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사극의 영웅 뒤에 등장하는 그 부모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사극 속에 등장하는 영웅의 뒤에는 영웅을 키워낸 부모가 있고, 그 부모의 희생이 있다. 최근 고구려 사극 트로이카 시대를 열고 있는 고구려 사극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는 ‘부모, 가족 코드’가 시청자들의 피를 끓게 만들고 있다. 드라마 상에 등장하는 이들 부모들은 모두 똑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의 존재감은 각각 다르게 느껴진다. 이들 사극들은 영웅의 부모들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다
사극 속에 등장하는 영웅의 가족들은 모두 해체되어 있다. 주몽과 해모수, 그리고 유화부인이 그랬고, 연개소문과 연태조가 그랬으며, 대조영과 대중상, 그리고 달기가 그랬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지 못한다. 주몽은 해모수를 만나기까지는 그저 철없는 왕자에 불과했고, 연개소문은 연태조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근본을 알지 못했다. 또한 대조영은 달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개동이가 아닌 대조영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가족이 이렇게 해체되고 영웅이 자신의 신분을 모르게 된 것은 출생의 비밀과 연관이 있다. 주몽과 함께 등장하는 삼족오와, 연개소문과 대조영의 심상치 않은 탄생에는 모두 국가를 위협하는 대역(大逆)의 기운이 존재한다. 그러니 그들 가족이 온전할 리가 없다. 영웅의 탄생에 대역(大逆)이라는 모티브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시련을 따르게 하고 그 시련을 넘어서는 순간, 대역이 예고한 것처럼 거대한 국가, 혹은 영웅의 탄생을 예감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웅을 다루는 신화나 전설에는 가족의 해체가 그 기본 전제가 되곤 한다.

부모들은 자식을 부정한다
그런데 이들 가족은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자신의 신분을 영웅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만나는 순간에 부모들은 자식을 부정한다. 주몽 앞에서 해모수는 자신을 아버지로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죽어갔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히 돌궐에서 자식인 연개소문을 만나게 된 연태조는 고구려에 대한 유업만을 남겼을 뿐, 홀연히 떠나버린다. 죽음 앞에서 달기는 자식인 대조영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이 어미임을 부정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들이 자신들의 부모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는 다시 부모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이다. 드라마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구조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연출하게 해준다. 부모의 자식을 위한 거짓말과 그 거짓말이 탄로 나며 헤어지는 과정은, 갈망하던 가족의 인연이 막 생겨나는 그 즈음 다시 끊어버리는 효과를 준다. 그러자 영웅은 자신의 유업을 알게되고 그 의지를 한층 불태울 수 있게 된다.

자식을 위한 죽음 앞에 당당하다
이 마지막 순간에 영웅의 부모들은 기꺼이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유화부인은 대소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몰려 있으면서도 절대로 자신을 구하러 오지 말라고 주몽에게 서찰을 보내며, 달기는 대조영의 앞에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다. 연개소문은 양상이 조금 다른데 그것은 연태조가 가진 자식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그는 연개소문을 자신의 자식이 아닌 고구려의 자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의 행보 또한 결국 그 자식을 위한 포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에게 유언처럼 남기는 말은 바로 대업이다. 사사로움보다는 대의를, 혈연보다는 백성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부모들의 희생을 통해서 자식은 드디어 자신의 범주를 넓히게 된다. 한 개인의 차원을 뛰어넘은 연후에나 영웅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고구려 사극들은 그 영웅의 탄생에 있어서 부모들의 희생이라는 기본 모티브를 모두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드러나는 과정에서의 힘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어떤 부모의 드라마가 가장 강할까
‘주몽’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은 드라마 초반부 주몽이 갖지 못한 카리스마의 보완 기능이 컸다. 그런데 이 카리스마가 주몽으로 전이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주몽은 강한 카리스마로 부하를 이끄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의견을 묻고 지시하는 쪽에 가깝다. 죽은 해모수를 다시 살리고, 아직까지도 해모수의 잔영이 계속 드라마의 구석구석을 떠도는 것은 주몽의 부모가 주몽보다 더 강력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반면 ‘연개소문’의 연태조는 부모라고는 하지만 선인 같은 인상을 갖고 있다. 이것 때문인지 부자 간의 드라마가 그다지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작가의 잘못된 해석이거나, 놓치고 지나간 드라마 요소처럼 보인다. 그 수많은 세월을 이역을 떠돌다 만나게 된 자식에게 그다지 담담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연태조가 속세를 벗어난 인물이라는 말은 되지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는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아마도 가장 적합하게 부모의 코드를 활용하고 있는 건 ‘대조영’인 듯 싶다. 대조영과 달기의 만남과, 눈앞에서 웃으며 죽어 가는 달기와 그걸 보며  흘리는 대조영은 일단 드라마적으로 가장 강력하면서도 효과적이다. 그것은 아마도 타 사극이 아버지와의 조우를 그린 데 비해 ‘대조영’이 어머니를 택한 데 있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강력한 힘 앞에 두 영웅들이 무력했던 반면, 어머니의 모정 앞에서 대조영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부여받게된다.

재미있는 것은 대조영이 아버지 대중상을 만나는 장면에서 자신도 아들임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때가 되기까지(이것은 또한 자신 스스로 충분한 카리스마를 만들 때까지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숨길 것이다. 주몽과 연개소문의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자신이 아버지임을 숨기고 있을 때, 대조영은 거꾸로 아버지에게 자신이 아들임을 숨기는 것으로 아버지의 카리스마에 눌리지 않는 힘을 얻고 있다.

드라마에 따라 조금씩 양상이 다르지만 고구려 사극들이 최근 그 힘을 받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 혈연, 가족이라는 카드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최근 우리네 드라마들의 화두이기도 하다.

연개소문 세트 논란, 극 집중도 저하가 원인

대하사극 연개소문의 세트 논란이 거세다. 이밀(최재성 분), 양현감(이진우 분), 이화(손태영 분) 등이 왕빈, 연개소문 일행과 함께 사냥을 떠나는 장면에 노출된 성문 배경이 조잡하게 만들어진 세트의 티가 너무 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이 나온 다음날 지적의 효과였는지 배경의 세트는 이화와 연개소문이 나란히 말을 타고 가는 장면에 너무도 명확하게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 세트의 문제가 논란으로까지 비화된 것은 단지 세트를 너무 조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400억 짜리 드라마에 합판 배경이냐”는 질책 속에는 400억이나 들여서 그것밖에 못 만드냐는 비아냥이 섞여있다. 세트 논란은 이 드라마의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져 이제는 서서히 그 증상이 나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드라마가 보이지 않는 연개소문
집중도 저하의 가장 큰 원인은 드라마 전개에 있어서의 상투성이다. 현재 연개소문에서는 극중의 갈등, 즉 드라마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연개소문이 처한 상황을 가만히 보면 그저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는 유유자적만 있을 뿐, ‘대조영’만큼의 자기 출생에 대한 강렬한 욕구도 보이지 않고, ‘주몽’ 만큼의 고구려에 대한 희원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청년의 치기는 없고 오히려 중년의 느긋함이 엿보인다.

지금 연개소문은 처음의 무리한 설정(신라와 수나라, 그리고 고구려로 분할되어 전개되던 드라마)을 봉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어느 한 장소와 인물로 집중시켜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나누어진 이야기 전개는 시청자의 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있던 신라쪽의 이야기 전개보다, 수나라의 양제 이야기가 갖는 무게감이 더해지자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연개소문이 수나라로 들어가면서 그나마 극의 집중도가 높아질 거라 예감했지만 여전히 연개소문이 머무는 왕빈의 집과 수나라는 따로 놀고 있다.

이렇게 되니 드라마가 생길 수가 없다. 드라마라고 해봐야 연개소문과 이화와의 멜로인데, 이것 역시 극적인 긴장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연개소문이 나타나자 수많은 혼처를 거부하던 이화가 단박에 그에게 빠져든다는 설정만으로 어떻게 극적인 멜로의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현대적 어법을 찾지 못한 상투적 대사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현대적 어법을 찾지 못하는 상투적인 대사들이다. “-사옵니다” 말투가 주는 어색함에다 의도가 뻔한 질문들과 자로 잰 듯 정확히 나오는 상투적 대사들은 극적인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차원을 넘어서 실소를 자아내게까지 한다. 이화가 연개소문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은 너무나 설명적이고 구태의연해 마치 70년대 멜로 영화 속의 대사를 반복하는 느낌이다. 잠시 그 대사들을 되새겨보자.

연개소문이 포산공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밖에 나와 그의 심복인 생해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이화가 나타난다. “어떻습니까. 소녀와 함께 말이라도 달려보시는 것이. 달빛이 아주 좋지 않사옵니까.”그리고 그들은 갈대 숲에 당도해 걷기 시작한다. “달빛이 좋지 않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낭자.” 그리고 이어지는 신라의 보희와의 일을 얘기하는 연개소문. 그 끝에 “외람된 이야기입니다만 소녀가 잠시 그 자리를 메꾸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낭자 어떻게 그런 말씀을.” “많은 혼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부다운 장부를 본적이 없습니다. 공자께서 처음이십니다. 이제 이유가 되겠습니까.” “낭자..” “다시 한 번 말을 달려 보시겠습니까.”

이런 상황에 오기까지 드라마 상으로 연개소문과 이화간에 벌어진 사건은 거의 없다. 그저 가끔 눈빛이 오고갔을 뿐이다. 물론 진짜 연애의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나 이것은 드라마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연애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만한 사건이나 이야기가 존재해야 한다. 사건 없이 바로 이어지는 너무 직설적인 대사의 전개는 보는 이들을 낯간지럽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이 장면들에는 필요 없는 대사들이 너무 많다. 멜로를 사건이 아닌 대사로서 설명하고 만들려는 것이다. 이로써 대사에 설명이 너무 장황해지는 드라마 작가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함정에 빠지게 된다.

연령대로 나눠지는 대사의 층위
그러나 모든 대사가 그런 것은 아니다. 사극으로서 진짜 힘을 발휘하는 정치적인 대사들과 전개는 나무랄 데가 없다. 수양제의 캐릭터가 힘을 받는 것은 그걸 연기하는 김갑수의 힘이기도 하지만, 그런 대사를 적재적소에 잘 넣는 작가의 힘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연개소문’에서는 이 잘 맞아떨어지는 대사와 그렇지 못한 대사의 층위가 나누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확히 연령대로 잘라진다. 중년 이상의 캐릭터들은 대사가 연기와 잘 맞아떨어지지만, 청년 캐릭터들은 영 겉돌고 있다. 이것은 작가가 멜로보다는 정치적인 상황의 사극에 더 강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혹 요즘 젊은 감성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시청자대가 중ㆍ장년층이라 하더라도 젊은 캐릭터에 노회한 목소리를 넣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이제 드라마에서 배경은 그 드라마의 완성도를 말해주는 좋은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논란이 된 배경은 그다지 중요한 상황에서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를 밖에서 찾게 만든다. 캐릭터에 한참 집중해야할 상황에(연개소문과 이화가 연애감정을 보여주는 장면) 시선을 배경으로 빼앗겼다는 점이 이 논란의 핵심이 될 것이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의 재미가 서 있는 지점

고구려 사극이 지금까지의 사극과 다른 점은 그 시대상이 고구려라는 것이다.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료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같은 소재의 드라마가 거의 동시대에 방영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사료의 빈곤함으로 인해 생겨난 고구려라는 미지의 세계는 많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매혹시키는 구석이 있다. 게다가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태생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 전 세계적인 경향으로 등장하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유혹과 바람은 우리에게 있어 고구려 사극이라는 지점에서 맞닿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의 ‘고구려 사극 삼국지’라 일컬어지는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은 고구려라는 ‘역사’와 그 역사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상상력’이라는 양날의 칼을 쥐고 탄생한 셈이다.

주몽 - 상상력을 취해 인물을 살리다
40%대의 시청률을 유지하는 ‘주몽’의 힘은 바로 퓨전사극이라는 데 있었다. 상상력이 갖는 아기자기한 재미, 멜로드라마 못지 않은 멜로라인의 형성, 과거의 역사를 다루지만 현재적 의미로 재해석되어 그 코드가 맞는다는 점, 그래서 현재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게임이나 판타지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 등등 퓨전사극의 장점은 지금의 ‘주몽’을 만든 장본인이다. 물론 과거에도 퓨전사극은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퓨전사극이라 하면 ‘해신’이나 ‘다모’ 같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소품들이었다. 퓨전사극이 갖는 장점에 ‘주몽’이라는 민족적 영웅이 만나자 ‘퓨전대하사극’의 기대감이 높아졌다. 엄청난 스케일과 동시에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아기자기한 퓨전의 맛을 시청자들은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몽에서 대하사극을 기대한 것은 ‘주몽’이라는 제목이 주는 막연한 스케일과 민족주의적 욕구 탓이었다. ‘주몽’은 국가 간의 전쟁 같은 당대의 국제분쟁을 다루기보다는 인물의 탄생에 방점을 찍었다. 주몽이 비판받고 있는 ‘역사왜곡’과 ‘작은 스케일’ 문제는 주몽이 가려는 사극의 방향과 시청자들의 욕구가 부딪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역사왜곡’ 문제는 퓨전사극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작은 스케일’은 전쟁 자체보다는 인물들 간의 갈등에 방점을 찍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 타 사극들이 등장하면서 비판의 강도는 높아졌다. ‘연개소문’은 시작부터 안시성 전투에 엄청난 물량을 퍼부었다. 하지만 ‘주몽’의 시작은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닌 다물군의 게릴라식 전투, 그것도 한나라가 아닌 한나라의 대표성을 띄는 현토성과의 전투였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연개소문’이 가려는 방향과 ‘주몽’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연개소문’이 이미 성숙된 고구려라는 국가의 외세에 대한 자주적 대응, 국제정세, 정치상황 등을 다루고 있다면 ‘주몽’은 이제 저 신화 속에 가리워져 있던 주몽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내는데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

주몽’은 한 인물과 국가의 탄생을 그리는 드라마이지 국가 간의 전면적인 전쟁(물론 소소한 전투들은 있지만)을 그리는 드라마는 아니다. 주둔하고 있는 한나라군을 몰아내는 것이지, 한나라와 전면전을 벌이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국가를 세우려는 주몽과 그걸 막으려는 인물들간의 시소게임이 이 드라마의 진짜 재미이다.
주몽에 대한(혹은 연개소문에 대한) 비판은 그만큼 각자의 드라마들을 보는 시청자들의 충성도가 높다는 것의 반증일 뿐이다. 세 편의 사극이 모두 같은 지점에 방점을 찍어야 할 이유는 없다(또 그래서도 안된다). ‘주몽’의 재미는 인물간에 벌어지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에 있다. 그것이 타 드라마와의 차별점이며 주몽만의 힘이다.

연개소문 - 멜로를 버리고 정치드라마를 살리라
‘연개소문’은 좀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시작은 엄청난 물량공세였으나 그만한 주목을 받지 못했고, 멜로 라인이 가미되었지만 어설펐다.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는 아마도 먼저 시작해 퓨전사극으로서 주목받은 ‘주몽’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정통사극을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퓨전사극의 ‘주몽’을 의식한 결과일 뿐이었다. 역사왜곡의 무리수를 가지면서도 ‘연개소문’을 안시성 전투에 끌어들였고, 전투라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의 전쟁 신을 잡아냈다. 또한 이어진 요하와 요택에서의 전쟁 신은 그 스케일에 있어서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전쟁구경’은 있었지만 ‘인물의 탄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전투영웅을 탄생시키고 그 영웅을 통해 인물의 탄생으로 연결시켜 드라마적 긴장감을 이어갔던 ‘주몽’과는 달리, ‘연개소문’은 교묘한 전략과 전술에 더 많이 시선을 잡아두었다. 초기 전쟁의 영웅은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막리지, 을지문덕, 영양왕, 영류왕 고건무 등이 분명하지만 드라마 전체를 이끌어가야 할 연개소문과 이들 간에는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당대의 국제정세 속에서 고구려의 위치를 보여주는 민족주의적 가치는 있었을지 몰라도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힘을 실어주는 드라마적 가치는 별로 없었다. 게다가 초기에 너무 많은 걸 보여준 탓에 앞으로 보여줘야 할 전쟁신의 부담감만 더 높여놓았다.

막상 그 국제정세 속의 중심에 서 있어야할 연개소문은 신라에 있었다. ‘연개소문’은 정통사극의 기치를 걸었지만 결국 퓨전을 채용했다. 연개소문은 김유신의 시종이 되고 거기서 김유신의 동생과 사랑에 빠진다. ‘주몽’에서 비롯된 멜로에 대한 강박이다. 게다가 그 사랑은 전혀 현대인들의 가슴에 전달이 되지 않는 구태의연한 멜로 신파를 답습한다. 그러면서 또 한번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의 힘을 약화시켜놓는다. 하지만 주목해야할 것은 이 즈음 ‘연개소문’이 본래부터 추구했어야할 재미라는 바람이 조금씩 중국에서 불어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독고황후(정동숙 분)와 수양제(김갑수 분)라는 인물의 탄생이다. 본래 멜로가 약하고 선 굵은 사극에 강점을 가진 이환경 작가의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드라마 상으로 주인공인 ‘연개소문’이 약화되고 중국의 인물들이 살아난 것은 작가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바로 이 지점이 ‘연개소문’이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이 아닐까. ‘연개소문’이 상상력을 발휘해야하는 지점은 ‘주몽’이 했던 아기자기한 인물 관계가 아니고 국제정치드라마 속에서 이전투구하는 인물들이다. 그것이 ‘연개소문’을 보는 진짜 재미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

대조영 - 정석대로 가다
아직 드라마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대조영’은 ‘연개소문’이 주창했던 정통사극의 진정한 길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군의 요동침략과 여기에 대항하는 양만춘(임동진 분),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중상(임 혁 분)의 활약이 보인 요동성 전투 신을 보면, 스케일과 인물 양자를 꼼꼼히 잡아내는 힘이 엿보인다. 거대한 전쟁신 속에서 디테일있는 전투 신까지 엮어내면서 영웅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힘은 아무래도 중견연기자들 몫이 가장 클 것이다. 그들은 얼굴 한 번 잠깐 들이미는 것만으로도 드라마의 집중도를 높여놓는다.

‘주몽’과 ‘연개소문’이 앞서 있어 막내의 이점을 톡톡히 보고 있는 ‘대조영’은 양 드라마의 장점을 하나로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다. ‘대조영’은 ‘주몽’처럼 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인물이다. 시작은 ‘연개소문’이 보여줬던 전쟁(물론 세밀한 전투신을 가진)이지만 이제 패망하는 고구려와 함께 ‘대조영’은 ‘주몽’이 했던 건국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대조영’의 이런 후발주자가 갖는 장점은 또한 단점이 되기도 한다. 같은 고구려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함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연개소문’에서 보여주었던 안시성 전투를 앞으로 ‘대조영’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낼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분명한 것은 ‘주몽’과 ‘연개소문’이 나름대로의 목적에 의해 정통 사극에서 한발씩 발을 떼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영’의 차별화는 바로 그 정석으로 가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부족한 사료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간다면 말이다.

고구려사, 역사와 상상력으로 복원하라
현재의 고구려 사극들은 모두 부족한 사료를 채워 넣어야 할 상상력과 역사적 개연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에는 위아래가 없다. 다만 방식에 있어서, 강점과 약점에 있어서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주몽’을 통해 고구려의 탄생을, ‘연개소문’을 통해 고구려의 전성기를, 그리고 ‘대조영’을 통해 고구려의 패망과 그 후에도 이어지는 정신을 읽을 수 있다면 고구려 사극들의 고민은 충분히 보답 받을 수 있을 것이다.
OSEN(www.osen.co.kr)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