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걷는 남자>, 이 위대한 범법에 기꺼이 공모하고픈 까닭

 

줄타기가 삶에 대한 은유라는 건 무수한 예술이 말해준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살판과 죽을 판 사이에서 장생(감우성)이 오르던 줄이 그 탄성으로 그를 하늘로 날게도 해주지만 그만한 중력으로 맨바닥에 곤두박질치게 하는 것처럼, 줄타기란 삶이 가진 비상과 추락을 모두 담아내는 소재다. <하늘을 걷는 남자>의 줄타기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아름다운 곳에 줄을 걸어 그 위를 걷고 싶었던 남자 필리프(조셉 고든 레빗)의 줄타기는 우리네 삶에서 예술적 행위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담아낸다.

 


사진출처: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

이야기는 단순하다. 사실 <하늘을 걷는 남자>라는 제목 속에 다 들어가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실화다. 그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맨 온 와이어>라는 영화는 이미 2010년에 국내에서도 개봉됐다. 물론 흥행은 저조했지만 어쩌면 <하늘을 걷는 남자>의 흥행으로 다시 관객들의 주목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현재 다시 개봉되어 상영되고 있다.

 

그러니 <하늘을 걷는 남자>의 이야기는 스포일러랄 것이 없다. 어느 날 우연히 뉴욕의 쌍둥이 빌딩 세계무역센터의 기사를 본 필리프는 그 두 건물 사이에 와이어를 연결하고 줄타기를 하겠다는 꿈을 갖고 그 불가능할 것 같은 도전을 하나하나 실행해 옮긴다. 그리고 결국 그는 하늘을 걷게 된다. 그런데 이 제목만 봐도 딱 아는 이야기가 왜 이토록 감동적으로 다가올까.

 

물론 영화가 주는 스펙터클의 힘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무려 지상에서 4백 미터가 넘는 높이의 쌍둥이 빌딩 사이를 줄 하나에 의지해 건너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3D 아이맥스의 시대에 영화의 체험은 고스란히 관객이 그 줄을 밟고 있는 것만 같은 아찔함을 선사한다. 그 아찔함은 그리고 자유로움과 뒤섞이며 시각적 스펙터클이 단지 자극이 아닌 감동은 물론이고 나아가 어떤 깨달음에까지 나아가게 한다.

 

그 감동의 실체는 다름 아닌 예술적 행위의 숭고함에서 나온다. 그저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가녀린 존재인 인간이 그토록 높은 곳에 줄을 세우고 그 위에 선다는 그 행위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무모한 일이면서 돈을 벌어주는 일도 아니며 심지어 뉴욕시에서는 하지 말아야할 범법행위다. 하지만 그가 그런 범법 행위를 하려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공모한다. 그들은 그 공모의 이유에 대해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모두 같은 말을 한다. 그건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필리프는 거기에 그런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다만 줄을 세울 아름다운 곳이 있었고 그래서 거기에 줄을 세운 후 걸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그런 예술적 행위를 함으로써 달라진 것이 있다. 뉴요커들도 싫어했던 그저 높기만 한 세계무역센터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필리프의 줄타기로서 그 건물은 어떤 상징이 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비상하려는 욕망의 상징.

 

알다시피 그 건물은 911 테러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던 상징은 테러와 깊은 상처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물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무역센터 건물이 지어졌지만 그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아마도 그 공간에 남아있는 이 트라우마를 저 과거에 있었던 필리프의 예술적 행위를 통해 넘어서려 했을 것이다. 그것은 비극 앞에 예술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가 될 테니 말이다.

 

<하늘을 걷는 남자>라고 그 줄 위에 있던 필리프의 행위에만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기까지 그를 뒤에서 도운 수많은 공모자들. 그들 역시 이 예술의 동참자가 되었다. 아니 그 날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그의 줄타기를 바라보며 회사도 까무룩 잊어버린 채 서서 박수를 쳤던 많은 행인들까지도 그 예술의 동참자가 된다. 예술의 완성은 결국 예술적 행위를 누군가 기억에 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를 통해 다시금 세계무역센터에서 있었던 놀라운 인간의 예술적 행위에 감탄하고 있는 우리들 역시 그 예술을 완성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 우리들도 그들이 했던 위대한 범법 행위에 기꺼이 마음으로나마 공모하고 있으니



<어벤져스>와는 다른 <매드맥스>의 입소문 질주

 

79년도에 상영되어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이끌어냈던 멜 깁슨의 <매드맥스>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훨씬 다이내믹한 카메라 기술과 CG로 총무장해 다시 돌아온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는 더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의 <매드맥스>가 사막과 펑키한 폭주족들 그리고 헤비메탈한 스타일을 엮어낸 그 기발한 아이디어에 환호 받았다면 돌아온 <매드맥스>는 이것을 심지어 예술적인 영상연출로 만들어낸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영화 <매드맥스>

모래 폭풍 속으로 뛰어 들어가 질주하는 차들을 잡아낸 영상은 마치 초현실주의 예술 작품의 세계 속에 관객이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사람을 피 주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물질화되어 보이는 육체가 터지는 폭탄 위로 날아다니고, 질주하는 자동차 위에서 다른 자동차로 뛰어오르는 장면들은 액션을 넘어선 퍼포먼스로 보인다. 장대 위에 사람을 태워 마치 낚시질하듯 도망치는 여자들을 낚는 장면의 기발함은 이 감독의 상징체계가 얼마나 남다른가를 잘 보여준다.

 

놀라운 건 영상연출만이 아니다. <매드맥스> 특유의 의상과 헤비메탈 스타일은 하나하나가 캐릭터처럼 보인다. 자동차 앞에 매달려 진군의 헤비메탈 연주를 하는 괴상한 사내가 주는 기묘함은 <매드맥스>만의 독특한 세계를 잘 대변해준다. 온몸에 하얀 칠을 하고 죽음을 구원이라 부르며 전쟁 속으로 뛰어드는 워보이들이나, 자유와 희망을 찾아 도주하는 여성들 그리고 그녀를 돕는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 같은 인물들은 하나하나가 잘 구축된 캐릭터들이다.

 

무엇보다 맥스보다 더 주목되는 여주인공 퓨리오사의 카리스마는 압도적이다. 한쪽 팔이 잘려져 기계 팔을 덧대고 있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은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주인공 맥스는 마치 퓨리오사를 돕는 조력자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영화가 폭력에 맞서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퓨리오사는 똑같은 폭력으로 남성적 폭력의 세계에 대항하고 있지만 그녀가 지키는 여성들은 척박한 사막 위에 씨앗을 심으려는 여성성을 상징한다.

 

사막은 이 영화의 숨겨진 주인공이다. <매드맥스>가 호주라는 공간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 드라이 랜드라고도 불리는 호주의 특징을 이 영화가 가장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막화가 진행되는 그 곳의 풍경들은 아마도 조지 밀러 감독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사막이라는 텅 빈 공간은 그래서 감독의 손길에 의해 기막힌 스타일의 이야기들이 채워지는 가능성의 스크린이 되었다.

 

<매드맥스>는 새삼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어벤져스2>의 수치가 얼마나 무색한 것인가를 확인하게 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마케팅과 극장의 몰아주기로 탄생한 천만 관객이 영화의 질적 우수함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2시간이 어떻게 훌쩍 지나갔는지 알 수 없는 압도적인 몰입감의 재미에 심지어 예술미까지 느끼게 되는 영상 연출, 그리고 결코 유치하게 보이지 않는 영화적 메시지까지. <매드맥스>의 입소문 질주는 천만 <어벤져스2>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격정 멜로 <밀회>, 이 불륜이 보여주려는 것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현실은 퀵서비스를 하며 살아가는 청춘 이선재(유아인). 한 때 피아노의 꿈을 포기한 후 결혼해 그럭저럭 꿈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중년 오혜원(김희애). 두 사람은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될까.

 

'밀회(사진출처:JTBC)'

격정 멜로라고 불리는 <밀회>지만 첫 방송의 느낌은 격하다기보다는 격조 있는 멜로의 인상이 짙다. 물론 금기된 사랑이 짙어지면 격조도 격정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이 청춘과 중년을 엮어주는 것이 피아노 선율이라는 것은 이 드라마가 단순히 불륜을 자극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증표다.

 

잠깐 예고편으로 등장한 것처럼 이선재와 오혜원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이들의 사랑을 에둘러 표현해준다. 피아노를 치는 오혜원의 표정은 사랑하는 여인처럼 희열에 가득 차 있다. 오혜원에게 피아노란 자신의 식어버린 사랑 같은 존재다. 한 때는 불타올랐으나 이제는 그저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재능은 있어도 스펙이 없어 피아노가 아닌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청춘 이선재가 처한 상황은, 숨겨둔 꿈과 열정은 있으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지운 채 친구의 가족회사 서한예술재단에서 마치 그 집안의 비서처럼 살아가는 오혜원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선재가 사회라는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에서 신음하는 것처럼 오혜원은 서한예술재단이라는 사회의 축소판 속에서 자신의 열정을 지워간다.

 

그녀가 이선재의 재능을 아끼고 키워주려는 마음은 그래서 친구에게 뺨을 맞으면서도 수긍하며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자기애와도 닿아있다. 그녀의 사랑은 그래서 이선재라는 청춘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로 표상되는 자신의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회한과 위무에 가깝다. 이 점은 이 사랑이 격조에서 격정으로 나가는 기폭제가 된다.

 

따라서 <밀회>가 다루는 불륜은 단지 엇나간 사랑에 머물지 않는다. 그 속에는 청춘이든 꿈이든 사랑이든 예술이든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삼켜버리는 우리 사회의 밑바닥이 담겨져 있다. 서한예술재단은 그 밑바닥을 보여주는 곳이다. 수면 위에서는 클래식 음악 연주회 같은 예술을 즐기고 사교모임으로 마작을 즐기는 귀족적인 삶이 그려지지만 그 뒤편에서는 심지어 주먹질이 오가는 살풍경한 욕망들이 꿈틀댄다.

 

이 살풍경 속에서 가녀린 청춘과 허탈한 중년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모습은 그래서 그 지독한 현실에 대한 저항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들의 사랑은 또 어떤 현실의 장벽을 만나 파국으로 달려갈 것인가. 결국 <밀회>가 보여주는 불륜이란 태생적으로 비극을 예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비극은 단지 개인적인 비극이 아니라 사회적인 비극으로 다뤄진다. 청춘, , 사랑, 예술 같은 것조차 돈과 현실의 이름으로 포획해버리는 세상의 파국.

 

마치 유려한 영화를 보는 듯한 안판석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멜로에 사회를 담아내는 정성주 작가의 예사롭지 않은 필력, 그리고 청춘의 갑갑함과 설렘 사이의 어느 지점을 연기해 보여주는 유아인과 무엇보다 우아함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숨겨진 열정을 꾹꾹 눌러 보여주는 꽃누나 김희애의 연기는 <밀회>라는 격이 다른 멜로의 탄생을 예감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보는 격하면서도 격조 있는 멜로, 그것이 바로 <밀회>라는 작품의 진면목이다.


만들 필요 없다, 그저 한 부분을 떼어내 보여줘라

'무한도전'(사진출처:MBC)

김태호 PD는 ‘만들어진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 ‘만들어진 것’은 기성관념일 수도 있고, 일상적인 관계일 수도 있으며, 사회적인 통념일 수도 있다. 물론 예능 프로그램으로 돌아오면 그것은 기성형식이나 상투적인 주제의식 같은 것이 된다. 김태호 PD가 ‘무한도전’을 통해 매번 만들어내는 웃음의 소재들과 형식들이 다른 것은 다분히 이런 성향 덕분이다. 물론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 방송 PD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중성을 확보하는 방식은 여타의 예능 PD와는 방향성이 다르다.

보편성의 웃음을 추구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시청률로 대변되는 대중들의 반응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는 방송 예능의 한계 속에서도 그는 대중을 따라가기보다는 대중을 이끄는 방식을 선택했다. ‘무한도전’은 그래서 따라온 대중들에게는 그 능동성에 걸맞는 달콤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선사하지만, 따라오기만을 원하는 대중들에게는 외계어처럼 들리기도 한다. 20% 안팎의 시청률은 어쩌면 그래서 김태호 PD의 적절한 선택인 셈이다. 그에게 지나치게 대중적인 것은 ‘만들어진 것’을 그저 잘 따라한 증거가 되고, 지나치게 무관심한 것은 자신이 정한 방향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중간 어디 즈음에 김태호 PD는 자신이 서야할 예능의 방점을 찍는다.

이것은 김태호 PD가 언론을 상대하는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만큼 언론의 인터뷰를 기피하는 인물도 없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자신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언론에 노출되곤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하려는 얘기는 A인데, 언론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B를 보여준다는 얘기다. 그래서 어찌 어찌 해 어렵게 김태호 PD를 만난다고 해도 그 인터뷰는 기자와 PD 사이의 좀 더 편안한 사적 관계를 만들어준다기보다는 오히려 팽팽한 거리감과 긴장감을 만들어내곤 한다.

이런 김태호 PD도 단박에 반하는 인물이 있다. 무언가 ‘만들어진 것’ 바깥에서 놀라운 도전정신으로 부딪치는 인물들이다. 이것은 아마도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하면서 생겨난 경향일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제대로 된 경기장 하나 없지만 묵묵히 도전정신을 보여준 봅슬레이팀이 그렇고, 퉁퉁 부운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것을 보여준 여성 복싱선수가 그러하다. 김태호 PD의 페르소나, 유재석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떠한 미션을 줘도 성실함과 무모할 정도의 도전정신을 발휘하는 유재석이 없었다면 김태호 PD의 ‘무한도전’이라는 세계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테니.

김태호 PD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장기하의 새 음반에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 참가를 권유했지만 자신의 새 음반이 성공할 자신감이 있다며 그 성공이 ‘무한도전’ 덕이라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고사한 장기하의 무모할 정도의 도전정신을 그가 높게 산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기성사회가 갖는 통상적인 관계의 틀 바깥으로 탈주한다는 점에서 김태호 PD의 성향과 그대로 만난다.

김태호 PD의 이런 ‘만들어진 것’에 대한 거부는 ‘무한도전’이 왜 예술 같은 예능이 되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사실 ‘무한도전’이 예능의 레전드가 된 것은, 그 하나 하나가 도전이었던 과정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무한도전’을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새로운 형식의 선구자 정도로 인식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김태호 PD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무한도전’이 거둔 가장 큰 공적은 예능 프로그램에 촬영 카메라와 마이크를 여러 대로 늘린 것”이다. 삽과 포크레인이 대결을 벌이던 ‘무모한 도전’이 뭔가 스펙타클하기는 해도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하지 못한 것은 그 광경을 포착하는 카메라와 마이크가 몇 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방송국에 카메라를 더 달라고 요청했지만 요지부동. 김태호 PD는 결국 외주 카메라를 직접 모았다고 한다. 그들이 지금의 많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바탕이 된 셈이다.

카메라가 늘어나자 비로소 각각의 인물들의 개성 넘치는 이야기들이 담기기 시작했고, 쌓여진 비디오테이프만큼 후반작업에 들어가는 공도 커지게 되었다. 깨알 같은 재미를 북돋워주는 자막이 붙기 시작했고 각각의 캐릭터는 좀 더 공고해졌으며, 그 캐릭터들을 각각 따라다니는 카메라로 인해 다양한 미션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많아진 카메라로 인해 캐릭터들 간의 중심과 변경의 벽이 무너진 것이다. 물론 메인 MC로서 1인자 유재석이 서 있지만 그만큼 비슷한 비중의 다른 인물들도 이제 수평적인 위치에서 멘트를 쏟아낸다. 즉 카메라를 좀 더 늘리겠다는 그 새로운 도전의 결과는 우리에게 이미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세계를 가져왔던 셈이다.

그러나 김태호 PD의 ‘무한도전’이 예능의 벽을 넘어서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열려진 작품세계(?)’ 덕분이다. 이미 ‘정해진 어떤 틀’ 속에서 움직이던 예능이 이제 미션 하나를 던져놓고 보는 하나의 실험이 되면서, 그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과정들은 독특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 미션을 수행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일상적인 경험들과 습관들을 이 미션 속으로 끌어옴으로써 상황에 상징성을 부여한다. 스키 점프대 꼭대기까지 전원이 오르기 위해 벌이는 미션은 가상적이고 게임적이지만, 그것이 그려내는 이야기가 현실을 상기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미션 과정에 가타부타 없는 설명은 대중들의 좀 더 적극적인 개입을 끌어낸다. 그래서 대중들에 의해 이런 저런 의미로 해석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무한도전’이라는 예능은 비로소 예술이 되어간다.

웃음은 과연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명쾌하다. 물론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비극만이 예술인 것처럼 오인되기도 했지만, 이미 수많은 희극들이 우리에게 예술로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웃음의 방송버전인 예능은 과연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의문점이 있다. 이것은 웃음이라는 소재 때문이 아니라, 방송이라는 매체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로 대변되는 보편성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방송이 독창적인 웃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태호 PD를 본다면 그것이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물론 이 ‘무한도전’ 역시 방송 프로그램으로서의 보편성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경우 그 틀을 넘어 예술의 차원을 언뜻 우리에게 보여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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