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치’가 그리는 영조에서 떠올리게 되는 현재

“땅에서 일하는 자가 없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먹고 입을 것인가. 누가 누구 덕분에 살고 있는가. 그런 수탈은 없어져야 한다. 세제인 내가 언젠가 보위를 잇는다면 땅의 세금은 땅의 주인에게 매길 것이다.”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정일우)은 양반들을 위해 열린 연회에 나가 그렇게 선포한다. 살주(주인을 죽인다) 사건에 연루되어 그들을 비호했다며 사대부들에 의해 폐위 위기에까지 몰린 연잉군이 오히려 사대부들을 공격하는 발언을 한 건, 사실상 자신을 지키려 애쓰는 경종(한승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스스로 세제 자리에서 물러나려 한 것. 하지만 이런 연잉군의 행보는 민심을 오히려 돌려놓는 반전의 이유가 된다. 

SBS 월화드라마 <해치>는 역사적 인물인 영조의 성장담을 그리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현재적 해석을 상상력으로 덧붙였다. 노론과 소론이 벌이는 당쟁 속에서 이른바 ‘탕평책’을 써 어느 한 쪽에 힘을 실어주지 않으려 했던 영조는 특히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애민정책을 편 왕으로 알려져 있다. 군역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했고, 차별받는 서얼들에게서 사회 진출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첩의 자손에게도 상속권을 인정해 주었다. 

<해치>는 영조의 이런 민초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의 출신성분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밑바탕에 깔고 있다. 천민 출신이었던 무수리로 숙빈에 오른 이가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는 것. 그래서 차별받고 일찌감치 궁 바깥으로 내몰리던 인물이었기에 오히려 그들의 곤궁한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잉군 이금이 부정으로 얼룩진 과거 때문에 연실 낙방하던 박문수(권율)와 호형호제하고, 다모인 여지(고아라)나 왈패 우두머리인 달문(박훈)과 친구처럼 어울린다는 드라마적 설정은 이러한 처지에 놓였던 연잉군과 무관하지 않다. 

아이들마저 그 고사리 손에 칼을 들게 만든 살주 사건은 결국 양반들의 수탈에 의한 것이었다. 도무지 살 길이 없는 민초들은 심지어 아이까지 청국에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던 것. 이런 핍박받는 민초들의 편에 연잉군이 서자, 사대부들은 “천것의 피는 어쩔 수 없다”며 그를 몰아세운다. 노론의 실질적 우두머리인 민진헌(이경영)이 이런 연잉군의 행보를 “사대부에 등을 돌린 것”으로 치부하자, 이 대결구도는 사대부들과 민초들 사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로 넘어간다. 

결국 사대부들에 의해 자신이 폐위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민초를 위한 마음을 드러낸 연잉군은 이로써 핍박받던 저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궁벽에 누군가 연잉군을 지지한다는 뜻을 적어 붙여놓은 벽서와 거기 놓여진 호패는 순식간에 도성의 민초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놓는다. 호패가 쌓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전해진 백성의 마음들이 거대한 힘이 되어 연잉군을 몰아내려던 노론까지 어쩔 수 없게 만드는 것.

이건 <해치>가 연잉군의 이야기를 가져오긴 했지만, 현재적인 해석을 덧붙인 부분이다. 그 장면에서 우리는 단박에 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다름 아닌 고 노무현 대통령이다. 항상 격의 없이 대중들과 어우러졌던 그는 그렇게 자신을 낮췄다는 이유로 ‘대통령감’이 아니라는 이야기마저 듣지 않았던가. 심지어 대통령이 되어서도 탄핵 정국을 맞은 바 있다. 물론 그 때나 지금이나 대중들의 그에 대한 지지는 저 연잉군을 위해 호패를 던지는 민초들처럼 여전하지만.

그러고 보면 지금의 정국이 <해치>가 그리고 있는 시대의 당쟁 정국과 많이도 닮아있다 여겨진다. 갖가지 권력형 비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가진 자들의 도덕적 해이는 그 비리와 함께 만연해 있다. 민심은 어지러운데 저들끼리 싸우는 정치꾼들에게서 민심은 호명될 뿐 진정한 민초들을 위한 마음은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 대중들을 위한 바른 길을 열어가려 해도 이를 결사적으로 막는 기득권자들의 반대가 저 당쟁의 사대부들처럼 피어난다. 결국 이 혼탁한 현실 속에서 민초들 스스로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다. 호패나 촛불처럼, 가녀리게 보이지만 하나하나 모인 마음만이 유일한 희망이 되어버린 현재를 <해치>는 영조의 이야기를 통해 에둘러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사진:SBS)

정신없이 몰아치는 '해치', 정일우가 있어 몰입된다

SBS 월화드라마 <해치>는 ‘신세대 사극’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기존의 사극의 틀에 젊은 감각을 더했다. 그 단적인 증거는 이 사극이 가진 남다른 속도감이다. 끊임없이 사건들을 몰아치는 <해치>는 우리가 흔히 미드를 통해 보던 그런 몰입감을 선사한다. 과거 <이산>과 <동이> 등을 통해 이병훈 감독과 사극의 묘미를 맛보던 김이영 작가는 이제 미드적인 장르의 틀을 가져와 자기만의 색깔을 세우고 있다. <해치>는 그 성취가 보이는 작품이다.

<동이>를 통해 숙종에서 영조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이미 체득하고 있고, 거기서 영조가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인가를 잘 알고 있는 김이영 작가는 이번 <해치>를 통해서는 그 영조가 연잉군 이금(정일우)으로 방황하던 시절부터 스스로를 왕좌에까지 올리는 그 입지전적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동이로 불린 숙빈 최씨의 아들이 바로 영조다.

연잉군이 흥미로운 소재가 되는 건, 천민 출신 무수리의 소생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그 처지 속에서 임금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그 성장담 때문이다. 여기에 <해치>는 당대의 파당정치로 인해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노론에 의해 농단되는 정치현실 속에서 아무런 당파조차 없는 연잉군이 어떻게 빈손으로 이 파란의 세파를 뛰어넘었으며 결국에는 왕권을 틀어쥐고 민생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는가가 더 흥미로운 스토리로 더해졌다.

당대의 사헌부를 상징하는 ‘해치’가 제목으로 세워진 건, 아무 것도 없던 연잉군이 그나마 힘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노론 세력의 비리를 그냥은 두고 볼 수 없는 ‘정의 실현’이나 ‘진실 추구’ 같은 가치들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뜻을 갖게 된 박문수(권율)나 여지(고아라) 그리고 달문(박훈)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그를 따르게 된다. 과거비리로 늘 낙방의 고배를 마셨던 박문수가 그 비리를 캐면서 잡게 된 노론의 약점이 그들을 분열하게 만들고, 그 틈을 비집고 연잉군이 세제(왕좌를 이을 아우)가 되는 과정은 그래서 이 아무 것도 없는 인물이 가진 ‘비전’의 힘을 보여준다.

중요한 건 <해치>가 역사적 인물이나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의 새로움과 세련됨이다. <해치>는 정치사극에서 늘 중시되던 ‘명분’보다는 저마다의 욕망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는다. 즉 연잉군은 왕좌에 대한 뜻이 전혀 없다가, 자신이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함으로써 소중한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걸 직접 경험하고는 각성한다. 경종(한승현)은 노론의 수장 민진헌(이경영) 앞에서 말을 더듬을 정도로 유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구와도 손을 잡으려 하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분열된 노론의 이이겸(김종수) 같은 인물이 자신이 살기 위해 연잉군을 세제로 삼으라고 경종에게 주청을 올리면서, 노론과 소론 그리고 경종으로부터 모두 배척당할 위기에 놓인 연잉군이 이를 기회로 바꾸는 모습은 저마다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어 흥미진진해진다. 당파가 없는 연잉군이 역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경종을 독대하며 자신에게는 오히려 당파가 없기 때문에 결코 노론의 개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설득시킨다.

그리고 내금위장을 연잉군에게 보내는데, 이것은 어쩌면 경종이 연잉군을 시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진짜 역적이라면 도주했을 테지만 연잉군은 기꺼이 내금위장을 맞음으로써 그가 경종에 충성한다는 걸 보여준다. 반면 연잉군을 세제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은 민진헌이 경종에게 반발하자, 경종은 오히려 더 자신의 선택을 믿게 된다. 결국 노론과 연잉군이 결탁한 게 아니라는 게 밝혀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디테일한 인물들의 욕망들을 세우고, 이들이 부딪치며 내는 다양한 양상들을 빠른 속도감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해치>는 남다른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그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튀어나갈지 예측하기 어려워지는 건 여러 인물들의 욕망들이 잘 살아있어서다. 알다시피 복잡하게 권력과 이해로 얽힌 관계란 한 사람의 변화만으로도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복잡한 양상을 굳건히 하나로 모아 끌고 가는 인물이 바로 연잉군이다. 연잉군과 그를 위시한 박문수, 여지, 달문 같은 인물들은 그래서 복잡한 상황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해준다. 시청자들이 결코 쉽지 않은 이 사극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이유다.

결국 그 중심축을 쥐고 있는 연잉군을 연기하는 배우 정일우를 칭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는 폭풍전개 되는 상황의 반전 속에서 확실히 흔들림 없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간간히 긴장을 풀어주는 여유까지 자연스럽다. 물론 발성이 아직 명쾌하지 않다는 지적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 건 그가 보여주는 무거움과 가벼움을 넘나드는 진지한 연기다. 흥미진진한 입지전적인 영조의 행적을 따라가는 이야기 <해치>에서 정일우가 마땅히 박수 받아야 될 이유다.(사진:SBS)

과거를 통해 현재를, ‘알쓸신잡2’가 보여준 역사의 묘미

사실 어사 박문수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tvN <알쓸신잡2>가 천안에서 펼친 수다 속에 등장하는 박문수의 이야기는 어쩐지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그것은 단지 수업을 통해 배우는 역사가 아닌 수다로 들려주는 역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같은 역사 이야기에서도 현재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시각이 덧붙여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사라는 직종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 ‘감시’라는 관점에서 장동선 박사가 질문을 하자 유시민이 ‘보고하는 자’가 ‘보고받는 자’를 콘트롤하면 시스템이 붕괴된다는 사례를 소비에트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고, 유현준 교수가 ‘권력’의 기제가 ‘나를 숨기고 다른 사람을 훔쳐볼 수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진다’는 것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와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수가 그만큼 멀리 있는 것까지 들여다본다는 권력을 얘기하는 대목이 그렇다. 

어사 박문수에 관한 일화들을 들은 적은 있지만 어사라는 직종이 가진 권력의 구조를 풀어서 이야기하고, 거기서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풀어냈던 파놉티콘의 감시구조를 끄집어내 암행어사라는 직종이 가진 효과가 일종의 파놉티콘 감시구조와 같다는 걸 유추해낸다. 실제로는 어사들이 많이 활동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어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시체계가 기능했다는 것. 여기서 유시민은 당시 어사들이 몇 백 명씩 있었지만 알려진 인물이 박문수 정도인 이유일 수 있다고 추론했다.

어사 박문수의 이야기에서 권력과 감시의 기제까지 풀어나가는 <알쓸신잡2>의 이야기는 우리가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읽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역사란 과거의 기록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면의 이야기들을 들여다봐야 하고 또 그것이 현재에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생각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아마도 우리는 이 불운한 가족사를 대부분 알고 있지만 <알쓸신잡2>는 여기에 부모 자식 간의 교육적인 관점과 가족이 만들어줄 수 있는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감성적인 이야기를 덧붙인다. 

영괴대를 다녀온 유현준 교수가 그 짠한 마음을 전하면서 꺼내놓은 사도세자의 이야기에서 유시민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훈육했던 방식은 너무 지나쳤다는 걸 지적했다. 하고픈 걸 못하게 하고 과도한 요구를 함으로써 자식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했다는 것. 결국 파행을 저지르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그 상황을 통해 유시민은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지금의 부모 자식 간에서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당대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던 홍대용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사실 세종대의 장영실 같은 놀라운 과학자의 성취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후대에 거의 사라져버린 사실에서 유시민은 조선이 “망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한탄했다. 그것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천대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장영실의 사후에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고, 마지막 기록으로 남았던 가마가 망가져 장 100대를 맞았다는 그 기록의 미스터리에서도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만큼 과학자를 천시하는 분위기였다는 것. 이 이야기에서는 실리적인 학문에 대한 천시 같은 시대착오적 생각들이 한 나라를 망하게도 할 수 있다는 현재적인 울림이 느껴졌다.

<알쓸신잡2>를 보다 보면 과연 우리의 역사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저 역사의 기록만을 적시하고 그것을 암기해 시험문제를 푸는 것으로서 역사교육을 가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짜 역사 교육이라면 이처럼 사료로 남은 몇 줄의 글귀 속에서도, 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도 새로운 현재적 의미들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흥미진진한 <알쓸신잡2>의 역사이야기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사진:tvN)

<대박>, 도박으로 풀어낸 왕좌의 게임의 재미와 한계

 

역시 도박이라는 소재는 세다. 이병헌과 송혜교가 주연으로 나왔던 <올인>은 차민수라는 실제 프로갬블러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뤘다. 당시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허영만 원작의 <타짜>19금으로 개봉되어 560만 관객을 동원했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타짜>17.2%(닐슨 코리아)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SBS 월화사극 <대박>이 동시간대에 출격한 타 지상파 드라마들보다 한 발 앞선 12.2%로 앞서가고 있는 건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물론 2위로 시청률 11.4%를 기록한 KBS <동네변호사 조들호>와 근소한 차이지만.

 


'대박(사진출처:SBS)'

<올인>이 도박에 로맨스를 넣었다면 <타짜>는 한 판 승부에 손목을 거는 자극이 있었다. <대박>은 도박으로 풀어낸 왕좌의 게임이다. 첫 회에 인현왕후를 잊지 못하는 숙종(최민수)이 숙빈 최씨가 될 복순(윤진서)를 두고 그 남편인 백만금(이문식)과 도박을 벌이는 장면은 이 독특한 팩션 사극의 많은 걸 얘기해준다. 이 사극은 역사 보다는 상상력쪽에 더 기울어져 있고 모든 역사적 상황들 이면에는 도박에 가까운 선택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숙종의 눈에 복순이 들게 된 것도, 그래서 백만금으로부터 도박으로 그 아내인 복순을 빼앗게 된 것도 이인좌(전광렬)라는 반란을 꿈꾸는 승부사의 도박이다. 아내를 잃은 백만금은 뒤늦게 그 도박에 속임수가 있었다는 걸 알아채고 숙종을 찾아와 아내를 되찾기 위한 승부를 다시 요청한다. 그 날 밤 일기를 두고 벌인 도박에서 백만금은 비가 올 것에 승부를 걸어 이기지만, 결국은 그 도박 자체가 자신의 패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졸지에 판돈이 되어버린 복순이 숙종을 선택하게 된 것.

 

바로 이런 점들은 <대박>이라는 사극이 흥미로워지는 대목이다. 즉 직접적인 도박을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그 이외의 많은 삶들이 결국은 도박과 비슷한 양상들을 띄면서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삶의 도박은 실제 도박을 통해 이긴다고 해서 결코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백만금이 숙종에게 이기고도 아내를 되찾지 못하는 것처럼.

 

<대박>은 또한 저 <타짜>가 도박 한 판에 손목을 거는 자극적인 상황들을 연출했던 것처럼 한판 승부에 아내를 걸고, 심지어 갓 태어난 아기의 목숨을 거는 자극을 보여준다. 궁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복순이 낳은 아기는 또 다른 운명을 건 도박에 인물들을 뛰어들게 만든다. 왕의 아기가 아니라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오자, 복순은 아기를 살리기 위한 도박을 하게 된다. 전염병으로 죽은 아기와 바꿔치기 해 궁 밖으로 아이를 내보내는 것.

 

하지만 숙종은 이미 이 사실을 간파하고 후환이 될 수도 있는 아기를 죽이라고 지시하고, 이인좌는 왕과 대적할 인물이 될 그 아기를 데려오라고 지시한다. 백만금은 그 아기를 거둬 기르지만 그가 왕이 될 상이라는 얘기에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폭포 절벽에서 아기를 집어던진다. 1편이 아내를 둔 도박이었다면 2편은 훗날 대길(장근석)로 자라날 아기를 두고 벌어지는 도박이다.

 

모든 이야기들과 그 속의 인물들의 선택을 하나의 도박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 사극이 가진 힘을 만들어낸다. 이미 숙종과 영조 대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많이 사극에서 다뤄졌다. 그 유명한 장희빈을 소재로 한 사극만 몇 편인가. 하지만 <대박>은 이 시대를 가져와 도박이라는 관점으로 새롭게 풀어낸다. 이것은 물론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과한 설정일 수 있다. 영조의 어머니가 되는 숙빈 최씨를 도박으로 얻는 숙종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상관없는 하나의 허구로서 본다면 <대박>은 왕좌를 두고 벌이는 한판 도박으로서 분명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극성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도박이라는 소재가 갖고 있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설정들을 시청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드라마화된 <타짜>가 생각만큼의 반응을 얻어가지 못했던 가장 큰 원인은 본래 도박이라는 소재와 손목을 거는 스토리 자체가 19금으로서 영화에 더 최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내를 도박에 걸고, 아기의 목숨을 내거는 <대박>은 어떨까. 이것은 극적인가 아니면 자극적인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