴 게 아니다. 이것은 타이틀 롤이 무색하게 기본 자체가 되어 있지 않은 드라마가 주는 실망감이다. <신의>는 연출에서도 대본에서도 연기에 있어서도 그 어느 것 하나 어설프지 않은 것이 없는 졸작이다. 타임슬립이라는 소재를 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CG는 어색하기 이를 데 없고, 사극의 질을 담보하는 미술이나 조명은 너무 조악해서 마치 중국 B급 무협드라마를 보는 것만 같다. 특히 100억대의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스케일과, 애니메이션 처리된 장면들은 그것이 하나의 연출이라기보다는 제작비를 아끼기 위한 방편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연출의 문제만이 아니다. <신의>는 대본에 있어서도 송지나 작가의 작품이 맞는가 싶게 구성이 어설프다. 기황후의 오빠로 고려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 기철(유오성)과 최영(이민호)의 대결구도도 막연히 정치적인 대립만이 이해될 뿐, 그다지 감정을 끌어낼만한 팽팽한 긴장감이 생겨나지 않는다. 공민왕과 그 일행들이 원나라를 빠져나오는 과정도 밋밋하기 이를 데 없다. 너무나 전형적인 캐릭터 역시 매력을 갖기 어렵다. 공민왕(류덕환)의 정치적 입장이나 최영과의 관계 역시 뭔가 특별한 사건이 없이 대사로 일관되다 보니 너무 설명적으로 만들어진 느낌이다.

 

이런 연출과 대본 위에서 연기가 살아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신의>는 타임슬립을 장치로 의학드라마와 사극을 퓨전한 작품이다. 연기가 호락호락할 수 없다. 이야기가 허공에 붕 떠 있기 때문에 자칫 연기 또한 현실감이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사극이 가진 진중함과 진지함이, 현대에서 타임슬립으로 넘어간 신의 유은수(김희선)의 엉뚱하고 가벼운 코믹한 상황과 부조화를 이룰 수 있다. 최영의 진지함이나 유은수의 엉뚱함이 부딪치면서 양측이 모두 과장되게 보여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민호나 김희선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민호는 <시티헌터>를 통해 보여주었던 그 진지함을 보여주고 있고, 김희선은 확실히 자신이 늘 보여주던 그 비슷한 이미지를 던져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연기는 연기자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어떤 대사와 어떤 영상연출로서 보여지느냐에 따라 연기의 질감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최민수가 까메오로 등장하고 유오성이 홀로 단단한 악역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는 건 어설픈 대본과 연출 때문이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신의>는 과거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참극이었던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100억대의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 드라마라고 했지만 그 액수가 무색하게 거의 B급 드라마가 되어버린 졸작. 몇몇 잘 나가는 한류스타를 세워두고 제작비를 투자받는 것으로 작품과는 별개로 수익을 노리곤 했던 무늬만 한류 드라마들은 왜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일까.

 

<신의>를 드라마의 완성도와 거의 동급으로 여겨지곤 했던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만들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째서 이런 조악한 드라마가 만들어졌던 것일까. 이제 고작 4회가 지난 것이지만 이러한 섣부른 비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학드라마로서의 전문적 디테일도 잘 보이지 않고, 거의 무협지 같은 내용으로 사극으로서의 면모도 잘 보이지 않는 <신의>에서 그 어떤 진정성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100억 대의 제작비까지 들여가며 만들어졌다는 <신의>는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Posted by 더키앙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