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률의 늪에 빠진 MBC드라마, 문제는?

 

또다시 임성한 작가다. 이번 <압구정백야>에서는 잠잠하다 싶었는데 데스노트 논란이 터져 나오고 있다. 백야(박하나)와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조직폭력배와의 실랑이 끝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조나단(김민수)이 그 주인공이다. 물론 드라마에서 상황에 따라 인물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임성한 작가 드라마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럽고 허무한 느낌마저 준다는 점에서 전작인 <오로라공주>의 데스노트의 시작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압구정백야(사진출처:MBC)'

<오로라공주> 때 연달아 죽음을 맞이한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낸 논란은 작가의 하차 운동까지 벌어질 정도로 그 파장이 컸다. 그걸 의식했는지 MBC 측은 부랴부랴 또 해명에 나섰다. 애초에 조나단의 죽음은 예고되어 있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갑작스런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갑작스런 죽음은 아니더라도 이번 <압구정백야> 역시 자극적인 장면들의 연속으로 시청자들의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수영장 격투신은 이 드라마를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화제가 되었다. 물속에서 상대방의 허벅지를 꼬집는 장면은 역시 임성한 작가라는 얘기를 만들었다. 친모인 서은하(이보희)에게 복수하기 위해 접근한 백야가 그녀에게 시어머니인지 친정어머니인지를 묻는 장면은 거의 한 회를 다 채울 정도의 치열한 육박전을 통해 보여줬다. 설정도 설정이지만 그걸 보여주는 방식 또한 보는 이들의 혀를 내두르게 만든 장면들이었다.

 

드라마를 하면서 방송사가 나서 해명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유독 임성한 작가의 작품을 할 때면 방송사의 해명이 이어지는 건 그 작품이 가진 논란과 파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이렇게 큰 논란이 벌어지는 작가의 작품을 계속해서 그것도 일일극으로 편성하는 MBC의 저의는 뭘까.

 

작년 MBC 드라마의 얼굴이 된 건 <왔다 장보리>였다. 물론 임성한 작가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막장 논란이 제기된 김순옥 작가의 작품이었다. 그나마 긍정적인 가족애를 그리려 노력했다고는 하지만 연민정(이유리)이라는 캐릭터의 악행은 상식 이하로 자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이 드라마가 막장 논란을 벗어난 것은 35%를 넘는 시청률 덕분이었다.

 

임성한 작가나 김순옥 작가 같은 자극적인 드라마를 그리는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는 당연히 시청률이다. 실제로 이들 작가들은 논란은 일으키지만 확실히 시청률 제조기라는 표현이 틀리지 않는 작가들이다. 하지만 과연 시청률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을까. 그렇게 시청률을 가져가는 사이에 MBC드라마의 이미지가 점점 자극으로 점철되어가고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과거 드라마 공화국이라고 부르던 시절 MBC드라마를 떠올려보라. MBC에서 만들어진 <여명의 눈동자> 같은 대하드라마에서부터 <전원일기> 같은 장수 드라마,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도전적인 퓨전사극들이 전체 드라마업계를 견인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물론 작품성으로 승부하는 작품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나 시끄럽고 시청률에 경도된 임성한 작가나 김순옥 작가가 만든 드라마들이 마치 MBC드라마의 얼굴이 된 듯한 인상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나를 찾아줘>가 보여주는 기막힌 미국사회에 대한 통찰

 

미국식 막장이라는 표현은 <나를 찾아줘>라는 영화에 온당할까. 아마도 끝없는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고, 숨겨졌던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져 나오며, 멀쩡했던 인물들이 끔찍할 정도로 변신하는 그 과정들이 우리네 막장 드라마를 떠올렸던 모양이다. 심지어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MBC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이유리)과 비교하기도 한다.

 

출처 : 영화 <나를 찾아줘>

하지만 한 마디로 얘기하면 <나를 찾아줘><왔다 장보리> 같은 우리네 막장드라마는 비교 불가다. 다만 그 속도감과 놀라운 반전에 반전이 유사하게 여겨질 뿐, <나를 찾아줘>라는 작품이 그려내는 세계의 밀도는 우리네 막장드라마들의 그 허술함과는 비교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나를 찾아줘>의 이러한 빠른 전개와 반전요소들이 그저 자극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이 하려는 주제의식과 딱 맞아떨어지는 완성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찾아줘>는 평범하게 잘 살아가는 듯 보였던 부부 닉(벤 애플랙)과 그의 아내 에이미가 보여주는 거의 막장에 가까운 그네들의 연기적인 삶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에이미 때문에 그녀를 찾아 나선 닉은 사랑하는 아내를 절절하게 찾고자 하는 남편처럼 보이지만 차츰 그와 그들의 부부생활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건이 전개되면서 점점 에이미의 실종은 마치 닉의 살인이라는 심증으로 흘러가는데, 이것은 이 2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가 본격적인 반전을 만들어가는 데 거의 시작 부분에 해당할 뿐이다.

 

아주 담담하게 시작했는데 영화가 흘러가면서 점점 사건들이 중첩되고 그로인해 예측과 배반이 계속되는 이 흐름은 특별한 스펙타클 없이 이야기로만 흘러가는 이 긴 영화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이토록 이야기의 세계에 푹 빠지게 만드는 그 힘은 영화가 가진 놀라운 스토리텔링 능력 덕분이다. 영화는 한 쪽으로 이야기를 몰고 나갔다가 그 지점에서 다시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틀어버리는데 대단히 능하고, 그것은 또한 작품이 말하려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놀랍기까지 하다.

 

영화가 반전을 모티브로 삼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야기는 스포일러에 해당되는 것일 게다. 하지만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면 이 영화는 연기하는 삶의 끔찍함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들 쇼윈도 부부라고 부르는 그 연기하는 삶이 어떻게 자본주의와 결탁하고 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끔찍한 짓들이 자행되면서도 전혀 도덕적으로 둔감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담고 있다.

 

영화의 제목이 <나를 찾아줘>라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도대체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삶. 그것은 이 영화의 극적인 전개만을 빼놓고 본다면 우리네 현대인들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그 복잡한 삶 속에서 겉으론 멀쩡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잘 살아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본색이 숨겨진 채 연기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지 않던가.

 

<나를 찾아줘>를 보면서 또 한 가지 떠오르는 건 미국이라는 사회가 가진 이중적인 얼굴이다. 겉으로 보면 미국(美國)’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의 외견을 보여주지만 어디 실체가 그런가. 로맨틱한 사랑의 이면에서도 쿨하다는 시대적 연기 강령을 가진 미국은 그 속에 자본의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한다 하면서 모든 걸 제 손에 쥐고 통제하려는 욕망은 그래서 때로는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를 찾아줘>는 그래서 한 멀쩡해 보이는 부부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미국 사회가 가진 이중적 얼굴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미국식의 자본주의를 이식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문제가 아니다. 이 기막힌 미국사회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영화가 막장이라고? 만일 이런 게 막장이라면 매일 보고 싶다.

 

지상파 드라마의 총체적 추락, 심상찮다

 

지상파 드라마들의 추락이 심상찮다. 10시에 하는 드라마들의 시청률이 거의 10% 정도 선에 머물러 있고, 수목드라마는 아예 한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지경이다. 한때 국민드라마라고 불릴 정도의 4,50%에 육박하는 시청률은 기대조차 하기 어렵고, 이제 10%를 넘기면 선방했다고 말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TV 시청패턴이 달라지면서 현실적으로 잘 맞지 않는 시청률 추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좀 과하다 싶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왔다 장보리(사진출처:MBC)'

다 비슷해보여도 지상파 드라마는 월화드라마와 수목드라마 그리고 주말드라마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월화드라마는 MBC <야경꾼일지>처럼 장편드라마가 주로 배치되어왔고, 수목드라마는 미니시리즈가 편성되어왔으며, 주말드라마는 가족드라마 같은 형태의 드라마들이 주를 이뤄왔다. 물론 최근 들어 이런 패턴은 상당부분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즉 월화에도 미니시리즈가 들어가기도 하고, 주말에도 가족드라마 형태를 벗어난 복수극 같은 장르가 편성되기도 한다. 거의 유일하게 수목에만 미니시리즈가 고수되는 형국이다.

 

이런 편성의 변화 속에는 어떻게든 드라마를 살려보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지상파 드라마들이 힘을 발휘하는 건 딱 한 가지다. 우리가 흔히 막장드라마라고 부르는 자극은 강하고 패턴화 되어 있으며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한다기보다는 공식을 따르는 드라마들이 그것이다. 최근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낸 MBC <왔다 장보리>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 드라마들은 우리가 흔히 아침드라마라고 부르던 것이 이제는 저녁 시간에도 주말에도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왔다 장보리>같은 MBC 주말 저녁 시간대의 드라마는 사실상 아침드라마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녁 시간대의 드라마가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낸다는 것이 어떤 착시현상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본래 전통적으로 지상파 시청률의 수위를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아침드라마들이었다.

 

실제로 시청률표를 보면 SBS <청담동스캔들>이나 MBC <모두 다 김치> 같은 드라마는 저녁시간대의 드라마들을 압도하는 시청률을 내고 있다.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를 빼고 나면 그 다음이 아침드라마 순으로 시청률이 높게 나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지상파 드라마들에서 시청률을 가져가는 건 하나의 패턴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것은 가족드라마 형태이거나, 아니면 그 변형으로서의 복수극을 다루는 드라마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청률의 획일화는 지상파 드라마들로서는 위기감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완성도 높은 미니시리즈를 만들어내려 해도 그것이 시청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예감한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시청률 포기현상은 결국 참신한 드라마를 시도하려는 의욕 자체를 꺾을 수 있다. 애초에 시청률 목표가 그리 높지 않은 케이블이나 종편의 드라마들이 더 도전적이고 참신한 느낌을 주는 건 그래서다.

 

최근 수목드라마들이 일제히 추락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이러한 위기상황이 이제 거의 목전에 다다른 느낌이다. 시도하지 않으면 외면 받고, 시도한다 해도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 난감한 상황이 향후 지상파 드라마들의 총체적인 아침드라마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심정이다.

 

 

이건 <왔다 장보리>가 아니라 왔다 연민정이네

 

MBC <왔다 장보리>에서 정작 주인공인 장보리(오연서)는 주목되지 않을까. 마지막회에서 연민정(이유리)은 결국 모든 걸 잃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악역 중의 악역인 연민정에 대한 말 그대로의 연민이 생겨나고 있다. 왜 하필 이름이 연민정인지 끝에 와서야 알게 됐다는 시청자의 반응까지 나온다. 항간에는 연말 시상식에 <왔다 장보리>에 상을 준다면 오연서보다는 이유리에게 줘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왔다 장보리(사진출처:MBC)'

그 첫 번째는 <왔다 장보리>라는 드라마에 대한 열광이 주인공인 장보리 때문에 생겼다기보다는 악역 연민정에게서 나왔다는 걸 시청자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힘은 결국 악역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연민정은 살인 미수는 물론이고 부모 자식 간의 천륜마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용하는 인물이다. 시청자들은 이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에 연민정을 욕하며 보았다. 과거라면 악역보다 선한 주인공인 장보리에 그래도 더 집중했을 것이지만, 지금의 시청자들은 안다.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오히려 연민정에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처럼 연민정이 마치 주인공처럼 느껴지게 된 더 중요한 이유는 두 번째다. 그것은 연민정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연민과 동정에서 나온다. 갖가지 악행을 저지른 그 사실은 치가 떨리도록 그녀에 대한 당연한 비난과 분노를 하게 만들지만, 그렇게 그녀가 왜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상황을 들여다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상 연민정의 처지란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악착같이 살아내야 하는 서민들의 상황과 별 다를 것이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장보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다 가진 인물이었다. 물론 중간에 고난을 겪게 되지만 이 드라마가 후반부에 하게 된 이야기는 태생적으로 운명이 정해지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즉 태생적인 정통성을 갖고 태어난 장보리가 모든 걸 가져간다는 것이고, 연민정처럼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권선징악을 바탕에 깔고 있어서 선한 장보리가 악한 연민정을 이겨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렇게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선과 악이란 공존하는 것이고 다만 상황이 그 어느 한쪽을 더 드러내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즉 선악의 관점으로 보면 이 드라마는 착한 자들의 승리를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애초에 가진 것 없는 자들은 실패한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것 같다.

 

드라마에서 이처럼 하나의 캐릭터가 이토록 죽도록 밉다가도 마지막에는 심지어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던가. 연민정은 그래서 단순한 악역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한없이 비뚤어지고 끝없이 거짓말에 협박에 부모 자식 관계마저 부정하는 그 안간힘 뒤에는 그녀가 어떻게든 서 있으려 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디작은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연민정이란 캐릭터를 이처럼 극악하게 끝까지 밀어 부친 이유리라는 배우의 발견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거둔 최대의 성과가 아닐까 싶다. 막장드라마적인 요소들이 연기에 있어서 몰입을 쉽지 않게 만들었을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혼신을 다하는 연기를 통해 시청자들을 몰입시켰다. 연기자라면 작품이 어떻고를 떠나 그 열심히 자신을 내던지는 이유리에게 배울 점을 발견할 것이다. 연말 시상식 대상? 막장드라마라고 불렸기 때문에, 혹은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상이 안 된다면 그것은 진정 연기에 주는 시상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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