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 이 영화의 마법 속에 빠져버린 까닭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마법 같은 영화다. 생각하고 곱씹어보면 볼수록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둔중한 울림이 점점 커진다. 그건 힘겨운 현실 속에서 음악이나 연극, 영화 같은 예술이나 상처받은 아픈 영혼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위로받으며 커나가고, 궁극에는 어떤 마법 같은 사랑의 완결을 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라라랜드>라는 뮤지컬 영화에는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져져 때론 강렬하고 때론 감미로운 재즈 음악 속에 흐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 그리고 그 둔중한 깨달음은 삶이 얼마나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따뜻한 것들을 찾아내는가를 알게 해준다.

 

사진출처:영화<라라랜드>

“<라라랜드>를 통해 음악과 노래, 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뮤지컬은 꿈과 현실 사이의 균형 잡기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이 이야기는 이 영화가 가진 마법적인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일 게다. 도로를 가득 메운 정체된 차들 속에서 저마다 길이 뚫리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차 문을 열고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오프닝 장면은 현실에서 꿈으로 넘어가는 마법장치 같은 뮤지컬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말이 아니라 어느 순간 음악으로 표현되는 장면들은 현실적 상황이 예술적 장치를 통해 마치 마법 같은 꿈으로 변화하는 순간들을 제대로 잡아낸다. 자신이 하고 싶은 재즈 음악을 추구하지만 이제 젊은이들은 누구도 그런 고전적인 재즈를 듣지 않는다며 제 꿈을 펼치지 못하던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연거푸 연기 오디션에서 떨어지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 미아(엠마 스톤)가 그 정체된 도로에서 서로 으르렁대는 그 첫 만남이나, 견인되어버린 차 때문에 길거리를 헤매다 흘러나오는 재즈 피아노 소리에 마치 홀린 듯 들어간 카페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장면, 그리고 어느 수영장 파티장에서 다시 마주치는 그 순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 우연적 사건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파티장에서 나와 도시의 밤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언덕길에서 당신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그러면서 두 사람이 어우러지는) 걸 서로 강변하듯 노래하는 장면은 다시 현실을 훌쩍 벗어난 마법 같은 순간으로 다가온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영화를 연기 연구 차원에서같이 보기로 한 두 사람이 극장에서 만나 조금씩 서로에게 이끌리고, 키스를 하려는 순간 영화 필름이 끊어지자 그 영화 속 로케이션 장소인 그리피스 천문대로 직접 차를 몰고 가는 장면은 현실이 판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순간들을 극적으로 연출해 보여준다. 그들은 마치 영화 속으로 뛰어 들어간 것처럼 그 마법적인 사랑의 시간 속에서 물리적인 중력을 뛰어넘는다. 진자가 움직이는 그 곳에서 허공으로 붕 떠오른 두 사람이 구름 위에서 함께 왈츠를 추는 풍경이라니. 이만큼 사랑의 순간을 잘 표현한 장면이 있을까.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비현실적인 사랑의 순간만을 그려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전작이었던 <위플레쉬>에서 우리가 봤던 것처럼 예술이란 그저 달콤한 환상이 아니다. <라라랜드>에서 세바스찬은 재즈를 설명하며 그건 악기와 악기가 서로 대결하는 치열한 현장이라고 말했다. 세바스찬과 미아는 애초부터 각각의 다른 악기였다. 그래서 저 마다의 소리를 냈던 것이고, 처음에는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며 으르렁댔다가 어느 순간에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 서로의 소리에도 매료되었고 그 힘겨운 현실 속에서 서로를 위로해주는 사랑으로 피어났던 것. 그것은 마치 치열하지만 아름다운 재즈 연주의 한 대목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서로의 사랑이 확인되고 자신들의 현실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그들은 다시 각자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북돋으며 그 누가 뭐라 해도 서로에게는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최고의 배우인 그들은 각자의 길로 달려가며 서로의 길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니고 또한 서로에 대해 실망한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나서 했던 가는 데까지 흘러나게 해보자는 말은 그래서 이들의 사랑이 단지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서로의 꿈을 지지해주고 멀리 있어도 평생 마음 한 구석에 그 사랑을 남겨둔 채 살아가겠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각자 원하던 꿈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대신 음악은 그들 사이를 여전히 이어주는 마법이 된다. 남편과 함께 우연히 찾아간 세바스찬의 재즈 클럽에서 그의 음악을 들으며 그녀는 짧은 순간 상상한다. 각자 꿈을 이루고 또 그와 사랑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가정을 이뤄 함께 살아가는 상상. 그것은 즉흥 재즈 음악이 갖고 있는 변주처럼 달콤하고 강렬하게 그려진다. 그 재즈 음악 속에서 세바스찬과 미아는 각각의 악기처럼 부딪치며 뒤섞인다. 세바스찬의 음악이 흘러나오면 미아는 그 상상 속에서 그와 함께 마치 연기하듯 꿈을 그려낸다.

 

<라라랜드>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들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원스>, <비긴 어게인>, <싱스트리트>로 각인된 존 카니 감독의 음악영화들과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전작인 <위플래쉬> 같은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확실히 우리네 감성적인 관객들은 음악영화들에 특히 더 마음을 빼앗기는 경향들을 보인다. 하지만 <라라랜드>를 단순히 그 음악영화의 성공으로 치부하기에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사랑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마치 삶과 예술의 비의를 들여다본 듯한 그런 기분. 참 웃을 일 없는 시절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피어난다.

<닥터 스트레인지>, 어떻게 이 진부함과 황당함을 이겨낸 걸까

 

새로운 마블의 슈퍼히어로물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 스토리나 설정만 두고 보면 진부하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잘 나가던 외과의사가 교통사고로 손을 다쳐 절망감에 빠지게 되고 육체적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몸을 정신 수련을 통해 고쳐내면서 엄청난 위기상황을 맞게 된 세상을 구원해내는 이야기... 일단 동양인이라면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막연한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처럼 진부하고 황당한 스토리지만 관객들은 의외로 영화 속에 점점 빨려 들어간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사진출처:영화 <닥터스트레인지>

네팔에서 만난 신비로운 여인 에인션트 원(틸다 스윈튼)으로부터 수련을 받는 스티븐 스트레인지(베네딕 컴버배치)의 설정은 역시 그 무수한 쿵푸 영화의 한 대목을 잘라 붙인 듯한 느낌을 준다. 갖가지 마법을 부리는 방법들이 들어 있는 책들이 가득한 공간은 마치 무협지의 비급들이 숨겨진 공간처럼 그려지고, 그 곳을 지키는 도서관장인 웡(베네딕트 웡)은 진짜 소림사에서 갓 나온 듯한 모습이다. 스승인 에인션트 원을 배신하고 그 책들 중 중요한 마법의 한 장을 잘라내 도망치는 제자 케실리우스(매즈 미켈슨)와 또 다른 제자가 된 스트레인지가 대결 구도를 이루는 스토리도 역시 쿵푸 영화의 전형적 설정이다.

 

게다가 이들이 부리는 마법은 현실감을 갖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일종의 관문 같은 걸 만들어 이쪽 세상에서 갑자기 히말라야 꼭대기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중력의 세계를 무색케 만드는 전후좌우가 마음대로 뒤집어지는 마법을 부려 그 속에 있는 이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날아다니는 건 기본이고 공간과 공간의 이동은 물론이고 시간까지도 멈춰 세우거나 뒤로 돌리기도 한다. 이 정도면 거의 신에 가까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상상력의 무한 확장은 현실적인 무게감을 지워버릴 수밖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상상력의 스펙터클은 관객의 시선을 매료시킨다. ‘거울의 차원이 보여주는 것처럼 건물들이 뒤집어지고 어느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런 장면들은 마치 관객이 거대한 만화경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중력이 여러 방향으로 바뀌는 그런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그래서 독특한 긴박감을 만들어낸다. 결국 <닥터 스트레인지>의 진부함과 황당함을 무화시킨 건 놀라운 CG 기술 덕분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CG는 그저 기술의 차원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기술이라면 그럴 듯한 가상의 장면들을 현실감 있게 구현해내려 노력한 면들이 두드러졌을 게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CG는 그것보다는 예술 작품의 한 대목을 잘라낸 듯한 인상이 짙다. 압도적인 비주얼이지만 예술적인 느낌들이 그 진부함을 새로움으로 바꾸고, 황당함을 상상력의 자유로 바꿔준다.

 

여기에 의도적으로 구사되는 <닥터 스트레인지> 특유의 농담과 유머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 작품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들어 지나친 현실감 추구가 야기할 수 있는 황당함을 벗어나게 해준다. 예를 들어 위기를 맞게 된 스트레인지가 수술을 받는 동안 그 영혼이 빠져나와 적의 영혼과 한판 대결을 벌일 때, 수술도중 사용하는 심장충격기의 충격이 적에게 타격을 주는 대목은 사실 개연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대신 영화는 이 장면이 주는 유머와 웃음의 코드를 활용함으로써 개연성의 부족을 슬쩍 뛰어넘는다.

 

물론 그렇다고 이 황당한 스토리의 영화가 그저 허망한 볼거리의 작품이라는 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어떤 허탈함을 느꼈을 게다. 하지만 영화는 이 상상력의 이야기를 통해 시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의미를 확보해낸다. 즉 시간으로 인해 결국은 사멸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의 조건이 꿈꾸게 되기 마련인 영원이나 불멸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일일 수 있는가를 이 영화는 흥미로운 스펙터클로 보여준다. 스토리로만 보면 황당할 수밖에 없는 영화지만, 예술적인 CG와 전략적인 유머들 그리고 그 상상력 속에 심어놓은 나름의 철학은 그래도 이 영화에 열광하게 만드는 이유들이다.

<싱 스트리트>, 존 카니의 음악영화는 늘 옳

 

<싱 스트리트>라는 영화에 있어서 존 카니 감독이라는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다. 이미 <원스><비긴 어게인>으로 음악영화의 묘미를 관객들에게 전한 바 있는 감독이니 이번 <싱 스트리트>에 대한 기대감은 굳이 여러 이유를 댈 필요가 없을 게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역시 존 카니 감독의 음악영화는 늘 옳다는 만족감으로 돌아온다. <싱 스트리트>는 이전의 음악영화들이 준 감동 그 이상이다.

 

사진출처: 영화 <싱 스트리트>

<싱 스트리트>는 시간을 80년대로 되돌렸다. 사실 이 영화의 정서를 만들어내는 당대의 아하, 듀란듀란, 홀 앤 오츠 등의 곡만으로도 어쩌면 반색하는 관객들이 있을 법 하다. 그저 음악이 아니라 어떤 스피릿(Sprit)’이 느껴지던 그 때의 음악들. 지금 보면 웃음이 빵 터지는 뽕 들어간 의상과 폭탄 머리지만 그것이 하나의 시대 정서로까지 느껴지는 그 때의 아티스트들과, 그들을 흉내 내면서 스스로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보이 밴드 싱스트리트의 매력이라니.

 

존 카니 감독은 역시 음악이 어떤 순간 우리를 매혹시키는 지 정확히 알고 있다. 85년 더블린. 경제상황이 어려워진 현실 때문에 학비가 싼 싱스트리트로 전학 온 코너(퍼디아 월시-필로)가 라피나(루시 보인턴)라는 뮤즈를 만나게 되면서 밴드를 하게 되면서 성장해가는 이야기. 거의 음치에 가깝게 노래하던 코너가 사랑을 알게 되면서 그 마음을 담아 가사를 쓰고 거기에 밴드의 만능 악기 연주자인 에이먼(마크 맥케나)의 도움을 받아 곡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신비로울 정도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음악은 지독한 현실을 뚫고 더 아름답게 피어난다. 더블린의 어두운 경제, 지독한 현실 속에서 꿈을 포기한 채 버텨내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다. 부모로부터 학대받는 아이, 알코올 중독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둔 미래의 음악가, 부모가 없는 편이 오히려 낫다며 항상 그곳으로부터 탈출하려 하는 청춘들... 그들의 고뇌와 방황은 고스란히 음악으로 승화된다.

 

코너의 음악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건 그것이 기술적으로 기교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거칠지만 그 안에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고, 그것을 음악으로 당당하게 전하는 그 모습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음악은 완전히 새롭게 들린다. 존 카니 감독은 바로 이 음악이 가진 마법적인 순간이 그 음악 자체의 소리가 아니라 거기 담겨진 음악을 만든 이들의 진심이라는 걸 영화를 통해 말해주고 있는 듯 보인다.

 

<비긴 어게인>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았던 관객이라면 <싱 스트리트> 역시 충분히 만족할만한 영화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음악의 본질적인 면들을 훨씬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싱 스트리트>는 존 카니가 만든 음악영화들의 근간을 보여줬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게다. 음악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음악의 마법 같은 탄생 과정과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그 과정까지를 담아낸 이야기는 영화를 보고난 뒤에도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코너가 그저 그런 아이에서 차츰 아티스트가 되어가는 과정은 이 아픈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하는 영화의 메시지로 승화된다. “너는 파괴할 줄만 알지. 뭔가 만들어낼 줄은 모르잖아.” 집에서 학대받으며 자라 학교에서 폭력을 일삼는 친구에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는 코너의 모습은 예술이 어떻게 그들에게 구원이 되어주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부분은 80년대 더블린이라는 곳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깊은 감흥을 주는 이유다. 코너와 그가 만든 싱스트리트 밴드의 성장기는 지금 우리의 청춘에게는 큰 용기와 위안으로 다가올 만하다

세월호 꼭 닮은 부산국제영화제, 누가 침몰시키나

 

예술적 부분에서 독립성 보장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가 재정 지원을 받는 기관으로서 공익적 관점에서의 행정적 책임성이라는 건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부산시 김규옥 경제부시장의 부산국제영화제 사태에 대한 이 발언은 모순처럼 들린다. 예술적 부분공익적 관점을 마치 분리할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영화제에서 이를 분리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부산국제영화제(사진출처:BIFF)'

예술적인 부분은 그 자체로 공익적일 수 있다. 또 공익적인 선택이 어떤 영화에서는 예술일 수 있다. <다이빙벨> 같은 영화가 그렇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노력을 영화로 담는 일은 예술적이면서도 공익적인 일이다. 공익적인 이유로 영화를 찍은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예술이기도 하다. 물론 그 공익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 김규옥 경제부시장이 말하는 공익은 <다이빙벨>의 공익과는 다른 모양이다.

 

2014<다이빙벨> 상영을 두고 벌어진 영화제 측과 부산시 측의 갈등은 최근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그간 부산시는 많은 영화인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을 사퇴시켰고,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던 장면처럼 감사원이 감사를 실시한 후 이용관 위원장과 전 현직 사무국장 등이 검찰에 고발됐다. 또 부산시가 낸 신규 자문위원 효력정지 가처분 신정이 부산지법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결국 대다수의 영화인들은 독립성 보장과 표현의 자유 보장을 요구하며 영화제의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제 6개월 남았다. 6개월이라는 골든타임이 20년 간을 잘 달려온 영화제라는 배가 계속 순항할 것인지 아니면 침몰해버릴 것인지를 가름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우리네 영화계가 향후에도 저마다의 소신에 따른 공익을 위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맞는 공익만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지를 가름하는 일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화제와 영화계는 지금 부산시에 의해 커다랗게 쏠려버린 무게로 인해 중심을 잃고 기울어진 채 가라앉고 있다.

 

최근 세월호 2주기를 맞아 이와 관련한 방송을 내보낸 곳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JTBC <뉴스룸>뿐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세월호와 국정원과의 연관성에 의혹을 제기했고, 또 마지막 골든타임 동안 구조는 하지 않고 보고에만 시간을 보낸 안타까운 상황을 청와대와 해경의 통신내용을 통해 보도했다. <뉴스룸> 역시 같은 내용의 정보들이 보도되었다. 하지만 이 밖의 지상파 채널에서 세월호 2주기에 대한 심층취재 같은 것들은 시도도 되지 않았다. 아마도 여기에도 공익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들이 엇갈렸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보이콧 할 만큼의 쟁점이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라는 부산시측의 답변은, 거꾸로 이런 일들이 영화인 대다수가 보이콧 하고 심지어 외국의 영화인들까지 나서서 부산시에 반대하게 만들 정도로 사태를 악화시킬 만한 일인가 라고 질문이 되돌려져야 할 상황이다. 현재의 부산국제영화제는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를 닮았다. 아마도 부산시 측은 그 침몰의 원인을 영화인들의 잘못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배에 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영화인들이지 부산시 측이 아니다. 영화인 그 누가 영화제의 침몰을 원하겠는가.

 

<그것이 알고 싶다>는 골든타임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차라리 내버려뒀으면 구조에 더 힘을 쓸 수 있었을 상황에 갖가지 보고를 요청하며 시간을 보내버린 탓에 안타까운 비극을 맞이하게 된 장면들을 보여줬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남은 6개월간의 골든타임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 대중들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이 사태에 집중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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