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이야기’의 김강우, ‘카인과 아벨’의 백승현

악역이야말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힘이라고 할 때, ‘남자이야기’의 채도우(김강우)는 실로 매력적인 악역이라 할 수 있다. 잔뜩 인상을 쓰면서 악다구니를 해대는 ‘에덴의 동쪽’의 신태환(조민기)이 온몸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악역임을 드러낸다면, 채도우는 최대한 그걸 숨김으로써 그 속의 섬뜩한 면모를 보여준다.

채도우라는 악역의 핵심은 ‘감정이 없다’는 것. 어린 시절 늘 병상에 누워 진통제로 살아가는 어머니에게 주사를 끊임없이 내주며, ‘엄마, 이젠 행복해?’하고 묻던 인물이다. 그 감정 없음은 타인이건 가족이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끔찍하다. 그는 아버지 채회장(장항선)과도 대놓고 맞서는 패륜아이기도 하다.

감정이 없는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친구 앞에서 무릎도 꿇고, 심지어 눈앞에서 친구를 배신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른바 사이코패스라고도 불리는 채도우의 이런 감정 없는 악역이 상징해서 보여주는 건 이 드라마의 주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바로 자본이라고 하는 감정 없이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존재를 채도우라는 캐릭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감정 없는 자본(채도우)이 이른바 작전이라 불리는 숫자놀음을 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숫자 놀음이란 그 숫자 밑에 놓여진 사람의 존재 따위는 지워버리기 일쑤다. 따라서 자본을 가진 자의 횡포는 그 숫자 밑에 놓여진 사람을 파탄에 이르게도 하고 죽음으로도 내몬다. 숫자만을 보는 채도우에게 감정이란 있을 수 없다. 즉 채도우란 캐릭터는 무감정한 돈의 생리로 움직이는 이 사회를 축소해 보여준다.

한편 ‘카인과 아벨’에서 주목할 악역은 최치수(백승현)다. 주인공인 이초인(소지섭)과 실제 대결구도를 이루는 인물은 이선우(신현준)지만, 왜 최치수가 더 주목되는 걸까. 그것은 이선우가 가진 형이라는 입장이 악역으로서 복합적인 성격을 띄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선우라는 악역은 대놓고 시청자들을 도발한다기보다는 어딘지 동정이 가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그가 뇌종양이라는 병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이선우가 가진 너무 많은 성격적 소재들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그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반면 최치수는 사실 그다지 주목할 만한 악역의 성격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는 단순히 정해진 소지섭의 B급 악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치수라는 인물은 백승현이라는 연기자를 통해 그 존재감을 살려냈다. 사실 최치수는 그다지 대사도 없고 상황에 대한 심리묘사도 거의 없다. 하지만 짧은 순간에 보여주는 백승현 특유의 표정과 목소리 톤은 보는 이를 소름 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악역이 이제 웬만한 주인공보다 더 주목되는 이유는 사실상 대립구도에서 드라마를 극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이 악역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제는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딘지 꾸며낸 듯한 달달하고 교훈적인 주인공들보다는 이 사회적 문제들을 독하게 표현해내는 악역이 오히려 리얼한 매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악역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역할을 연기해내는 연기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강우와 백승현은 악역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 배우들이다.

사극의 그림자 악역, 그들에게 박수를

드라마의 반은 그 몫이 악역이다. 드라마라는 갈등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반대편에 선 악독한 인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 쉽게 이겨낼 수 있는 적을 두고 무슨 재미로 드라마를 볼까. 특히 대결구도가 관건이 되는 사극엔 화끈하게 욕먹고 확실하게 힘을 만들어주는 악역이 주인공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주인공만큼 사극을 장악해나가는 소문난 악역이 있으니, KBS ‘대조영’에서 신홍 역할을 맡고 있는 김규철과, MBC ‘주몽’에서 금와왕의 부인, 원후 역할을 맡고 있는 견미리다. 이 관록의 연기파 배우들은 공교롭게도 과거 ‘불멸의 이순신’과 ‘대장금’에서 확실한 악역을 소화해낸 바 있다.

몸을 아끼지 않는 명연기, 김규철
연극무대를 고집했던 그의 연기는 애초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서편제’에서 오정해와 공동주연을 했던 것 이외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4년부터 드디어 ‘불멸의 이순신’과 ‘부활’로 악역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악역 연기는 음모에 능한 모사꾼. 주로 나라를 팔아먹고 배신을 일삼는 그의 연기에 걸려들면 제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욕이 나올 정도로 뿜어내는 카리스마가 강하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임천수 역할로 분한 그는 청소년기를 이순신과 함께 보내던 선량한 역할에서부터 아비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결국 이순신을 배신하는 역할까지 소화해낸다. ‘대조영’의 신홍 역할 역시 희대의 간웅이자 매국노. 신홍은 부모가 적진에 잡혀있는 부지광을 회유해 요동성의 문을 열게 하는 인물로 시작해, 지금은 연남생의 책사로 역시 당나라와 연남생을 손잡게 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향후에는 부씨 집안의 장자인 이해고를 도와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대조영을 괴롭힐 작정이다.

그의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2005년 KBS 수목 드라마 ‘부활’에서 악역, 최동찬 역을 소화해내며 악역도 갈채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특히 사고로 골절 수술을 받았지만 끝까지 휠체어 연기 투혼을 펼치며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킨 그에게 시청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표독 연기 물오른 견미리
견미리의 악역 이미지는 대개가 ‘대장금’ 최상궁에서 나온 것. 수랏간 최고상궁을 두고 한상궁, 대장금과 벌이는 대결구도에서 확실한 악역을 선사했다. ‘대장금’의 힘은 온전히 견미리가 펼친 표독스런 악역이 반이라 할 정도로, 그녀는 출세에 대한 무서운 집념을 가진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최상궁 역을 확실하게 소화해냈다.

최근 ‘주몽’에서 활약하고 있는 견미리는 궁궐 내에서 자식을 앞에 둔 팽팽한 대결구도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주몽’이 좀체 부여를 벗어나 나라 건국에 일찍이 앞장서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자식들을 앞세운 원후 역의 견미리와 유화부인 역의 오연수의 대결이 볼만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악역은 대개가 ‘자기 사람’을 성공시키려는 욕망에서부터 비롯된다. ‘대장금’에서 금영을 앞세워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다면 ‘주몽’에서는 자식 대소와 영포를 앞세운다. ‘주몽’에서 다른 점은 금와의 유화부인에 대한 사랑을 보며 살아온 질투심과 자식에 대한 모성애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스타’가 아닌 ‘연기자’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이제 중견 탤런트의 길을 걸어가는 그녀는 어떤 역할이 주어져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녀의 연기 결은 폭이 넓다. 하지만 이 어쩔 수 없는 악역의 매력은 그 중 백미가 아닐까.

사극에서는 칼을 휘두르는 사람보다 칼에 맞고 쓰러지는 사람이 더 잘해야 한다고 한다. 늘 빛만 보다 보면 그 빛이 사실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는 깜박 잊는 경우가 많다. 김규철이나 견미리 같은 드라마 깊숙이 그림자를 만들어 빛을 강조해 주는 악역들이 없다면 사극은 결코 빛날 수 없다. 그들에게 박수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