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이병헌의 연기학 개론

 

왕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자리가 만들어내는 것일까. 영화 <광해>가 던지는 질문이다. 왕을 연기하던 광대 하선(이병헌)은 그 얼굴이 똑같다는 이유로 광해(이병헌)에게 불려가게 되고 왕을 연기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광해가 중독으로 쓰러지게 되자 허균(류승룡)은 하선을 당분간 왕의 자리에 앉히게 된다. 흥미로운 건 하선이 그 왕의 자리에 앉게 되면서 점점 왕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사진출처:영화 <광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은 아마도 <광해>가 가진 뭉클한 정치적 지점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광해는 왕의 자리에 앉아 그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폭군의 면모를 보이지만, 그저 저잣거리에서 살아가던 민초 하선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그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외척세력을 문제 삼아 중전을 폐하려는 신하들의 청 앞에 그는 조강지처를 내치는 남편이 어디 있느냐며 호통을 치고, 대동법 시행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땅 더 가진 자가 더 세금을 내는 게 뭐가 잘못됐냐고 말한다.

 

이것은 왕이 백성을 생각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민초인 자가 왕의 입을 빌려 하는 말이다. 이것은 <광해>라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가 대선을 앞두고 있는 2012년에도 울림을 갖는 이유다. 국민을 호명하는 정치인들은 많아도, 진짜 국민이 무엇을 바라는 지 그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은 보기 힘든 현실. 이것이 어쩌면 <광해>에서 광해를 연기하는 하선이라는 존재가 지극히 비현실적이면서도 영화라는 장막을 통해 기꺼이 현실적으로 믿게 되는(믿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 왕이 타고난 왕이 아니라, 왕을 연기하는 하선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병헌은 왕을 연기하는 하선을 연기한 셈이다. 연기론으로 보면 연기는 연기를 흉내 내는 게 아니고 그 캐릭터 자체가 되는 일이다. 하선이 왕 연기를 하다가 점차 광해와 동화되어가는 과정은 바로 이 진정한 연기가 구현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게다가 하선은 직업이 광대다). <광해>는 따라서 한 연기자(하선이라는 광대)의 연기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병헌으로서는 이 지점이 굉장히 매력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결국 연기라는 것이 흉내 내기가 아니고,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끄집어내 그 캐릭터에 동화시키는 것이라는 걸 이 영화 속 인물인 하선과 그를 연기하는 이병헌이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진짜로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광대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선택의 순간은 중요해진다. 이것은 연기자가 캐릭터에 몰입되어 있다가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그래야 연기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 광인이 아니라) 그 과정을 보여준다. 이병헌은 아마도 <광해>를 연기하면서 어느 순간에는 진짜 왕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다시 광대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지만.

 

<광해>에서의 이병헌이 그 어떤 다른 작품에서의 이병헌보다 돋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자신의 연기에 대한 자세를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왕이 된 독한 카리스마의 이병헌을 볼 수도 있고, 그 왕을 연기하는 연기자로서의 이병헌을 볼 수도 있다. 거기에는 진지함과 코믹함이 뒤섞이고, 무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한다. 이 이질적인 면들이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구현되었다는 것은 이병헌이라는 한 연기자의 이 작품을 통한 성취라고 여겨진다. 그리하여 <광해>는 마치 이병헌의 연기학 개론 같은 작품이 되었다.


 '뿌리', 자신과 싸워야했던 고독한 군주의 초상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가 그리는 세종은 대단한 파격이다. 욕쟁이에, 똥지게를 지고, 개소리를 연구하는 왕. 게다가 어린 시절 아버지 이방원(백윤식)의 피의 정치를 보고 자라며 갖게 된 트라우마는 그를 정신분열의 상태로까지 몰아넣는다. 세종(한석규)이 젊은 세종(송중기)과 논쟁을 벌이는 이 셰익스피어 희곡 같은 장면은 이 왕의 깊은 내상을 밖으로 드러낸다. 아버지와는 다른 정치를 하려 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이상적이고 힘겨운 것인가를 실감하며 절망하는 세종의 내면이 이 장면에 압축되어 있다. 도대체 이 왕은 무엇이 그리도 괴로운 걸까.

일찍이 마방진 에피소드에서 상징적으로 제시되었듯이 세종은 왕 하나만을 남기고 필요하면 모두 제거해버리는 아버지 태종의 패도정치가 아니라, 모든 백성이 저 마다의 자리를 잡아서 함께 살아가는 모두가 상생하는 정치를 꿈꾼다. 즉 태종이 죽이는 정치를 했다면 세종은 살리는 정치를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린 첫 번째 백성, 똘복(장혁)은 그를 죽이려 궁에 들어와 있고, 어린 시절 아버지 태종의 실체를 까발리고 자신을 조롱했던 정기준을 살리려 했으나 그 역시 밀본의 수장으로 돌아와 자신의 학사들을 죽이고 있다. 그는 살리려 하지만 그들은 죽이려 한다.

세종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홀로 고독하게 싸우고 있지만, 그런 왕을 이해하는 이들은 없다. 세제개혁을 위해 새로이 여론을 조사하겠다는 얘기에 조정은 술렁이고 신하들은 반기를 들려 한다. 그런 신하들을 바라보며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반문하는 장면에서는 왕의 외로움이 묻어난다. 갖은 명분을 붙여 자신이 하려는 일을 막아 세우는 그들을 보며 새로운 나라를 꿈꾼 왕의 절망감은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왕을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 나인에 불과한(그것도 말 못하는) 소이(신세경)라는 건 아이러니다. 모두가 왕의 책임을 묻고, 왕 스스로도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할 때, 소이는 "전하의 책임이 아니옵니다"라고 말해준 유일한 인물이다.

"이 조선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다." 이 아픈 고백은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외로운 심사가 겹쳐져 있다. 장인어른이 아버지 태종에 의해 죽게 되었을 때, 소헌왕후조차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이 모두가 전하 때문이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간 사극이 좀체 깊게 다뤄지지 않았던 왕이란 존재의 고독을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왕이란 자리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물이 아니다. 세종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온전히 백성을 위한 삶을 꿈꾸면서, 본인은 정작 깨질 듯한 두통과 참을 수 없는 트라우마에 불면의 밤을 지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사극의 팽팽한 긴장감은 어찌 보면 밀본이라는 세력이 가진 위협감이나 똘복이라는 복수의 화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긴장감은 세종의 내면 속에 있다. 자신이 꿈꾸는 조선을 위해 '살리는 정치'를 하려는 자아와,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괴로워 이를 모두 포기하고픈 자아가 부딪치는 것. 똘복과의 대결이 아니라, 똘복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세종의 갈등 속에 이 팽팽한 긴장감이 들어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사극은 기묘한 지점이 생겨난다. 마방진의 숫자 하나가 달라지면 전체가 흐트러지듯이 사극의 한 사건은 왕에게도 고스란히 그 여파가 전달된다. 외적인 상황들이 사건으로 터져 나오지만 그것이 결국 세종의 내면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세종이 욕을 하고 기물을 때려 부수거나 누구의 책임이냐를 두고 소이를 윽박지를 때 이 사극의 긴장감은 그래서 더 고조된다. 얼마나 인간적인 왕인가. 백성을 위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이것은 아버지 태종의 트라우마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삶이 지독스럽게 고통스럽고 외롭다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왕. '뿌리 깊은 나무'가 보여주려는 그 깊은 뿌리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그 꽃이 아니라 그 꽃이 피어나기까지 꿈틀대고 괴로워했던 세종의 내면에 있다.

‘동이’, 그 깨방정 숙종이 가진 의미

"여깁니다. 게중 가장 낮은 곳입니다. 냉큼 넘으세요." 동이(한효주)는 범인들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숙종(지진희)에게 담을 넘으라고 한다. 하지만 "난 담을 한 번도 넘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숙종. 그런 숙종에게 변복을 한 그가 왕인 줄 모르는 동이는 "아니 다른 나으리께서는 글공부도 하기 싫어 담을 넘고 다니시는데, 나린 대체 뭘 하십니까?“하고 채근한다. 그러자 숙종은 ”내가 있는 곳은 담을 넘기엔 너무 높았다“고 말한다. 결국 ”담은 제가 넘을 테니 잠시 엎드려 주십시오“하고 청하고, 동이는 왕의 등을 밟고 담을 넘는다.

‘동이’에 등장한 이 짧은 에피소드는 이 사극의 초반 부진을 털어내며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왕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보던 근엄한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이와 함께 도망치다가 이내 “달려본 적이 없다”고 주저앉고, 칼을 들고는 “배우긴 배웠으되 실전은 처음이다”고 말하는 왕. 그 모습에 ‘허당’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항간에는 이 깨방정(?) 왕의 모습이 지나치게 희화화되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

하지만 이 동이가 감히 왕의 등을 밟고 담을 넘는 이 장면은 우스꽝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낮게 웅크린 왕의 모습과 ‘담을 넘는다’는 그 행위가 마치 ‘왕과 낮은 자들과의 소통’으로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이 덕분에 사건을 해결한 왕은 그녀가 일하는 장악원에 어식(御食)을 내리고 동이에게 상을 내린다. 왕과 노비가 함께 일을 해결하고 왕이 내린 상에 장악원 사람들이 함께 포상 받는 이 장면을 통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슴 한 구석에 바로 이런 ‘소통의 욕구’를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숙종은 훗날 장희빈이 될 장옥정(이소연)을 부를 때, “옥정!”하고 이름을 부른다. 이것 역시 여타의 사극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 왕은 옥정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무용담처럼 말하면서 “이건 절대 풍(거짓말)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전날 동이에게서 배운 서민들이 쓰는 ‘풍’이란 말을 옥정에게 써먹은 것이다. 그러자 옥정은 방긋 웃으며 저잣거리에서 쓰는 말을 어떻게 왕이 아시냐고 반색한다. 왕의 낮은 자들과 소통하려는 욕구를 ‘풍’이라는 말 하나로 보여준 것이다.

사실 왕의 깨방정은 파격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바로 이러한 소통의 몸짓이라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한껏 낮아지고 한껏 소탈해진 왕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동이와 왕의 로맨스가 단지 사랑놀음이 아니라 이러한 통(通)에 대한 사극의 메시지로 확장해낼 수 있다. 이것은 ‘동이’가 단순한 사극판 신데렐라 이야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가능성이다.

여기에 이병훈 사극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명랑한 분위기’는 이러한 통(通)하는 세상에 대한 판타지마저 꿈꾸게 만든다. 왕이 서민과 함께 고개를 맞대고 똑같은 눈높이로 얘기하는 것. 그것은 때론 우스워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숙종의 등을 밟고 동이가 담을 넘는 그 순간, 우리는 어쩌면 현실에서는 쉬 찾기 힘든 그 통(通)하는 세상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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