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킥'의 황정음과 신세경

술에 만취해 한 여인은 끊임없이 웃고, 한 여인은 끊임없이 울어댄다. 웃는 여인은 신세경이고 우는 여인은 황정음. '지붕 뚫고 하이킥'의 핵심적인 두 캐릭터들이다. 그런데 왜 똑같은 술을 먹고 신세경은 웃고 황정음은 우는 것일까. 여기에는 이 시트콤이 가진 독특한 재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알다시피 술이란 놈은 참으로 요상한 물건이다. 평상시에 억눌렸던 감정을 거침없이 밖으로 끄집어내는 이 술을 통해서 웃고 있는 신세경과 울고 있는 황정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신세경이라는 캐릭터는 시트콤 속에서 우울한 상황에 놓여진 존재로서 그려진다. 아버지가 부재중인 상황에 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이순재네 집에서 식모로 살아가는 처지. 그러니 웃을 일이 뭐가 있을까.

한편 황정음은 신세경과 비교해 늘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실제 속은 역시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 서운대 출신이라는 서러움과 돈이 없어 남자친구에게 늘 얻어먹는다는 자괴감 속에서도 늘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녀의 당당함 속에는 숨겨진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슬픔이 있다. 그러고 보면 황정음이나 신세경은 내면적으로는 비슷한 처지에 서 있다고 보여진다. 다만 그 힘겨움의 강도가 다르고, 그것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황정음의 슬픔과 신세경의 슬픔을 다루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시각이 다르다. 황정음은 슬픔을 웃음으로 전화시킨다. 그녀가 떡실신녀가 되고, 서운대라는 사실 때문에 버스의 서운대 광고에 들어간 자신의 얼굴에 낙서를 해대는 상황은 그녀에게는 고통의 순간이지만 그것이 시트콤의 과장된 연출과 연결될 때, 보는 이들은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삐에로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 웃음을 터뜨리게 하듯이.

반면 신세경은 슬픔을 슬픔 그대로 그려낸다. 이것은 시트콤의 시각이 아니라 정극의 시각이다. 물론 이 '지붕 뚫고 하이킥'의 본질은 시트콤이기 때문에 신세경을 다루는 시각이 모두 정극의 그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다른 어느 캐릭터들보다도 진지한 편이다. 따라서 신세경의 캐릭터는 시트콤과 정극을 오간다. 동생을 위해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는 신세경이 우스우면서도 슬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여타의 시트콤들과 달리 웃음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감동까지 선사하는 것은 황정음과 신세경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지듯이, 시트콤의 시각과 정극의 시각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그 자유자재의 연출력이 대중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웃음은 이 시트콤의 재미를 극대화시켜주고, 감동은 거기에 어떤 의미까지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이 두 코드는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황정음과 신세경을 통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붕 뚫고 하이킥'만의 매력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웃을 때 눈물을 주기도 하고, 그들이 울 때 웃음을 주기도 하는 그 반어법 같은 이 시트콤만의 쿨한 자세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우는 게 우는 게 아닐 때, 보는 이들은 그 웃음의 과장됨과 눈물의 질척거림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웃음과 감동의 강도도 세진다. 거꾸로 말해 웃기기 위해 웃기는 것과 울리기 위해 울리는 것은 뻔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즉 이런 상반된 자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세련되게 웃음과 감동을 그려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황정음과 신세경이 보석 같은 캐릭터인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이 두 캐릭터는 실로 시청자들이 이 시트콤을 보며 웃고 울게 되는 그 핵심적인 재미를 만들어내는 장본인들이다. 이렇게 잘 운용된 시트콤의 캐릭터는 그것을 연기하는 연기자들의 이미지까지 제고시킨다. 황정음과 신세경의 주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은 이 시트콤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연기자들에게도 잘 만들어진 시트콤은 기회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정극도 해내지 못한 매력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니 말이다.

예능 프로그램, 무엇이 공익일까

이른바 공익 예능프로그램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1박2일’은 애초 기획의도에서부터 일정부분 공익성을 담고 있었다. 바로 우리네 관광자원의 발굴과 오지에 대한 조명 등이 그것이다. ‘무한도전’은 초기 도전을 통한 성장 버라이어티로 시작해서 점점 성장의 정점에 이르자, 그 도전의 공익적 성격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도전하는 국내 봅슬레이팀들을 위해 그 스포츠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나,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 뉴욕으로 달려가는 것, 혹은 각종 사회적 이슈들은 소재 속에 녹여내는 방식은 ‘무한도전’ 특유의 공익을 보여준다.

‘천하무적 야구단’은 전형적인 스포츠 버라이어티지만 사회체육의 활성화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야구라는 스포츠의 저변을 알리는 측면에서도 그 공익적인 성격을 무시할 수 없다. 야구협회측에서 이 예능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청춘불패’ 같은 신생 버라이어티쇼 역시 대단히 공익적이다. 아이돌 걸 그룹이 유치리라는 작은 동네에 정착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실제로 이 동네 분들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 체제로 다시 돌아오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도 거의 전면에 공익을 내세웠다. '대한민국 생태구조단 헌터스'는 개체수가 늘어난 멧돼지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의 불씨가 남아있지만 결국 주창하고 있는 것은 생태 살리기라는 공익이다. 이것은 고개 숙인 우리 시대의 아버지 기 살리기라는 미션을 통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는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또한 '단비'는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나라에서 봉사하는 공익 버라이어티를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익을 내세운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또한 만만찮다. 도대체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엇이 공익인가 하는 점이 그 질문이다. 무언가 출연진들이 감동적인 일을 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공익일까. 혹자들은 이러한 공익이 전면에 포진한 예능 프로그램에 진저리를 치기도 한다. 예능에서의 이른바 억지 춘향식의 감동은 때때로 역풍을 맞기도 한다. 한 마디로 웃기기나 잘 하라는 얘기다. 이러한 관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이 줄 수 있는 최대의 공익은 웃음”이라는 것이 이 관점을 대변해주는 문구가 된다.

그런데 이 말은 언뜻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한 번 더 깊게 생각해보면 또 다른 관점으로도 읽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예능의 최대 공익이 웃음’인 것은 맞지만, 그 웃음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다는 점이다. 그저 웃기기만 하려고 갖은 자극적인 방법들만 끌어 모은 예능을 가지고 우리는 공익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때론 진정성이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 주는 훈훈한 웃음이라는 층위는 분명 인정해줘야 할 대목이다. 그러니 ‘예능의 최대 공익이 웃음’이라 주장한다면, 그 웃음이 과연 공익에 맞는 진정성을 담고 있는가를 들여다 봐야할 것이다.

혹자는 과거 공익을 내세운 예능 프로그램들이 가져왔던 부작용들을 언급하면서 섣부르게 예능이 공익을 추구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무책임한 짓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예능의 목적이 결국에는 공익이 아니라 웃음이기 때문에, 어떤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에는 일회적인 것에 머물러 오히려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다는 시선이 담겨있다. 즉 감동적인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처음에는 뭐든 다 줄 것처럼 포장되어 방송이 되지만, 방송이 끝나고 나면, 일정한 웃음과 감동을 가져간 프로그램들은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사후관리가 되지 않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된다. 감동이 주는 카메라 앞과 뒤의 온도차는 이처럼 크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도 또 다른 시각은 존재한다. 즉 초창기 공익을 주창한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 낯선 시도 위에서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디지털 혁명으로 열려진 매체 환경 속에서, 그것도 리얼을 주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공익의 사후관리를 등한시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1박2일’ 같은 경우, 한 번 방문해 인연을 맺은 지역주민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기도 하고, ‘청춘불패’ 같은 프로그램은 아예 한 곳에 정착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아예 발생할 수가 없다.

진정성이 있는 웃음을 주는 것인가, 아니면 그 웃음 속에 사회 참여적인 부분들을 포함시켜야 하는 것인가. 예능 프로그램의 어떤 것이 공익인가 하는 문제는 제작자들이 갖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정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대중들이 어느 쪽에 더 공감하느냐가 이 공익 예능에 대한 앞으로의 방향을 열어줄 것이라 생각된다. 확실한 것은 예능이 공익을 얘기할 정도로 과거와 그 위치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 공익이 어떤 것인지는 차치하고라도, 프로그램이 공익적인 부분까지 들여다보고 실제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이제 예능 또한 가져야 하는 책무가 되고 있다.

상황 반전된 '그대 웃어요', 그 웃음을 회복한 이유

SBS 주말드라마, '그대 웃어요'는 제목이 알려주듯 아예 내놓고 웃음을 표방한 드라마다. 하지만 6회가 지나는 동안, 이 드라마는 꽤 웃음의 포인트를 집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체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웃음의 포인트는 건설업 회장이었다가 졸지에 망하게 되어 길바닥에 나앉게 된 서정길(강석우)과 그 가족들이 그의 운전기사였던 강만복(최불암)의 집에 얹혀산다는 그 설정에 있다. 하지만 좀체 웃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얹혀사는 서정길과 그 가족들이 염치라는 걸 모르는 인간들로 그려지면서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 때문이다.

서정길은 여전히 그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강만복을 함부로 하대하고, 얹혀사는 주제에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는 뻔뻔한 인물. 불황으로 가뜩이나 빈부 격차에 대해 민감한 현재, 이런 부를 앞세워(심지어 그 부조차 사라져버린 과거지사가 되어버렸지만), 타인을 지나치게 낮게 바라보는 시선은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사업이 망했다고 결혼식날 바로 파혼을 선언하는 장면은 아무리 과장되게 연출되었다고 해도 씁쓸한 뒷맛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만큼 그 상황들은 웃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현실에 여유가 있는 이들의 눈에는 웃음을 줄 수 있었을 지 몰라도, 현실 자체가 팍팍한 서민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서정길의 맏아들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던 서성준(이천희)이 거의 알거지로 귀국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강만복은 이제 서정길을 "사람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하게 되고, 도련님이라 부르던 호칭 대신, "야 서정길이!"하고 호통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드라마는 이제부터 강만복이라 대표되는 서민들의 대변자가 돈푼깨나 만졌다는 졸부들에게 한 수 가르치는, 본래하려고 했던 본격적인 제 이야기의 궤도에 들어서고 있다.

부자랍시고 사람 대하기를 하인 대하듯 해왔던 서정길과 그 가족들은 이 인간냄새 풀풀 나는 집안에서 서민들의 삶을 통해 인간적인 삶을 배워나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찬란한 유산' 이후 주말 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한 고전적인 이야기의 현대적 재해석이 이 드라마에도 깃들어 있다. '찬란한 유산'이 '위대한 유산'의 재해석이라면, '그대 웃어요'는 어찌 보면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 같고, 어찌 보면 '양반전'의 재해석 같은 풍자의 칼날이 숨겨져 있다. 이 위에 빈부 격차를 뛰어넘는 사랑의 이야기 역시 고전적인 맛이 있다.

고전의 재해석이 갖는 익숙함이 있기 때문에, 그 위에 양념처럼 얹어지는 웃음의 코드는 그만큼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강만복의 변신을 통한 국면전환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 드라마가 제목 값을 하게 될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서정길의 행동과 그 일련의 에피소드들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시청자들에게 작금의 불쾌한 우리 현실을 과장된 틀을 통해 환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갖는 판타지를 강화하기 위해 먼저 현실의 각박함을 드러내주는 방식.

그렇다면 드라마가 내놓고 표방하듯이 이젠 웃을 수 있을까. 앞으로 전개될 '그대 웃어요'에서는 현실의 세태가 도마 위에 올려지는 유쾌한 웃음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그 풍자의 웃음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까지 전해줄 수 있을까. 그것을 통해 드라마가 주는 웃음이, 좀체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는 각박한 현실에도 어떤 웃음을 던져줄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이 드라마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붕 뚫고 하이킥', 저녁시간 유쾌해질까

'지붕 뚫고 하이킥'은 여러모로 기대작이다. 그것은 국내 시트콤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김병욱 PD의 작품인데다, 숱한 화제를 낳았던 전작 '거침없이 하이킥'의 시즌2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대감은 첫 회에서부터 이미 확인할 수 있었다. 배우들이 가진 기존 이미지를 비트는 것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김병욱표 시트콤의 유머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석이 야쿠르트 아줌마에게 돈을 지불하며 나누는 '이상한 계산법' 에피소드는, 정보석이 가진 정극의 이미지를 비틀었다. 반듯한 얼굴과 태도와는 상반되는 빈 구석이 많은 말과 행동은 특별히 짜내려하지 않아도 웃음이 터지게 만든다. 이현경을 연기하는 오현경은 기존 비련의 여인의 이미지를 180도 뒤집었다. 씩씩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제목에 걸맞게 하이킥이 예감되는 캐릭터다.

이순재는 정극과 코미디를 오가는 연기경력이 있어서인지 기존 이미지를 비틀기보다는 강화하는 쪽에 가깝다. 야동순재로 이름이 난 그는 이번 시트콤에서는 김자옥과 만들어가는 로맨스 그레이에서 액션을 방불케 할 비밀데이트를 통해 액션순재의 탄생을 예고하게 만든다. 신신애 역할을 맡은 서신애는 '고맙습니다'에서 보여주었던 순박한 시골소녀의 이미지가 한층 강화된다. 서울 상경을 통해 도시의 문명을 신기하게 접하는 그녀의 순수한 모습은 이미 산골에서 콜라가 뭔지 몰라 이리 저리 입으로 물어보는 콜라 캔 에피소드에서 복선을 깔아놓았다.

이미 각각의 캐릭터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나씩 갖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대책 없이 들이대는 양수경 역할로 눈길을 끌었던 최다니엘은 이 시트콤에서는 남일 신경 안 쓰고 자기중심적인 순재의 아들 이지훈 역을 맡아 엉뚱한 웃음을 기대하게 만들고, 오랜 만에 다시 보는 반어법 교장선생님 특유의 말투는 '거침없이 하이킥'의 웃음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 대한 기대감이 큰 것은 이러한 화려한 출연진과 믿음이 가는 연출자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작금의 유쾌한 웃음이 사라져버린 저녁시간대에 제대로 된 가족 시트콤 한 편이 그리운 까닭이다. 언제부턴가 막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저녁 시간대의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패륜적인 설정의 이야기들 속에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볼 수 있는 드라마는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자극적인 드라마들 속에서 건강한 웃음을 주는 시트콤이 설 자리는 그만큼 좁아졌다. 게다가 시트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뛰어난 작가들이 선뜻 이 분야에 뛰어들지 못하게 함으로서 시트콤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트콤을 했다면 무언가 낮게 보려는 시선은 이 가능성이 충분하고, 가치 또한 충분한 장르를 힘겹게 하는 요인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그런 편견 자체를 하이킥 하고,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을 보낼 수 있는 그 시간을 갖게 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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