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호불호 갈리는 압도적 볼거리와 약한 스토리 사이

영화 <안시성>은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로부터 시작한다. 달리는 말과 창과 칼을 들고 맞붙는 당 태종의 군대와 고구려군의 치열한 전장. 살점이 잘려져 나가고 피가 튀는 그 현장이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상황을 고스란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재연된다. 

그 영화의 도입 부분을 채운 전투 장면은 앞으로 이 영화가 어떤 걸 보여줄 건가를 말해준다. 제목만 들어도 그 내용을 모를 우리네 관객은 없을 소재. 20만 당나라 최강의 대군을 맞아 고작 5천의 병사들로 이를 물리친 양만춘 성주가 이끈 안시성 전투가 그것이다. 

KBS 대하사극 <대조영>에서도 다뤄졌고,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제작비 400억 중 상당한 액수를 소진시켜 결국 전체 드라마를 휘청하게 만들었던 게 바로 초반 안시성 전투 스펙터클이었다. 그 정도로 안시성 전투라는 소재를 재연해내려는 역사 콘텐츠들의 야심은 계속 있어왔다. 그러니 영화 <안시성>이 다루는 이야기는 이미 우리네 관객들이 대부분 아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재연해낼 것인가가 이 영화가 가진 관건이었다.

<안시성>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다소 전형적이고 도식적이다. 백성들에게 자애로운 성주 양만춘(조인성), 그와 정치적으로 부딪치는 연개소문(유오성), 양만춘을 따르는 무사들로 부관인 추수지(배성우), 도끼를 쓰는 부월수장인 활보(오대환), 그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챙기는 환도수장 풍(박병은)이 있고, 양만춘의 여동생인 백하부대장 백하(설현)와 그의 연인인 기마부대장 파소(엄태구)가 등장한다. 캐릭터 설명만으로도 그들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해나갈 것인가가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그런 인물들을 <안시성>은 배치해놓는다. 

이렇게 쉽게 전형적인 인물을 사용하고, 안시성 전투라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소재를 가져왔다는 건, 이 영화가 주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전투 장면의 스펙터클이라는 걸 명백히 해준다. 그래서 영화는 이야기의 재미보다는 볼거리의 재미가 훨씬 더 관객을 몰입시킨다. 특히 우리네 사극에서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공성전’을 다룬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밀고 당기는 전투의 스펙터클은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성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당 태종과 이를 막아내면서 반격을 가하는 양만춘의 치열한 두뇌싸움은 흥미롭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공격 속에서 이를 뒤집는 전략들은 ‘전쟁 스펙터클’이 보여줄 수 있는 극점들을 보여준다. 특히 공간감을 잘 인지하게 만든 연출은 관객이 안시성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여러 국면들에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만 이렇게 스펙터클이 강렬하게 전편에 채워지다 보니 가끔씩 전투의 소강상태에서 이어지는 드라마들이 너무 소소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물을 다소 전형적으로 그려 놓은데서 빚어진 결과이기도 하고, 애초부터 인물을 파기보다는 전쟁의 양상에 더 집중하겠다는 영화의 전략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안시성>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다. 볼거리를 찾는 관객이라면 <안시성>의 시종일관 이어지는 전쟁 스펙터클이 압도적인 재미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보다 섬세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원하는 관객이라면 인물에 대한 평이한 이야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건 <안시성>은 극장에서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영화라는 점이다. 시각과 청각이 아우러진 그 시스템 속에서 더더욱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는.(사진:영화'안시성')

'선덕여왕'의 전쟁신이 MBC사극에 위치하는 곳

사극에서 전쟁이라는 스펙터클이 가지는 힘은 자못 크다. 다른 내용을 차치하고라도 그 장면 자체가 대단한 볼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KBS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김명민)이 치르는 일련의 해전들은 마치 스포츠 중계처럼 방영됐다. 예고편에서도 마치 한일전이라도 치르듯 '이번엔 어디서 벌어진 무슨 해전이다'하고 자막이 붙었고, 실제로 사극을 시청하는 입장에서도 그 관점으로 스펙터클한 전쟁의 흥미진진함을 만끽했다.

'태조 왕건', '대조영' 같은 일련의 KBS 대하사극이 주말의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능수능란한 전쟁과 전투신의 연출이었다. MBC와 SBS에서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그 노하우를 단번에 체득하기는 어려웠기에 사극 하면 KBS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것은 고구려 사극에 와서 정점을 이뤘다. 물론 '주몽'이 특유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늘 아킬레스건처럼 따라오는 건 '소소한 전쟁 신'이 가진 왜소함이었다. SBS는 '연개소문'의 단 2회 동안의 전쟁 신을 찍기 위해 몇 개월 동안 어마어마한 물량을 쏟아 붓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KBS는 '대조영'의 안시성 전투를 통해 역시 지존의 면모를 과시했다.

전쟁사극이 요령부득인 MBC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허준', '상도' 같은 전쟁이 아니라도 인물들 간의 미션들이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구축하는 그런 사극들이 MBC사극에 자리했다. MBC 사극에 어떤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태왕사신기'부터였다. 엄청난 제작비도 제작비지만 완성도에 공을 들인 결과, '태왕사신기'는 CG와 전쟁 장면의 연출에 있어서 한 단계 높은 성과를 보여줬다. 그리고 '선덕여왕'에 와서 이제 MBC사극은 아킬레스건으로 지목되던 전쟁사극의 한계를 한 발 넘어서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선덕여왕'의 신라와 백제 간에 벌어진 전쟁 에피소드가 남달랐던 것은 스펙터클에 충실하면서도 디테일을 잊지 않는 연출 덕분이었다. 김서현(정성모)이 이끄는 신라군이 아막성을 얻기 위해 벌이는 공성전에서는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상황에 성벽을 뛰어오르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다 떨어지는 등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덕만(이요원)과 동료들이 처음 전쟁을 접하며 느끼는 두려움과 이를 차츰 적응해가는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

고립되어 백제군에게 포위된 덕만과 화랑들이 원진을 짜고 대항해가는 장면 역시 인물의 감정을 살림으로써 왜소해 보이는 전투를 극적 긴장감으로 이끌었다. 여기에 설원랑(전노민)이 백제군을 속이기 위해 벌이는 고육지책은 전쟁 스펙타클의 또 한 요소인 전술적인 묘미를 안겨주었다. 백제군을 물리치고, 동시에 정적이랄 수 있는 김서현과 김유신(엄태웅)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거양득을 취하는 모습은 전쟁과 정치가 맞물리는 재미를 선사한다.

사실 '선덕여왕'의 이러한 전쟁 장면들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은 그 비교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만일 저 '적벽대전' 같은 작품과 비교한다면 '선덕여왕'의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전투에도 못 미치는 장면으로 치부될 수 있다. 또 일련의 명장면이라 일컬어지는(예를 들면 '불멸의 이순신'의 해전들이나 '대조영'의 안시성 전투 같은) 장면들과 비교해도 여전히 소소한 느낌을 벗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스펙터클의 완성도는 노하우도 노하우지만 기본적으로 제작여건과 함수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선덕여왕'이 보여준 전쟁 신의 가치를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최근 들어 사극에서의 전쟁 스펙터클은 디테일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과거처럼 어느 나라와 어느 나라가 싸우고 누가 전쟁을 이끌었고 어떻게 이겼는가 하는 그 교과서적인 내용의 전달보다는, 전쟁 속에서의 인물들의 실감나는 심리나 그 관계들이 엮어가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거대한 전쟁과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시청자들을 방관자로 세워놓던 스펙터클에서, 이제는 그 속에서 같이 뛰는 스펙터클을 대중들이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덕만과 그 일행을 앞세운 '선덕여왕'의 전쟁 신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말드라마를 보면 연기자가 보인다

최근 홀연히 나타나 주말 드라마의 판도를 바꿔놓은 연기자가 있다. 바로 사극의 제왕, 유동근. 그는 갖은 비판과 혹 허우적대던 ‘연개소문’을 단박에 기대감으로 채웠다. 그의 출연과 함께 ‘연개소문’이란 사극은 지금부터 새로 시작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심지어는 지금까지의 ‘연개소문’이 걸어온 길은 그저 사족에 지나지 않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렇게도 어려웠던 시청률 25%를 손쉽게 넘기면서 수위를 지켜오던 경쟁사극 ‘대조영’을 제쳐버렸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단지 유동근이라는 대배우만의 힘이었을까. 여기에는 물고 물리면서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는 연기자들의 부침이 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장 불리한 시간대를 지킨 ‘대조영’의 연기자들
주말드라마 삼파전에서 가장 불리한 시간대를 갖고 있는 것이 ‘대조영’이다. 9시부터 시작하는 ‘연개소문’과 10시부터 시작하는 MBC 주말극 사이인 9시30분대에 끼어있어, 양 드라마의 공격을 받는 형국이 되기 때문. 만일 ‘연개소문’의 청년시절이 좀더 존재감 있게 흘러왔다면 ‘대조영’은 맥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시절의 ‘연개소문’은 존재감이 없었다. 그나마 그 드라마의 힘을 이어준 것은 김갑수라는 괴물 배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특유의 광기 어린 연기로 수양제역을 소화함으로써 연개소문의 공백을 채워 넣었다.

‘연개소문’과 함께 한창 ‘환상의 커플’이 상종가를 치며 앞뒤로 압박해왔을 때 ‘대조영’을 지켜낸 인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조영’의 연개소문 역을 한 김진태였다. 호랑이 같은 눈빛을 부라리며 안면근육을 떨며 호통을 치는 모습에 빨려들지 않을 시청자가 없었다. 때론 자상한 아버지처럼, 때론 광기 어린 제왕처럼 변신의 변신을 보여주는 김진태 앞에 양만춘 역할의 임동진이 가세하자 그 힘은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연개소문이 죽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이 두 카리스마의 충돌이 빚어내는 숨막히는 연기대결이 펼쳐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드라마는 제목이 ‘연개소문’이나 ‘양만춘’이 아닌 ‘대조영’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인공 대조영이 차츰 앞으로 나오고 그들은 역사 속에 사라져야할 인물들이었다.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김진태가 사라진 자리를 양만춘 역의 임동진이 채워 넣었으나 그마저 사부구(정호근 분)가 제거해버리자 ‘대조영’의 드라마적인 힘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빈 자리를 온전히 대조영 역할의 최수종이 채워놓기도 전에 유동근이 출연한 것이다.

진짜 ‘연개소문’을 만드는 연기자들
결과적으로 ‘대조영’에서 만들어놓은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기대감은 새로운 ‘연개소문’을 도와준 격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새롭게 주말드라마의 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유동근 이외에도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이 선 굵은 카리스마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책사 역할로 돌아온 우리의 영원한 시라소니 조상구, ‘야인시대’의 나미코 역할은 물론이고 ‘대장금’에서 장금과 열띤 경쟁을 벌였던 이세은, ‘태조 왕건’에서 견훤 역할을 했던 서인석 등이 가세하자 유동근의 절대 카리스마와 조화를 이루면서 기대감을 만들었던 것. 여기에 ‘대조영’에서 익숙해진 ‘검모잠(안승훈 분)’같은 인물의 출연은 재미를 더해주었다.

따라서 이것은 지금까지의 ‘연개소문’과는 다른 카리스마 넘치는 드라마가 연출될 공산이 크다. 적어도 연기자들만큼은 확실한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걱정되는 것은 마치 역사를 가르치는 듯한, 설명조의 지지부진한 전개로 비판을 받아온 이환경 작가가 얼마나 속도감 있게 이들 연기자들의 맥을 살리면서 긴박한 드라마를 엮어나갈 것인가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기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캐릭터의 설정이나 스토리 진행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 ‘연개소문’은 그 연기자만으로 충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얀거탑’의 노련한 연기자들
이 경쟁에 가세하는 것이 바로 ‘하얀거탑’의 노련한 연기자들이다. 상황으로 보면 ‘대조영’을 진퇴양난의 입장에 빠뜨린 것은 바로 이들이다. 이름만 들어도 존재감이 팍팍 느껴지는 외과과장 이주완 역할의 이정길.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상황에 따라 굴욕적인 면모 역시 거침없이 보여주는 호연에 힘입어 네티즌들에게 ‘인쇄정길’, ‘굴욕정길’로 불릴 정도다. 의국실로 프린트되는 외과과장후보 이력서를 가로채기 위해 달리는 모습과 노민국의 호텔방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으로 이런 호칭이 붙여졌다.

이정길과 손을 잡았다가 또 뒤통수를 때리는 부원장 우용길 역할의 김창완은 특유의 능구렁이 연기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의 연기는 뒤통수를 치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 그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그 놀라운 연기변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물론 주인공 장준혁 역할의 김명민은 특유의 야누스적인 면모를 과시하며 악마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정이 느껴지는 쉽지 않은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저 영화 ‘괴물’에서 주목받은 변희봉(오경환 역), ‘영웅시대’에서 천태산의 차남 역할로 나왔던 정한용(민충식 역), ‘제5공화국’에서 허문도 역할로 열연했으며 각종 사극에서 감초 역할을 확실히 해준 이희도(유필상 역) 역시 이 드라마의 힘을 만들어주는 연기자들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이들 얼굴
요즘 주말드라마는 유독 클로즈샷이 많다. 그것도 극단적인 클로즈샷이다. 미세하게 떨리는 근육까지 보일 정도로 화면의 거의 2/3를 채우는 이들 연기자들의 얼굴. 이러한 장면들은 드라마의 성패에 얼마나 연기자들의 존재감이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드라마 속에 확실한 존재감을 주는 연기자가 있다면 그 드라마는 그 힘을 기반으로 어떻게든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이들 존재감을 주는 연기자가 주연이 아닐 경우, 이들 연기자들 사이에서 그 힘에 눌린다면 드라마의 중심 축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동근이라는 확실한 중심축이 선 ‘연개소문’은 일단 기선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얀거탑’ 역시 차츰 주인공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미 고정층을 확보한 ‘연개소문’의 아성을 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대조영’. 사실 지금의 주말드라마 판도를 가장 도와준 격이 되었지만, 가장 곤란한 시간대에 자리잡아 양측에 공격을 받는데다 아직까지 대조영으로서의 최수종이 확실히 자리매김을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 힘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분명한 것은 그 힘을 만들어 드라마를 성공으로 웃게도 하고 실패로 울게도 만드는 이들이 연기자들이라는 것이다.

고구려 사극들이 동시에 각 방송사에서 터져 나오다보니 묘한 일들도 벌어진다. 세 편의 고구려 사극 중, MBC 드라마 ‘주몽’이야 그 역사적 시기가 동떨어진 데다 방영요일도 달라 그다지 큰 영향은 없다. 하지만, 주말 저녁 시간대의 KBS ‘대조영’과 SBS ‘연개소문’은 다르다. 이 두 드라마는 역사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는 데다 같은 요일, 비슷한 시간대에 방영되기 때문이다. 두 드라마가 영향을 주고받는 그 중심에는 바로 연개소문이란 인물이 있다.

‘연개소문’엔 없고, ‘대조영’엔 있는 것은?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연개소문’과 ‘대조영’은 초기 이야기 설정 부분에서 엉뚱한 인물들에 초점이 맞춰졌다. SBS 사극 ‘연개소문’은 청년기로 들어서면서 연개소문보다는 수양제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한 회분에서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시간은 고작해야 10분을 넘지 않는데, 훨씬 많은 시간이 수양제에게 할애되었다. 그것은 사극을 끌어가는 구심점으로 젊은 연개소문의 힘보다 수양제의 그것이 더 강력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상황을 보면 ‘연개소문’이란 제목이 무색할 지경이다.

반면 KBS 사극 ‘대조영’은 정통사극을 표방하며 대조영이란 인물이 차곡차곡 극의 힘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중간에 대조영만큼 강력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대중상, 양만춘, 연개소문이 그들이다. 그들 중 최근 최후를 맞이한 연개소문의 힘은 ‘대조영’이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구심점이 되었다. 실제 아버지인 대중상보다 연개소문이 더 대조영의 아버지 같이 그려지는 것은 그 힘을 어느 정도 주인공에게 분산해 가지려는 드라마의 의도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최후로 인해 고구려가 무너진다’는 극 본연의 설정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드라마 장악력은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연개소문이란 역사적 인물은 SBS 사극 ‘연개소문’엔 없고 KBS 사극 ‘대조영’엔 있는 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 역할을 맡은 연기자들의 공력 또한 중요한 요인이 됐다. ‘연개소문’에서 수양제 역할을 맡은 김갑수는 광기 어린 황제의 모습을 그려내며 사극의 또 다른 재미인 ‘강한 적’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한편 ‘대조영’에서 연개소문 역할을 맡은 김진태는 카리스마 연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보여주고 인상적인 최후를 맞았다.

‘대조영’의 연개소문 사망 그 후
이렇게 해서 두 사극에서 동시에 존재하던 한 연개소문은 사라졌다. 그런데 ‘대조영’에서 죽은 연개소문의 유령이 SBS 사극 ‘연개소문’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그것은 ‘대조영’의 연개소문이 살아있을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 만일 ‘대조영’ 없이 단독으로 ‘연개소문’이 방영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연개소문이란 역사적 인물이 어디서도 각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주인공 없는 '연개소문'이란 드라마를 시청자들이 얼마나 참을성을 갖고 봐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연개소문’에는 없는 연개소문이 같은 시간대 ‘대조영’에는 있었다. ‘대조영’을 통해 역사적 인물인 연개소문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것은 역할을 다하고 사망한 뒤에도 여전히 남았다. 그리고 이제 몇 회분이 지나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유동근의 연개소문을 보게 될 터이니, 사실 이 연개소문 없는 ‘연개소문’의 시기를 메워준 것은 ‘대조영’의 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조영’의 카리스마들, ‘연개소문’에서 기대된다
비슷한 소재를 같은 시간대에 양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것은 때론 혼동을 낳게 만들며 이것은 비판의 소지가 충분하다. ‘대조영’의 양만춘을 보다가 ‘연개소문’의 양만춘을 보면서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혼동에 의해 ‘연개소문’은 톡톡한 이점을 얻게 되었다. ‘대조영’에서 우리는 이미 대조영만이 아닌 양만춘, 대중상 같은 여러 장수들의 매력적인 카리스마를 목격했다. 그러니 지금 저 ‘연개소문’에서 나오는 젊은 양만춘에게 어찌 관심이 가지 않을까.

이것은 저 드라마 ‘주몽’의 시청자들이 RPG 게임처럼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되는 주몽에 매료되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대조영’에서 등장한 카리스마들이 하나의 예고편 역할을 해주었다면 우리는 ‘연개소문’에서 그들의 성장과정, 혹은 성장한 모습을 기대할 것이다. 반면 ‘대조영’은 이제 이 카리스마들을 떨구고 자신만의 외로운 길을 새로 개척해나가야 되는 불리한 상황이 됐다. 하지만 결과를 속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연개소문’에 새롭게 생긴 이 기대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더 깊은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대조영’은 오히려 홀가분하게 맘껏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두 사극의 향방이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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